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어제는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탁하고 후텁지근한 도시의 하늘 위로 둥근 무지개가 떴었다. 비는 그렇게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아침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낮에는 반짝하고 해가 나더니 저녁부터 내린 비로 인해 한껏 습도가 높아진 탓인지 방안 공기는 텁텁하고 끈적끈적했다. 그 상태로는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동네 산책을 나섰다. 잔뜩 흐린 하늘, 비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그쳐 있었다.

 

산책에서 돌아와 무심결에 확인한 1층 우편함에는 두툼한 황색 봉투 하나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화인 시인의 시집이었다. 당신의 시를 인용했던 내 블로그의 글을 읽으셨던 시인은 자신의 시집을 보내주시겠노라 연락했었다.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는데 이렇게 친필 서명이 들어간 시집을 받고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그리고 왠지 미안해졌다.

 

나는 8년 전쯤에 다음과 같은 글을 블로그에 올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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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는 시를 읽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시인들은 뉘라 지목할 것도 없이 잘 팔리지도 않는 시집보다는 여행서나 산문집을 낸다. 그렇다고 우리 주변에서 시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세간에 잘 알려진 류시화, 안도현, 신경림 등 몇몇 유명 시인들만 근근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신통치 않은지 앞다퉈 책의 정가를 낮추고 있다. 그 외에 시집이라고 눈에 띄는 목록은 수험생들을 위한, 시험 대비용으로 출판된 명시 모음집이 대부분이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나는 시인도 아니고,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 순수 독자의 입장에서 시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서글프다.

 

시인의 속내를 낱낱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시가 전하는 그 울림만으로 설레던 시대가 있었다. 맘에 쏙 드는 시구를 연애편지에 인용하며, 자신이 쓴 것인 양 얼굴을 붉히던 그리움이 있었다. 술 동무를 옆에 두고, 노래 삼아 시를 읊조리던 젊음이 있었다. 우리는 시를 잃고, 사랑을 잃고, 그 속에 숨겨진 설레임, 그리움, 그리고 젊음의 낭만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시를 모르고 어찌 문학을 논하랴. 시를 모른 채 어찌 사랑을 노래할 것이며, 순수의 아름다움을 어찌 볼 수 있으랴. 시를 제쳐 두고 주옥같은 언어의 향연을 어찌 즐길 수 있으랴. 시는 문학의 태동이자, 끊이지 않는 북소리이다. 시는 언어가 아닌 몸짓이며, 아픔을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다. 시는 논리를 따라 흐르는 나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흐르는 작은 흔들림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회!

그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우리는 무엇에서 위로받을 것이며,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그 통로를 무엇에 의지하여 찾을 것인지.... 시를 쓰지 못하는 문학가는 한낱 글쟁이에 불과하며,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영혼을 잃은 로봇에 불과하다. 사랑은, 설레임은, 그리움은, 낭만은 언어가 아닌 시에 숨겨진 떨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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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위와 같은 글을 썼던 8년 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시집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나부터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체온이 느껴지는 시집을 펼쳐 들고 나는 밤이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밤새 비가 서럽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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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가든 (리커버) - 개정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에게도 저마다의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권의 책을 잘 읽어낸다는 건 독자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생각이 이따금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작가의 장점과 단점을 잘 구분하여 막연하기 이를 데 없는 평가, 좋은 책이라는 둥 그저 그렇다는 둥 하는 평가는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성실한 독자로서의 기본적 책무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는 침묵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의 교과서에서 행간에 숨은 의미를 잘 짚어주는 작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에쿠니 가오리를 통해 침묵의 색깔과, 침묵의 형태와, 침묵이 갖는 의미를 배운다. 그리고 수시로 감탄하곤 한다. 침묵을 말하는 것과 어둠을 그려낸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허튼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을 생생한 현실로 받아들이곤 한다.

 

"기억은 장난감 블록과 비슷하다. 언뜻 보면 색깔도 알록달록 서로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편리하게 기획되어 있는 것이다. 가호처럼 기억의 블록을 무수히 쌓아 올려 그 안에 틀어박히고 싶지는 않았다. 현실을 사는 세리자와만을 사랑하고 지금의 세리자와하고만 살고 싶다. 시즈에는 강을 따라 난 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p.92)

 

고등학교 미술 교사인 시즈에는 지금 연애를 하고 있다. 그러나 미혼의 청춘남녀가 하는 그런 연애는 아니다. 연인인 세리자와에게는 아내와 19살 먹은 딸이 있다. 신칸센으로 4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세리자와를 만나기 위해 가슴 설레며 떠났다가도 현실로 돌아올 때는 한없이 안도한다. 첫 번째, 두 번째 애인과는 정신적인 친구로 지내면서도 유독 세 번째 남자인 세리자와만큼은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시즈에의 오래된 친구 가호는 5년 전에 끝난 사랑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사랑으로 인해 심인성 섭식장애까지 앓았던 가호는 지금도 그 사람(쓰쿠이)과의 추억이 서린 비스킷 깡통과 머스캣 상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 자신의 웃는 얼굴이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을 모아둔 비스킷 깡통과 차마 깨뜨리지 못한 파란 장미 무늬 홍차 잔이 들어 있는 머스캣 상자. 가호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현실적인 삶이고 현실은 그저 부수적인 삶처럼 여겨진다.

 

"쓰쿠이와 함께일 때, 가호는 늘 웃었다. 모든 것이 빛나 보이고, 너무 많이 웃어서 눈초리가 처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 사람은 정말 즐거운 것만 보며 사는 재능이 넘쳤다. 그것을 사방에 흩뿌리며 온갖 것을 아름다운 농담으로 만들어버렸다. 쓰쿠이는 심각한 척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p.40)

 

안경점에서 근무하는 가호는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 친구를 불러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들르는 안과 의사나 대학생 코우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외로움을 잊기 위한 수단일 뿐 마음을 주는 사랑은 아니다. 안경점에는 가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가호 주변을 맴도는 나카노가 있다. 그러나 가호는 그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순진한 나카노는 가호의 마음을 열기 위해 끝없이 두드린다.

 

"상대가 자신의 불행을 기대하고 있다고,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시즈에는 엽차 한 모금에 닭고기를 꿀꺽 삼킨다. 헛도는 피해의식이 한심했다. 맞지도 틀리지도 않은 말이다. 가호는 시즈에의 밥공기에 두 공기째 밥을 푸면서 생각한다. 자신이 불행할 때 상대도 불행하면 기운이 나는 것은 왜일까. 상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자신의 행복보다 더 많이 바라는데." (p.106)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현재를 즐기는 시즈에,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에 탐닉하는 가호, 자신의 감정을 그때그때 드러내는 시즈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는커녕 생각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가호, 연인과 헤어져 현실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안심하는 시즈에,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도 과거의 연인을 떠올리는 가호, 키가 크고 행동에 거침이 없는 시즈에, 키가 상대적으로 작고 소심한 가호, 너무나 이질적인 두 사람의 시간은 때로는 각자, 때로는 뒤섞이면서 흘러간다.

 

"시간은 저렇게 무정하게 흘러가면서, 어떤 곳에서는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척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아주 흐름을 멈춘 척한다. 그래서 모두들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라고 시즈에는 생각한다. 물론 약한 사람만이 겪는 그런 혼란 때문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고 화가 나지만, 그 사실과 사진에서 눈길을 돌린 자신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p.155)

 

작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친구로 지냈던 두 사람, 시즈에와 가호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던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하면서 잠시 헤어지지만 졸업 후에 다시 같이 살기도 했다. 긴 시간의 추억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사랑의 방식으로 인해 충돌을 하고 때로는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친구라는 끈끈한 인연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소외감, 이해할 수 있고, 처음 느껴보는 것도 아니다. 그 시절에도, 하고 시즈에는 생각한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서 가호의 아파트로 굴러들어간 시즈에, 그리운 옛 친구와의 평온한 생활을 기대했던 새내기 교사 시즈에에게, 가호는 무참하게도 소외감만 만끽하게 해주었다. 쓰쿠이와 가호의 끈끈한 사랑의 나날을 시즈에는 꽤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칭칭 뒤얽혀 서로를 구속하는 어리석은 남녀를 처음 보는 시즈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p.267)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고 난 후에는 주저리주저리 수다스러워지는 느낌이 든다.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가 독자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설 속 문장마다 자신의 생각을 주석으로 달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점점 가팔라지는 계절의 경사를 가늠하면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왠지 모를 쓸쓸함을 더하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침묵을 번역하는 그녀의 문장마다, 행간의 의미를 설명하는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에 나는 오래전부터 중독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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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스러운 날씨였다. 하늘이 빼꼼하니 개는가 싶다가도 금세 어두워져 비가 쏟아지곤 했다. 기상청 예보로는 주 후반까지 이런 날씨가 길게 이어진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날씨로 인한 이런 꿉꿉하고 불쾌한 느낌을 아무 소리 말고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차라리 한꺼번에 확 쏟아지고 반짝 개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폭염보다는 이게 낫다는 생각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지만 어디 인간의 생각이란 게 이성적으로만 작동하던가 말이지. 하나가 좋아지면 금세 다른 것을 요구하게 마련이니...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속담이 하나 그른 게 없다. 이렇게 궂은날에는 다들 기름 넉넉히 두른 프라이팬에서 갓 부쳐낸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이 그립다고들 하는데 술을 먹지 않는 나로서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오늘도 기름진 음식이 별로 당기지 않는다. 물론 개인의 취향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홀리가든>을 읽고 있다. 오랜 친구 사이인 가호와 시즈에를 통해 '우정'이라는 특권(아닌 특권)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끼어들고 있으며, 또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방관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성과 함께 친구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에 대해 묻게 된다. 가족은 아니지만 남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특별한 관계, 친구란 과연 무엇인가.

 

묘하게도 강원도 산골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대학 시절 이후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친구인데 그의 목소리만큼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서로의 소식이 궁금했던 까닭에 우리는 마치 십대 소녀처럼 질문을 이어갔다. 십여 분을 훌쩍 넘기고서야 통화는 끝이 났다. 시간이 되면 자신이 사는 강원도로 놀러 오란다. 얼굴 한 번 보자며. 그러마, 대답하면서도 나는 또 묻고 있다. 친구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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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걸어도 나 혼자
데라치 하루나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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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사랑하는 소설은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그 이유가 다양하지만 독자에게 외면을 받는 소설은 그 이유가 단순하고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한 모양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불행의 이유가 다르다."고 썼던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거꾸로 뒤집은 듯한 느낌이 살짝 들지만 말이다. 최근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담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나는 독자들로부터 외면받는 까닭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의식의 세계엔 관심이 없다는 하루키는 의식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떠오른 문장을 지하 2층의 무의식의 세계에 담갔다 꺼낸다고 했다.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번 무의식층에 내려갔다 올라온 재료는 전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담갔다 건지지 않고 처음 상태 그대로 문장을 만들면 울림이 얕아요. 그러니 제가 이야기, 이야기, 하는 건 요컨대 재료를 담갔다가 건지는 작업입니다. 깊이 담글수록 나중에 밖으로 나오는 것이 달라지죠."

 

나는 소설을 즐겨 읽는 일개 독자일 뿐 직접 소설을 쓰는 작가는 아니지만 소설가로서 하루키가 말하려 했던 바를 조금쯤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소설가는 자신이 쓰는 소설에서 작위적인 느낌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루키처럼 무의식의 세계에 담갔다 꺼내는 것과 같은 방식의 필터링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작위적인 요소를 걸러내는 필터링 과정일 수도 있고 소설의 깊이를 더하는 숙성의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과정이 필수적인 까닭은 독자는 다양한 반면 소설은 한 사람의 작가에 의해 쓰인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라 할지라도 매의 눈으로 살피는 그 수많은 독자의 눈으로부터 소설에 언뜻언뜻 묻어나는 작위적인 느낌을 의식적인 글쓰기만으로는 완전히 걸러낼 수 없다는 얘기다. 반면에 이런 숙성의 과정을 거친 소설은 장르와는 무관하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느낌을 받는 것이다.

 

데라치 하루나의 소설 <같이 걸어도 나 혼자> 역시 비슷한 이유로 사랑을 받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생면부지였던 중년의 두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홀로 서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린 이 소설은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좌석에 앉게 된 중년 여성으로부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다.

 

"나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내 삶은 분명 아름답지 않다. 수도 없이 틀리고 남에게 수도 없이 상처를 주고, 과거에 저지른 죄와 부정을 불에 태워 용서를 받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옳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게 산다는 사실을 아는 나는 적어도 다른 사람이 진심으로 원하는 대상을 가치 없다고 비웃거나 부정하지는 않겠다." (p.254)

 

소설 속 주인공 유미코는 서른아홉 살이다. 폭력적인 홀어머니 밑에서 불우하게 성장한 유미코는 수예 교실의 선생님 아들 히로키와 결혼한다. 결혼식도 없이 함께 살게 된 남편 히로키에게 중학생이 된 딸과 전처가 있다는 사실을 결혼한 후에야 알았다. 전처와 살고 있는 딸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히로키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한다. 그때마다 히로키는 만사를 제쳐두고 뛰쳐나간다. 임신이 되지 않던 유미코가 어렵게 아이를 가졌으나 유산하고 유산한 날 밤에도 히로키는 딸의 전화를 받고 나간다. 더 이상은 힘들겠다고 판단한 유미코는 짐을 싸서 나온다. 그렇게 이사한 곳이 메종 드 리버 맨션. 이름만 예쁜 낡은 목조주택이었다.

 

"어려서부터 운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유산 사실을 알았을 때도, 새까만 피를 봤을 때도, 언제나, 히로키 앞에서도 나 혼자 있을 때도 늘 그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울지 않아야 강한 것이라고 믿었다. 감정을 무턱대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어른의 도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의 이런 오기는 그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나 자신조차도." (p.193)

 

유미코의 옆집에는 마흔 살의 독신 여성 카에데가 산다. 요리도 잘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천생 여자인 유미코와는 달리 자유분방한 성격의 카에데의 집에는 많은 남자들이 드나든다. 그러나 지난주에 직장을 잃은 유미코와 내일이면 실업자가 되는 카에데. 두 사람은 실업 기념(?) 파티를 연다. 그리고 유미코와 별거 중에 있는 남편 히로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최근에 그가 태어나고 자란 섬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소식을 시어머니인 미츠에로부터 듣게 된다.

 

"아니다, 그러는 대신에 카에데 씨를 데리러 가서 여행을 가자고 말하자. 이렇게 됐으니 '히로키를 혼쭐 내러 가는 여행(가제)'이든 뭐든 좋다. 벌써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고, 돈도 얼마 없는 우리. 그래도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과 기분 전환이다." (p.84)

 

두 사람은 히로키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신칸센을 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배를 타야 하는 힘든 여행이었다. 자신에게는 나쁜 남자와 선한 남자를 알려주는 보이지 않는 안테나가 있다고 자신하는 카에데는 섬에서 만난 남자와도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지만, 같이 갔던 그 남자에 의해 갖고 있던 현금을 모두 털리고 만다. 돈이 없어 호텔을 나올 수도 없었던 카에데는 유미코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한밤중에 자신을 데리러 와준 유미코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안테나가 고장 났다며 좌절한다. 두 사람이 섬에서 머무는 곳은 히로키의 먼 친척인 시즈 씨의 집이다. 그녀는 어린 아들 샤토와 함께 섬에서 산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히로키를 좋아했던 시즈는 유미코를 질투하며 미워한다. 그리고 히로키의 소식을 철저히 함구한다.

 

"인간의 생각은 단순히 정리되는 것이 아니니 오히려 엉망진창이 기본 설정인지도 모른다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엉망진창인 시즈 씨도 그럭저럭 섬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어 사는 모양이니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지 않을까. 그런 일을 당했으면서도 나는 시즈 씨를 미워할 수 없었다. 절대 친해지지는 못할 상대지만." (p.218)

 

처한 환경은 비슷하지만 성격은 극과 극인 두 사람은 섬에서 보내는 며칠 동안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정체성을 차츰 깨닫게 된다. 아버지도 없이 불행하게 자랐던 시즈 역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만 받으며 외롭게 자랐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유미코는 시즈를 이해하게 된다.

 

"꽃이나 색채가 화려한 동물을 봤을 때 예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감탄한 적은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꽃도 별도 유한하고, 지금 그것들을 보고 있는 내 목숨 역시 유한하다는 진리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은 후부터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연스레 눈물이 고였다. 지금처럼." (p.113)

 

그렇게 섬을 떠나는 카에데와 유미코. 가진 것도 없고, 변변한 직장도 없지만 그들 앞에 펼쳐지는 미래가 전보다는 조금 더 단단해질 거라고 믿게 되는 까닭은 나의 단순한 바람 때문은 아닐 터였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억지로 등 떠밀려 사는 삶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며 사는 삶은 모든 면에서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가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아마도 작위적인 부분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기 때문일 터,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아주 오래도록 고르고 매만졌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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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나 드라마틱한 변화의 연속이지요. 우리가 매 순간 체감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중형급 태풍 솔릭이 한반도에 상륙도 하기 전부터 얼마나 가슴 졸이며 불안에 떨었던지요. 자연의 힘이라는 게 인간의 능력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게 다반사, 속절없는 기다림 외에는 달리 준비할 게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농사를 짓거나, 배를 타는 사람은 아니지만 막연한 걱정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이따금 바람이 몰아치던 목요일 밤, 새벽 무렵에 태풍이 내륙을 관통한다는 뉴스 예보를 들었던지라 베란다 창문을 꼭꼭 닫아걸었습니다. 그렇게 어찌어찌 잠이 들었나 봅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겠거니 생각했는데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습니다. 회색 유화물감을 아무렇게나 칠해놓은 듯한 하늘에서는 가는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요란했던 태풍은 비상해제, 평범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던 것입니다. 일부 지역의 피해는 있었지만 우려했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인지요.

 

아주 오래전에 뭔 일만 터지면 그게 모두 대통령의 탓으로 돌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도 대통령 탓, 비가 적게 와도 대통령 탓, 심지어 날씨가 추워도 대통령 탓 등 하나부터 열까지 대통령 잘못이 아닌 게 없었지요. 정치인들이 저희들끼리 모여 연극을 하면서도 대통령 욕을 하는 게 전부였던 시절입니다. 그분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지요. 21세기의 우리 국민은 여전히 19세기에나 있었을 법한 이런 야만의 시절을 통과했던 것입니다. 최근 뉴스 메인을 장식하는 건 지난 정권의 대법원장이었던 양승태와 그의 졸개들에 의해 자행된 사법농단과 기무사의 쿠데타 계획이 아닌가 싶은데, 며칠 전 저는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무죄 판결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한 자가 무죄라면 평범한 개인을 악의적으로 비난한 자 모두가 무죄 판결을 받아야 하겠지요. 그런 논리라면 대한민국에서는 아마도 명예훼손으로 처벌 받을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 듯합니다.

 

지난해였던가요. 홍일표 국회의원의 아들인 홍성균 판사가 지하철 몰카범으로 입건되었던 게. 그는 당시 성범죄 전담 판사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사법 정의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런 잡범들이 판사를 하고 있는 상황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할 테지요. 고영주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김경진 판사 또한 홍성균 잡범과 하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법 농단은 괜히 생겨난 게 아닌 듯합니다.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가린다는 게 애초부터 말이 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졌던 2018년의 대한민국 여름, 대한민국의 사법 농단은 지금도 게속되는 듯합니다. 2018년 여름처럼 끈질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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