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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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맛비처럼 내리던 비가 저만치 물러가고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비가 지나간 후의 대기는 얼마나 투명한가! 나는 허공을 향해 종주먹을 들이대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조용히 참는다. 절제된 욕망은 실상 자신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제 영역을 넓혀갈 뿐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자가증식하는 세포처럼. 그것은 마치 파괴의 순간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에너지를 응축하는 지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알 수 없으리만치 조금씩조금씩, 그러다 어는 순간 '꽝' 하고 폭발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처럼.

 

오후가 되자 하늘은 다시 어두워졌다. 바람이 불고 힘없는 낙엽이 소리도 없이 흩날렸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는다. 그의 작품은 리얼리즘을 철저히 배제한 한 권의 판타지 소설일 뿐이다. 나는 이 작품이 오직 그의 머릿속에서만 창작되었다고 믿는다. 누군가의 삶으로부터 축출된 그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그의 내면에 꾹꾹 잠재되었던 욕망이 어는 순간 틈새를 비집고 나와 한 편의 소설이 되기까지 그는 무척이나 오래 견디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배설행위이다.

 

잠재된 욕망을 누군가에게 쏟아냄으로써 작가는 쾌감을 느낀다. 절정의 쾌감. 나는 오르가슴으로 치닫는 작가를 상상한다. 작가는 결국 죽음을 생각한다. 명멸하는 욕망의 찌꺼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삶이 죽음의 이면인지, 죽음이 삶의 이면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얼굴이 비칠 듯 반짝이는 승강기의 전면과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승강기의 뒷면처럼 삶과 죽음은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죽음의 뒷면이 삶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둡고, 습하고, 더럽고, 어느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승강기의 뒷면처럼.

 

"퍼포먼스는 달라요. 저는 직접 만나죠.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 죽음과 애욕을 보죠. 제가 그날 그들의 눈 속에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제 작업은 즉석에서 바뀌곤 하죠. 예술의 목적이 결국 아름다움을, 그것도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대면하고자 하는 욕구라면,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모든 예술은 가짜이고 타협이고 부질없는 불멸에의 욕망, 그 찌꺼기들이지 않아요? 퍼포먼스에 대한 모든 공격은 참된 아름다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불멸에 대한 강박 때문에 참된 아름다움을 박제하죠. 그들은 죽은 예술에 길들여진 노예들이에요." (p.113)

 

저녁이 되자 다시 잠깐 맑은 하늘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이내 오렌지빛 석양과 함께 사라졌다. 루이 다비드의 그림 <마라의 죽음>으로 시작된 소설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에 이를 때까지 아름다우면서도 몽환적이었다. 그러나 3부 <에비앙>에서부터 작가의 의식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현실을 의식하는 것일 수도 있고, 타인(또는 독자)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수음을 하던 소년이 그 장면을 제 어미에게 들킨 것처럼. 작가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또는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을 때의 소설은 이미 아름다움과는 멀어지게 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처음은 섹스와 죽음을 도발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작가의 의식이 꿈의 저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깔린 하늘은 목화솜처럼 넓게 펼쳐진 구름으로 뒤덮였다. 오늘 밤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 별은 현실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언젠가 읽었던 허구 속에서 존재했던 것처럼. 소설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소설 속에서 죽음을 택한 세연과 그녀와 관계를 가졌던 C와 그의 동생 K, 행위 예술가 미미,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나. 나는 고민 상담을 하며 의뢰인의 자살을 도와주는 죽음 안내인이며, 동시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작가이다. 이를테면 나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사르다나팔의 죽음>에 등장하는 사르다나팔인 셈이다. 팔베개를 한 채 죽음의 향연을 바라보는 바빌로니아의 왕 사르다나팔. 나는 유디트(세연)와 미미의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 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 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는 않는다." (p.140)

 

밤이 깊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삶의 이면을, 죽음과 같은 또는 꿈과 같은 아름다움과 대면하는 일이다. 비록 그것이 잉여적 삶이라 할지라도 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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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이 소설에서 기억할 만한 문장들을 기록해 둔다. 단지 참고용으로.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의 지상 덕목이다." (p.8)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p.10)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 (p.16)

"가끔 허구는 실제 사건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실제 사건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면 구차해질 때가 많다. 그때그때 대화에 필요한 예화들을 만들어 쓰는 게 편리하다는 것을 아주 어릴 적에 배웠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즐긴다. 어차피 허구로 가득한 세상이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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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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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대체 몇 권의 책을 소장해야 장서가로 불릴까요? 오천 권? 만 권? 아니면 적어도 몇 만 권 이상은 되어야 할까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애독자에서 책 수집가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본의 아니게 말입니다. 한두 권 사들이던 책이 어느새 몇 십 권이 되고 금세 몇 백 권이 되었다가 이제는 셀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합니다. 잠깐 방심한 사이에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책을 보유하게 된 셈이죠. 때마침 이사라도 할라치면 이건 숫제 애물단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버리자니 아깝고 이삿짐에 슬쩍 끼워넣자니 짐의 부피며 무게가 여간해야지요.

 

"책이 아무리 많더라도 책장에 꽂아두는 한 언제든 검색할 수 있는 듬직한 '지적 조력자'다. 하지만 책장에서 비어져 나와 바닥이며 계단에 쌓이는 순간 융통성 없는 '방해꾼'이 된다. 그러다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범람은 결국 '재해'로 치닫는다. 아직은 책의 범람이 지하에 머물러 다행이지만, 이윽고 1층을 잠식하고도 성이 차지 않아 계단을 따라 2층까지 밀고 올라오면 정말이지 '대참사'가 따로 없다." (p.19)

 

서평을 중심으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는 오카자키 다케시는 이 책 <장서의 괴로움>에서 넘쳐나는 책 때문에 겪었던 자신의 경험과 같은 경험을 했던 여러 작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일본 작가인지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감탄하게 만드는 일화들이 재미있게 씌어 있어서 책을 읽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예컨대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집이 무너졌다거나 무너지기 직전의 사례가 잇달아 나옵니다.

 

나도 한때는 책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짬짬이 했던 여러 아르바이트 덕분에 벌어들이는 고정수입이 짭짤하던 시기였죠. 그 돈으로 동네 서점을 제집 드나들듯 했었고, 책은 나날이 늘어만 갔습니다. 마땅한 책장도 없었던지라 바닥에 쌓아 놓는 것으로 책정리를 대신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간이 비좁아져서 잠을 잘 수도 없는 처지에 이르고 보니 어떤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그대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집 주변의 건재상에 들러 널빤지 몇 장과 빨간 벽돌을 사서는 방 안의 사방 벽면에 책꽂이를 만들었고, 그럭저럭 책도 정리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방은 다시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사들인 책도 책이었지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이 빼서 읽고는 제멋대로 던져 놓은 탓에 책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죠. 다시 정리하기를 몇 번, 안 되겠다 싶어 필요없는 책들은 모두 헌책방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하더군요. 결혼을 하고 한동안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낸 적도 있었지만 책을 사들이는 병(?)은 다시 재발하고 말았습니다.

 

주말부부로 지내는 게 문제였습니다. 아내의 잔소리가 없으니 책은 날로 불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더군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숙소 주변의 아이들에게 책을 나눠주는 일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에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각자가 읽고 싶은 책을 빌려주었더니 반납하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 책의 양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아끼던 책이 보이지 않아 가끔 속상한 적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합니다. 요즘은 아예 새로운 책을 구입하거나 공짜로 받은 책이 생기면 내가 먼저 읽은 후 아이들을 불러 나누어주곤 합니다.

 

"원고를 집필하는 동안 여러 사람이 '장서의 괴로움'을 이야기했다. 심지어 내게 곤혹스러운 사정을 털어놓은 이도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실을 알게 됐다. '책이 너무 늘어 걱정'이던 투정은 결국 자랑삼아 자기 연애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p.235)

 

작가는 책의 말미에 '억지를 부려서라도 내 신념을 밀고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로 '괴로워'하며 살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나도 그가 그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전자서적이 난무하는 세상에 아직도 촌스럽게 종이책을 읽느냐 타박하는 사람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기술이 지금보다 더 발달한다 할지라도 어려서부터 들였던 버릇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잠들기 전에 읽는 종이책의 푸근한 느낌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괴로움을 안고 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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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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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은 실상 그 자신이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살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운명이라는 굴레, 또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우연에 의해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길을 따라 그저 떠내려가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삶 전체에 나의 의도는 실오라기 하나 개입할 수 없는 것이구나 쓸쓸해지곤 한다.

 

폴 오스터의 <선셋 파크>는 그런 쓸쓸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나는 잠깐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외딴방>에서 받는 우리의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아마도 폴 오스터가 남성 작가이기도 하고, 다분히 독립적이면서 개인주의적인 미국적 정서가 배어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암울한 현실을 겪는 네 명의 청춘들의 이야기는 처절하다거나 절망적인 느낌보다는 오히려 담담하게 읽힌다.

 

사실 청춘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노년의 회상을 떠올리게 하는 '선셋 파크'라는 제목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희망이 없는 현실과 마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노년과 같은 삶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청춘의 모습은 공동묘지가 넓게 펼쳐진 '선셋 파크'의 배경과 함께 지금 미국의 젊은이들이 겪는 고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그 청춘들을 바라보는 부모 세대의 걱정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p.328)

 

소설은 마일스가 폐가 처리 작업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경제적 이유로 황급히 도망간 사람들이 버리고 간 집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다. 이복 형 보비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우연히 듣게 된 새엄마와 아빠의 대화 내용에 충격을 받은 마일스는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미국 전역을 떠돌게 된다.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언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계획도 없이 지내던 중 그는 공원에서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같은 책(위대한 개츠비)을 읽고 있던 한 소녀, 필라 산체스. 마일스는 똑똑하고 야무진 그 소녀에게 한눈에 반한다. 미성년자인 필라와 동거를 하며 늘 조심스러웠던 마일스. 그러나 필라 언니로부터의 협박에 굴복하여 결국 그는 그곳을 떠나게 되고 고향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뉴욕으로 돌아간 마일스 헬러가 지내게 되는 곳이 바로 선셋파크인데 그곳에서 그는 옛친구 빙과 엘런, 앨리스를 만나게 된다. 뉴욕의 변두리에 위치한 낡은 건물인 선셋 파크는 현재 시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시 소유의 건물인 선셋 파크를 불법 점유한 셈이었다. 다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그들에게 선셋 파크는 임대료나 관리비의 부담 없이, 집주인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 모인 네 명의 청춘들에게는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그들 나름의 아픔과 상처가 있다. 형과의 말다툼 끝에 형을 도로로 밀쳐 달려오던 차에 치여 죽게 한 것에 대한 자책에 시달리는 마일스와 반사회적 투사를 꿈꾸며 선셋 파크 무리의 리더가 됐지만 의외의 감정으로 고민하는 빙, 고통스러운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그림에 몰두하는 엘런, 체중에 대한 콤플렉스와 남자 친구와의 삐걱거리는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앨리스.

 

마일스는 그들과 함께 선셋 파크에 모여 살면서 서서히 미래를 꿈꾸게 된다.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연인 필라가 뉴욕에 있는 대학에 합격함으로써 곧 재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대학에 복학함으로써 미래를 계획하고자 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거의 끝내고 새로운 삶을 계획하던 앨리스. 과외 교사로 일했던 시절 가르치던 학생과의 교제와 우연찮은 임신 때문에 달아났던 엘런은 그때의 학생이 어엿한 청년이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남으로써 희망에 부풀게 되고, 마일스의 고교 동창인 빙은 마일스에게 자신의 사업체를 맡기고 밴드와 함께 순회 공연을 떠날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로의 꿈을 찾아 각자의 길로 헤어지려던 그때 선셋 파크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더 나은 사람,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거요.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좀 공허하기도 하지요. 더 나은 사람이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4년동안 대학에 가서 전 과정을 이수했다고 증명해 주는 학위증을 받는 식이 아니잖아요.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더 나아졌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더 강해졌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로 그냥 계속 밀고 나갔어요. 한참 지나니까 목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노력 자체에만 집중하게 되었어요.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저는 투쟁에 중독되어 버렸어요. 저 자신을 놓쳐 버리고 만 거죠. 계속 죽 해나갔지만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더는 모르게 되었어요.˝ (p.281)

 

삶은 자신의 의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연과 같은 사건들에 의해 등 떠밀려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그러한 삶을 유지하고 끝까지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 폴 오스터는 독자들에게 그것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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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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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라고 생각해요. 살아보니 그렇더군요. 다 때가 있는 법이지요. 굳이 서두르거나 욕심을 켤 필요는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그만한 나이에 군은 충분히 의젓하고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사려가 깊지요. 그것은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군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편견이나 거부감 없이 타인을 받아들이고 싶다 하셨죠?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다고 말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저는 군이 바라는 삶이 머지 않은 장래에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오늘은 군에게 줌파 라히리의 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을 들려주고 싶군요. 젊은 사람들에게는 조금 따분한 소설로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처럼 아주 작고 소소한 것들을 작가는 집요하리만치 세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만일 군이 이 책을 읽는다면 처음 몇 페이지를 겨우 넘기고는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문을 박차고 나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없다거나 형편없는 소설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언젠가 모슈미가 자는 쪽 침대에 놓여진 책 더미에서 발견한 소설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불어로 씌어진 것을 영어로 번역한 책이었는데 몇백 장이나 되는 긴 이야기 내내 주인공들은 그저 '그'와 '그녀'로 불려졌다. 그는 몇 시간 만에 책을 다 읽었고, 주인공들의 이름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 이상한 위안을 받았었다. 불행한 사랑 이야기였다. 그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p.317)

 

제목에서 혹 짐작했을지 모르지만 작가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거듭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것도 아닌데 이름이 한 인간을 규정짓고 그 사람을 대표한다는 사실에 저도 가끔은 아이러니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군도 혹시 자신의 이름에 대하여 한번쯤 의문을 품지는 않았는지요. 책에서는 인도계 미국 이민 2세대인 고골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외투>로 유명한 러시아 작가 니꼴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와 동명이인이죠. 인도 출신인 그의 부모가 주인공에게 '고골리'라는 이름을 부여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주인공의 아버지인 아쇼크는 기차여행 도중 큰 사고를 겪게 됩니다. 일찌기 고골리에 매료되었던 아쇼크는 사고가 있던 그날도 고골리의 작품을 읽고 있었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납니다. 그리고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합니다. 나이가 들어 맞선을 보고 결혼하게 된 여자가 고골리의 엄마인 아시마입니다. 두 사람은 이제 미국에 정착합니다. 그러나 인도의 문화 속에서 성장했던 두 사람은 미국에서도 그들의 문화를 고집합니다. 말하자면 몸만 미국에 있는, 이름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과 행동도 완벽하게 인도인이었던 셈이죠.

 

"그녀와 아쇼크는 결혼을 결정하기까지 오후 반나절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두 이름이 적혀 있었을 꼬리표를 떠올렸다. 그때는 보관해둘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 꼬리표를 생각하니 남편과 함께한 그들의 인생이 떠올랐다. 그가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그녀에게 준 예상치 못했던 이곳에서의 삶.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삶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 펨버튼 로드의 벽 안에서 완벽한 편안함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이곳이 그녀의 집이었다. 그녀가 꾸리고 떠맡아온 세상이었다. 이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짐을 챙겨 누군가에게 주거나 하나씩 버려져야 했다." (p.360)

 

그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고 인도 전통에 따라 인도에 있는 할머니로부터 아들의 이름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고, 고골리를 좋아했던 아쇼크는 아들에게 고골리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자신의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던 고골리는 결국 대학입학과 동시에 '니킬'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었다고 해서 '고골리'로 살았던 그의 어린 시절마저 그의 삶에서 잊혀지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8년 동안 고골리로 살아온 이후 두 달 동안의 니킬이란 뭔가 빈약하고 미약한 존재였다. 때로는 연극에서 배역을 맡데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눈으로 봐서는 구별이 안 되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쌍둥이 중 한 명이랄까. 불현듯 옛날 이름이 마치 아픈 이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 (p.140)

 

인도식 이름도, 미국식 이름도 아닌 제3의 이름으로 살았던 고골리. 그는 인도 전통을 고집하는 부모님의 삶으로부터 끝없이 달아나려 합니다. 미국 여자와 연애를 하고, 미국식 사고방식에 적응하려 합니다. 그러면서 부모님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하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고골리로 하여금 좋든 싫든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고골리는 홀로 남은 어머니를 돌보고 일정 부분 인도의 전통이나 문화에 기우는 듯 보입니다. 어린 시절에 알고 지내던 인도계 미국인 여성 모슈미와도 결혼을 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그마저도 이혼으로 끝납니다.

 

"여러 면으로 그의 가족의 삶은 에상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았던 하나의 사고가 다음 사고를 낳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시작은 아버지의 기차 사고였다. 이 사건은 처음엔 아버지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었지만, 나중에는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은 욕망을 낳게 하였고, 세상 저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했던 것이다. 다음은 고골리의 증조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 담긴 편지가 캘커타와 케임브리지 사이 어딘가에서 사라진 사고였다. 이로 인해 얼떨결에 고골리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고, 이 이름은 수년 동안 고골리라는 한 인간의 윤곽을 형성함과 동시에 괴롭혀왔었다. 그는 이런 임의성을, 이런 빗나감을 바로잡으려 해왔다. 그러나 자신을 완벽하게 새로 창조하는 것은, 그 엉뚱한 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결혼 또한 실수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가족의 곁을 떠나신 것은 사고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사고였다." (p.369)

 

제가 군에게 이 소설의 내용을 미주알고주알 늘어 놓은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군이 겪는 부모님과의 갈등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죠. 누군가의 몸에서 태어난 우리 모두는 비록 타인의 몸을 빌어 생명을 얻은 것은 분명하지만, 러시아 전통 인형 타트로시카처럼 새로 태어나는 새생명이 처음의 그것보다 반드시 작게 태어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부모님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부모님보다 더 큰 발전을 보이는 게 인간의 삶이고, 우리의 역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군! 부디 용기를 내세요. 군을 낳았을 때 부모님이 지어주신 군의 이름이 상품의 브랜드처럼 군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군이 '누구누구의 아들'로 불려지지 않고, '아무개의 부모님'으로 군의 부모님이 불려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신의 자식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인 즉슨 부모님과의 갈등은 지극히 보편적인 것일 뿐 군의 인성이 특별히 나쁘거나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부모님과 마찰을 빚는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이제 그들의 부모보다 더 큰 그릇이 되었음을 알리는 시발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줍잖은 충고로 군을 위로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나도 한 아이의 아비인지라 이런 말밖에는 달리 들려줄 게 없군요. 다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겠지요. 군의 앞날에 건투를 빌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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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작가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  적어도 책에서 작가에 대한 힌트를 조금이라도 얻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이라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고전이 아닌 이상 외국 작가의 작품은 일부러라도 작가 소개를 외면한다.  우연히 알게 된 작가라 할지라도 작가의 성별만큼은 철저히 가린 채 책을 읽어나간다.  십자말풀이를 하는 것처럼 작품 속에서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아 작가의 성별이나 성격을 짐작하는 일은 의외로 재미있다.  일인칭 소설은 책을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단박에 알아맞추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삼인칭 소설은 조금 더 어렵다.  처음 접하는 작가에 대한 정보를 단순히 작품 속에서 찾아 맞추어 보는 재미는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도 그랬다.  작가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책을 펼쳤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삼인칭 소설.  재미있겠는 걸.  몸속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웬걸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작가는 분명 여자라는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과감히 생략해도 될 듯한 장면에서의 지나치게 세밀한 묘사와 일상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주인공 주변의 다양한 인물들.  책을 펼쳤을 때의 긴장감은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다.

 

소설은 주인공 토비아스가 교도소를 출소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여자친구 둘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었던 토비아스는 새로 사귄 여자친구 스테파니(백설공주)와 예전 여자친구 로라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채 단순히 정황증거만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 모두는 그를 외면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대를 진학하겠다던 그의 꿈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어젯밤에는 토비아스 자토리우스와 살해된 여자애들에 대해 생각하는라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로라 바그너와 스테파니 슈네베르거는 살해될 당시 지금의 아멜리와 같은 열여덟 살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멜리가 살고 있는 집은 살해된 여학생 중 하나가 살던 집이다.  아멜리는 티스가 '백설공주'라고 부른 여학생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알텐하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p.40 ~ p.41) 

 

토비아스가 출소한 후 폐쇄된 군 비행장의 지하 기름탱크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로라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다 끝난 듯했던 사건은 또 다른 의문으로 재점화된다.  마을에서 농장과 식당을 운영하던 토비아스의 아버지는 그가 투옥된 후 어머니와 이혼하고 많은 빚을 진 채 절망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고교시절 토비아스를 짝사랑했던 나디야는 이제 유명 배우가 되어 있다.  고향 마을을 떠나 자신의 집에서 사는 게 어떠냐는 나디야의 제안을 뿌리치고 토비아스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황폐화된 농장을 정리하며 아버지를 돕는 토비아스.

 

마을 사람들은 토비아스의 귀향이 반갑지 않다.  마을 사람들의 협박과 린치에도 불구하고 토비아스는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마을에는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테를린덴 가문이 존재한다.  토비아스의 아버지도 그 집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독일의 작은 마을 알텐하인은 테를린덴의 왕국과 다름없었다.  토비아스에게 우호적인 사람은 오직 외지에서 새로 이사온 아멜리가 유일했다.  당차고 용감한 아멜리는 열여덟이라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모든 행동에 거침이 없다.  자폐 증세가 있는 테를린덴의 둘째 아들 티스와 어울리면서 토비아스가 진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토비아스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아멜리는 티스가 그린 그림을 손에 넣게 되자 토비아스가 진범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티스는 그 사건의 목격자였다.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티스는 그때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그려놓았던 것이다.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아멜리는 토비아스에게 알리려 했으나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다.  아멜리의 실종을 수사하던 경찰은 두 여학생을 살해한 진범이 따로 있음을 직감한다.  아멜리의 실종과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토비아스 어머니에 대한 살인 미수 사건은 소설을 또 다른 국면으로 몰고간다. 

 

이야기는 본론에서 번번이 벗어난다.  수사반장이었던 보덴슈타인의 가정사와 그와 콤비를 이루는 피아 형사의 이야기, 문화교육부 장관인 라우터바흐와 의사인 그의 부인, 그리고 테를린덴의 첫째 아들인 라르스의 이야기, 모든 것을 잃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토비아스와 토비아스를 소유하려는 나디야의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마치 우리네 일상이 늘 그런 것처럼.

 

오백 쪽이 넘는 책의 분량에 비해 사건의 결말은 너무도 쉽게 풀려버린다.  어쩌면 이것은 작가가 여자라는 데 원인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강한 집중력과 장시간의 인내를 요구하는 소설 집필은 체력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체력이 약한 작가는 소설이 끝을 향해 나아갈 때 급격히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성격이 급한 작가라면 어서 빨리 끝내고 싶은 욕심에 소설이 막바지를 향해 갈수록 조바심을 내게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결말 부분은 항상 허술하다.  이런 류의 소설을 읽을 때면 마치 다른 작가가 결말 부분만 대신 쓴 것처럼 여겨진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주인공인 토비아스와 아멜리도 여러 어려움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조된다.  사건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 구조는 평이했다.  다만 작가는 알텐하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욕심과 부와 권력에 눌린 소시민들의 비겁함, 짝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나디야의 집착을 여성 작가만의 섬세한 시선으로 잘 그리고 있다.

 

소설 전반에 등장하는 나디야라는 캐릭터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토비아스를 사랑했지만 언제나 그의 관심 밖에 있었던 까닭에 소유와 집착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성공한 여배우가 10년 형을 받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한 과거의 연인에게도 과거와 같은 강한 열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열여덟 살의 아멜리가 10년 연상의 살인 전과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도 여러 번 만난 사이도 아닌데...  아주 쉽게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과 소설 전반에 여성 작가 특유의 디테일이 살아 있었던 점에 만족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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