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쓴 <인간 실격>이라는 소설이 있다. 제목처럼 꽤나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이다. 나는 아마도 대학시절쯤에 이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별 감흥도 없이 이 책을 읽었다. '아,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는 정도로 가벼이 읽었었고, 그때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시기였으니만큼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가 느꼈던 인간에 대한 지극한 공포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며칠 전 그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 자리를 오르내리는 한 사람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그의 행위에 동조하는, 김영오 씨의 단식과 단식 중단을 조롱하는 많은 글들이 트위터에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참으로 썩은 내가 풍기는 '인간 결격자'들의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이들을 두고 인간성이나 도덕성이 결여된, 말하자면 잘못된 인성의 소유자쯤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판단이다. 인성의 결여는 그들도 한 사람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적어도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는 인간의 실체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인간의 허위와 기만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 실격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은 오바 요조보다 못한, '인간 실격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결격자'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자들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조차 없는, 인간의 자격 조건이 결여된 '인간 결격자'라는 말이다. 그들의 행위는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본인 스스로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그것을 마치 자신의 신념인 양 떠벌리고 있는 것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어울릴지 모른다. 세상을 모르는, 인간에 대해 무지한, 도덕심이나 배려심은 눈곱만치도 없는 하룻강아지는 자신의 방종조차 신념이라고 우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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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락시아 - 정현진 사진집
정현진 지음 / 파랑새미디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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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억지가 있겠지만 사진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본다기보다는 오히려 읽는 것에 가깝다. 사진을 읽는다? 얼핏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 느껴지지만 시간을 두고 찬찬히 곱씹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할 것이다. 나는 사진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상하곤 한다. 그날 날씨는 어땠을까, 구름은 많았나? 바람은? 주변에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지? 조금 추웠을까? 주변 도로에는 개미가 몇 마리쯤 이동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갑작스런 카메라 렌즈에 놀란 어린 새가 푸드득 날아가지는 않았을까?

 

별의별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 장의 사진을 놓고 웬만한 책 한 권 읽는 시간을 소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진을 그리 한다는 건 아니다. 예컨데 여행 책자에 실린 선명하고 화려한 사진은 오히려 섬뜩한 기분마저 들곤 한다. 아무런 상상을 할 수 없는, 이 세상의 풍경에서 한쪽 귀퉁이를 도려낸 듯한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의 사진은 오랫동안 보고싶은 기분이 영 들지 않는 것이다.

 

사진가 정현진의 사진집 <아타락시아>를 나는 정말 공을 들여 보았다. 아니, 읽었다.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피사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피사체를 둘러싼 배경 스토리, 한 컷의 사진에 담기지 않은 그 순간의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소소한 것들, 영속하는 시간의 경과에서 무한히 정들었던 대상 속에 작가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으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 중에는 '후지와라 신야'가 있다. 여행작가이기도 한 그의 사진에는 '상상 금지'의 팻말이 붙은 여느 여행작가의 사진처럼 선명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진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고, 다가갈 수 없는 그리움이, 아련한 향수가, 그리고 시간의 경과와 삶의 무상함이 담겨 있다. 내게 무슨 심미안이 있어서 그렇게 느꼈던 것은 아니다. 예술적인 방면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다만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내가 정현진의 사진집 <아타락시아>를 보고 리뷰를 남기게 된 계기는 그의 사진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상', '사유', '동심', '사랑', '행로', '장면' 등으로 소제목을 달아 분류된 그의 사진집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사는 평면의 일상에서 시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 한계 저편의 세계로 공간이동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게 된다.

모래 위에 남겨진 피서객들의 발자국에서, 도로의 갈라진 틈새에서, 겨울을 견디는 나목에서, 사선으로 흩날리는 빗줄기에서,어느 음식점의 물컵에서, 때로는 나뭇잎 위의 이슬에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상상으로 다시 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 같다. 사진 사진마다 촬영 동기가 몇 줄의 짧은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어떤 철학적 사유나 현학적 글귀를 써 넣음으로써 독자의 상상을 방해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저 단순하고 깔끔하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작은 것에 대한 관심과 무한한 상상력, 지워지지 않은 동심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좋은 사진은 적어도 수십 명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정현진의 사진은 아련한 향수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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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볼일이 있어 차를 몰고 외출했을 때의 일이다. 막 은행 주차장에 들어서려는데 때마침 볼일을 마치고 나가려는 차량 한 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차량 두 대가 비껴가기에는 턱없이 좁은 출입구인지라 나는 어쩔 수 없이 후진을 했다. 그렇게 후진을 하고 있는데 택시 한 대가 내 뒤를 가로막았다. 택시 기사는 전혀 비켜줄 마음이 없었던지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택시 뒤에 또 다른 차량이 바싹 다가서는 게 아닌가.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가 되고 만 셈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내 앞의 차량이 후진하는 것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나는 앞 차량의 운전자에게 내가 더 이상 후진을 할 수 없노라는 의사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 차량은 전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동안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고 가운데 끼인 나는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더 가관이었던 것은 앞 차의 조수석에 동승한 나이 지긋한 노인의 행동이었다. 인상을 험악하게 하고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서로 문을 닫고 있어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모양으로 보아서는 욕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욱하고 치미는 게 있어 그 자리에 차를 정차시키고 나가 따지려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앞 차의 운전자가 후진을 했다.

 

주차장의 출입구를 지나서야 차량 두 대가 간신히 비껴갈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나는 치밀어오른 분을 삭일 수 없었다. 딴에는 노인을 대접한다는 마음에 주차장 진입을 미루고 정차했을 뿐 아니라 후진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욕을 먹기까지 하다니... 나는 상대방 노인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육두문자를 날렸다. 물론 듣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 차는 내 옆을 천천히 비껴갔고 나도 무사히(?) 차를 주차시킬 수 있었지만 여전히 분은 풀리지 않았다.

 

은행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풋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는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 생각했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누군가 내 마음을 제멋대로 조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에 매달린 인형이 조종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의 추(錘)는 한시도 고요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괜스레 슬프거나, 이유도 없이 들뜨거나, 대상도 없이 분개하거나, 시도 때도 없이 기뻐하는 등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한 쪽으로 깊이 기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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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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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소지가 있으니까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부터 말해두자. 짬짬이 책을 읽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작가가 보기에)나는 과연 괜찮은 독자인가, 하는 의문이 여러번 들었던 것이다. 독서란 결국 책을 매개로 작가와 소통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일방적인 책읽기, 나 혼자만의 독백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의문에서 비롯된 반성은 어쩌면 뒤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책이 쓰이고 만들어지는 과정을 제대로 알아보자,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즉, 책의 제목과는 다르게 좋은 작가가 되려는 목적보다는 좋은 독자가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 책을 읽었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 장난감이나 라디오가 작동하는 원리가 궁금하여 이리저리 뜯어보고 해체함으로써 결국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으로 망가뜨렸던 기억, 그 과정에서 눈으로 볼 수 없던 원리를 스스로 깨우쳤던 기억이 내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였다.

 

소설보다는 오히려 영화《미저리》《쇼생크탈출》《돌로레스 클레이본》의 원작자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스티븐 킹'은 이 책에서 소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기에 앞서 자신이 소설가로 성장하게 된 전 과정을 회고록처럼 쓰고 있다. 두 개의 머릿말에 이어 '이력서'라는 소제목으로 등장하는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흥미롭다.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까닭에 그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상한 베이비시터에게 맡겨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홍역으로 시작된 질병이 귀와 편도선으로 전이되어 초등학교 1학년을 다시 다녀야만 했던 기억, 소설 한 편을 완성할 때마다 어머니로부터 25센트 동전 하나씩을 받았던 초등학교 시절, 자신이 쓴 소설을 친구들에게 팔아 9달러를 벌었던 고등학교 시절과 선생님을 풍자했던 글로 처벌을 받았던 경험, 아내 태비사와의 만남, 결혼과 아이들,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창작활동, 첫 장편소설 <캐리>의 성공 이후 미국 최고의 작가로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글을 쓴 진짜 이유는 나 자신이 원하기 때문이었다. 글을 써서 주택 융자금도 갚고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냈지만 그것은 일종의 덤이었다. 나는 쾌감 때문에 썼다. 글쓰기의 순수한 즐거움 때문에 썼다. 어떤 일이든 즐거워서 한다면 언제까지나 지칠 줄 모르고 할 수 있다." (p.308)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소제목으로 쓰인 본론에 해당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어휘력을 증진시키고 올바른 문법을 익히는 것의 중요성과 더불어 작가는 지나친 부사어의 사용과 수동태 문장의 남용에 대하여 경계하라고 말한다. 또한 서술(narration)·묘사(description)·대화(dialogue)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들, 문단의 구성법, 묘사에 있어서 배경 스토리의 사용 등 좋은 글(이 책에서는 주로 좋은 소설을)을 쓰기 위한 방법들을 풍부한 예시와 함께 위트와 재치를 섞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지금 간단한 두 가지 명제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의 중심부에 접근하려 한다. 첫째, 좋은 글을 쓰려면 기본을(어휘력, 문법, 그리고 문체의 요소들을) 잘 익히고 연장통의 세 번째 층에 올바른 연장들을 마련해둬야 한다. 둘째, 형편없는 작가가 제법 괜찮은 작가로 변하기란 불가능하고 또 훌륭한 작가가 위대한 작가로 탈바꿈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스스로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시의적절한 도움을 받는다면 그저 괜찮은 정도였던 작가도 훌륭한 작가로 거듭날 수 있다." (p.172~p.173)

 

훌륭한 작가가 된다는 것은 다분히 선천적인 재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고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스티븐 킹의 생각은 많이 읽고 많이 써봄으로써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작가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하여 깊이 사유하고 삶의 교훈을 깨닫는 일 또한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스티븐 킹은 말한다.

 

"글쓰기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귀중한 교훈들은 스스로 찾아 익혀야 한다. 이런 교훈을 얻는 것은 서재문을 닫고 있을 때가 거의 대부분이다. 물론 창작 교실에서의 토론도 지적인 자극을 주고 흥미진진한 때가 많지만, 글쓰기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도외시하고 곁길로 빠지는 일도 많다는 게 문제다." (p.293)

 

좋은 독자가 되는 길은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만큼이나 험난할지 모른다.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구조 속에서 드러나는 어떤 상징과 교훈을 무시한 채 무작정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분히 자가당착의 딜레마에 빠질 우려가 있다. 내가 그랬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책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일반론이란 듯 떠벌렸다. 나는 간혹 그 과정을 즐겼고, 이따금 우쭐해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인류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삶의 비의를 찾는 일에는 언제나 서툴렀다.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글쓰기(엄밀히 말하자면 소설 쓰기)에 국한된 것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좋은 글과 형편없는 글을 구분하는 안목을 기르는 방법, 즉 좋은 독자가 되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 이 책의 일부분은 - 어쩌면 너무 많은 부분이 - 내가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 내용이다. 나머지는 - 이 부분이 가장 쓸모있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 허가증이랄까.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여러분도 해야 한다는, 그리고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여러분도 해내게 될 것이라는 나의 장담이다. 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도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p.334)

 

글을 통하여 행복해지는 것, 스티븐 킹의 바람은 바로 그것이다. 직접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좋은 글을 읽고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서 잠시 쉴 수 있는 것, 그 시간에 현실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글이 갖는 가치와 생명력을 함께 누리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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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아침.  전날 모질게도 비가 내리던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쾌청했다.  벽제로 가는 운구버스에서 누나는 목놓아 울었다.  한이 깊어서였는지, 아버지의 인생이 불쌍해서였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나는 목울대 바깥으로 터져나오려던 울음을 끝내 토하지 않았다.  이른 새벽의 안개를 뚫고 속속 도착한 많은 운구버스와 리무진 차량이 접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검은 상복을 입은 유족들은 쓴 커피 한모금을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사는 것은 기다림이고, 기다리는 빈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일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이제는 죽어서도 제 순번을 기다려야 한다.  6시 40분!  직원이 유리문을 열고 접수를 받는다.  배정받은 번호에 따라 영정을 앞세운 시신이 화로로 운반되는 동안 가족들의 흐느낌이 이어진다.  화장로로 향하는그 짧은 시간에 어찌나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던지...

 

엘리베인터처럼 단단한 문이 닫히고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주황색 램프만이 서럽게 밝혀져 있었다.  하릴없는 유족들이 좁디 좁은 2층의 가족 대기실에 빼곡히 모여 앉아 화장의 진행상황을 알려주는 모니터만 주시했다.  꽉 막힌 대기실이 답답했던지 사람들은 이따금 조용히 일어나 방을 나갔고, 한동안 밖을 서성이다 들어오곤 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를 파는 2층 카페는 옹색한 대기실과는 딴판이었다.  마치 죽음과 삶의 경계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모니터에 '냉각중'이라는 자막이 뜨면 화장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화장을 마친 시신은 한 줌 뼛조각이 되어 나왔고 마스크를 쓴 직원이 쓰레받기에 쓸어 담았다.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디딘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영정 사진을 앞세우고 흰 보자기에 싸인 분골함을 들고 벽제 화장장을 떠났다.  납골당에 유골함을 안치할 때까지 누구도 말이 없었다.  뉴욕에 사는 여동생은 늦게 도착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인지 벽제 화장장에서부터 소리를 죽여 울었다.

 

아버지의 발길이 거쳐간 이 세상의 모든 곳에는 몇 웅큼의 증기로 변해버린 아버지의 정령들이 가족들 시선을 한참이나 앞장서서 날아와 안개처럼 퍼져 있을 듯싶었다.  나는 그 정령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이제는 더 멀고먼 하늘 저쪽으로 날아가 편히 사시라고 달래주고 싶었다.  자기 주장이 강하셨던 당신은 내 말을 순순히 따르실까?  몸뚱이가 불에 탄 다음에는 치매도 다 치유되었을 것이고 원래의 영혼으로 되돌아갔을 터였다.

 

아버지를 보내드린 지 오 일만에 다시 돌아온 직장은 낯설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알 수 없는 설움이 안개처럼 몰려왔다.  혈육의 정이라곤 눈곱만치도 느끼지 못했던 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회한을 당신이 불 타던 화장로에 함께 태웠다.  인간의 그 보편적인 죽음 앞에서 나는 절반쯤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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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8-2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아버님께서 이 세상을 뒤로 하고 가셨군요.
대학생때이니 삼십년도 더 전에 벽제에 간 적이 있는데, 전 제 또래 되는 사람을 보내면서 어찌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절차 하나하나가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더군요.
꼼쥐님, 절반쯤 무너진 다리를 다시 추스리고 일어나셔야지요.

꼼쥐 2014-08-26 13:54   좋아요 0 | URL
저는 벽제 화장장을 서너 번쯤 다녀온 듯싶어요.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사는 게 참 허망하다는 것이었어요. 일말의 감상이겠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느낌에 더하여 많은 생각들이 오가더군요.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요. 이제는 다시 일어나야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위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