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소중했던 것들 (볕뉘 에디션)
이기주 지음 / 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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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래저래 되는 게 없는 하루였다. 이런 날이면 생각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계절을 오가고 건기와 우기를 반복한다. 그뿐이랴. 금세 먹구름이 몰려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금세 쨍하고 볕이 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어서 생각에 밴 습기가 사라져 서걱거리지만 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에 언제든 동조할 준비만 갖추어져 있다면 하루에 열두 번이 아니라 백이십 번 바뀐다 하더라도 문제 될 게 없는 것이다. 오늘은 비록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날이었지만 내일은 또 다를 테니까.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가슴에 쌓인 위로를 바닥까지 박박 긁어 쓴 날이면 나는 이따금 오래된 편지를 뒤적이기도 하고, 늘어진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보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보내고 나면 물이 고이듯 가슴에는 그리움이 몰려든다. 결국 위로가 되는 건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단절이나 결핍을 경험한 후에나 생겨나는 감정, 그리움. 과거와의 단절일 수도 있고,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의 단절일 수도 있는 그 경험은 당시에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닐지라도 시간을 통해 숙성된 감정은 농익은 과일처럼 달콤하다.

 

"가을이 짙어질수록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과 일상이 건네주는 하찮은 것들의 소중함을 감사히 여기게 된다. 선선한 바람에 마음 한편이 허물어질수록 곁에 있는 대상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우리 안의 허전함을 채우는 방법일 거란 믿음이, 몸과 마음에 빈틈없이 들어찬다." (p.115)

 

이기주의 산문집 <한때 소중했던 것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소녀적 감성에 사로잡히도록 한다. 평범한 일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애잔하거나 쓸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때 소중하게 생각했던 어떤 것들을 매일 조금씩 흘려보내는 게 우리네 인생이지만 그 느낌은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감을 두드리는 그런 경험들을 하나둘 겪어낼 때마다 머릿속에 작은 깨달음 하나쯤 얻게 되는 게 아닐까.

 

"한때는 나도 세월의 강물에 보폭을 맞춰 비슷한 속도로 달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다 언젠가는 강물을 추월해, 물 위에서 부유하며 반짝이는 것들을 붙잡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오산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절감하게 된다. 시간은 늘 새로운 물결을 몰고 온다는 것을, 인생의 하류로 쓸려 내려가는 것들은 갈수록 늘어가지만 내 뜀박질은 점점 느려지고 있음을, 그리고 무언가를 마음에 담아 온전히 간직하려면 온전히 떠나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p.232)

 

1부 '추스르다'는 투병생활을 하던 작가의 아버지를 떠나보내던 날 했던 어머니의 당부 말씀 '크게 그리고 천천히 자라다오'처럼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지만 세월과 함께 무겁게 다가오는 말의 의미와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작은 깨달음들을 담고 있다. 2부 '건네주다'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함게 삶의 단상을 담고 있다.

 

"우린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기쁨의 앙금을 틈틈이 휘저어서 붕 떠오르게 하거나,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기쁨을 끌어다 설움과 애통함의 농도를 묽게 희석하며 사는 게 아닐까. 슬픔을 적당히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내면서, 슬픔의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말이다." (p.154)

 

3부 '떠나보내다'는 작가가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와 책 등을 통하여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전하고 있다.

 

"상처와 관련해 인간은 이중적인 심리가 있다. 우린 마음의 흠집과 상처를 꼭꼭 감추려 하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 그것들을 알아채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종종 믿을 만한 사람 앞에서 은연중에 삶의 비애, 허무, 고충 따위를 넌지시 밖으로 흘리는 것이다. 꼭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내 사정을 알아주었으면, 누군가 내 상처를 인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p.63)

 

감정 소모가 많은 책일수록 다시 읽게 될 가능성은 적어진다. 힘이 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진다. 그러므로 다분히 감상적이거나 슬픔을 과장하는 글은 피하게 된다. 그렇다고 에세이가 철학처럼 딱딱하고 무미건조해질 필요야 없겠지만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토로하는 그런 글들이 더 가슴에 남는다. 예컨대 지금은 고인이 된 위지안 작가의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와 같은 책은 다 읽은 후에도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곤 한다. 태풍 솔릭이 북상하고 있다는데 사람들은 그저 무심하다. 제발 큰 피해가 없이 지나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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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끄느름하던 하늘은 비 한 방울 뿌리지 않고 하루 종일 후텁지근한 열기만 더했다. 여름도 이제 막바지, 지난달에 비하면 해가 무척이나 짧아졌다. 그런 느낌은 오늘처럼 햇살 한 점 없는 날이면 더욱 짙어졌다. 아침 산행을 하기 위해 새벽 5시 30분이면 집을 나서는 나로서는 해가 짧아지고 길어지는 느낌에 유독 민감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의 능선에 오를라치면 아침 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지곤 했었는데 이제는 맑은 날에도 새벽의 푸른 기운만 감돌뿐 환한 느낌은 숫제 없다.

 

오전에 며칠 전 한국을 방문했다는 프랑스인과 차를 한 잔 했다. 가뜩이나 무더운 한국의 여름 날씨에 그는 무척이나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이따금 자신도 모르게 프랑스어가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 덕분에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프랑스어를 전공한 지인도 옆에 있었지만 그가 영어로 말을 하는 바람에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지인도 떠듬떠듬 영어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눈 대화 중에 압권은 이것이었다. 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승용차의 뒷유리에 '아기가 타고 있어요'(Baby on board 또는 Baby in car)라는 글자를 붙인 자동차가 수도 없이 보이던데 어떻게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지 믿을 수 없다는 거였다. 통계가 잘못된 게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이 분이 도대체 뭔 말을 하는지 잘 몰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보았던 것은 초보 운전 스티커였던가 보다. 아기가 차 안에 있다는 문구를 도로를 통행하는 차량 수십 대에서 보았으니 그로서도 잘 납득이 되지 않았을 터였다. 그게 다 초보운전 스티커라고 하자 그분이 말하기를 그냥 'New driver'라고 하면 되지 왜 아기 핑계를 대는 것이냐며 따지는 바람에 대답이 궁색했던 나로서는 우물쭈물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개성이랍시고 내세우는 것도 그 정도가 과하면 오해를 부를 수 있고, 괜한 시비를 일으킬 수 있음이다. 더구나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는 작금의 세태에 개인의 과한 주장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음을 그분과의 대화에서 새삼 느꼈다. 과유불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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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 우리가 몰랐던 원자과학자들의 개인적 역사
로베르트 융크 지음, 이충호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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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든 과학적 발견이 인류의 복지증진에 적극적으로 기여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아마도 과학의 역사에 있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지금도 논쟁이 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그렇고, 그 이전의 시험관 아기, 원자력 개발,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발명도 그러했다. 인류의 과학·기술 혁신은 대부분 당대 윤리와 충돌하며 발전해 왔다. 그것은 비단 획기적인 과학적 성취를 이루어 온 20세기 이후의 과학계에만 존재했던 일은 아니다. '진화론'을 발표했던 멘델은 종교계로부터 '사탄'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으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역시 종교 재판정에서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었다고 말해야만 했다. 이러한 충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진보는 계속되었고, 인류의 절멸을 가져올 수도 있는 과학 기술의 부정한 사용을 경험하면서도 과학자들은 정치인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할 뿐 자신들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베르트 융크가 쓴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은 미국과 독일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다룬 최초의 간행물로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미국과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핵무기 개발과 관련을 맺은 60명이 넘는 과학자들과 30명이 넘는 관계자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과학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은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이 과연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반핵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던 저자를 생각할 때 책을 쓴 목적이 분명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바이츠제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물리학자들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구성원들에게 징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제단체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과연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할까?""    (p.145)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전쟁이 종식된 후,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과학자 오펜하이머는 피고석에 앉아 조사를 받게 된다. 1854년 4월 12일에 시작되어 꼬박 3주일 동안 계속되었다는 행정부 차원의 청문회는 원자력위원회를 대표한 로저 로브와 증인으로 나선 오펜하이머의 질의응답 형식으로 이어졌지만 그것은 마치 죄인을 취조하는 검사의 심문과 변호인의 변론처럼 읽힌다.

 

"내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지요. 로스앨러모스에서 나는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폭탄을 다른 형태로 만드는 것을 포함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요청받은 일은 어떤 일이라도 했을 겁니다."    (p.524)

 

모든 역사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기술되기 마련이다. 전쟁의 종식과 승리를 안겨준 원자폭탄 개발자들에 대한 기록도 다르지 않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는 것처럼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역시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물론 그 모든 게 제국주의 일본의 야욕에 의해 빚어진 일이며 전쟁의 종식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의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원폭 희생자 중에는 징용으로 끌려간 우리나라 국민도 다수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아무리 장래에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연구 분야의 추가 발전을 자발적으로 멈추고 절반만 탐구된 상태로 남겨둔다면, 그것은 현대 과학의 정신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 변화에도 불구하고, 원자 무기 연구소들에서 연구를 계속하는 행위를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가 필요했다."    (p.286)

 

책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연구 성과를 자유롭게 서로 교환하며 지내던 당시의 과학자들이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을 탈출한 물리학자들과 독일에 남아 있는 물리학자들 사이에는 동업자 의식은 사라지고 반목과 갈등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오해의 소지는 남는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하여 독일에 남았던 과학자들이 도덕적인 이유로 정부 몰래 태업을 했기 때문에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기술한 대목이다. 과학사가들은 저자의 해석이 하이젠베르크의 진술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평가한다.

 

"인류는 우리가 발견하고 개발한 것과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장래에 이것을 파괴적 목적이 아니라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조심하는 것뿐이다."    (p.287)

 

최근에도 어린이 40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우디 군에 의한 예맨 스쿨버스 폭격에 쓰인 폭탄이 미국산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미국의 사과는 없었다. 흔히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고는 하지만 과학자들의 명예욕이나 경제적 욕구마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자의 연구가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그 순수성을 유지하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그 이면에는 어쩌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보편적인 인간의 추악하고 더러운 속성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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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어떤 목적을 갖고 흘러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를테면 목적을 가진 인간 군상들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시간을 걸어가는 게 아니라 도구화된 인간이 목적을 가진 시간에 의해 움직여지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라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기능을 다한 인간이 죽음과 함께 폐기된다는 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진다. 시간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에. 물론 인간이 무엇엔가 종속되어 도구로 변한다는 게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차를 몰아 도시 근교를 잠시 다녀왔다. 폭염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계절은, 산천은, 나아가 모든 자연이 시간을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허덕일 때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처럼 세상 모든 사물이 시간 앞에 납작 엎드린 채 정지될 것이라 믿는다. 나 외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도무지 헤어날 방법이 없는 듯한 참담한 심정이 들면 그런 느낌은 점점 더 가중되게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고통 속에서 허덕이던 순간에도 우주의 삼라만상이 시나브로 조금씩 변해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한 달여 지속되었던 폭염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이기주의 산문집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읽고 있다. 작가가 경험했던 소소한 일상들을 짧은 글로 풀어 쓴 산문집이다. 그러나 <언어의 온도>를 통해 자신의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렸지만 그 후로는 이렇다 할 책을 못 내고 있는 걸 보면 그도 아마 '서퍼모어 증후군'을 앓고 있는 건 아닌지... <언어의 온도> 이후 2017년에 출간한 <말의 품격>이나 최근에 나온 이 책 <한때 소중했던 것들> 역시 <언어의 온도>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작가라는 직업은 대기만성형일 때 비로소 그 생명이 오래 지속되는 듯하다. 그러므로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는 말은 작가들에게는 그닥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삶이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글은 독자의 가슴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오래 기억되는 대부분의 책은 작가의 삶이 기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자는 작가의 불행을 인기로 대체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시간의 농간일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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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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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말복이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어제와 오늘의 날씨는 어찌나 다르던지요.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하고 누군가에게 묻고 싶을 정도로 날씨는 천양지차 달라져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마주치는 등산객들의 표정도 한결 가벼워진 듯 보였고, 더위에 지쳐 인사말만 겨우 건네던 어제와는 달리 "날씨가 좋지요?"라거나 "금년 더위도 이제 다 끝난 것 같아요."라면서 설레는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요란하던 매미 소리마저 잠잠해졌고 숲은 그저 평온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간간이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낮의 기온은 크게 올랐으나 청명한 하늘은 가을을 닮아 있었고, 그늘에 서면 불어오는 바람이 마냥 반가웠습니다. 며칠 전에 읽고 미뤄두었던 리뷰를 작심하고 써보려 했지만 날씨 탓인지 집중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시선은 연신 창밖 하늘을 향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마음도 싱숭생숭 흔들렸습니다. 생각해보면 장편소설을 쓰는 소설가의 인내와 끈기가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가와카미 미에코의 대담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읽었던 바 그에 대한 간단한 느낌을 적어보려 합니다.

 

소설을 쓴다는 건 작가가 또 하나의 다른 인생을 압축해서 살아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작가가 살아내는 세상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인 까닭에 꿈을 꾸는 것처럼 자유로운 인생이 될 테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꾸는 꿈을 현실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공통의 언어를 통해 다시 듣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작가가 쓰는 문장은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하며 그 스토리의 전개는 현실에서 상당히 비껴가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인 문장으로 현실적인 세상을 말한다면 소설은 그야말로 다큐멘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밋밋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도구로서의 문장을 작가의 의식 저편으로 끌고 가는 작업이 소설 쓰기의 전제가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소설은 자주 읽지만 단 한 번도 직접 써본 적 없는 순수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드는 생각이지만 말이죠.

 

"다시 한번 확인해두자면 제 문장은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비非리얼리즘이죠. 그런 분리가 처음부터 떡하니 전제되어 있어요. 리얼리즘 문체를 철저하게 구사하며 비리얼리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제 목적이니까요." (p.117)

 

무라카미 하루키와 가와카미 미에코의 대담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는 인터뷰이로 등장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솔직 담백한 대답이 눈길을 끄는 책입니다. 평소 언론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이기에 네 차례나 이어진 인터뷰도 그렇고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가수 출신의 특별한 이력을 지닌, 게다가 배우와 방송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엔터테이너이자 시인으로도 인정받은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가 인터뷰어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설은 평생 대여섯 권 정도 만나지 않을까요. 많아야 열 권 남짓일까. 그리고 결국 그 몇 안 되는 책이 우리 정신의 대들보가 되어줍니다. 소설가의 경우는 그 스트럭처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바꿔 말하고 풀어 말하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소설에 편입해갑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요." (p.197)

 

총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는 하루키 문학의 전반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키 소설의 애독자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건 아닌 까닭에 인기 있는 소설가의 소설 작법이나 작가론을 중심으로 읽는다면 하루키의 팬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인 듯싶습니다. 자신이 마치 고대 원시시대의 영매와 같은 이야기꾼으로 인식되기도 한다는 대목이나 소설가로서 자신은 무엇보다 문장을 중시한다는 대목 등은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되짚어봐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가 살아 있으면 문체도 그에 맞춰 살아 숨쉬죠. 그러니 매일 변화를 수행할 테고요. 세포가 교체되는 것처럼. 그 변화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게 중요해요. 그러지 않으면 자기 손에서 떠나갑니다." (p.127)

 

1장 '뛰어난 퍼커션 연주자는 가장 중요한 음을 치지 않는다', 2장 '지하 2층에서 일어나는 일', 3장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 4장 '설령 종이가 없어져도 인간은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의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존경과 애정을 담은 인터뷰어의 질문에 소설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일상 속 에피소드를 곁들인 하루키의 신선한 대답이 잘 어우러진 대담집으로서 이야기는 최근에 발간된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부터 하루키의 초창기 작품을 넘나들며 끝없이 이어집니다.

 

"나 자신은 실제로 이 현실세계에 살지만 지하에는 나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고, 소설을 쓸 때 스멀스멀 위로 올라와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리얼리티를 밀어제치고 나가버린다. 나는 그런 작업 속에서 나 자신의 그림자를 보려 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나는 소설가이기에 이야기를 쓰는 작업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지만 보통 사람은 좀처럼 불가능할 수도 있다. 즉 나는 이야기를 씀으로써 많은 사람을 위해 그 작업을 대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입니다. 왠지 주제넘은 소리 같지만." (p.271)

 

우리가 누군가의 팬이 되고(그 대상이 가수든 , 배우든, 연주자든, 혹은 작가든 상관없이) 팬으로서 더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까닭은 내게는 없는 뭔가 특별한 것을 그 대상이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허점을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통해 확인하고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에게는 불가능한 어떤 것이 그 대상을 통해 완벽하게 재현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흥미롭게 읽었던 것도 하루키의 팬으로서, 나에게는 없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그를 통해 대리 만족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복지간(三伏之間)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고 하더니만 말복이 지나자 없던 기운도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지난 리뷰를 이렇게 쓰고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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