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알아요, 당신?

아무도 없는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을 때 TV를 켜는 것보다 라디오를 트는 게 아무래도 기분 전환이 된다는 것 말이에요. 낮게 깔리는 DJ의 목소리가 마냥 넓어만 보인던 빈 공간에 울타리를 치고 나와 침묵 사이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헤집고 들어와 별 의미도 없는 싱거운 얘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가 하면 대중가요의 경쾌한 곡조가 주변의 우울을 띵가띵가 날려보내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어깨를 짓눌러 도통 소파에서 일어날 기운조차 없게 만드는 TV와는 사뭇 다르지 않나요? 요즘과 같은 스마트한 시대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들으면 될 것을 굳이 라디오를 트는 이유가 뭐냐고 당신은 묻는군요. 이따금 그런 날이 있지요. 온종일 같은 노래만 반복해서 듣고 싶은 그런 날 말이에요. 괜히 쓸쓸해지거나 창밖의 빗소리가 조금 전까지도 없던 우울을 좁은 틈새로 쫄쫄 흐르게 하는 날, 김광석의 노래를 '무한반복'으로 들었던 적이 저도 있답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목까지 차오른 우울이 나를 질식시킬 듯한 오후, 침묵 속으로 속속들이 배어든 우울을 정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팔랑팔랑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라디오만 한 게 없습니다.

 

당신 , 그거 알아요?

산길을 오래 걷다 보면 인간의 아주 작은 흔적조차 눈에 걸린다는 것을요. 오늘 아침의 일이었답니다. 날씨가 풀리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탓인지 등산로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가 종종 눈에 띄더군요. 오가는 길에 눈여겨 보면서도 주을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그저 고민만 하면서 며칠을 보낸 셈이지요. 그러나 오늘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겠더군요. 양파즙 파우치며, 홍삼 캔디 포장지며, 플라스틱 커피 용기며, 500ml 생수병이며, 먹고 버린 소주병이며, 검은 비닐 봉지며, 심지어 강아지 용변 처리를 하고 버린 화장지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쓰레기만 한아름 주워 들고 내려온 오늘, 다른 어느 날보다 개운했던 아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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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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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변화의 모습을 말할 때면 나는 항상 허둥대게 된다. 이를테면 그것은 정지된 스틸사진처럼 누군가에게 딱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선악이나 호불호의 문제로 간주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시간의 이쪽 편에 서서 저쪽 과거를 바라보는 관계로, 또는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저들이 사는 그곳을 바라보는 관계로 객관성이라는 건 언제나 담보될 수 없는 어떤 하위 개념에 놓이게 된다.

 

가령 왕정 체제였던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민주주의 체제인 대한민국의 사람들과 비교될 때 승자는 항상 대한민국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근시안적인 사고는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과거의 사람들에 대한 변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사고는 언제나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격일 뿐 우물 밖의 세상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세컨드 핸드 타임>을 읽으면서 위에서 내가 언급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작가는 1991년부터 2012년까지 무수히 많은 러시아인들을 만났고, 그들이 작가에게 들려주었던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증언을 이 책에 실었다.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인간', 이를테면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짜르시대부터 갖고 있던 그들의 경제적 토대나 정치체제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마저 달라진 '새로운 인간', 소비에트 문명에 적합화 된 '소비에트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1991년 자본주의 러시아의 탄생과 함께 70여년 동안 지속되던 사회주의 실험은 급하게 막을 내렸다. 사회주의 소비에트 이후의 시대를 흔히 포스트 소비에트라고 부른다. 그러나 작가는 이 시대를 세컨드 핸드, 곧 중고품 시대라고 부른다. 스탈린 시대부터 푸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난 처음에는 미처 녹음기를 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삶이, 그냥 삶이었던 것이 문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녹음기를 켰어야 했는데 말이다. 난 사적인 대화든 여러 명이 함께 하는 대화든 항상 그 순간을 놓칠세라 촉각을 곤두세우곤 한다. 하지만 가끔은 이처럼 경각심을 잃을 때가 있다. '문학의 작은 조각'은 어디에서나, 때때로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다." (p.526)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그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편집하고, 기록하는 그 모든 것을 과연 문학이라 말할 수 있을까. 2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작가가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의 삶을 작가는 무슨 수로 되짚으려 했던 것일까. 공산주의 속에 살던 인간, 민주주의 속에 사는 인간, 전쟁터에서의 인간, 평화로운 삶 속에서의 인간 등 작가가 전하는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유형은 다양하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인간 개개인의 적나라한 모습에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어떤 체제나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참인간의 모습을 만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 혼란은 내 의식의 한 쪽 끝을 길게 잡아당기는 것처럼 중심을 잃고 흔들리게 했다.

 

"인생은 개 같아요! 내가 얘기를 해주죠. 인생은 선물을 선사하지 않아요. 난 내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기억에도 없어요. 아무리 떠올리게 해도 생각이 나질 않아요! 난 독도 마셔보고 목도 매달아봤어요. 한 세 번 정도 자살을 시도했었어요. 지금은 손목을 그은 상태고요." (p.561)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을 차마 옮기지 못하겠다. 권력을 인민에게 돌려주고 새로운 문명을 구축하려고 했던 사회주의 혁명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자본주의 체제도 결국 러시아인의 삶을 조금도 나아지게 하지 못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러시아의 대중 사이에서 소련에 대한 동경이 나타나는가 하면 강제수용소 체험이 관광상품으로 등장하기까지 했단다.

 

시간의 흐름을 진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현재는 언제나 좋은 것, 선하고 아름다운 것일 테고 그에 비해 과거는 언제나 나쁜 것, 미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일 테지만 그것이 꼭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만은 아닐 터였다. 구소련을 동경하는 많은 사람들과 박정희 시대를 동경하는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자신의 삶에 대한 인간의 가치 판단은 외부환경의 객관적 기준에 기인한다기보다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 환경에 익숙했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예컨대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1980년의 어느 날 그 소식을 알지 못했던 대다수의 국민들은 전보다 나아진 환경에 만족해 하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었구나'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2016년의 지금 시점에도 '그때가 좋았지' 회상하는 인간들이 더러 있다.

 

이 책은 한 편의 잘 짜여진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작가가 추구하거나 지향하는 바는 명확해 보인다. 어떤 체제나 환경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 군상의 적나라한 모습을 조명함으로써 사라져가는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데 있는 듯하다. 어쩌면 이십일 세기 인류가 직면한 공통의 문제는 지구 온난화나, 테러나, 종교 문제처럼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문제가 더 시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한 번쯤 되물을 것이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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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운동을 나서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없이 내리는 순한 비였다. 집에 다시 들러 우산을 들고 나오는데 이유도 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흘렀다. 아파트 화단의 산수유나무에 꽃이 피었다. 올해 들어 산수유꽃은 처음 본다. 아침이 채 밝기도 전의 옅은 보랏빛 어둠을 배경으로 산수유꽃은 그야말로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깡똥하게 자른 조팝나무 울타리에도 새순이 돋고 있다.

 

먼짓내에 섞여 비 비린내가 훅하고 끼쳐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편도 일차로의 좁은 도로가 나온다. 그 도로를 따라 산자락에 이르는 지점까지의 공터에는 요즘 아파트를 짓기 위한 터닦기 공사가 한창이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그 어수선한 공사 현장을 어슬렁거린다. 조립식 건물을 부순 건축 폐자재와 사람이 떠난 자리의 각종 쓰레기가 어수선하게 뒤섞여 있다. 흉물스러운 풍경이었다.

 

우산에 듣는 빗소리가 싫지 않았다. 나무가 많은 등산로에서는 빗소리마저 엇박자로 들린다. 조용한 숲에 먹이를 찾는 까투리 소리만 요란하다. 일정한 크기로 늘어선 소나무들 사이로 길은 이어진다. 이따금 보이는 상수리 나무 위로 부지런한 청설모들이 무리를 지어 내달린다. 높이 매달린 까치둥지도 보인다. 비 오는 날에는 사람의 흔적마저 끊긴다.

 

산을 다 내려왔을 때에도 올라갈 때 보았던 길고양이가 공사 현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도 한두 사람 보이고 아파트 화단에는 산수유꽃이 여전히 비에 젖고 있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한 대목이 생각났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의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꽃을 처음 보아서인지 나도 한바탕 꿈을 꾼 듯하였다. 비는 여전히 찔끔찔끔 내리고 있다. 높은 건물 위에서 비 내리는 오후를 내려다 보면 건물 저편에서 마치 한낮의 졸음이 건듯 불어올 것만 같다. 그러지 말고 꿈을 꾸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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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
차현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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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특색 없고 밋밋한 시간들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성긴 시간들 속으로 흐릿한 추억들이 언뜻언뜻 끼어들고, 지친 기색의 사람들이 무채색의 오후 일과를 습관처럼 펼쳐듭니다. 아침나절 맑았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우중충한 얼굴을 드러냈건만 사람들은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관.심.없.음' 팻말을 공공연히 드러낸 채 그저 제 할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기다림은 일상인 양 또 익숙합니다. 왠지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 목요일 오후. 차현진의 <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를 읽으며 '아, 진작 연애나 할걸'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지금 내게 연애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아주 오래전에 외웠던 수학 공식처럼 시시한 느낌인 것도 같고, 지난 봄에 피었던 산수유꽃처럼 흐릿한 색깔인 듯도 하고, 마치 오늘의 풍경처럼 시큰둥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목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극복하기 위해 집어든 책이건만 과거를 향해 내달리는 생각을 어찌하지 못한 채 그저 하염없었습니다.

 

"우리가 그 시간 속,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난 우리가 만만해졌으면 좋겠어." 아, 담백해. 사귀자는 말을 이렇게 사소하게 건네던 그였다. 그 말 한마디가 내 평범한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p.21)

 

그녀는 자신이 만났던 8명의 남자에 대한 추억과 느낌을 책에 적었습니다. 그녀가 겪은 일종의 사랑 회고록이라고나 할까요.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녀에겐 아직 남겨진 사랑이 있을 테니까요. 이 책에서 그녀는 자신이 만나 한때 사랑했던 남자들의 각기 다른 느낌과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변화를 감각적인 문체로 쓰고 있습니다. 모두 이별한 사람들이고 그 이별의 기억들 하나하나가 버거울 텐데 그녀는 마치 자신이 들었던 다른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인 양 그저 담담할 뿐입니다.

 

"이게 마지막이어도 좋다. 어쩌면 나는 이 3초의 포옹을 평생 가슴에 넣어두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가 내 영혼을 가만히 어루만져주는 이 느낌을 끝까지 간직하고 살아가면 되니까. 그건 아무도 못 뺏어가는 거니까. 한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p.177)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아니 이별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어쩜 그렇게 제각각 다를 수가 있을까요. 무명의 개그맨에서부터 식품회사의 젊은 CEO, 일본에서 활동하는 디젤 모델, 항공사의 부기장 등 직업도 다양하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사랑의 색조는 무지개처럼 다채로웠습니다. 그녀의 연애 경험은 젊었던 시절의 나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나는 비슷비슷한 성격의 비슷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주로 만났던 듯합니다. 그런 까닭인지 나는 지금도 여자에 대해서는 별반 아는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혹은 여자라면 다 이런 것을 좋아한다거나 저런 것은 싫어할 것이라고 뭉뚱그려 추측하기도 하지요. 말하자면 나는 오늘의 풍경처럼 밋밋하고 단조로운 사랑만 했었나 봅니다.

 

이따금 후회의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때 나는 왜 조금 더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연애의 시기는 인생에서 찰나의 시간처럼 짧다는 걸 왜 진작에 알지 못했을까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도 연애도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경험했던 이별의 모습은 사랑만큼이나 다양했습니다. 어쩌면 사랑의 순간은 세월에 따라 빛이 바래고 기억마저 희미해지는 것이지만 이별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가슴 깊이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자신의 마음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편할까? "나도 방금 니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그대로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난 그게 안 되는 사람이야.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가 말로 나오지 않아."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수많은 계절, 그 쪼개진 틈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단어를 가지고 있어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였다." (p.248)

 

인생이 의도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지는 것처럼 사랑 또한 의도하지 않았던 시간에, 기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낯설게 다가오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생경한 느낌에 가슴 설레고 마치 지구 밖의 지구 위에서 단 두 사람만 존재하는 듯 잠깐 넋이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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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지음 / 문이당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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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낯선 감정의 알갱이들이 몇 톨 서걱거렸다. 하루하루 기복없이 반복되는 순한 감정들을 제외하면 하루에 생겨나는 새로운 감정이란 게 사실 별것도 없지만 이따금 소금 알갱이처럼 서걱거리는 감정이 밀물처럼 출렁일 때가 있다. 때론 깊어졌다가 때론 아무일 아니라는 듯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변화들이 봄날씨처럼 변덕스럽기만 하다. 그런 날이면 나는 시를 읽는다. 손사래를 칠 만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 한 편을 두고 한나절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로 간다. 빨리도 느리지도 않게 천천히.

 

색깔도 없이 다만 형태로만 존재하는 물동그라미의 파문처럼 내 마음의 호수 위를 일렁이며 떠다녔을 숱한 감정의 흔적들을 찾아 나는 오늘 시 한 편을 화두 삼아 기신기신 헤매었다. 이정하 시인이 쓴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를 읽는 내내 약간의 두통이 있었고, 열병을 앓던 첫사랑의 순간에 닿아 있었고, 아련한 그림움의 옛기억들을 사랑인 양 반겼었다. 사랑은, 그대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대에게 꼭맞는 언어로 그리움이 놀다 갔을 당신과 나 사이의 틈새를 메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책에는, 그동안 독자들이 사랑해왔던 시들과 새로 쓴 시 여러 편, 그리고 왜 이 시를 썼는지에 대한 나의 변辯을 묶어 함께 엮었다. 시로 다할 수 없는 이야기. 시 속에 감춰진 나의 고백 같은 것을 덧붙였는데,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내내 자책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혀야 했다. 그때는 왜 그리 바보스러웠는지, 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 새로 시작하고 싶다." ('작가의 말' 중에서)

 

시인이 쓴 시어에는 사랑, 이별, 슬픔, 그리움, 삶, 추억 등 어느 한 시절 마음에 담은 누군가로 인해 자신이 알던 언어를 모두 버린 채 그대와 나 사이의 언어를, 둘만의 맞춤법을 새로 배우고, 어쩌면 세상과, 세상에 통용되는 질서마저 새로 배웠을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1장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2장 '그대라는 이정표', 3장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각 장마다 사랑과 이별, 혹은 삶에 대한 시와 그에 대한 시인의 설명이 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여 이채롭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봄햇살이 유난히 싱그러운 오늘, 먼 곳에 있던 추억이 '물처럼 내게 밀려오'고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시절의 언어가 마치 호수면을 스치는 봄바람처럼 옅은 파문을 일으켰다. 반짝이는 추억의 물비늘에 가슴까지 촉촉히 젖어들었다.

 

"그래, 사랑은 그런 우직한 사람만 하는 거다. 모든 걸 다 잃는다 해도 스스로 작정한 일, 소멸할 줄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제 몸을 불태워 그대에게 건너가는 저 유성처럼." (p.267)

 

나는 왜 반짝이던 그 시절에 긍정의 후회 한 줄 남기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왜 이별을 위한 사랑 한 소절 남기지 않았을까. 이성을 닮은 무분별한 열정 하나로 완벽해지지 못했을까. 시인으로 인해 하나의 후회가 또 다른 후회로 이어지는 오늘, 봄바람이 철없이 불고 시어처럼 물비늘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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