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 - 되는 일이 없을 때 읽으면 용기가 되는 이야기
하주현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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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는 자기계발서의 대부분이 성공담이나 성공 노하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아니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그렇다. 오히려 저자 자신의 실패담이나 실패로부터 깨우친 것을 책으로 엮었을 때,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은 소설을 비롯한 대부분의 문학 장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쁨보다는 슬픔,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 성공보다는 실패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마음에 더 깊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의 기저에는 우리 삶의 근본 원리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듯 보인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삶은 실패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인간적 성숙을 이룬 영웅담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조차도 실패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 모든 것들이 따지고 보면 실패담이다. 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다른 분야를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인 까닭에 다른 여러 분야의 측면에서는 역시 실패담일 수밖에 없다. 다만 본인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가 성공한 분야 이외의 다른 분야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 까닭에 성공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이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기준은 자신의 삶을 다른 어떤 것과 견주어 비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자신의 삶에 무리한 욕심을 낸 까닭에 이 분야에 조금, 저 분야에 또 조금의 시간을 허비했다면 그것은 실패담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다른 이의 삶을 기웃대지만 않는다면 우리 모두의 삶은 성공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쉽게 말하는 '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유들'로 바꾸어 가는 얘기를 전하고 싶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니까. 언젠가 희망 없이 털썩 주저앉아 있을 때 내 이야기를 떠올리며 의지와 희망으로 툭툭 털고 일어난다면 이 책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p.19 '프롤로그' 중에서)


<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를 쓴 하주현 역시 다른 이의 삶을 기웃대거나 자신이 선택한 삶을 후회하지 않은 채 오직 외길을 향해 달려온 케이스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의 삶을 성공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스스로는 극구 부정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혹은 저자 스스로가 다른 분야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삶은 순식간에 실패담이 되고 만다. 다른 분야에서 특별한 성취를 이룬 사람은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하는 비교의 기준(예컨대 재산이나 명성, 권력 등)으로 보더라도 그녀의 삶은 특별할 게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에는 쥐도 많았다. 그것도 슈퍼 사이즈의 쥐! 이곳 바퀴벌레와 쥐는 모두 슈퍼 사이즈였다. 새벽에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일어나면 쥐가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보다 더 당당해서 오히려 쥐가 사는 집에 내가 얹혀사는 기분이었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그리는 밝은 뉴욕의 뒤에는 늘 어둠이 깔려 있었다."  (p.129)


저자의 이력을 보면 화려하기 그지없다. 코넬 대학교에서 호텔과 레스토랑 경영학 석사를 졸업하고 포시즌스 호텔 뉴욕, 리츠칼튼 호텔 서울, 미국 플로리다, 펜타곤 시티, 호주 시드니와 미슐랭 3스타 쉐프들의 레스토랑 뉴욕 다니엘, 르 버나딘, 라틀리에 드 조엘 로부숑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2013년 한국으로 돌아와 프랑스 식료품 브랜드 포숑의 한국 디렉터, 2015년 신세계 그룹 신세계 푸드 외식 팀 영업팀장과 레스케이프 호텔 식음 팀장을 거쳤다고 하니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녀의 출신 배경이 '금수저'려니 착각할 수도 있겠다.


"나는 국내외 대기업과 중소기업, 개인 기업을 아우르며 말단 직원에서부터 임원, 그리고 조그만 베이커리의 오너까지 차근차근 성장했다. 다양한 위치와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경험이 쌓였다. 누구나 그렇듯 나에게 다시 지나간 시간이 주어진다면 좀 더 잘 준비해서 더 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내 인생을 뒤로 되돌릴 순 없다. 대신 후배들이 지나간 나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방식대로 젊음과 열정적인 삶을 잘 써내려 가길 바란다.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p.226 '에필로그' 중에서)


저자 하주현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기적처럼 일구어낸 작은 성취들을 기록한 이 책, <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는 자기계발서라기엔 다분히 문학적이며 가독력이 높고, 삶에 지친 이들에게 큰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선 수준 높은 자기계발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나는 저자의 삶 역시 누구나가 넘볼 수 있는 평범한 분야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결코 저자의 성취를 폄훼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노력이나 열정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섞인 것도 아니다. 다만 각자의 삶이 이룩한 성취가 어떻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다른 분야를 기웃대지만 않는다면 그러한 삶을 사는 모든 이의 삶이 성공담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저자 하주현의 삶이 성공담이듯 나와 우리 모두의 삶이 성공담으로 평가될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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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코앞이라 그런지 때 아닌 복고 바람이 거셉니다. 토속 신앙이랄 수도 있고, 미신이랄 수도 있는 이 전통은 야당의 대선 후보 또는 그 부인에 의해 작금의 유행이 촉발된 듯한데 제 주변에서도 온통 난리입니다. 용하다는 점집을 묻는 사람들이며, 신년 액막이를 하기 위해 굿을 하려는데 그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묻는 사람 등 잊혀가던 무속신앙이 21세기 대한민국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운세와 함께 코로나19의 종식이 언제쯤 가능할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 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갑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용하다는 '거니 도사'를 만날 방법은 없고, 도력은 그만 못하지만 차선책으로 건진법사나 해우스님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군요. 어릴 적 만화영화에서 만났던 무도사, 배추도사에 이어 건진법사까지 합쳐 놓으면 올해 김장은 걱정이 없을 듯합니다. 하나 아쉬운 건 건진법사 앞에 절임도사 한 명쯤 끼워넣어도 참 좋겠지만 말입니다.

 

저의 초등학교 친구 한 명도 서울의 모 여대 근처에서 전통 무속신앙(소위 점집)을 지켜나가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직업군인이었던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군에서 제대한 후 점집을 차렸다는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지라 뭐라 조언을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놀랐던 건 사실입니다. 복비라도 들고 점을 보러 갈까, 하고 몇 번이나 시도를 하다가도 나의 어릴 적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점을 본다는 건 이 업계의 규정상 도리에 맞지 않는 듯하여 그만두었습니다. 야당의 대선 후보 역시 자신의 장모를 재판하는 판사가 그와 사법연수원 동기로 각별한 사인인데도 기피신청을 하지 않아 욕을 먹는 것처럼 저와 초등학교 친구인 '00 거사'는 각별한 사이임에도 기피신청을 하지 않고 점을 본다는 건 욕을 먹어 마땅한 일이겠지요.

 

이제 보니 또 한 명의 친구가 무속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친구는 무제한급 유도선수였는데 하라는 동계훈련은 하지 않고 산에 들어가 풍수지리학을 연마하던 친구는 그 후 속세에 나와 가엾은 중생들을 인도하며 부산에서 전통신앙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친구의 고향도 강원도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어쩌면 야당 대선후보의 멘토라는 무정 스님과도 친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산에 갈 일이 있으면 한 번 정중히 물어봐야겠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우리네 삶이라는데 영험하다는 '거니 도사'는 자신이 청와대에 입성하여 영빈관도 옮기고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굿이라도 한판 벌일지 모르겠습니다. '거니 도사'가 주관하는 천도제가 열리기만 한다면 저도 돼지머리에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넣을 요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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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2-01-2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아아..우주선발사 성공이니 뭐니 하는 시대에 이게 무슨 선사시대도 아니고 ㅜ

꼼쥐 2022-01-28 16:02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재미 삼아 점을 보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마는 한 국가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와 그의 부인이 전적으로 무속신앙에 의존한다는 게 참 어처구니없습니다.
 
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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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일기를 읽을 때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어깨가 움츠러드는 긴장감에 휩싸이곤 한다. 책으로 출간되어 읽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락된 일기이든 개인의 사적 비밀이 담긴, 책상 서랍에 꽁꽁 숨겨둔 비밀 일기이든 가리지 않고 일기라는 이름이 달린 글을 읽고 있노라면 언제나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학창 시절, 형이나 누나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다 들켜서 죽지 않을 만큼 혼쭐이 났던 경험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주눅 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일기를 읽을 때는 언제나 내용 위주로 후다닥 읽는 것은 물론 한두 줄의 중요 문장만 머릿속에 기억한 채 원래 있던 자리에 가지런히 두고 조용히 물러나는 걸 원칙으로 하게 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황정은 작가의 『일기日記』를 책으로 읽으면서도 나는 내내 주변의 눈치를 살폈고, 금방이라도 누군가 내 방문을 왈칵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불안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책을 읽었으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긴장감으로 인해 눈을 통해 들어온 문장은 뇌를 통해 쉽게 이해되거나 기억되지 않았다.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몰래 훔쳐 읽는 것만 같았고, 꽁꽁 숨겨둬야 할 이야기들을 나만 알고 있는 듯해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는 나와 동거인의 나이를 잘 세지 않는다. 소설을 쓰는 일은 여우에 홀려 여우굴에 들어가는 일과 얼마간 닮았다. 백지를 바라보다가 한 계절, 두 계절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봄비 내릴 때 책상 앞에 앉았는데 소설 한편을 마무리하고 나오니 낙엽이 떨어지는 때,라는 패턴으로 시간이 흐르는 일을 직업으로 택해 살다보니 나이를 띄엄띄엄 생각하거나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p.32)

 

내가 황정은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었던 건 아마도 <百의 그림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 시절의 나는 박민규 작가의 <핑퐁>이나 <카스테라>, 천명관 작가의 <고래>처럼 문체가 특이하거나 창의성이 뛰어난 작품들에 열광하고 있던 터라 황정은 작가의 <百의 그림자> 역시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디디의 우산>이나 <연년세세>도 출간과 동시에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나는 황정은이라는 이름 석자만 기억할 뿐 그녀에 대해 도통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소설 잘 쓰는 작가일 뿐.

 

첫 장인「일기日記」와 그다음 장인 「일 년一年」은 파주로 이사한 작가의 달라진 일상과 코로나19로 인한 주변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경의중앙선 너머로 호수공원이 보이는, 직선거리로는 150여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철길이 가로지르고 있어 1킬로미터를 걸어야 호수공원의 일부인 소리천에 다다를 수 있는 곳이란다. 작가는 원고노동자로서 몸을 관리하기 위해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고 근력운동과 스트레칭을 하는 등 몸을 지키는 일에 열심인 모습을 쓰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적응을 하며 집앞 공터인 '반달터'를 지켜보았고, 우주를 상상하기도 하고, '명命을 지닌 존재들의' 안녕을 빌기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 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  (p.41)

 

「책과 책꽂이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과 「민요상 책꽂이」에는 어린 조카들에 대한 이야기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에는 작가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인 「빨강머리 앤」에 대한 작가의 솔직한 평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목포행木浦行」은 2017년 이후 매년 목포신항을 방문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산보」는 작가가 돌보는 화분들과 걷기에 관한 이야기를, 쿠키를 먹는 것처러 읽을 수 있는 일기를 목적하고 썼다는 「쿠키 일기」, 그리고 「고사리를 말리려고」와 「흔痕」에는 작가의 과거가 담겨 있다. 작가의 아픈 과거를 읽다 보면 공감할 수 잇는 아픔 한 자락이 길게 여운을 남긴다.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갈 수 있도록 '일기日記'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p.197 '작가의 말' 중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살금살금 겨울비가 내렸다. 점심을 먹고 조심스레 빗길을 걸었다. 먼짓내가 사라진 가까운 공원의 풍경을 눈에 넣으며 나는 누군가의 아픔을 생각했고,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게 썩 나쁜 일은 아니라며 자위했다. 누군가 다녀갔는지 허공에서 보행을 하는 운동기구는 주인을 잃고 한동안 흔들렸다. 살금살금 비가 내렸고, 조용조용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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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꼴값을 떠네!"라는 말로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꼴값'은 사실 '얼굴값'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지만 '꼴값하네' 혹은 '꼴값 떠네'라고 이르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통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나 과장스런 몸짓 자체에 꽤나 부정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다. 물론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사대부의 남정네들, 그것도 얼굴값 하는 남정네들에 대한 거부감 혹은 안하무인의 태도는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감정은 시대가 바뀌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우리들 의식 곳곳에 남아 있다가 어떤 상황에서 불현듯 툭 하고 불거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여인네도 있었던 모양이다. 야당의 대선 후보 부인이 바로 그렇다. 그녀와 한 인터넷 언론 기자와의 전화 통화 내용 중 한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보수들은 챙겨주는 것은 확실하지, 그렇게 뭐 공짜로 부려먹거나 이런 일은 없지. 그래서 미투가 별로 안 터지잖아. 미투 터지는 게 다 돈 안 챙겨주니까 터지는 게 아니야. 돈은 없지, 바람은 피워야겠지. 이해는 다 가잖아. 나는 다 이해하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이 대목만 들어보면 바람피우는 데 익숙한 남정네들의 입장에서 그녀는 보살과 다름이 없다. 이해의 폭이 바다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어느 신문사에서는 '걸 크러시'라는 제목을 뽑아 찬양 기사도 내지 않았던가. 나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꼴값을 떨어도 이런 꼴값이 없다.

 

나는 그녀의 말을 소위 검사의 부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바람피우는 것에 대한) 그 정도의 포용력과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이해했다. 이른바 남정네가 꼴값을 떨어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러려니' 하고 마음속으로만 삭혀야 한다는 것, 그게 여인네의 도리인 것이다. 이런 태도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그걸 또 '걸 크러시'라고 칭송하는 언론사는 또 뭐고. 세상 참 가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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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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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 하면 많은 사람들이 1순위로 꼽는 것 중 하나가 '교회의 몰락'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개신교의 몰락일 수도 있고, 목사로 지칭되는 개신교의 목회자에 대한 불신과 그들의 세속화에 대한 염증쯤으로 요약할 수도 있겠다. 그와 같은 현상이 유독 대한민국에서 크게 불거졌던 데는 공동체를 중시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일상화된 우리 국민의 높은 시민의식이 크게 한몫했는지도 모른다. 교회를 중심으로 외부인에 대한 배타성과 그들만의 폐쇄성이 상존하는 교회의 태도가 코로나 시국에 무척이나 이기적으로 보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테다. 감염병 예방을 위해서 온라인 예배를 강조했던 정부 방침을 무시하면서 대면 예배를 강행했던 일부 교회를 중심으로 대규모 확진자가 연일 발생했던 것은 물론 그와 같은 사태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로 인해 주변의 상인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 주민들도 한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으니 교회를 좋게 볼 수만은 없었던 게 사실. 지금 당장 코로나가 종식된다고 할지라도 교회에 대한 안 좋았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안녕을 도외시한 일부 교회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교회는 다 그렇다'는 식의 일반화는 건전한 교회마저 적대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마저 약화시킨다. 하기야 황금만능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팽배한 21세기에 이르러 보이지 않는 신의 권능보다는 돈의 위력이 이를 완전히 대체하였다는 시각이 우세한데 종교가 무슨 필요이고, 믿음이 뭔 소용이겠나.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고, 절대자를 찾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에 믿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함께 그들의 말을 경청할 필요는 더욱 절실해지지 않았을까.

 

"희망과 기대감은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 삶의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내일의 천국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지금 우리의 삶이 인간다운 삶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가 헛된 희망과 거짓된 기대로 과대 포장한 선물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종교인들이 스스로 자기 모습을 돌아보고, 불안한 인간 존재에게 신실하고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써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p.15 '이야기를 시작하며' 중에서)

 

<라틴어 수업>으로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한동일의 신작 에세이 <믿는 인간에 대하여>는 어쩌면 성직자 신분인 저자가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참회의 기록인 동시에 자신과 종교가 다른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공존의 악수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20, 30대의 탈脫종교 현상은 종교 인구의 고령화와 전체 종교 인구의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통계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는 마당에 종교인이 나서서 자신들이 믿는 종교만 옳고, 다른 종교는 옳지 않다고 한다거나 비종교인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종교는 어쩌면 설 자리를 잃고 소멸할지도 모른다. 한동일 저자 역시 그와 같은 긴박한 심정에서 이 책을 구상했을 터, 저자의 경험과 한 인간으로서 겪는 고뇌를 숨김없이 드러낸 이 책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인간의 고통은 인간 사회가 만들어 온 구조적인 문제가 그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 탓에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사라진 사회에서 이웃끼리 서로 고통을 주고받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나 내가 믿는 종교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나와 종교가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비난하며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그를 구제해야 할 죄인으로 보며 다가가지 않아야 합니다."  (p.242)

 

이 책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교, 이슬람, 유대교의 성지가 모두 모여 있는 예루살렘에서 한 달간 머물렀던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도 하고, 각자의 종교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분리장벽을 세우고 전쟁도 불사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며, 신의 존재와 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했음을 털어놓기도 한다. 또한 저자는 코로나 정국을 통과하면서 종교인이 취할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자유'에만 큰 방점을 찍고 행동한다면 사회나 이웃과 불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을 믿고 그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나와 내가 속한 종교 공동체의 행동이 이웃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웃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p.137)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신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모두 인간에게 달려있다’고 한 저자의 말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곱씹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비단 믿는 자들에 대하여 던지는 말은 아니었을 터,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의 그와 같은 거룩한 모습을 여러 번 반복하여 보면 볼수록 돈과 신이 경쟁하는 작금의 사태는 조금씩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믿는 자들이 나서서 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다면 종교 무용론이 발붙일 자리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냉담자가 냉담을 풀고 성당의 주일 미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믿는 자들의 올바른 태도일 터, 중언부언 변명 같지 않은 변명으로 리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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