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비가 내렸습니다. 그야말로 단비. 밤새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산행을 준비합니다. 준비라고 해야 운동복과 등산화를 신는 정도이지만. 저는 빗속의 산행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우산에 듣는 규칙적인 빗소리도 즐겁고 빗물에 씻겨 말갛게 드러난 등산로도 보기 좋습니다. 게다가 습습한 대기에 녹아 있는 짙은 솔향은 어떻구요.

 

얕게 괸 물웅덩이에 작게 퍼지는 물동그라미들. 함초롬히 젖은 개망초의 하얀 꽃송이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반갑습니다. 비행을 연습하는 어린 까치가 있는지 어미로 보이는 까치 울음 소리가 다급합니다. 늘 비슷한 시각에 비슷한 장소에서 마주치던 사람들도 오늘은 보이지 않습니다. 호젓하고 여유로운 산행을 예감합니다.

 

얼마쯤 올랐을까요.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두꺼비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두꺼비도 제 딴에는 오늘 같은 날에는 등산객과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등산로 중간에 멈추어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명상에라도 잠겼는지 눈을 반쯤 내려 감고 움직일 줄을 몰랐습니다. 마치 필요한 놈이 비켜가라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맹랑한 놈이로구나' 생각하며 한참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래도 이 산의 주인은 나라는 듯 길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다시 가늘어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듯합니다. 두꺼비를 피해 산을 다 올랐다가 내려오는 데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두꺼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모르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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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한다고 해도 달리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건만 기상청에서는 여러 이유로 설명하고 있더군요. 먼지가 날리는 등산로를 걸을 때마다 가뭄의 심각성을 체감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다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물웅덩이가 줄어든 탓인지 모기의 개체수가 예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것 같습니다. 작년만 하더라도 아침에 산에 올라 운동을 하고 있노라면 땀냄새를 맡은 모기들이 까맣게 달려들곤 했는데 올해는 손짓 몇 번만으로 가볍게 쫓을 수 있는 정도입니다.

 

모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밤에도 더위를 느끼는 요즘에는 문을 있는 대로 활짝 열어놓고 잠이 들게 마련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으레 모기약도 뿌리고 전자 모기향도 피우지만 이따금 피곤에 지쳐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모기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들어와 어느 곳에 숨어 있다가 내가 잠든 틈만을 노려 공격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그냥 잘 것이냐 일어나 불을 켜고 모기를 잡을 것이냐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결국에는 잠을 포기하고 모기와의 한판 승부를 격렬히 치른 후에야 다시 잠이 들게 됩니다. 그렇게 잠을 설친 날이면 몸도 찌뿌듯하고 컨디션도 영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이런 날벌레들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저으기 안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모기를 비롯하여 잠자리, 매미, 나비 등 인간의 시선에서 가까운 작은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것은 지구환경이 아직은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날벌레보다는 덩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인간이 이 지구에서 당분간은 그럭저럭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으니까요.

 

4대강 문제로 언론이 시끄럽습니다. 큰빗이끼벌레인가 뭔가 하는 것이 온 국토의 강에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다지요? 녹조현상도 심각한가 봅니다. 전직 대통령은 그 많은 돈을 들여 우리나라 국토에 무슨 짓거리를 한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국토를 온전히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고사하고 엄청난 액수의 세금으로 기껏 한다는 짓이 국토를 파괴하는 일이었다니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집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건전한 정신과 문화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물려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에 우수한 문화가 있다한들 뭐하겠습니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정신상태가 올바르지 못하면 전 국토가 일시에 파괴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위험성은 참으로 지대한 것입니다.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해 전 국토를 파괴한 통치자의 말로가 이런 것이다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저 가슴만 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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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 습격사건 - 엽기발랄 오쿠다 히데오 포복절도 야구장 견문록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동아일보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우울감이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버릴 요량으로 우연히 시작한 일이 그 사람의 개인적 취향이나 습관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컨대 기분전환 삼아 들렀던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우연히 맛보았던 초코 아이스크림에 대해 '생각보다 맛있네'라고 말했다면 당신은 분명 실수한 것이다. 그것도 크나 큰 실수를 범한 셈이다. 우울감을 한방에 빨아들이는 강력한 진공청소기 한 대를 장만했다고 좋아했던 당신은 그 청소기가 4개의 모터를 장착한 강력한 흡입력의 청소기로 진화하여 타깃을 당신의 몸으로 바꾸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장담하건대 어느 곳에나 효용 체감의 법칙은 작용하는 법이다. 서너 번쯤 반복되면 이제는 더 이상 초코 아이스크림이 나의 우울감을 제거해주지 않는다. 효용이 의심스러운 초코 아이스크림을 떨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슬슬 들게 마련이지만 진공청소기는 이제 당신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우라질! 취향은 늘 그런 식이다.

 

오쿠다 히데오의 <야구장 습격사건>은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다룬 재미있는 책이다. 하네다 공항에서 20분 거리에 사는 작가는 그야말로 '여행하라고 외쳐 대는 동네'에 사는 셈이다. 스트레스를 풀 겸 작가는 오키나와 여행을 결정한다. 작가는 마치 일기를 쓰듯 여행을 기록한다. 열혈 야구팬인 작가는 하네다 공항 로비에서 오키나와로 전지훈련을 떠나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선수들과 우연히 마주친다. 작가는 여행 시작 전부터 흥분한다.

 

"눈을 휘둥그레 뜬 내 앞으로 전 주니치 드래건스 선수 다네다 히토시가 지나간다. 어이! 하마터면 말을 걸 뻔했다. 안면도 못 튼 주제에. 문예춘추 <올 요미모노> 편집부의 B여사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B여사는 주니치 드래건스의 열렬한 팬이라 나와는 동지인 셈이다. 나보다 10년 늦게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나와 같은 수준으로 주니치 드래건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무서운 편집자다." (p.11)

 

오쿠다 히데오의 유머는 즉각적이고도 관능적이다. 웃음이 언제 배달될지 며느리도 모르는 한국식 유머와는 사뭇 다르다.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삶의 무게가 시간에 비례하여 1kg씩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물음보다는 나도 한번쯤 이렇게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진지하다는 것은 때로 어깨에 뭉친 근육통만 유발할 뿐이다.

 

"난 평소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어느 정도로 관심이 없냐면 리모컨을 잃어버리고도 한 달 동안이나 모를 정도다. 신문도 안 본다. 주간지 따위 사본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그러니 아는 게 없다. 여자 아나운서의 스캔들이 터진들 애당초 그 여자의 얼굴을 모르니 관심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다.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물으면 '내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대답한다. '채식주의자'같은 취향이라고 얼버무린다." (p.45)

 

작가는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시코쿠, 타이완, 도호쿠, 히로시마, 규슈를 여행한다. 책을 읽다 보면 야구 경기를 보기위해 나 홀로 여행을 하는 오쿠다 히데오의 모습이 연상되는 듯하다. 자신이 정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남는 시간을 어찌 보낼까 궁리하다 길거리의 어느 우동집에 들러 색다른 맛에 감탄하며 눈물을 찔끔거리거나, 야구 경기의 시간을 기다리며 영화를 한 편 때리거나, 그도 아니면 미니스커트 차림의 젊은 여성으로부터 마사지를 받으며 온갖 상상을 하는 모습 말이다.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가지고 온 책은 반도 읽지 못했다. 사색 모드로 들어간다. 나는 생각하면서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런 능력이 소설에 활용되지는 않는다. 공상은 장사 밑천이 될 수 없다." (p.70 )

 

소심하면서도 은근 기분파인 작가는 도쿄를 떠나 맘에 드는 어느 지역으로 이사를 생각하기도 하고 트럭 운전사가 되어 사계절 내내 여행을 꿈꾸기도 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녹색의 논에 반하여 농사를 지어볼까도 생각한다. 늘 그런 식이다. 아주 이따금 진지한 생각을 할 때도 물론 있다.

 

"막 등단했을 무렵 나는 '작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처녀작은 화제에도 오르지 못하고 업계에서는 완전히 무시당했다. 사람들이 직업을 물으면 "소설도 가끔 써요,"하고 곁가지처럼 말했다. 사실 난 아주 달콤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출판만 되면 각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원고 의뢰가 정신없이 밀려들 것이라고. 웃고 만다. 고독과 친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중략) 지금, 내 일정은 5년 후까지 꽉 찼다. 옛날에 비하면 거의 기적이다. 여행을 하면서 원고를 쓰기만 해도 그걸 사줄 출판사가 있다. 이 무슨 기적 같은 일인가. 그렇지만...... 괴롭다. 나는 아니디어와 테크닉으로 소설을 쓸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살을 후벼 파지 않으면 한 줄도 나가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p.209 ~ p.210)

 

누군가는 야구가 인생과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런 구태의연한 표현은 딱 질색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곰팡이가 필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인생은 결국 비극도 희극도 아니지만 나는 선택할 수만 있다면 희극을 선택하고 싶다. 별 가는성이 없어 먼저 침이라도 발라 보자는 속셈이지만. 그렇지만 책을 고르라면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이 좋다. 별 것 아닌데도 신나게 웃을 수 있는 그런 책 말이다. 대리만족을 누리는 기쁨도 쏠쏠하다. 야구장을 찾아 떠나는 오쿠다 히데오의 나 홀로 여행은 2월부터 시작되어 7~8월은 쉬고 12월까지 이어진다. 책을 읽은 소감을 굳이 말하자면 '유쾌하다!'는 말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작가가 우동 한 그릇을 먹고 '맛있다'는 표현 밖에 다른 말을 찾지 못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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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7-14 10:22   좋아요 0 | URL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읽으면서, 소설 읽는 즐거움을 만끽했습니다.
왠지 친근한 오쿠다 히데오^^
이 글 읽으니 여행가고 싶네요.

꼼쥐 2014-07-17 13:58   좋아요 0 | URL
저도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 중에 <공중그네>를 처음으로 읽었어요. 그것도 최근에서야 말이죠. 그 책을 읽고난 후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만 읽게 되네요. 이제 곧 휴가철이니 즐거운 여행 계획 세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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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의 예상은 그 근거가 너무도 빈약한 탓에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내리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예상을 하고 로또의 1등 당첨 확률보다 못한, 우연에 가까운 적중률에 환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예상의 빗나감 때문에 실체적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것도 아니요, 예상의 적중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은 오직 현실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종종 현실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자신이 제시했던 예상의 근거를 작은 목소리로 수정함으로써 변명에 가까운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실이 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줄리언 반스의 에세이집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 저자는 예상치 못했던 현실에 대처하는(아니 '반응하는'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일이기에 모든 사람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줄리언 반스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물론 그의 아내 팻 캐바나의 죽음이었지만 그는 이 책에서 개별적인 (팻 캐바나의)죽음과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의)비탄의 모습을 객관화시킴으로써 삶의 보편적인 패턴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번역했던 최세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세 이야기의 묶음이다. '비상의 죄(하늘)', '평지에서(땅)', '깊이의 상실(지하)' 이라는 각 장의 제목이 암시하듯, 세 개의 수직적인 층위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원제 'Levelsof life'는 직역하면 '인생의 층위들'이다.) 층위가 다르고, 장르적 성격이 다른 세 이야기는 대동소이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의 것들을 하나로 합쳐보라. 그때 세상은 변한다.' 그리고 이 문장은 한 가닥 실처럼 세 이야기의 바늘귀를 관통한다." (p.200)

 

책을 펼치자마자 시작되는 19세기의 '기구를 즐겨 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독자들은 아마도 저으기 놀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캐바나에 대한 회고록 성격의 책이라는 사전 지식을 갖고 있었던 독자라면 의아한 마음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아내와 사별하여 비탄에 잠긴 작가와 기구 또는 기구를 즐겨 탔던 사람들과의 연관성이 전혀 짐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작가는 기구를 타고 '신의 영역'인 하늘로 비상하여 '땅위에 묶여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사진에 담았던 나다르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내 에르네스틴을 사랑했던 그는 아내가 죽은 후 '땅 위에서의 삶'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했다고 합니다.

 

2장에서도 작가는 여전히 기구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다만 사랑의 패턴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와 그녀를 사랑하는 영국인 장교 프레드 버나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질적인 두 보헤미안인 사라와 프레드는 두 사람의 사랑을 완성함으로써 함께 기구를 타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기구가 그렇듯 추락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의 쾌락을 찾아 헤매는 사라와 사랑의 완성을 원하는 프레드의 만남은 처음부터 추락을 염두에 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걸요. 그래서 난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고요.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감각, 쾌락,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어요. 난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감정을 찾아 헤매요. 삶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렇게 살아갈 거예요. 나의 마음은 어느 누구, 어느 한 사람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짜릿한 흥분을 원한답니다." (p.93)

 

3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내를 잃고 비탄에 잠겼던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들리지 않는 위로의 말들과 그다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비탄에서 벗어나는 여러 방법들 역시 아내를 잃고 비탄에 잠겼던 작가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상실의 고통은 삶의 층위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땅을 딛고 사는 보통의 사람들과의 영원한 단절, 비탄에 잠긴 사람들로 하여금 가치관의 기준이 확실하게 바뀌도록 만든 냉엄한 자연의 섭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탄은 시간을 바꾼다. 시간의 길이를, 시간의 결을, 시간의 기능을 바꿔놓는다. 오늘 하루가 내일과 전혀 다르지 않게 돼버린 마당에, 굳이 각각의 날들에 별도의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공간 또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지도 제작법에 의거해 측량된 새로운 지형에 들어서게 된다. '상실의 사마''(무풍지대인) 무심의 호수' '(말라서) 황무지가 된 강' '자기연민의 습지' '기억의 (지하) 동굴' 등을 표시한 17세기 지도와 흡사한 그 지도에서 당신은 당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p.138 ~ p.139)

 

구름을 뚫고 하늘로 비상한 기구처럼 삶의 층위가 갑자기 변했을 때, 바람의 방향을 예측하는 일도 땅의 고저를 가늠하는 일도 자신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 되었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다만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자조적인 무기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건, 벗어날 수 없는 비탄의 강정이나 혹은 구름을 벗어난 행복의 감정에 충만하건 그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우주의 진행은 무심히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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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붓기 없는 얼굴로 출근했더니 기분이 너무 좋아!"

여자 화장실 앞을 지나쳐 갈 때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는 두 여자분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엿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연히 제 귀에 들려온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인즉슨 얼굴이 붓지 않았던 날보다 퉁퉁 부은 얼굴로 하루를 시작했던 날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얘긴데 얼굴이 붓는다는 걸 경험해보지 못한 저로서는 그 여성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녀의 표정으로 추측컨대 날아갈 듯 즐거워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문득 떠올랐던 것은 '부풀려진 행복보다는 붓기가 쪽 빠진 있는 그대로의 행복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것'과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죽을 때까지 껴안고 가야 할 질병 한두 개쯤은 누구에게나 흔한 것이로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가 보았던 여성분들의 나이는 대략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였지만 말입니다.

 

얼굴의 붓기와 행복의 연관성이 쉽게 짝지어지지 않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부은 얼굴처럼 언제나 그 모습이 부풀려져 있다는 게 제 평소의 생각이었던 까닭에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의 붓기는 곧바로 행복과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부은 얼굴이 여러 날 계속되다 보면 본 얼굴을 잊어먹는 것처럼 우리는 행복의 본래 모습을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벌써 세 달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찾지 못한 세월호 실종자는 열 명이 넘습니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나날이 행복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우주의 탄생처럼 신비롭고 기적에 가까운 일일진대 사람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무심히 흘려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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