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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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공포는 호기심을 부풀리는 습성이 있다. 예컨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던 어린 시절에 마을 인근의 한 기업에서 매주 지역주민을 위한 영화상영이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왕복 한 시간도 넘는 길을 걸어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시작된 영화는 늘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나곤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을 가운데에 두고 대열의 앞쪽과 뒤쪽에는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를 세웠다. 그렇게 줄나래비를 서서 걷는 산길은 유난히 무서웠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자 했던 결심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호기심만 점점 부풀어 올랐고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호기심에 뒤를 돌아보면 묵묵히 걷는 형들과 캄캄한 어둠만이 내 발끝을 좇고 있었다. 공포는 더욱 커져만 갔고 비례하여 호기심도 커져만 갔다. 마음 한켠에서는 공포와 호기심이 셀 수도 없이 다투었고 끝내 이기는 쪽은 언제나 호기심이었다.

 

역사적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인간의 잔인성에 있다. 잔인성의 강도가 더하면 더할수록 공포심도 증가하지만 결국, 가슴 속에서는 외면했던 시선을 돌리게 할 호기심도 시나브로 함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비록 역사적 진실 앞에서 치를 떨지라도 그 실체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편하게 잠들 수조차 없다. 공포와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 마을 형들의 뒤꽁무니를 번번이 따라 나섰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그런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주 대하기 싫은 어둠 저편의 공포를, 실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내면의 호기심이 끝내 삼켜버린 듯한 결과물.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나는 이 소설이 갖는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인 그날의 실체와 인간의 잔인성에 대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었었다. 그러나 외면하고자 했던 처음의 결심은 나의 호기심에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소설은 5.18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년 동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동호는 누나와 함께 문간채에 세들어 살던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동호는 결국 진압군에 의해 도청에서 살해된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정대의 이야기는 죽어 혼령이 된 사자(死者)의 말이다. 군인들이 트럭에 실어 날랐던 시신은 탑처럼 쌓이고 정대의 혼령은 갈 곳을 잃고 헤맨다.

 

"가장 먼저 탑을 이뤘던 몸들이 가장 먼저 썩어, 빈 데 없이 흰 구더기가 들끓었어. 내 얼굴이 거뭇거뭇 썩어가 이목구비가 문드러지는 걸, 윤곽선이 무너져 누구도 더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는 걸 나는 묵묵히 지켜봤어." (p.59)

 

당시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끔찍하다.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 남은 자들의 죽음보다 더 지독한 삶의 모습들을 작가는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나는 몇 번이나 책을 덮어야 했다.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역사의 진실들을 30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서 겨우 바라보는 나 자신의 비겁과 발포를 명령했던 살인자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가 나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수피아여고 3학년 시절에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 있었던 김은숙, 봉제공장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쫓겨난 후 광주의 어느 양장점에서 일을 하다 상무관에 합류한 임선주,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진수, 그리고 막내 아들을 잃고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동호의 어머니... 김은숙은 대학을 포기하고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 자신이 담당하던 원고의 검열을 받는 과정에서 서대문 경찰서로 끌려가 뺨을 맞는 은숙, 5.18 직후 경찰에 연행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던 선주.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p.166 ~ p.167)

 

도청에 진입했던 진압군에 의해 연행되었던 김진수도 갖은 고문을 받고 출소한 후 결국 자살하였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행동들을 세밀하게 기록했던 작가 역시 공정성을 잃고 이따금 호흡이 가빠졌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씀으로써 살아 남은 자의 비겁을 용서 받았을까? 인간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잃은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내란수괴와 반란수괴로 재판을 받았던 전두환을 유엔 전범재판소에 세우지 않았던 까닭을. 전쟁 범죄자보다 더 잔인했던 그를 국내법으로 잠시 재판정에 세우고 형식적인 형을 선고하고 쉽게 풀어줬던 이유를 말이다. 한때 고문 기술자로 불렸던 이근안은 "고문은 애국이고, 신문은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미친 놈들과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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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돌이 2014-08-11 15:35   좋아요 0 | URL
축하드려요~ 이달의 당선작^^

꼼쥐 2014-08-12 18: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남희돌이 님 ^^

조금 부끄럽네요. 잘 쓰지도 못한 글인데...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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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해발고도 500m 이상의 고지대에 단 한 번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햇살의 질감이 저지대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언제였던가.  내가 저지대의 도시로 처음 나와 살게 되었을 때 척척 감겨오는 햇살의 감촉에 나는 저으기 놀랐었다.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살짝 부담을 느꼈는지도.  나는 왜 그 겨울의 헤살거리던 햇살을 부담스러워만 했던가.  모를 일이다. 익숙함은 언제나 변화에 저항하는 속성이 있다.  사춘기였고 호기심과 저항이 나의 이성을 반반씩 지배하던 시기였다.

 

고지대의 햇살은 공격적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그렇다.  뜨거운 여름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수천 수만의 햇살이 가닥가닥 풀어져 빛의 화살처럼 내려 꽂힌다.  찰나지간에 모공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온 몸을 헤집어 놓고는 다른 방향으로 유유히 빠져 나갈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저지대의 햇살은 뭉근하게 풀어진 수프처럼 올올이 흩어지는 법이 없다.  그저 저항하는 대상을 은근히 감싸다가 서서히 풀어질 뿐이다.  군불에 달구어진 황토방의 열기처럼 발원을 알 수 없는 열감이 한동안 머물다 흩어지곤 한다.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불현듯 들었던 생각이다.  수학을 소재로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구나 감탄했다.  이질적인 두 대상이 만나 하나로 융합되는 과정은 경이롭다.  내가 두 지역의 햇살을 한 몸으로 살아낸 것처럼.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p.164 ~ p.165)

 

소설의 내용은 최근에 읽었던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를 떠올리게 한다.  박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이 80분을 넘지 못한다.  80분 이전의 기억은 금세 사라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박사를 미망인이 된 형수가 돌본다.  교통사고 이전에는 천재 수학자였던 박사는 이제 수학 저널에 실린 수학 문제나 풀며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신세가 되었다.  형수는 집의 안채에서 박사는 별채에서 개별적인 노년을 견디고 있다.

 

최근 수년간 9명이나 되는 가정부를 갈아치운 박사에게 싱글맘인 쿄코가 10번째 가정부로 등장한다.  다음 날이면 가정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박사는 자신이 입은 양복 소매에 메모를 붙여 잃었던 기억을 되찾으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쿄코에게 10살 먹은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박사는 아이를 집에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며 학교가 파한 후 자신의 집에 들르도록 당부한다.  박사는 아들이 모든 수를 포용할 수 있는 루트 기호와 닮았다고 '루트'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80분의 기억이 허락되는 한도에서 박사는 루트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늘 외롭게만 지냈던 루트는 박사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할아버지의 따스한 정을 느낀다.  쿄코는 대인 기피증이 있는 박사를 이끌고 미장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교통사고 이전에 야구에 열광했던 박사를 위해 루트와 함께 야구장을 찾기도 한다.  야구장에 다녀온 후 고열에 시달리는 박사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 쿄코와 루트는 박사의 집에 머문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쿄코는 해고된다.

 

박사를 통하여 수식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의미를 배워나가던 쿄코와 루트는 박사를 몹시 그리워 한다.  교통사고 전에 박사는 형수를 사랑했었다.  그야말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형수는 자신의 남편이 죽고 미망인이 되었지만 기억과 젊음을 상실한 채 살아야 하는 박사를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학 잡지의 현상문제를 풀어 리포트 용지에 깨끗하게 옮겨 쓰고서 다시 한 번 훑어볼 때면 박사는 자신이 도출해낸 해답에 만족하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조용하군."  정답을 얻었을 때 박사가 느끼는 것은 환희나 해방이 아니라 조용함이었던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 정확하게 자리하여, 덜고 더할 여지 없이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한결같이 그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있으리란 확신에 찬 상태.  박사는 그런 상태를 사랑했다."    (p.93)

 

쿄코는 결국 다시 복직된다.  수와 관련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을 배우는 생활이 한동안 지속된다.  중학 중퇴의 학력이 전부인 쿄코도 초등학생인 루트도 박사의 설명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독한 수인 소수를 사랑하는 박사를 통하여 수식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의미를 배운다.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p.164 ~ p.165)

 

여름 한낮의 저층에 깔린 해묵은 기억을 가을 햇살처럼 선명하게 되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박사처럼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그렇다.  우리는 어쩌면 저지대의 햇살처럼 사랑의 열감만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세세한 기억이 아니라 그때의 느낌만으로 말이다.  박사도 루트도 도타워졌던 사랑의 열감이 삶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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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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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소설 <소소한 풍경>은 작위적이다. 세상의 모든 소설이 작가의 의도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소설은 단순히 허구이고, 작위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 거하는 순간만큼은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이고 전 우주였던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때 소설은 직접적인 자신의 삶이자 경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순간 마치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난 것처럼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훤히 꿰뚫게 되거나 의도된 설정이라고 느끼는 순간 소설은 그저 하나의 텍스트이자 영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컨대 주인공 'ㄱ'이 '남자1'과 처음 조우할 때 같은 운동화를 신었다거나 비오는 날 같은 색의 구두를 신었다는 설정, '남자1'의 여동생이 사고로 죽었다는 설정과 'ㄱ'의 오빠와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사고로 죽었다는 설정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두 여자('ㄱ'과 'ㄷ')와 한 남자('ㄴ')가 같은 집에서 '덩어리'진 채 사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색하다.

 

소설은 주인공 'ㄱ'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남자1'이 등장하고 그와 'ㄱ'은 대학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는 사이다. 'ㄱ'의 오빠가 죽고 연이어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ㄱ'과 여동생을 잃은 '남자1'은 끝내 결혼했으나 1대1의 폭력적 사랑을 1년만에 종식한다. 여자 'ㄱ'은 부모님이 살던 소소시의 포도밭이 딸린 외딴집으로 귀향한다. 포도밭 옆에는 다세대 주택이 있고 그곳에서 늘 물구나무를 서던 'ㄴ'을 만난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아버지와 형을 잃은 'ㄴ'은 실어증에 걸린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긴 채 떠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ㄴ'은 한동안 어느 보컬 그룹의 베이시스트로 지냈으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들로부터 내쳐진다.

 

'ㄱ'과 'ㄴ'이 외딴집에서 동숙을 시작한 지 얼마 후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온 'ㄷ'이 등장한다. 북한을 탈출하면서 아버지를 잃고 'ㄷ'과 그녀의 오빠, 어머니는 중국의 어느 조선족의 집에 흘러든다. 어머니와 'ㄷ'은 그집 주인 남자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다. 주인 남자의 부인과 딸이 죽자 'ㄷ'과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ㄷ'은 결국 대한민국의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ㄱ'을 만난다.

 

눈으로 뒤덮인 소소시의 외딴집에서 'ㄱ'과 'ㄴ' 그리고 'ㄷ'은 '덩어리'인 채 또는 각자인 채 겨울을 난다. 'ㄴ'은 우물을 파고 'ㄷ'은 집 안을 광이 나도록 닦으면서. 봄이 오고 'ㄴ'이 판 우물에서 물이 솟고 그들은 이별을 예감한다. 자신이 판 우물에 빠져 죽은 'ㄴ'과 레미콘으로 우물을 메우는 'ㄷ', 그것을 지켜보는 'ㄱ'. 'ㄷ'은 'ㄱ'을 떠나 티켓다방의 여종업원 신분으로 몸을 숨긴다.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주체가 섞바뀌고 있다. 'ㄱ'에서 'ㄴ'으로 그리고 'ㄱ'의 선생님으로. 줄리언 반스의 소설《사랑, 그리고》에서 모든 등장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도 그렇다. 'ㄴ'과 '남자1'은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많은 소제목들이 하나의 상징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손, 성장, 화석, 모딜리아니, 바르도, 고원지대, 본, 아바타, 묘비명, 아크로칸트사우르스, 베르글라...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을 떠올리게 한다. 각각의 소제목에 붙은 이야기들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이 흘러 가는 듯하다가 전체로서 통일성을 갖추는 모습이다. 그것은 마치 색색의 천조가들이 하나로 이어져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퀼트를 보는 듯한 효과가 있다. 잘 썼을 때는 그렇다는 얘기다.

 

'ㄴ'의 죽음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따가운 햇살에 살의를 느끼는 '뫼르소'의 충동과 닮아 있다.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죽고 싶고 미치고 싶은 그 모든 감정 말이에요. 희로애락(喜怒愛樂)과 애오욕(愛惡慾)이 요지경처럼 뒤섞인 채 다가와 우리들 마음을 천 갈래로 흩어놓는 것이 봄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해요. 모든 건 그날의 햇빛과 천 갈래 봄빛 때문에 비롯됐었다고." (p.221)

 

이 책의 제목인 '소소한 풍경'에 대해 말할 시간이 되었다. 작가는 주인공 각자에게 처음부터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의 풍경으로 존재해야 하고 작가의 의도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풍경'은 바라보는 주체와 오브제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가 아닌 마음의 간격을 의미한다. 주체의 관심이 객체에 밀착되는 순간 '풍경'은 '사유'로 전환되게 마련이다. 작가 박범신은 그들을 온전하게 '풍경'으로 그려내지 못했다. 하여 '소소한 풍경'은 오히려 '소소한 사유'로 읽힌다.

 

또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소설에서 소제목이 갖는 효과에 관한 문제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에서 작가는 각각의 소제목에 딸린 글들이 다른 소제목의 글들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히 숨기고 있다. 독자는 그로 인하여 각각의 글들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막간의 휴식과 호흡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소소한 풍경>에서 화자 'ㄱ'의 호흡은 너무 가쁘다. 그리고 각각의 글들이 독립성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까닭에 독자는 소제목으로 구분된 글들을 단지 단락의 구분쯤으로 인식하게 된다.

 

작가 박범신은 아마도 그동안 자신이 유지해오던 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도 그랬듯 묘사보다는 사유가 지배하는 소설은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작가는 상상력의 부족을 철학적 사유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분명한 것은 묘사 속에 철학적 사유를 담을 수는 있어도 철학적 사유 속에 묘사를 담는 일은 어색하다. 장롱 속에 집을 담으려는 꼴이다.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시도와 모험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자세이고 독자에 대한 에의라고 본다. 그러나 철저한 사전 준비와 분석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경력이 화려한 노작가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 소설에서 불필요한 한자어의 남용도 눈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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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편 무대에는 물수제비를 뜨는 어린 시절의 내가 등장하곤 한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여름 한낮이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종일 물장구를 치던 아이들이 오소소 소름이 돋은 몸으로, 강의 이쪽 모래밭에 나란히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다, 누군가의 느닷없는 제의가 있었고, 아이들은 저마다 강변에 흩어진 조약돌을 고르고 있다. 동글동글 마모된 얄팍한 돌을 찾아 이곳저곳을 훑는 그 짧았던 시간에도 몸의 물기는 금세 사라진다. 따가웠던 햇살.

 

금방이라도 닳아 헤질 듯한 누런 팬티 차림의 한 아이가 자세를 잡는다. 마른 체격에도 굵고 실팍한 등근육이 시선에 들어온다. 몸을 비스듬히 눕혀 수면과 한껏 가까워지도록 자세를 취하는 게 요령이라면 요령이었다. 오후의 잔양(殘陽)은 뜨겁기만 하다. 달궈진 돌을 피해 조심조심 강가로 모이는 아이들. 어서 던지라고 성화다.

 

손을 떠난 돌은 어쩌면 수면 위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물보라를 튀기며 곤두박질 쳤거나, 과한 힘으로 던진 까닭에 단 몇 걸음만에 저쪽 강기슭으로 튀어 올랐거나, 물 위를 사뿐사뿐 밟으며 저쪽 강기슭에 가까워지던 돌멩이가 나른한 곡선을 그리며 종종걸음으로 회귀하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중력을 거스르며 통통 튀어오르던 물수제빗돌의 발걸음을 기억한다. 어쩌면 수면 위로 반짝이던 여름 햇살의 눈부심을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까맣게 탄 어깨 위로 드문드문 마름버짐처럼 허옇게 일어나던 화상 자국들. 건너편 숲에서는 뻐꾸기가 한나절 울었을게다. 저녁 어스름이 지고 산그늘이 깊은 음영으로 강물을 잠식할 때면 저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 "아무개야, 밥 먹어라!"

 

이따금 나는 수면 위를 가볍게 걷던 조약돌의 흔적을 아스라히 좇곤 한다. 사는 게 조약돌처럼 가벼웠던 시절이었다. 수면 위로 튀어오르던 조약돌의 발걸음을 합창을 하듯 입맞추어 하나, 둘, 셋, 넷...세던 친구들. 세월의 저편에서 만나는 그 시절의 추억. 친구들 모두 삶의 무게를 딛고 세월의 강을 가뿐히 건너가길 나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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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2 오늘의 일본문학 4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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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읽고 나는 그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이런 경험은 참으로 오랜만인 듯싶다.  일본 소설이라면 약간의 편견과 거부감이 있던 나로서는 더더구나.  한 권으로 끝내기에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동네 도서관에서 그의 작품을 주욱 훑어보았다.  서가에는 꽤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작가인 듯싶었다.  그 중에서 내가 고른 책은 <남쪽으로 튀어>.  사전 정보도 없이 제목만으로 책을 고르는 게 마뜩치는 않았지만 나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도서관 입구의 카운터에서 대출증과 함께 책을 내밀었더니 사서 아가씨 왈, "이 책 영화로도 나왔어요.  한 번 꼭 보세요.  재미있어요." 한다.  예감은 다른 누군가의 지지에 의해 너무도 쉽게 확신으로 변한다.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 생각나기도 하고, 아리엘 도르프만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방향을 나타내는 어떤 말이 책의 제목으로 붙여질 때 나는 왠지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남쪽으로 튀어>는 11살 소년 우에하라 지로를 주인공으로 한 성장소설인 동시에 그의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가 완전한 자유를 찾아 파이파티로마(우리나라로 치면 이어도쯤 될까? 아무튼 지도에도 없는 비밀의 섬)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 모험소설이기도 하다.  지로의 아버지는 한때 혁공동(아시아 혁명 공산주의자 동맹)의 전설적인 행동대장으로 활동하였으나 목표보다는 개인의 이권에 골몰하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에 회의를 느껴 탈퇴하고 지금은 프리라이터를 자처하는 백수로 지낸다.  어딘가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지로의 아버지는 국민연금 납부를 독촉하는 구청 담당자에게 국민임을 관두겠다고 말하는가 하면 지로의 수학여행비가 너무 비싸다며 학교 선생님에게 항의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작고 작아. 이 사회는 새로운 역사도 만들지 않고 사람을 구원해주지도 않아. 정의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야.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줄 뿐이야." (2권 p.287)

 

지로의 가족은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와 백수인 아버지, 누나 요코, 그리고 여동생 모모코로 구성되어 있다.  부잣집에서 자란 지로의 어머니는 대학 시절 운동권에 가담했다가 누나 요코를 임신한 채 상대방 남자를 칼로 찌르고 구속된다.  그때 요코를 키우고 돌봐준 사람이 지로의 아버지였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지로와 모모코를 낳았지만 지로의 외가와는 일절 왕래가 없었다.

 

어느 날 지로는 중학생 불량배인 가쓰로부터 협박을 받게 되고 그들과 다투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비밀을 가쓰로부터 듣게 된다.  외할머니와 우연히 마주친 후 지로와 모모코는 외갓집을 방문하게 되고 자신들과 다른 상류층의 생활을 부러워한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운동권 후배가 지로네 집에 은신함으로써 지로는 원치 않았던 사건에 휘말린다.  아버지의 운동권 후배가 조직 내 다른 분파의 대장을 살해한 것이다.  경찰의 조사로 어수선하고 공안과 기자들의 출입이 잦아지자 집주인은 지로네 가족에게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한다.

 

누나 요코를 제외한 지로네 가족 네 명은 오키나와의 이리오모테라는 남쪽 섬으로 이사를 한다.  아버지는 개발 예정지의 폐가를 수리하여 그곳에 정착한다.  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곳에서 아버지는 밭을 일구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등 원시적인 삶에 열성적으로 매달린다.  지로에게는 도쿄에서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낯선 모습이었다.  지로와 모모코는 전교생이 다섯 명뿐인 그곳 초등학교에 전학한다.  도쿄에 남았던 요코 누나가 돌아옴으로써 가족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그러나 평화롭던 생활도 잠시 개발업자들의 철거가 시작되고 격렬히 저항하던 아버지와 캐나다 청년 베니는 구속된다.

 

"경잘과 기업에 창끝을 들이댄 사람을 통쾌하다며 재미있어 하면서도, 그것을 막상 내 일처럼 생각해줄 사람은 없다.  텔레비전을 지켜본 어른들은 단 한 번도 싸운 일이 없고 앞으로도 싸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항하고 투쟁하는 사람을 안전한 장소에서 구경하고 그럴싸한 얼굴로 논평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냉소를 던지리라.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제외한 대다수의 어른들이었다."    (2권 p.267)

 

그러나 베니의 도움으로 듣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전설의 섬 파이파티로마로 향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파이파티로마 섬에 내려오는 전설적 영웅 ‘아카하치’ 신화로 끝난다. 아카하치는 섬이 본토로부터 독립되어 자유롭게 살기를 희망하고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였으나 결국 이웃 왕조의 침략에 의해 처형되는 인물이다. 지로는 이 신화를 통해 비로소 아버지가 꿈꾸던 이상을 이해하게 된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져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2권 p.245)

 

이 소설은 겉보기로는 초등학교 6학년인 우에하라 지로의 성장 과정을 다룬 소설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파고들면 주인공인 지로의 시선에 비친 각종 부조리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욕심, 그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꿈꾸는 아버지의 이상이 겹쳐지고 있다.  우리는 사는 내내 편안함을 대가로 어떤 대상이나 제도와 끝없이 타협하게 된다.  자유는 자신의 불편과 타인으로부터의 차별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이자 불가능에 도전하고자 하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편리를 대가로 나의 자유는 얼마나 깎여나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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