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이석원 지음 / 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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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가 황경신의 글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뭔가가 시작되고 뭔가가 끝난다. 시작은 대체로 알겠는데 끝은 대체로 모른다. 끝났구나, 했는데 또 시작되기도 하고 끝이 아니구나, 했는데 그게 끝일 수도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 그게 끝이었구나, 알게 될 때도 있다. 그때가 가장 슬프다.' 정말 그렇다. 잠시의 휴지도 없이 시간의 연속선상에 있는 우리는 그 끝도 알지 못한 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가 많다. 독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게 된다. 끝인 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되기도 하고, 끝은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완전히 끝난 경우도 가끔 있다. 이석원 작가의 글도 그렇다. 황경신 작가와도 인연이 깊은 이석원 작가이기에 그의 책 <보통의 존재>를 읽은 후 신간이 나올 때마다 계속해서 읽게 되었는데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읽고 나서는 '아, 이제는 이석원 작가와도 끝이구나' 생각했었다. 그랬던 게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닌데 나는 또 그의 신간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을 읽고 말았다.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오래된 습관처럼 나도 모르게 그만.

 

"첫 책을 낸 지 6년. 어느새 난 세 번째 책을 내게 되었다. 첫 책과 달리 두 번째 책이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긴장과 걱정 속에 출간된 새책은 다행히 독자들이 반겨주었고, 그 덕에 이제야말로 몸을 쭉 펴고 누울 수 있을 만한 거실이 있는 곳으로 부모님의 거처를 옮겨드릴 수 있었다. 비록 집을 사드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난 그때 어머니가 새집의 베란다에 틈틈이 모은 화분들을 들여놓으시며 기뻐하시던 모습과 처음으로 좁은 방을 벗어나 거실로 '산책'을 나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p.112)

 

사실 나는 이석원 작가의 글을 그닥 선호하지는 않는다. 감성 충만한 말랑말랑한 글을 읽을라치면 손발이 오글거리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장르가 불분명한 그의 글이 영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져서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읽은 후에는 '아, 이석원 작가와의 인연도 이걸로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가 그의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겠지만 어쩌면 <보통의 존재>를 읽었을 때도, <실내인간>을 읽었을 때도,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들었을 때도 모두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 존재했던 게 아닐까. 오늘날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가 우연적 에피소드의 연속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가 지적하듯 우연이 항상 무의미나 권태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석원의 글을 읽게 된 동기야 어떻든 많은 부분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니까.

 

1부 '그해 여름', 2부'내가 사는 작은 동네엔', 3부 '엄마의 믿음', 4부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5부 '배려', 6부 '스며들기 좋은 곳', 7부 '마음이란', 8부 '마지막 순간'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짧은 분량의 여러 꼭지의 글들이 실려 있다. 그런 까닭인지 '출퇴근길에 가볍게 읽기에는 딱 좋은 책'이라고 썼던 어느 블로거의 평에 머리를 끄덕이게 된다.

 

"어떤 이의 글을 읽으면 어, 이건 누구누구의 글이야 하고 대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그 작가만의 벗어버릴 수 없는 인장 같은 것. 단순히 독자의 입장에서, 내겐 그게 어떻게 보면 내용이나 본질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책 속에 담겨 있는 생각의 결이 아무리 매력적이거나 유용하다 해도, 그 사람만의 글의 톤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 책을 반복해서 읽기는 어렵다." (p.247)

 

작가는 삶의 거대한 주제들보다는 보다 작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이 책에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독자로서 내가 받았던 인상은 가벼운 듯 보이는 그의 글은 이전에 나왔던 다른 책들보다 더 깊은 의미를 품고 있는 듯했다. 어떤 글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볍게 읽히는가 하면 또 어떤 글은 가벼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 깊은 의미가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걸 연륜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삶의 성숙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되풀이하며 살아가기 마련인 인생에서, 어느 날엔간 혼자서도 잘 살아갈 거야 하다가, 또 어느 날엔간 그래도 내가 아닌 누군가가 아니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빈자리가 내 안에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될 때, 아무리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때,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람이란 게 이토록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버겁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다. 늘 말하지만 진짜 부자는 관계의 부자가 아닌가 한다." (p.276~p.277)

 

중학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아들은 졸업 발표회를 위한 춤 연습에 열심이다. 이것이 어쩌면 중학교 친구들과 할 수 있는 마지막 추억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아, 그게 끝이었구나'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나이가 되면 왠지 모를 슬픔과 먹먹함이 느껴지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 끝을 확인한다는 건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오늘 하루도 무참히 저물고 있다. 하루의 끝을 담담히 맞이할 수 있는 까닭은 변함없이 내일이 온다는 걸 믿기 때문이요, 또 다른 하루가 내가 아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우연처럼 이석원의 산문집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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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미세먼지가 가득한 날에는 뭘 하면 좋을까. 인생은 농담처럼 가벼워야 한다는데 방 안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을 듯해.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보내기는 무료하지 않을까? 하루는 생각보다 길거든. 우리는 종종 하루를 마치 운동선수가 전지훈련을 하듯 숨 쉴 틈 없이 빽빽하게 계획을 세우곤 하지.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야. 그러면서도 늘 불안해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어. 알잖아.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자신보다 더 잘하는 학생만 눈에 띄는 까닭에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서도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보내지 못한다는 걸.

 

책 한 권을 읽고 있어. 그렇다고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읽는 건 아니야. 그저 시간이 날 때마다 설렁설렁 읽고 있을 뿐이지.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보니 꽤나 특이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1978년생으로 스웨덴의 시인이자, 전직 아이스하키 선수이며, 대중음악가라고 하네. 결혼식을 앞두고 아내 카린을 급성 백혈병으로 잃고, 현재 딸 리비아를 홀로 키우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적혀 있네. 아, 작가 이름과 책의 제목을 말하지 않았구나. 작가는 톰 말름퀴스트야. 처음 들어본다고? 사실은 나도 그래. 책의 제목은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야. 전 세계 20개국에 판권이 팔리며 수많은 독자들을 울렸다고 하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 조금밖에 읽지 못해서.

 

창을 통과하는 겨울 햇살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져. 나만 그런 걸까? 암튼 그래. 좀 추워지더라도 미세먼지만 사라졌으면 좋겠어. 날씨 때문에 잠시 우울해지는 건 그럭저럭 낭만이라도 있지만 미세먼지로 인한 장기간의 우울은 병이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우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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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푸른숲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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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통해 작가를 알아간다는 건 오프라인에서의 직접적인 만남과 온라인상의 간접적인 만남의 중간쯤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한 작가가 쓴 작품이 여러 권이라면 먼저 어떤 작품을 읽느냐에 따라 그 작가와의 인연이 좀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아주 짧게 막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지요. 오프라인에서의 만남도 그러하듯 첫인상이 안 좋았던 사람은 그와의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가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은 것처럼 말이지요.

 

중국 작가 위화를 처음 알게 된 건 그의 작품 <인생>을 통해서였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었던 푸구이의 기구한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었지요. 계속되는 가난과 불행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꺾지 않는 푸구이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의 저서 <허삼관 매혈기>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음으로써 작가와의 인연을 길게 이어갔으니 말입니다. 그 외에도 국내에 번역된 그의 작품은 더 있는 걸로 알지만 차츰 읽기로 하고 미뤄두었는데 그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나도 모르게 구매 버튼을 누르고 말았습니다.

 

위화의 신작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했던 특강이나 좌담을 모은 책입니다. 그런 까닭에 겹치는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어보면 수십 년에 달하는 오랜 시간 동안 위화라는 소설가가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해 왔는지 잘 알게 됩니다.

 

1장 '읽고 쓰기', 2장'사람으로 살기'의 총 2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에 대한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관객을 앞에 두고 했던 강연이거나 같은 업종의 사람들과 나눈 좌담이었기에 감춰야 했던 비밀 한두 가지쯤은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는 성인이 될 때까지 책다운 책 한 권 읽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루쉰의 작품 속에서 성장했으면서도 루쉰을 싫어했던 그가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루쉰을 재발견하게 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세계적인 고전을 찾아 읽고, 생각하고, 쓰고 문학을 재해석하는 과정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책이 없던 문화대혁명 시대에 성장했고, 제가 진정으로 진지하게 문학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소설을 쓰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글을 썼던 셈입니다." (p.38)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작가들도 여럿 등장합니다. 톨스토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카프카, 헤밍웨이 등. 물론 자신이 쓴 작품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이 뒤따릅니다. 작품이 처음 실렸던 잡지사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편집자들과 얽힌 일화, 그리고 소설가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삶의 철학에 대해 들려줍니다. 치과의사였던 그가 소설가가 되고자 분투했을 지난한 세월을 생각해보면 그에게도 무리 모두에게도 인생에서 거저 얻어지는 건 없나 봅니다.

 

"가장 훌륭한 독서는 마음을 비운 독서, 꾸밈없는 마음으로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 독서입니다. 아무런 선입견도 갖지 않는 그런 독서는 사람들의 인식을 더욱 넓혀주지요. 선입견을 가지고 하는 독서는 음식을 골라 먹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의 인식을 더욱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p.159)

 

그가 소설의 지평을 넓혀갔던 과정은 아주 단순했던 듯합니다. 분량으로 보자면 단편소설에서 중편소설로 그리고 중편소설에서 장편소설로 옮겨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 범위에서 그동안 써보고 싶었던 여러 주제 중 하나를 고르고, 앞에 놓인 많은 장애물을 하나하나 넘어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소설가로서 성장하는 일반적인 발전 단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앞의 장애물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도 않았던 까닭에 지금의 위화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건 어떤 분야에서건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기본 덕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편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게다가 이 모든 편견이 진리의 옷을 입고 있지요. 진리라는 것은 수시로 우리가 갈아입을 수 있는 겉옷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옷장에는 각양각색의 그럴듯한 옷이 가득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편견에 반기를 들어도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이미 옷을 갈아입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페터 한트케가 배운 보스니아어 욕으로 그들에게 반격을 가하는 것이지요. 너희 집, CNN에 나왔더라! 이 말은 대단히 수준 높은 욕입니다. 중국 속담으로 표현하자면 욕인데도 더러운 단어가 없는 셈이거든요." (p.374)

 

내일은 일 년 24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인 동지.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기도 하지요. 반대로 말하면 모레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낮이 길어진다는 뜻이겠지요. 문화대혁명의 시대를 잘 견뎌온 위화 작가도 그 어둠의 시기를 딛고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왔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 역시 자신을 의지하여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꾀를 부리거나 엄살을 떨지 않고 두려움 없이 나아갈 때 각자가 닿는 종착지에는 선물처럼 뭔가 주어지는 게 있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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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진료를 받기 위해 대학 병원 안과를 방문했었다. 눈의 상태만 확인하는 간단한 진료였다. 그러나 진료를 받기 위해 내원한 환자들이 어찌나 많던지 오전을 거의 다 소진하고서야 진료를 마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신체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어서 세월의 풍파에 속절없이 스러지게 마련인데 너나 나나 가릴 것 없이 어디 한 군데 탈이라도 날라치면 무조건 병원부터 찾는 걸 보면 '우리나라 경제가 안 좋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싶기도 하고,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불황의 전조를 주로 인간성 상실에서 찾고는 한다. 어떤 이론에 근거하는 건 아니다. 전체 국민 중 '저게 인간인가?' 싶은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면 그 나라는 필연적으로 불황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왜인고 하니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개인이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 거대한 공권력을 타깃으로 삼아봐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 화를 풀기는커녕 오히려 화만 쌓이기 십상이고, 그보다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개인을 타깃으로 삼아 화가 풀릴 때까지 별 이상한 짓거리를 다 하다 보면 어느 정도 화가 풀리는 까닭에 멀쩡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들이 꼭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돌+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타깃으로 삼는 분풀이 대상은 비록 자신과 철천지 원수를 진 건 아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 나쁘다고 하거나 그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유명세가 있는 개인을 타깃으로 삼아 마음껏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이유? 이유는 딱히 없다.

 

그 대상은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딱히 상관은 없다.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얼마나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느냐만 중요하다. 그러므로 최근에 발생한 대형 사고의 희생자들은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다. 현시점에서 국민 대다수의 관심을 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대상을 조롱함으로써 자신들의 개인적 화를 풀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다. 물론 자신들이 이상한 사람(돌+아이)이 아니라고 포장하고 싶은 까닭에 정치적 성향을 내세우거나 페미니즘과 같은 손쉬운 도구로 포장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강릉의 한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학생들의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많은 국민들이 슬퍼하며 안타까워하는 마당에 그들마저 조롱이나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다는 건 인간 이하의 짓이다. 대한민국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걸 보니 불황의 전조가 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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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0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1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가 함께 듣던 밤 - 너의 이야기에 기대어 잠들다
허윤희 지음 / 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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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닌데 학창 시절의 기억은 때론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그 시절을 경계로 아날로그 시대는 종말을 고했는지도 모른다. 친구들은 모두 라디오 프로그램을 줄줄이 꿰고 있었고, 우편엽서에 사연과 함께 신청곡을 자필로 꾹꾹 눌러 담아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줄기차게 보내고, 혹시나 자신의 사연이 소개될까 싶어 이제나저제나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은 물론 유행하는 노래를 테이프에 담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곤 했었다. 투박하지만 순수한 낭만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귀로 듣는 것이 더 좋았던, 눈을 감고도 세상의 흐름을 잘 감지할 수 있었던 그 시절에는 나이를 먹는 것도 무척이나 더뎠고 그만큼 사람들의 심성 또한 순하고 부드러웠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도 음악다방을 찾았다. 듣고 싶은 곡을 쪽지에 적어 DJ에게 전달하는 일과 LP판에서 울려 퍼지는 은근한 감성으로 인해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음악에 빠져드는 일은 라디오 방송국에 사연을 보내고 자신의 신청곡을 기다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되는 CBS 방송국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 '허윤희의 꿈과 음악 사이에'를 진행하고 있는 허윤희 DJ가 최근에 낸 책 <우리가 함께 듣던 밤>을 읽다 보면 그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통신수단이나 방송환경이 그때에 비하면 천양지차로 달라져 있기는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을, 삶의 허기를, 실연의 아픔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라디오를 듣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

 

"정답이 아닌 위로가 필요한 니들에게/끝이 보이지 않는 긴 어둠 속에서/함께 걸을 누군가를 만나는 일만큼 간절한 게 있을까.//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지 않더라도/같은 상황에 처해 있지 않더라도/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보폭으로 걷고 있음을/느낄 수 있는 사람.//드디어 도착한 긴 터널의 끝에서/웃으며 서로의 등을 토닥여줄 수 있는 사람./단 한 명이면 된다.// (p.98)

 

1부 '우리는 매일 부끄러움을 먹고 자란다', 2부 '선인장처럼 묵묵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3부 '잊지 않고, 아프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4부 '걸림돌이라 생각했던 게 실은 디딤돌이었다', 5부 '한때 내게 머물던 것들이 길을 물어 돌아올 수 있다면', 6부 '내가 머물던 세상은 어느덧 한 뼘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의 총 6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애청자들이 보내준 사연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덧붙였다. 12년째 음악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는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직업인으로서 그녀의 애환을 알게 되고 그녀 역시 다른 누군가와 자신의 아픔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기에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살았다. 매 순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안도하고 또 불안해했다. 수많은 따뜻한 사연 속에 톡 튀어나온 날카로운 글 하나를 온종일 붙잡고 괴로워했다. 피곤하고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 날은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p.192)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장 외롭고, 자신이 가장 슬프며, 자신이 가장 뒤처졌으며, 자신이 가장 약하며, 자신이 가장 한심하다고 여기는 까닭에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이 그리운 것이리라. 누군가 나에게 나누어줄 따뜻한 체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등을 토닥이는 웅숭깊은 위로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우리는 그런 모습을 차마 보일 수가 없다. 부끄럽기도 하려니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랬던 우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인해 나를 단단하게 둘러싸던 방어막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진심 어린 한마디의 위로에 감사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해지려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토닥여주는 공감과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걸 아는 나이가 되면 자신에게 남은 날들을 헤아려보게 된다. 그리고 겁도 없이 살아온 지난날보다 자신의 앞에 놓인, 앞으로 살아내야 할 날들이 더욱 아득하게만 보인다. 백 세 시대라는 말은 축복이 아니라 악몽처럼 다가오게 마련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과 같이 늙어간다는 게 과연 축복이기만 할까.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하는 진심 어린 위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 위로가 점점 줄어드는 야박한 세상이 되다 보니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밤 뜬 눈으로 지새우며 열심히 라디오를 듣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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