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억울함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일에 대하여 그 줄기를 따라 경과를 되짚어 가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예컨대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처럼 근원을 말하기 어려운 것에서부터 "설사 내가 그렇게 했기로서니 네가 나한테 그렇게까지 한 건 너무한 거 아냐?"라는 가벼운 질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약간의 억울함만 느껴져도 그 일을 반드시 되짚어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제 머릿속에서 끝없이 되새김질 하는 바람에 한 번 느껴으면 족할 억울함을 영원회귀의 억울함 속에 가두어 놓곤 한다. 때로는 전적으로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열 중 한둘은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라고 그렇게 안 해본 건 아니다. 하소연도 통하지 않던 억울한 일을 나라고 왜 겪어보지 않았겠는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또는 형이나 누나들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숱하게 당해보았다. 어찌나 억울한지 밤을 하얗게 지새운 적도 있었다. 가만가만 되짚어 생각해도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나만 억울하게 당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그럴라치면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더 화가 나곤 했다. 그야말로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곁에 당사자가 있다면 뭔 일이라도 곧 벌어질 것만 같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내 머릿속에서 실제로 일이 벌어졌을 당시의 사람들이 다 참가하여 그때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도 아니요, 순전히 나의 의도대로 편집되고 왜곡된 사건을 약간의 동정심을 등에 업은 내가 혼자서 연기를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시간과 배경도 달라진 채 말이다. 그 가상의 공간에서 제 아무리 억울하다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차라리 '운명이려니...'하고 잊는 게 백 번 낫다. 그러면 단 한 번의 억울함으로 끝나지 않겠나.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의 시각에서는 충분히 억울할 수 있는 일들을 수없이 겪게 된다. 그 하나하나의 사건을 잊어버리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곱씹어 생각한다면 결국에는 자신만 손해를 본다. 나는 '인생이란 좋았던 일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나빴던 일을 망각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말이다. 그게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잊으려 노력하는 자세는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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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수학을 좋아한다는 말을 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을 때 받게 되는 불필요한 오해나 왜곡된 시선 때문이지요. 예컨대 우리는 수학을 싫어하는 다수의 사람들 속에서 사는 까닭에 여타의 다른 어떤 과목보다 수학을 좋아한다는 한 사람의 솔직한 속내에 대해 '그래. 너 잘났다.', '잘난 체 하기는...', '말도 안 돼!' 하는 투의 눈빛을 보내기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특별히 싫어한다거나 어떤 원한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일종의 시샘이나 부러움일 수도 있고, '다름'에 대한 이해부족 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부러 잘난 체 하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수학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따금 이유도 없이 심란하거나 집중이 되지 않을라치면 수학이나 물리 문제를 놓고 한동안 고민하기도 합니다. 끙끙대며 그 문제에 매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해답을 구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결과가 좋았다고 하여 누가 알아주거나 내가 하는 일에 딱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만족이고 일종의 정신적 유희에 그칠 뿐이지요. 나의 이런 성향이 소설을 고르는 데에도 영향을 미칠 때가 있습니다. 내용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오직 제목만 보고 '재미있을 것이다, 아니다' 섣불리 판단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책의 제목이 수학과 연관된 경우입니다.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골라 읽었을 때처럼 생각지도 못한 진한 감동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하도 따분하여 결국에는 다 읽지도 못하고 내팽개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 책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쓴 <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도 읽을까 말까 고민이 많았던 작품입니다. 작가의 이름도 생소하였고, 앨런 튜링이라는 수학자는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수학자였기 때문입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은 앨런 튜링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수학적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테지만 말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읽게 된 이 책은 나의 일천한 수학 지식때문에 독서에 방해가 될 정도로 고차원의 수학 이론이 등장하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오히려 천재 수학자였던 앨런 튜링의 수학적 성과를 본문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품은 채 책을 읽어야만 했습니다.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탓인지 책은 그만큼 수학과 관련된 내용은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지엽적인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했습니다.

 

"과학지 <마인드>의 논문에서 튜링 박사는 디지털데이터 기계가 향후 '사고'와 비슷한 과정을 수행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으며, 또한 기계를 아이들처럼 교육할 가능성을 논하기도 했다." (p.172)

 

소설은 앨런 튜링이 자신의 숙소에서 자살을 실행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사과에 독극물을 주입한 후 그것을 베어먹고 침대에 누운 것이지요. 2차대전 당시의 업적으로 영국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던 인물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쓸쓸하고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1954년 영국 윔슬로우 애들링턴로드의 한 자택에서 그렇게 발견된 한 남자의 죽음을 수사하기 위해 젊은 경관 레오나드 코렐이 배정됩니다.

 

코렐이 앨런 튜링의 시신 옆에서 찾아낸 것이라고는 수학 방정식으로 가득한 수첩 한 권, 그리고 베어 문 사과 반쪽과 친필 편지 한 통이 전부였습니다. 특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다른 추정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없는 명확한 사건을 수사하면서 코렐은 오히려 의문을 품게 됩니다. 서랍에서 우연히 보았던 훈장이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앨런 튜링의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코렐은 많은 커다란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력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코렐은 앨런 튜링의 가족과 연구 동료, 블레츨리파크의 전우들을 만나, 그의 일생을 역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그가 동성애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당시에는 범죄자로 취급되었던 동성애자를 코렐이라고 좋게 볼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대학 등록금을 대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엄마처럼 돌보아주었던 비키 이모도 동성애자였음을 어렴풋이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앨런 튜링에 대한 코렐의 인식은 바뀌게 됩니다.

 

독일군의 암호 체계인 에니그마를 해독하여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위대한 수학자는 한낱 혐오스러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화학적 거세를 받아야 했고, 1954년에 그는 끝내 청산가리가 묻은 독사과를 먹음으로써 자살에 이르게 됩니다. 수학에 대한 열정과 노력만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던 천재적인 수학자는 그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로 인해 희생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과학자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의욕적인 한 젊은 경관에 의해 파헤쳐진다는 식의 추리소설 형식을 택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삶과 업적, 평범하지 않았던 그의 사랑과 비극적 결말에 대하여 곰곰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앨런 튜링을 미리 알았던 계기는 리만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그의 연구 때문이었습니다. 소수의 분포와 암호 문제는 필연적으로 리만 가설과 이어집니다. 나는 그것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는 리만 가설은 튜링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컴퓨터 개발에 기여했고, 에니그마를 해독함으로써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었던 그의 업적보다 더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540쪽이 넘는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리만 가설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앨런 튜링만이 역설과 모순이 삶과 죽음의 차이를 뜻할 수도 있음을 이해했다'는 이 책에 나오는 한 문장이 지금도 여전히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비탈'을 노래했던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걷는 게 고역일 때/ 길이란/ 해치워야 할/ '거리'일 뿐이다// 사는 게 노역일 때 삶이/ 해치워야 할/ '시간'일 뿐이듯) 사는 게 노역일 때 우리의 삶이 해치워야 할 것은 다만 '시간'뿐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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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한다면 어느 누구의 공감도 받아내지 못할 일방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적인 얘기에 누군가의 공감을 바라는 일, 그것은 마치 말도 못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 날 작열하는 태양과 그에 어울리는 풍경을 머릿속에서나마 희미하게 떠올려 봄으로써 잠시나마 추위를 잊어보려는 얄팍한 시도와 같다. 사실 오늘처럼 더운 날 겨울의 어느 모퉁이를 떠올려 본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 부질없는 짓이다. 어차피 더운 건 더운 것일 뿐 사라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짧은 연휴의 감질나는 열기가 하룻밤 새에 푸스스 꺼져버렸는지 막상 연휴의 시작인 오늘은 초여름처럼 더운 한낮의 열기에 나른한 졸음만 몰려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6주기이기도 한 오늘. 벌써 6년? 놀라게 된다. 서거 당시에는 그저 놀랍고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몸서리가 쳐졌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과연 노 전 대통령의 운명이었을까? 곰곰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시들한 죽음에 이르고야 말겠지만 그때까지 그들의 작태를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마음이란...

 

민주주의의 퇴행은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경제력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 또한 최정점에 있는 몇몇의 사람들에게 점차 집중되어 가는 현상을 두고 대한민국에서는 '발전'이라고 칭한다. 노인 두 명 중 한명은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이 나라의 현실은, 취업절벽과도 같은 청년실업의 문제는 권력자의 욕심에 묻혀 화석처럼 굳어지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을 바랐던 노 전 대통령의 꿈은 노란 풍선에 실려 날아갔을 뿐이다. 연휴의 첫째날이 힘없이 사그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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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하여 -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가치들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은 어떠어떠하다." 또는 "당신은 어떠어떠한 사람이다." 나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예전부터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인 것 같아."도 아니고 그렇게 규정하듯 말해버리면 그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층이 갑자기 생겨나 나는 저 밑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공손히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만 같고, 뭔가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들면서도 잔뜩 주눅이 들어 뭐라 항변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외치고 싶어도 그러면 꼭 안 될 것만 같다. 그리고 비록 내가 지금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언젠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마저 들기도 한다. 웃기는 일이지만 정말 그렇다.

 

어느 책에선가 김형경 작가는 20대에는 자살을 주머니 속 동전처럼 만지작 거리며 살다가 결국 자살은 하지 못하고 자원해서 정신분석을 받아 보았다는 내용의 글을 읽고 놀랐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을 받아볼 필요가 있긴 있나보다.' 생각했었다. 작가도 물론 베스트셀러가 된 심리 에세이를 몇 권 쓸 수 있었으니 시쳇말로 '뻘짓'을 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오히려 많이 남는 장사를 한 셈이지 않은가. 아무튼 임경선의 <태도에 관하여>를 읽으며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던 게 사실이다.

 

"'태도attitude'란 '어떻게how'라는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의 문제로, 그 사람을 가장 그 사람답게 만드는 고유자산이다. 나는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의 태도들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 태도들의 틀 안에서 개별적인 문제들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p.7)

 

12년간의 직장 생활을 거쳐 11년째 전업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임경선 작가. 그녀를 알게 된 건 꽤 오래 전의 일인 듯하다.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더 가깝게 느꼈을 수도 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듯한 글쓰기 방식이 맘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이 책 <태도에 관하여>에서 작가가 가장 신뢰하는 5개의 핵심적인 태도, 예컨대 자발성, 관대함, 정직함, 성실함, 공정함에 대하여 쓰고 있다. 작가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살아라.' 강요하지 않았다. 작가 본인의 이야기이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한 것이든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멈춰지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 속으로 한동안 빠져들게 된다.

 

"'누가 뭐라든 난 이걸로 됐어'라며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돌이켜보면 왜 과거의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을까 안타깝다. '만일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어땠을까'라며 또 하나의 인생을 자신에게 주어진 옵션이라고 착각하고 제멋대로 상상하던 나는 뭐랄까, 내가 현재 살고 있지 않은 대안의 삶에 멋대로 싸움을 붙인 후 알아서 지고 있었다. 대안의 인생, 그런 건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행여 있더라도 분명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저쪽 인생의 나'도 똑같이 '이쪽 인생의 나'를 시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p.24~p.25)

 

사실 나는 웃을 일 하나 없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거나, 최선을 다하라거나, 지금 이대로의 나를 사랑하라거나, 도전하는 삶을 살라거나 하는 식의 얼빠지고 정신 나간 사람들이 쓴 책은 딱 질색이다. 자신은 이만큼 살고 있으니 너희들도 잘만 하면 나 정도로 살 수 있을 거다 뻐기는 것도 아니고, 너희같은 찌질이들은 절대로 나처럼 될 수 없으니 애당초 포기해라 저주하는 것도 아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 말이다. 그러나 임선경 작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꿈에 대한 이야기, 사랑과 성에 대한 이야기, 연애에 대한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삶의 태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종일관 미안한 듯한 태도로 말했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을 읽는다고 하여 잘못될 인생이 크게 달라지라는 법은 없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자살하는 '자살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고, 내 아이만큼은 남보다 뒤쳐지지 않고 공부 잘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 아닌 위안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동안에 내 주변의 사람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고 더불어 행복했는가? 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인 것이다.

 

"이젠 꿈이라는 단어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 내가 하면서 불행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거, 가끔 충만함이나 순간의 행복을 느끼는 거, 저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여하튼 내 꿈이 뭘까? 나는 꿈을 이루어야 하는데, 라며 꿈이라는 명제에 사로잡히다 보면 오히려 지금 내 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이 시간들, 즉 현실을 제대로 살지 못하거나 현실을 부정하게 되죠. 미래라는 것은 끊임없는 '오늘'의 반복일 뿐이잖아요." (p.277~p.278)

 

오늘, 5월 21일은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에서 법정 기념일로 지정된 '부부의 날'이란다. 제정 목적은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일구는 데 의의를 두었다는데 나는 기억하고 기념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 아무튼 이것 저것 신경쓰며 살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세상이 되었다.  그럴수록 스스로 만족하고 지켜나갈 수 있는 원칙을 세울 필요성이 있다. 세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의지할 만한 원칙은 살아가는 데 종종 도움이 된다. 임경선 작가의 생각들처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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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권의 자원외교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모 기업의 회장이 검찰의 조사를 받은 후 목을 매 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었지요? 사실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목표로 현 정권이 야심차게 준비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현 정권의 부도덕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고인이 된 기업의 회장은 죽기 직전 모 신문사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돈을 건넸던 정치인들의 이름을 쪽지에 줄줄이 남김으로써 검찰의 조사를 받게 만들기도 했구요. 그 소식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더니 요즘은 조금 잠잠해진 듯합니다. 물론 그 쪽지에 적힌 인사들은 하나같이 펄쩍 뛰더군요. 자신만큼은 누구보다 결백하다고 말이지요. 심지어 어느 정치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1원이라도 받았다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구요. 예전부터 써먹던 상투적인 수법이지요. 저는 지금껏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정계를 떠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늘 누명만 쓰며 살았던 걸까요?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언제가 되면, 도대체 언제 국가는 그 최고의 임무가 그저 몇백만의 이름없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행복을 안겨 주는 것이라는 걸 인정할까? 그리고 언제, 국가는 평화를 향해 전혀 눈에 띄진 않지만 애쓰는 많은 발걸음들이야말로 개인에게도 여러 민족들에게도 전장에서의 대승리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뮌헨 대학교 의대생인 한스 숄과 뜻을 함께 한 3명의 친구, 조직을 이끌었던 쿠르트 후버 철학 교수님, 뒤늦게 합류한 한스 숄의 여동생 조피 숄이 모여 만든 '백장미'단은 나치에 반대하고 히틀러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배포합니다. 그러다 1943년 2월, 대학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유인물을 살포하던 중 게슈타포에게 체포돼 '조국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됩니다.

 

어찌 보면 조피와 그의 동료들이 한 일은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히틀러 체제에 반대해야 한다는 취지의 '삐라'를 뿌린 것뿐이었고, 조피는 이것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들의 저항은 철저히 비폭력적이었으나 나치 시절엔 그 '소극적 저항'마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뮌헨의 '백장미단'은 여섯 번째 '삐라'를 뿌린 뒤 모두 체포되었지만, 그 삐라들은 침묵하며 나찌에 동조하던 독일인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고, 나라 바깥까지 퍼져 나갔던 것이지요.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조국의 패전을 바라는 젊은이들의 고뇌는 조피의 일기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시대를 종말의 시대로 믿고 있다. 이 모든 끔찍한 징조들이 그렇게 믿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그리 중요한 의미가 없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한 번이라도 이 시대에 살았다면, 영원히 이 시대와 함께 묶여 생각될 사람으로서, 다음에는 어떤 시대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신에게 해명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내일도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폭탄 한 개가 우리 모두를 전멸시킬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죽는다면 내 죄는 적잖이 클 것이다. 마치 죽으면서 이 땅덩어리도 함께 파괴한 것만큼이나 말이다. 나는 오늘날 경건한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자취를 좇아가는 인간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 고작 칼부림과 같은 수치스런 행동이기 때문이다. 마치 신은 힘을 갖고 있지 못한 듯이… 나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신의 손에 달려 있는지 알고 있다. 사람들은 단지 존재만을 위한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삶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판 중에 조피는 이런 말도 남깁니다.

 

"올바른 대의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 올바름 넘치는 세상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날씨는 화창한데 나는 간다. 그러나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가. 얼마나 젊고 희망에 찬 생명이… 만약 우리가 한 행동이 많은 사람을 깨우쳤다면, 지금 죽는다고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제가 이 책을 인용한 이유는 고인이 된 기업 회장을 미화하거나 그의 행동이 정당했다 변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는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는 마당에 자신을 괴롭혔던 누군가에게 복수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그 한을 품고 죽는다 한들 남아 있는 사람에 의해 불쌍하다 동정을 받을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적어도 정의나 평화 등 우리가 '대의'라고 믿게 되는 넓은 목표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 1주기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한 사람의 죽음이 온 나라를 들끓게 만들었던 이유는 이 정부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목숨 앞에 정의롭지 못하였기 때문은 아닐런지요.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이어지는 한 이 정부는 다른 어떤 변명으로도 정의를 내세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죽음을 결심하는 순간에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저는 아직도 믿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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