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인근의 산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면 산은 단지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지만 등산로를 따라 한 발 한 발 직접 걸어보면 그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아침이든 저녁이든 시간에 구애 없이 매일 산을 오르는 나 같은 사람들은 산에서 받는 느낌이 각별하다. 일상에서 자연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대부분의 도시내기들에게 있어 집 근처의 산을 오른다는 건 멀어졌던 자연과의 거리를 좁히고 더불어 자신의 건강도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시기에는 산길을 걷는 것 자체가 자연으로부터 커다란 선물을 받는 느낌이 들곤 한다.

 

오늘처럼 밤 사이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은 산길을 오를 때면 코끝에 전해지는 진한 솔향기와 구수한 흙내음이 몸 전체에 스며든다. 이런 혜택을 무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물론 다는 아니지만) 일단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까닭에 자연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곤 한다. 자연에서 멀어진다는 건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품성, 이를테면 배려라든가 관용이라든가 너그러움과 같은 기본적인 인성을 배우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은 사회에서 저질러지는 잔인한 범죄에서 종종 나타나곤 한다. 최근에 온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n번방' 사건을 보더라도 주범인 조주빈이 극우 성향 사이트 일베 출신이라고 하지 않던가. 자연과 멀어진 채 컴퓨터와 모바일에만 몰두한다는 건 어느 한 방향으로의 극단적인 성향을 띌 공산이 크다. 워마드도 다르지 않겠지만 말이다. 어디 일베와 워마드뿐이겠는가.

 

정말 놀라운 사실은 그와 같은 성착취 동영상을 공유하고 범죄에 가담했던 사람들도 다수라고 하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고 잔인하게 변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처벌만으로 그와 같은 범죄가 완전히 사라지리라곤 믿지 않는다. 모름지기 현대 문명은 자연으로부터의 멀어짐을 꾸준히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둡다. 봄바람이라도 불어 먹장구름을 걷어갔으면 좋겠다. 달리 예정된 계획은 없지만 그래도 오늘은 금요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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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3-2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글 좋습니다.
오늘은 금요일, 이란 제목이 맘에 들어 들어왔으나
더 멋진 제목을 붙여도 될 것 같은 멋진 글입니다.

꼼쥐 2020-03-28 14:51   좋아요 1 | URL
칭찬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이렇게라도 저의 생각이나 일상을 가끔씩이라도 남겨두려는, 일종의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더불어 제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따금 위로를 받고 마음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늘 갖고 있습니다. 비록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말이죠.

북프리쿠키 2020-03-27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글 좋아하는 1인입니다.
수많은 글들 중 꼼쥐님 글은 읽게 되더라구요~오늘은 금같은 요일이네요^^

꼼쥐 2020-03-28 14:5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괜스레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다만 미안한 것은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이웃 블로거님들을 일일이 찾아뵙지 못한다는 것이죠. 마음은 굴뚝같지만 때로는 시간이 없어서, 때로는 귀찮아서 그리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마음뿐임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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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삶은 더없이 우울해진다는 걸 나는 안다. 누구나 그렇듯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과분한,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을 듯 보이는, 하나의 이상에 가까운 목표를 달성하는 걸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진정한 의미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기보다는 순간순간의 삶을 즐기는 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속물적인 삶을 권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타워>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한 번쯤 되묻게 된다. 소설을 읽는 관점에 따라 지극히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소설에서 작가가 그려내는 두 인물-토오루와 코우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소설에 대한 생각은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성적으로 한창 왕성한 시기인 스무 살의 두 인물이 같은 또래의 여성에게는 관심이 없고 기이하게도 남편이 있는 40대 연상의 여인에게 빠져들어 질펀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삼류 에로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인생이란 모든 것이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며 자신과 관계를 맺고 교류하는 인물들은 단순히 자신이 미리 짜 놓은 각본에 등장하는 인물들인 까닭에 내 의도대로, 내가 생각하는 역할만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고 믿는 코우지와 인생이란 계획한다고 모든 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당사자가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들로 삶이 구성될 뿐이므로 삶에서 계획 따위는 필요가 없다고 믿는 토오루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인생을 이제 막 시작하는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게 바람직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지극히 은유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물론 후자라고 믿는다.

 

"연상 여자의 '좋은 점'을 가르쳐 준 사람은 토오루였다. 토오루는 고교시절부터 친한 친구로, 코우지가 우습게 여기지 않았던 유일한 녀석이다. 그 당시, 코우지는 대부분의 인간을 바보로 여겼다." (p.14)

 

그렇다면 토오루와 코우지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엄마뻘되는 두 명의 중년 여성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작가는 20대의 젊은이가 자신의 미래 모습이자 삶의 표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성세대의 유형으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어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은 아닌, 아직 자신의 삶에서 추구할 만한 욕망이 남아 있는 상징적인 인물로 40대를 선정하지 않았을까.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스토리의 구성과 재미를 무시할 수 없으므로 두 명의 남자 주인공이 중년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설정을 취했겠지만 말이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토오루는 전화 부스에서 시후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한참 동안 시후미한테서 연락이 없다. 전화를 건다는 생각만으로도 동요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토오루는 망설이고, 자신이 한심스러워 한숨을 쉰다. 전화 부스의 유리에 붙은 물방울은 왜 그런지 언제나 지독하게 잘다. 두려운 것은 부재가 아니라 응대였다. 놀란 듯한, 또는 당혹스러운 듯한 시후미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서먹서먹하게 혹은 분주하게 응대 받는 것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발신음이 들린 순간, 토오루는 거의 부재중이길 기원했다." (p.228)

 

여성잡지 편집장으로 근무하는 토오루의 엄마는 토오루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남편과 이혼하고 커다랗고 정갈하게 정리된 맨션에서 토오루와 함께 살고 있다. 토오루의 엄마 요우코의 지인이었던 시후미는 사업을 하는 남편을 두고 있지만 자신도 역시 샵을 운영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토오루가 열일곱 살이던 2년 전 요우코를 통해 시후미를 소개받은 토오루는 자신처럼 책을 좋아하고 만날 때마다 전시나 공연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후미에게 깊이 빠져든다. 어려서부터 늘 혼자였던 토오루에게 시후미는 토오루가 미처 몰랐던 이 세상의 즐거움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스승이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줄 연인이었다. 반면에 코우지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제법 나이차가 나는 형 역시 의사인 엘리트 집안 출신이다. 집안 형편이 쪼들리지는 않지만 즐겁게 살기 위해 시간을 쪼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상의 여인 '키미코'와 연하의 여자 친구 '유리'와 교제하면서 바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

 

바쁜 생활이다 보니 연인과의 데이트도 언제나 자신이 정한 시간에만 허락하는 코우지와는 달리 토오루는 하루 종일 시후미를 생각하며 오매불망 시후미의 전화만 기다린다. 그렇다고 데이트에 있어 늘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키미코와 토오루가 서로의 상대방에 대해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키미코는 어느 날 코우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하지만 단칼에 거절을 당하고 만다. 결국 키미코와 코우지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지고, 연인과 헤어지는 것도 언제나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일 것이라고 믿었던 코우지의 생각은 빗나가기 시작한다. 게다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요시다의 엄마를 사귀면서 불륜 장면을 요시다에게 들키기까지 했던 코우지는 자신의 자취방에 요시다가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여자 친구인 유리와의 관계마저 삐걱대기 시작한다. 반면에 토오루는 큰 용기를 내어 시후미에게 전화를 걸지만 대개는 연결이 되지 않거나 간헐적으로 통화를 할 뿐이다. 따로 사는 아버지의 설계 사무실에서 시후미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시후미의 별장에 초대를 받기도 하는 토오루.

 

자신의 삶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람과 삶에서 경험할 만한 일은 대부분 다 겪어본 사람과의 만남. 그래서인지 에쿠니 가오리는 소설에서 중년 여인의 과거를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개개인이 취하는 개별적인 행위는 달라질지언정 그 과정은 엇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타워>를 단순히 스무 살 청년과 엄마뻘되는 중년 여인과의 불륜 내지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지저분한 애정행각으로만 읽는다면 그리 두껍지도 않은 책을 무척이나 지루하게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설은 얼마든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각자의 삶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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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한순간에 후루룩 무너져내리는 것도, 무너지던 삶을 근근이 되살아나게 하는 것도 다 그리움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처럼 뭐라 말할 수 없는 봄이 온 세상에 가득할 때면 그리운 이름들을 가만가만 불러보게 된다. 그리움처럼 개나리가 피고, 배꽃이 피고, 연녹색 잎들이 세상을 물들인 들판에 그리운 이의 이름이...

 

봄햇살이 너무 좋아서 차를 몰아 근교로 나갔었다. 낮에는 코트를 벗어야 할 정도로 철이른 대위가 대지를 뒤덮었던 오늘, 농부들의 분주한 손길만이 봄의 고랑을 고르고, 나무들은 꽃을 틔울 준비를 서두른다. 허둥대는 계절의 전령들이 제 순서를 잊고 갈팡질팡 혼란스러웠던 한낮,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저 어둡기만 했다. 봄을 즐기기에는 코로나19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넓고 짙었다.

 

인적도 끊긴 식당에서 칼국수 한 그릇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마을을 가로지른 배꽃 향기가 후드득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오후. 그리운 이름들을 가만가만 되뇌어보면 흘러간 봄에 지불했던 소중한 시간들이 되살아날까. 석양이 물들고 있다. 느긋했던 마음이 불현듯 길지 않은 봄의 하루처럼 다급해지는... 한적한 도로를 속력을 높여 달려가는 차량들. 문이 굳게 닫힌 시골 성당을 둘러보았다. 한때는 삶의 이야기로 북적였을 이곳도 적막감만 감돌았다. 그러나 집으로 향하는 어느 사거리의 교회는 예배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그도 저도 아니면 이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이런 단순 무식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바이러스는 숙주를 필요로 하고, 인간의 무지는 바이러스의 통로가 되고 있다. 그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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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사라지지 않는 여름 1~2 - 전2권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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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어떤 시점이 되면 오늘 뭘 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하루를 흘려보내게 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하루하루가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고, 새롭게 주어진 하루를 도대체 뭘 하면서 그 긴 시간을 채워나갈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도덕이나 관습과는 거리가 먼 다소 엉뚱한 생각들이 우리를 지배했던 날들이 더러 있게 마련이었고, 삶의 오점이나 흠은 그러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아무튼 우리는 럭비공과도 같은 그 시절을 통과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이라는 큰 자산을 얻는 대신에 복구할 수 없는 흠을 남기기도 하고, 그저 하나의 작은 오점에 불과한 여러 경험들을 두루 겪어보기도 한다.

 

세상에 흠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마는 나 역시 지난 삶을 이따금 돌이켜보면 인생의 어떤 부분은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끼게도 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안에서는 밖이 훤히 보이고 밖에서는 안을 조금도 볼 수 없는 원웨이글라스 방식의 화장실에서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한 부끄러움이랄까. 설령 누가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자신의 영혼을 투명 외피로 겨우 감싼 듯한, 그리하여 누군가 내 영혼의 검은 속내를 속속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 듯한 두려움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누군가에게 스스로 털어놓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리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것은 대개 삶의 방향이나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십대의 어린 시절에 만들어지곤 한다.

 

미국 작가 에밀리 M. 댄포스가 쓴 <사라지지 않는 여름 1, 2>은 십대 소녀 캐머런 포스트의 성장 과정을 담은 아름다운 소설이다. 묘사와 표현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동성애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한편으로는 섬세하게 다룸으로써 우리가 십대 시절에 형성했을 성() 의식과 그를 둘러싼 알 수 없는 죄의식, 동성애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방적인 편견과 무지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시나브로 대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소수의 동성애자들을 향해 얼마나 가혹했던가 반성하게 되고, 자신의 십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지나온 삶을 반추하기도 한다.

 

"그때 나는 리디아가 어째서 나의 망할 발달주기가 엉망이 되었는지, 어째서 내가 죄가 담긴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에 오게 되었는지 설명할 유의미한 무언가를 알아내기 직전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2p.228)

 

소설은 몬태나주 동부의 작은 마을 마일스시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엄마와 아빠가 퀘이크 호수로 캠핑 여행을 떠났고, 캐머런을 돌봐주러 할머니가 오셨다.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던 아이린과 장난스레 키스를 했던 날 캠핑을 떠났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심으로써 아이린과의 일은 이제 아무도 모른다는 안도감에 빠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캐머런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고, 부모님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큰 목장을 운영하던 아이린네 부모님은 아이린을 코네티컷에 있는 기숙학교로 보냈고, 캐머런은 그렇게 아이린과 헤어졌다.

 

부모님의 사망 이후 승무원이었던 루스 이모가 할머니와 함께 캐머런을 돌보기 위해 이사를 왔다. 아이린과 헤어진 후 중학생이 된 캐머런은 수영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시합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하던 린지와 사귀면서 캐머런은 레즈비언 문화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방학 동안 수영 연습을 함께 했던 린지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혁명적이며 대항문화적인 것'이라고 가르쳐준 상대였고, 그녀가 사는 시애틀로 떠난 후에도 꾸준히 편지를 쓰거나 선물과 믹스 테이프를 보내오곤 했다.

 

고등학생이 된 캐머런은 육상팀에 들어갔고, 생물학 수업을 같이 듣던 콜리에게 급격히 빠져들었다. 게다가 콜리와 그 애 엄마가 캐머런과 루스 이모가 다니는 찬양의 문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콜리가 커스터고등학교에서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농장에서 통학을 하다가 마일스시티 시내에 아파트를 얻고 자취를 하게 되면서 캐머런은 콜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기회를 엿본다. 아파트에서 격렬한 키스를 나눈 뒤에 털어놓은 캐머런의 고백에 콜리는 잘못된 거라며 부정한다. 콜리와의 일이 발각된 후 캐머런은 결국 릭 목사가 운영하는 동성애 전환 치료 시설인 '하나님의 약속 기독 사도 프로그램'에 보내진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그곳에서 캐머런은 다른 입소생들의 다양한 상처와 욕망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입소생 중 한 명이 자해를 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믿음이나 자기부정을 통해 성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어른들의 신념이 잘못되었음을 캐머런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캐머런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같은 입소생인 애덤, 제인과 함께...

 

"그러나 아침이 되어도 나는 죄를 극복했다거나 하나님께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만 내가 절제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달리기나 수영을 하면서 나 자신을 극복했을 때처럼 남몰래 뿌듯할 뿐이었다. 절제나 극기는 사람들을 중독시키기도 한다. 마치 자꾸만 절제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다른 사람보다 정결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리디아가 집착하는 그 모든 규칙을 따르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며, 시간이 흐르면 따라야 할 규칙을 점점 더 많이 만들게 되고 급기야는 성경 구절을 통해 이를 정당화하는 데 이르게 된다." (2, p.248)

 

본연의 성 정체성을 부정하고 혐오하며, 끊임없는 죄책감을 통하여 가능하지도 않은 믿음을 주입한다는 건 어쩌면 그들에게 크나큰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그들로 하여금 평생을 죄책감과 자기부정 속에서 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직접 겪어본 것도 아니면서 동성애자는 단지 그들의 의지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믿는 기성세대의 어리석은 믿음을 목격하곤 한다. 그와 같은 믿음은 동성애자들을 향한 포용이나 배려보다는 날 선 비난이나 혐오 혹은 배척이나 차별로 이어지는 게 보통이다. 나는 다만 운이 좋아서 이성애자라는 주류에 속했을 뿐 어떤 노력의 산물로서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다수 이성애자들이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코로나19의 확산이 특정 종교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 여름>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특정 종교의 잘못된 믿음이, 기성세대의 무지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비양심이 누군가를 향해 보이지 않는 칼날을 휘두르게 된다는 사실을 가슴 절절히 깨닫게 된다.

 

인간은 평생을 비난과 자기혐오 속에서 살아가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결코 그렇게 명령한 적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자신을 부정하며 평생을 살아가도록 누군가에게 강요한다는 건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자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자기부정이 아닐 수 없다. 오늘처럼 봄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타인에 대한 혐오와 비난을 일삼는 몇몇 인간의 잘못을 꾸짖는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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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의 농밀한 침묵 속으로 시간이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침묵 속을 유영하는 시간. 부챗살처럼 퍼지는 봄햇살 속으로 유영하는 시간을 타고 흐르다 보면 태곳적 원시의 세계를 만날 듯한 착각이 드는 주말의 아침. 고등학생인 아들은 코로나19의 위험을 뒤로한 채 학원으로 향했고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 타워>를 읽고 있다.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는 '여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자신의 작품에 무척이나 공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녀의 청순한 문체는 때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배가시키는 효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나만의 주관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컨대 악인을 묘사할 때 행동이나 표정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무덤덤하게 표현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영화에서도 표정이 없는 사이코패스가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작가의 내면에 깔린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과 결핍, 그리고 약자와 소수를 바라보는 그녀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녀의 작품 세계가 대부분 '정상적인 부부관계''정상적인 상처의 처리'를 부정하는 까닭에 그녀의 작품 전체를 싫어하는 독자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바깥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다 보니 다소 게을러진 게 사실이다. 물론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것처럼 일관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말이다. 웃기는 건 코로나19가 유행하지 않았던 지난해만 하더라도 바쁜 일상에 쫓기면서도 읽은 책은 언제든 리뷰로 남길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요즘은 읽었던 책의 리뷰를 쓰기는커녕 책을 다 읽은 후 책을 책꽂이에 꽂는 일조차 버겁고 힘겹게만 느껴진다. 읽은 책과 아직 읽지 않은 책이 혼재한 채 집안 곳곳에서 굴러다닌다. 대한민국에서 코로나19의 빠른 제거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과 이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혼재하는 것처럼. 어느 예일대 박사도 말하지 않았던가. 한국 정부의 적절한 코로나19 대응 시스템과 성숙한 시민의식 사이에도 '검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노년층과 믿음으로 뭉친 이단 신천지 집단, 그리고 미통당의 코로나19 정치화 등이 변수로 존재한다고.

 

베란다 창문을 건너온 봄햇살이 거실 바닥을 아지랑이처럼 핥고 있다.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시간. 주일 오전의 여유로운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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