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체험판)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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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아무도 없는 계단을 올라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계단의 난간과 난간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1층 로비의 여린 불빛, 그것은 어쩌면 까마득한 높이에 대한 공포이자 기우뚱 난간 옆으로 쓰러짐으로써 삶과 죽음의 아득한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강한 유혹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삶의 한쪽 끝을 부여잡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 그와 같은 불안은 우리 곁에서 조용히 거닐다가 농밀한 침묵이 내려앉는 순간 아득한 공포로, 혹은 강한 유혹으로 우리를 일깨우곤 한다.

 

김영하의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는 '여행'이라는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맡고 있는 한선과 짧았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수진. 말하자면 그들은 오래 전의 연인이었다. 지금은 상대방의 생일마저 기억에서 희미해진. 그러나 수진은 자신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한선에게 알린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한선은 수진에게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담긴 끈끈하고 강한 미련을 수진에게 어필하면서.

 

그러나 결혼을 이 주 앞두고 마지막 이별 여행을 가겠다고 했던 수진은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한선은 수진의 집으로 찾아가고 백화점에서 산 혼수품을 들고 귀가하던 수진을 불러 세운다. 예상치도 않았던 한선의 출현에 수진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 바람에 쇼핑백 안에 들었던 그릇이 와장창  깨져버리고, 주차 공간이 없어 잠시 이중 주차를 했던 한선의 차를 빼 달라는 경비 아저씨의 요청에 수진은 어쩔 수 없이 한선의 차에 오른다. 가까운 데서 차나 한 잔 하자던 한선은 느닷없이 고속도로로 내달렸고 수진은 자신의 엄마와 예비 남편으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전화를 끊자 한선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어떤 얇고 끈적이는 막을 찢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연히 거짓말을 했고 다른 남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다. 수진은 눈을 감은 채 그동안 꼿꼿하게 긴장하고 있던 머리를 등받이에 기댔다. 고단한 하루였다." (p48)

 

들어가야 한다는 수진의 요구를 무시한 채 납치하다시피 하여 동해안에 다다른 수진과 한선. 둘은 차에서 내려 인적이 없는 포구의 방죽을 걷게 된다. 한선이 벌인 돌발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던 수진은 한선에게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는 수진을 힘으로 제압한 한선. 어쩌면 한선은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한 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수진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시련? 그런 게 아니라 모래언덕에서 아래로 계속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분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힘을 내서 다시 올라가고 싶은 기분도 아니라는 거야. 올라가봤자 모래언덕일 뿐이야. 그 너머엔 또다른 모래언덕이 있겠지." (p.42)

 

"내 인생이 TV 드라마였다면 벌써 시청자들의 항의가 인터넷 게시판에 빗발쳤을 거야. 지루한 연장 방영을 즉각 중단하라고." (p.51)

 

인적이 없는 포구에서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둘 사이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배를 타지 않겠느냐 권하고 싫다며 달아나는 두 사람을 앞질러 가 한선의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선을 향해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한다. 한선은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수진은 낯선 남자를 향해 경찰에 신고를 했으니 그만두라고 말한다. 수진의 말에 그 사람은 마을을 향해 달아나고 수진은 119에 신고를 한다. 심하게 다친 한선을 앰뷸런스에 실은 구급대원이 동행할 것을 수진에게 요구하였으나 수진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거부한다. 그리고 수진은 택시를 부른다.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은 채.

 

"택시에서는 뽑은 지 얼마 안 되는 새 차 냄새가 났다. 지친 몸을 뒤로 기대며 발을 뻗는데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깨진 그릇이 담긴 백화점 쇼핑백이었다. 이제는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고 한쪽 옆구리는 찢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쇼핑백 안에서 사금파리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택시는 어느새 고속도로로 들어서 있었다." (p.61)

 

헤어진 남자 친구의 리벤지 폭행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은 마치 서늘한 공포영화처럼 긴박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는 이와 같은 불안이나 공포가 상존하지 않던가. 비록 언제라는 기약은 없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매일 반복적으로 경험되고 익숙해지는 일상에 의해 꾸려지는 것만은 아니다. 게다가 세상을 흔들고 지배하는 것은 흔한 일상이 아니라 전혀 본 적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블랙스완'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안정화시키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구축하도록 한다. 김영하의 단편소설 '여행'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보이지 않는 '블랙스완'의 존재를 강하게 믿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서늘한 공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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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인 시인으로부터 시집<가벼운 입술소리>를 선물로 받은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생각이 번다하여 시구는 그저 마른 낙엽처럼 흩날린다.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을 건조하게 살아가는 까닭에 몸보다 앞선 마음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풀풀 먼짓내만 풍기고 있다. 메마른 시구는 가슴에 남지 않는다. 그저 눈으로만 훑고 지나쳤던 시는 시인에 대한 미안함으로 남는다. 머잖아 봄이 오고 메마른 대지에도 봄처럼 초록물이 오르면 벙그러진 미안함을 내 눈에 가득 담아 한 자 한 자 눌러가며 읽어야겠다. 

 

눈송이

 

먼 우주에서 날아온 눈송이가

나비처럼 날아서

모닥불에 내려앉았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여!

하늘하늘 흔들리는 불꽃에

넋을 잃었다

 

꽃잎 깊숙이 몸을 들이밀자

이내 불꽃이 되었다

 

사랑은

온전히 주었을 때 찾아온다

 

 

개구쟁이 휘파람새

 

휘파람새가 놀려 댄다

열여섯 살 꽃님이

 

중 중 까까중

중 중 까까중

 

복숭아빛 수줍음 붉게 타는

꽃님이 볼 때마다

얄미운 휘파람새가 놀려 댄다

 

또래 애들 학교길 훔쳐볼 때

경전 펴고 사르르 눈꺼풀이 풀리면

 

중 중 까까중

중 중 까까중

 

개구쟁이 휘파람새가 놀려 댄다

부끄러워 할수록 재미있다고

자꾸자꾸 놀려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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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습관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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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은 러시아의 문학자이자 형식주의자인 빅토르 시클로프스키에 의해 시도된 것으로 사람들이 매일 마주치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대상보다 새롭고 낯선 대상으로부터 미학적 가치를 느낀다는 사실에서 착안되었다. 돌이켜 보면 사랑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로 '남자에게 가장 매력 있는 여자는 처음 보는 여자'라고 하지 않던가. 미학적인 측면에서 어쩌면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결혼을 하여 매일 한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모든 부부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도리스 레싱은 그녀가 쓴 단편소설 '사랑하는 습관'에서 사랑조차 습관이 돼버린 한 남자에 대해 쓰고 있다. 연극을 제작하기도 하고 강연도 하는 조지는 연극계에서는 꽤나 영향력이 있는, 그야말로 연극계의 거물이었다. 아내 몰리와 이혼한 후 5년쯤 동거를 했던 연인 마이러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을 피해 호주로 떠났다. 전쟁이 끝나자 조지는 마이러에게 영국으로 돌아올 것을 청한다. 그러나 마이러는 조지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지는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방황한다.

 

"사람들의 우스갯소리에 웃을 수 없을 때도 많았다. 가볍고 암시적이고 건조한 그의 말투도 변했음이 분명했다. 옛 친구들이 혹시 요즘 우울하냐고 물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조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예전처럼 공감한다는 듯 미소를 짓지 않았다. 조지는 자신이 이제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상대가 아닌 것 같다고 추측했다." (p.18)

 

결국 조지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몰리를 찾아간다. 이혼을 하기는 했지만 그녀와 함께 살 때 그닥 나쁘지 않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오랜만에 보는 몰리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고, 조지는 그녀에게 자신과 다시 결혼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그러자 몰리는 "있잖아요, 당신은 그저 사랑이 습관이 되었을 뿐"이라며 거절한다. 결혼 생활을 지속할 때 조지가 만났던 여인들을 거론하면서. 필리파, 조지나, 재닛 등.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밤거리를 쏘다니던 조지는 결국 심한 감기에 걸리고 만다. 몰리는 그를 간병할 사람을 물색해준다. 그녀의 이름은 보비 티팻. 예순 살의 조지에 비하면 40대의 보비 티팻은 무척이나 젊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조지는 자신이 앓아 누워 있는 동안 자신을 돌보고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등 능숙하게 안주인 역할을 했던 보비가 무정하지만 예의가 바른 여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그가 보기에 그녀는 모든 면에서 무척이나 어리다고 판단한다.

 

"지금 그는 그녀 안에서 되살아난 자신의 과거 속에서 그 과거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평생의 경험이 그에게 위엄을 주었다. 그의 눈빛은 묵직하게 상대를 조롱하며 비난하는 듯했다." (p.37)

 

보비와 혼인을 한 조지는 그녀와 함게 노르망디의 한 마을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전에 이브라는 아가씨와 갔던 곳이었다. 보비에 대한 조지의 사랑이 열렬하고 뜨거웠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조지의 주선으로 보비는 예전에 했던 연극배우의 세계로 복귀한다. 보비가 출연한 연극이 유명세를 타면서 보비는 제법 바빠지기도 했고, 같이 출연한 남자 배우와도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조지와의 결혼 생활이 이어지면서 보비 역시 몰리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조지의 사랑이 한 여인에 대한 깊은 애정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여자를 곁에 둘 뿐이라는.

 

"사랑이 습관이 되었다는 표현이 조지의 마음속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 말이 맞다. 그는 생각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자신의 맨살에 누군가의 맨살이 닿는 느낌, 젖가슴이 닿는 느낌에 본능적인 반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비가 지금껏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사실상 그녀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p.38)

 

연극 연습을 마치고 매일 비슷한 시각에 귀가를 하던 보비가 어느 날 연락도 없이 늦었다. 걱정이 된 조지는 보비를 찾아 나선다. 모두가 떠난 연극 연습장은 텅텅 비어 있다. 보비가 어딘지 모르게 아파 보였다는 말을 듣게 된 조지는 속이 탄다. 보비의 상대 배우인 재키의 집에서 보비를 발견한다. 이십대 초반인 재키와 사십대인 보비. 조지는 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비는 조지의 그와 같은 생각에 펄쩍 뛴다. 나이로 따지면 재키는 자신의 아들뻘이라고 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그녀가 감정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두 사람이 진정으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는 자신의 팔다리를 타고 그녀를 향해 힘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 남자였다." (p.52)

 

우리는 객체화된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사람이건 자연이건 집이건 상관없이 마주치는 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특별한 감정을 갖고 대하는 게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어떤 것, 감정을 교류하는 대상이 아니라 단지 존재로서의 개체, 사물화된 어떤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건 아닐까.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어제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는 반복되는 일상처럼 말이다. 도리스 레싱은 사랑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습관화된 무심함 그것을 지적하고 싶었을 게다. 남녀 간의 사랑이 처음 만나던 그 순간과 영원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습관화된 일상에 우리의 사랑마저 포함한다면 그러한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추억을 떠올리는 건 무료한 시간의 청량제이기도 하지만 사랑이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걸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랑은 언제나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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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제법 차다. 그래도 좋은 게 있다면 공기가 맑다는 사실. 투명한 겨울 햇살을 동무 삼아 잠시 걸었다. 이제야 비로소 겨울 분위기가 난다. 볼을 스치는 바람과 손끝에 전해오는 알싸한 추위. 명절 연휴의 피곤이 말끔히 씻기는 느낌. 사람들의 말간 표정이 햇살처럼 곱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된다는 기분 좋은 소식. 명절 연휴 뒤에 날아든 반가운 소식이기는 하지만 국민들의 피로를 날려줄 이런 산뜻한 소식을 자주 들을 수 없다는 게 못내 아쉽다. 사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정치권에 바라는 것도 이와 같은 소박한 기대일 텐데 말이다. 그러나 자유당 국회의원 김진태·이종명 및 지만원에 의한 망언과 돌출 행동은 우리나라 정치권의 후진성을 여실히 드러낸 한 사례이기도 했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게 만드는 그런 소식은 이제는 제발 그만 좀 들었으면 좋겠지만 하지 말라면 더 기를 쓰고 하는 청개구리 영신이 붙었는지 법적 처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정신이 나간 놈들처럼 말이다.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장에서 '5·18이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었다거나 '5·18 유공자라는 이상한 괴물 집단을 만들어 내 우리의 세금을 축내고' 있다는 둥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의 발언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들을 마구 쏟아냈다. 게다가 이미 그와 같은 주장을 일삼고 다니다가 법적으로도 처벌을 받은 바 있는 지만원 범죄자를 초청하여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행동을 했다는 건 우리나라 국민의 민의를 완전히 무시한 초헌법적 행위를 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애국지사라도 되는 양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다. 찬바람이 미세먼지를 몰아내는 것처럼 정치권에도 새 바람이 불어 미세먼지보다 더 해로운 몇몇 국회의원들을 날려버렸으면 좋겠다. 머지않아 그렇게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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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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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한 해 해가 가면 갈수록 문학적 수사나 기교가 없는 담백한 글이 좋아진다. 물론 젊은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전에 본 적 없는 화려한 수사의 문장을 접할 때마다 노트 한 귀퉁이에 적어 두거나 편지 상단의 계절 인사말로 써먹거나 하는 식으로 시간이 지나도 어떻게든 잊지 않으려 애를 쓰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화려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길 없는 담백한 글에는 시선이 가지 않았다. 말하자면 책의 내용보다는 문장의 화려함에 이끌리곤 했던 것이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았다고나 할까.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담백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딱 들어맞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는 것처럼 반복해서 읽어도 지겹다거나 지루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등단했던 그녀는 '이미 완성된 작가'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갖춘 작가였지만 팔 년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다섯 권의 에세이만을 세상에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전통과 구습에 얽매인 고국에서의 생활에 갑갑함을 느끼고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세계를 향해 동경을 품었던 작가가 1960년대에 이미 유학과 국제결혼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감행하였다는 사실과 2차 세계대전 직후 십삼 년간 이탈리아 밀라노에 거주하며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유럽의 모습은 꽤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기억의 올들을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풀어내고 잇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심코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루를 올려보았다가 나는 실로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저녁해를 가득 받은 종루의 크고 작은 종들 아래 가로대 위에서 한 사내가 양쪽 손발을 사용해 춤을 추듯, 공중을 헤엄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본 광경이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사내의 모습과 함께 그의 온몸에서 솟아나는 듯한, 밀려왔다가 물러가는 파도처럼 여러 겹으로 포개지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축일을 알리는 종소리가 떠오른다. 저 멀리 해가 뉘엿뉘엿한 평야를 뒤덮는 연보랏빛 안개와 함께." (p.42~p43)

 

<밀라노, 안개의 풍경>에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사유했던 청춘의 한 자락과 2차 대전 직후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카톨릭 학생운동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 국적을 초월하여 자신과 함께 순수했던 청춘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작가가 심취하고 동경했던 움베르토 사바, 알렉산드리아 만초니 등 이탈리아의 여러 문호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후 이십대의 젊은이였던 그들이 카톨리시즘을 보편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자며 시작한 운동보다 사회변혁의 보폭이 훨씬 커서, 서점 친구들이 한순간 목표를 잃은 듯 보이던 무렵이었다. 나와 처음 만난 날 제노바 역으로 함께 마중나왔고 나중에는 나의 남편이 된 페피노가 1967년 마흔하나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유력한 대변자를 잃은 가티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 무렵 서점은 경영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지만 출판을 책임지던 가티가 슬럼프에 빠져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니 당연히 출판 부문은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p.102~p.103)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가 독자의 마음을 붙드는 이유는 밀라노의 안개처럼 모호하고 여러 겹으로 중첩되는 면이 있다. 작가가 경험했던 젊은 시절의 추억을 쫓아가다 보면 독자들 역시 아슴아슴 자신의 추억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다시 오지 않을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작가와 함께 경험하다 보면 그게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아련한 슬픔이 되어 밀려오기도 한다. 책에서 나열되는 밀라노의 한 장면이 독자가 겪었던 구체적인 한 장면으로 치환되기도 하고, 그 순간 책장을 훑던 손가락도 방향을 잃고 만다. 어쩌면 오래된 흑백 사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사진 한 장. 한여름 태양이 내리쬐는 제노바 기념묘지의 하얀 대리석 계단 위에서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내가 흰색 투피스를 입고 희미하게 웃고 있다. 일본을 떠난 지 사십 일째인 1953년 8월 10일 아침, 이탈리아에 막 상륙한 참이었다." (p.133)

 

이십대 말에서 사십대 초, 인생의 한창때를 회상하는 작가의 글은 강물에 찰랑이는 물비늘처럼 곱디곱다. 그 시절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말이다. 때로는 영화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그 시절 읽었던 책 속 한 구절처럼, 다정했던 사람의 낮은 목소리처럼 정겹다. 나이듦이 두렵지 않은 까닭 역시 현실의 고단함으로부터 우리의 눈길을 빼앗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 연후의 후유증이 밀라노의 안개처럼 잔득하게 달라붙는 금요일 오후, 스가 아쓰코의 추억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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