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지도 -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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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끝이 뭉툭하게 닳은 연필 한 자루만 손에 쥐어 줘도 마냥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잘 써지지 않는 연필심에 침을 발라가며 삐뚤빼뚤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의미도 없는 낙서를 하면서 온종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시절. 삶이 흘러가는 방향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자라는 키만큼이나 수북수북 행복이 쌓여가던 시절. 계절이 오가는 길목에 허름한 아지트 하나만 있어도 행복했던 기억을 가득가득 담을 수 있었던 시절. 그러나 세상 모든 것에 깃들던 행복이 어느 순간 한 뼘 사진 속으로 오그라들었고, 행복은 체험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만 보는 눈요깃감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나에겐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났던 것일까?

 

행복은 어쩌면 행복에 대한 아무 관념이 없던 어린 시절에나 맛볼 수 있는, 유효기간이 매우 짧은 경험일지도 모른다. '뭔가 관찰하는 행동만으로 관찰 대상을 변화시킨다'는 하이젠베르크 원리가 작동하는 순간, 이를테면 성인이 된 당신이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는 지금 행복한가?' 하면서 하루에 12번쯤 질문을 던지는 순간 어린 시절의 흔했던 행복은 그 성질이 변하여 다시는 그런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맛보던 순수했던 행복.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행복의 가짓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헤아릴 수 없는 행복의 그라디에이션 속에서 우리들 각자는 자신이 찾는 행복을 잃은 채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식에 대한 걱정과 당부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주저리주저리 엉뚱한 말만 늘어놓다 잘 있으라는 인사말로 끝을 맺는 부모님의 편지처럼 성인이 된 우리는 행복에 대한 욕심과 갈망이 너무 깊고 다양해서 도저히 이룰 수 없고 노력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꿈속의 샹그릴라로 변하게 한 것은 아닌지...

 

기자 출신의 작가 에릭 와이너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행복하다고 인정받는 세계 각국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행복이란 주제를 통찰한 여행 산문집 <행복의 지도>를 완성했으니 말이다. 네덜란드, 스위스, 부탄, 카타르, 아이슬란드, 몰도바, 태국, 영국, 인도, 미국을 돌면서 작가는 '그곳에서 살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처음의 상상을 몸소 실천하고 그에 대한 깨달음과 소회를 책으로 썼다. 그러나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어느 동화 속 이야기처럼 작가 스스로가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었나 보다.

 

"네덜란드의 관용은 일상 속에서 정확히 어떤 모습일까? 우선 세 가지가 떠오른다. 마약, 성매매, 자전거 타기. 네덜란드에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합법이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미리 조치를 취하기만 한다면, 이 세 가지 모두 쉽사리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탈 때 헬멧을 쓰는 것이 그런 조치다."  (p.41)

 

흔히 행복을 찾는 여행이라고 하면 자신의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내면에서 들끓는 욕심을 인식하고 이를 잠재우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거나,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시기심과 질투 등 행복을 방해하는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심리적 처방을 찾아 떠나는 내적 여행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행복에 대한 탐구를 핑계로 공간적 이동을 요하는 여행을 선택했다. 말하자면 작가는 행복이 그 나라만의 자연경관과 문화적 배경에 의해 탄생된 독자적 산물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어쩌면 행복 탐구를 빌미로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잔혹한 기후와 철저한 고립 앞에서 아이슬란드인들은 절망 때문에 술독에 빠져 사는 삶을 쉽사리 선택할 수도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그랬다. 하지만 이 바이킹의 강인한 아들딸들은 정오의 하늘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검은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다른 삶을 선택했다. 행복하게 술독에 빠지는 삶. 내가 보기에 그건 현명한 선택이다. 사실 어둠 속에서 달리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p.298)

 

국가가 나서서 국민 행복 총량을 높이는 정책을 펴는 부탄, 국민에게 어지간한 월급쟁이 연봉보다 많은 용돈을 나눠 주는 카타르, 실패가 권장되는 나라 아이슬란드, 지구에서 가장 덜 행복한 나라 몰도바, 모순덩어리의 국가 인도, 유럽의 여러 나라와 저자의 고향인 미국 등을 돌아본 작가는 '행복의 본질에 대해 포괄적으로 일반화할 사람은 바보 아니면 철학자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철학자도 아니고 바보도 물론 아닌 작가가 행복의 본질을 밝힐 수는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작가는 행복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돈은 중요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돈이 우리 생각대로 기능하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중요하다. 친구도 중요하다. 시기심은 해롭다.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하는 것도 그렇다. 바닷가는 선택 사항이다. 신뢰는 그렇지 않다. 감사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기서 감하 더 나아가는 건 종잡을 수 없는 바다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같다. 행복은 미꾸라지 같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들을 많이 만났다."  (P.521 '에필로그' 중에서)

 

행복에 목말라하는 현대인들은 독서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버트란트 러셀의 행복론을 읽기도 하고, 천 근 무게의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누군가가 하는 행복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하고, 행복을 위해서라면 반 백 년도 더 된 자신의 습관을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행복에 이르렀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행복은 다만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 삶 전체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목적일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마음이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에 이르는 저마다 다른 거리를 갖고 있는 까닭에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음식을 맛볼지라도 행복의 감도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마음이 행복에 이르는 거리는 몇 미터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지금 시속 몇 킬로미터의 속도로 행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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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우라고 절망의 오늘을 희망의 내일로 바꾸라고 국민은 윤석열을 불러냈고 국민은 윤석열을 키워냈습니다."는 광고 문구를 듣는 국민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정치인의 광고라는 게 뭐 다 거기서 거기이겠습니다만 대선이라는 빅 이벤트는 어쩌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를 지지하는 누군가는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테고 그를 지지하지 않는 또 다른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광고라며 눈을 질끈 감거나 채널을 돌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의 광고가 합당했다고 생각하는 일인입니다. 그를 지지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광고 속 멘트를 합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느냐고요? 그렇습니다. 그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지만 그가 재직했던 검찰 조직 내에서도, 혹은 그가 사랑하는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그는 철저히 불공정과 몰상식을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측근이었던 한 모 검사 혹은 손 모 검사의 비리에 대해서도, 장모를 비롯한 처가의 비리에 대해서도 그는 못 본 척 눈곱만치도 파헤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덮음으로써 몸소 '불공정과 몰상식은 이런 것이다' 하는 모습을 국민 모두에게 알렸던 것이지요. 게다가 그는 모든 보수 언론(대한민국 전체 언론일 수도 있겠지만)을 장악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측근 혹은 가족의 비리는 일체 드러나지 않도록 조처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절망의 오늘을 살게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불공정과 몰상식의 화신인 셈이지요. 불공정과 몰상식으로만 따진다면 대한민국에서 그보다 더 뛰어난 인물은 아마도 찾기 어려울 듯합니다. 국민들의 분노가 그를 키웠고 종국에는 그를 대선판으로 불러내기에 이른 셈이지요.


그는 국민의 분노를 밑거름으로 측근들의 영달과 가족의 부와 자신의 체중을 키웠습니다. 그 모든 게 국민들의 덕분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고마움을 그는 자신의 대선 광고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낸 듯합니다. 피둥피둥 살이 쪄서 쩍벌을 일상화하게 만든 것도, 부정한 돈이 넘쳐나는 까닭에 주택청약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도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 질끈 눈을 감아준 덕분이었습니다. 광고 속 멘트는 전적으로 옳고 합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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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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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을 좋아한다. 콕 집어 좋아할 만한 뚜렷한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시인 특유의 섬세함과 글에 담긴 웅숭깊은 사유가 어쩌면 우둔한 나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시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나로서는 시보다는 산문집이 오히려 읽기에도 편하고 낯설지 않아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지나친 허세가 발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시인이 아닌 일반 에세이스트의 글을 하찮게 여기거나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이걸 글이라고 썼나? 내용도 빈약하고 표현도 거칠고...' 하는 식의 박한 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물론 남들 들으라고 입 밖으로 내는 경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책을 쓴 당사자는 허투루 한 나의 말에 몹시도 귀가 가렵지 않았을까.

 

"방법적 꿈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갖고 있지 않고, 따라서 기억도 상처도 못 이룰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그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향기로운 사탕발림 속에서 내가 공상으로 절여두었던 맛있는 것들을 한 입씩 꺼내 먹는다. 그렇게, 과거를 가진 기억과 시간 밖에 존재하는 방법적 비몽사몽 사이에서 나의 정신은 진자운동을 거듭한다."  (p.21)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역시 제목에 섞인 '시인'이라는 두 글자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살아,/기다리는 것이다./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라고 썼던 시인의 시구와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몇몇 시구들이 마치 오래된 어느 궁궐의 조각난 기왓장처럼 내 기억의 발길에 차여 뒹굴 뿐 시인에 대한 존경이나 독자로서의 팬심이 나를 사로잡았던 건 아니다. 인연이란 그저 시간의 벌판에서 마주치는 하나의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이 고독이라는 어휘와 그것이 뒤에 후광처럼 거느리고 있는 어떤  분위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독을 연기해보고 싶었다. 아니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고독을 실행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내 유년기 최초의 고독 연습이 시작되었다."  (p.106)

 

거친 피부와 광대뼈가 불쑥 솟은 시인의 얼굴은 신산스러웠을 어떤 삶과 연결 지어지곤 한다. 그것이 꼭 시인 자신의 삶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런 얼굴이 갖는 이미지는 어쩌면 고독, 죽음, 우울, 가난, 지병 등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과 연결된 채 더 이상 근접할 수 없는 어떤 거리감을 유지하게 한다. 온갖 어두운 그늘이 얼굴 전체에 덕지덕지 붙은 누군가를 바라보면 볼수록 나 역시 질긴 삶의  악연에 손목을 낚아채일 것 같은 느낌. 시인에게선 그런 불길한 징후가 풍기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시인이 알고 있는 삶의 이면을 반드시 알아내야만 할 것 같은 어떤 책임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카발라가 유대 신비주의라면 수피즘은 이슬람 신비주의인데, 수피즘은 이론보다는 주로 시와 우화를 통해서 가르치지. 재미있는 것은 모든 신비 체계에는 죽음의 주제가 나오는데, 그건 바로 재탄생 혹은 부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지. 죽지 않으면 재탄생, 부활이 가능하지 않으니까. 그러네 그 경우 죽음이란 우리가 두려워 마지않는 물질적, 육체적 죽음의 극복을 뜻하고, 그건 달리 말하자면 죽음이란 없음을 깨닫는 것을 뜻하지. 육체적 죽음이 마지막 목적지로 정해져 있는 인생 프로그램에서 죽음이란 없음을 뜻하는 것, 즉 '죽음'의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모든 신비 체계의 클라이맥스이고, 연금술에서 말하는 현자의 돌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p.168~p.169)

 

시인은 에둘러 말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이 쓰는 산문집의 모든 글을 에둘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시에서 잘 드러나지 않던 시인의 본모습은 산문에서 더 뚜렷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낸다는 건 시인에게도, 우리와 같은 장삼이사에게도 불편하고 꺼려지는 일임에 분명하다. 시인이 산문집의 출간을 꺼리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본업이 아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감추고 싶은 시인의 속내를 끝내 들추어내고 만다. 시인의 기억 속에서 '기억의 병균들'을 끝도 없이 끌어올려 현재라는 도마 위에서 무참히 난도질하는 풍경은 차마 볼 수가 없다.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하는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죄책감을 느낀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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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격이 높아지고 민주주의 선도 국가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촛불 혁명 이후가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현 정부는 높아진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과 친절한 국민성 및 수준 높은 공동체 의식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결과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과거 대한민국의 국민의 공동체 의식이라는 게 아주 보잘것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하는 한 줄 서기는 끼어들기와 편법으로 무너지기 일쑤였고, 시내버스는 물론 고속버스와 시외버스에서도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뒷사람은 생각도 않고 과도하게 의자를 눕히는 일도 빈번하였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열차 안에서도 흡연에 대한 제재는 일체 없었다. 술집은 물론 식당과 커피숍에서도 흡연은 지극히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비좁고 환기가 용이하지 않은 공공 화장실과 같은 곳에서는 담배 연기로 가득 찬 '너구리 굴'이 되는 게 일상이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흡연자들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흡연에 대한 규제가 시작되면서 거의 모든 게 달라졌다. 담배를 물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이도 많이 줄었고, 아파트를 비롯한 식당이나 커피숍 등 실내에서의 흡연도 완전히(?) 사라졌으며, 지하철 안에서의 '쩍벌'이나 고속버스 좌석의 과도한 눕힘도 보기 힘들어졌다.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이자 우리 사회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걸 국민 대다수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흡연자의 권리가 그만큼 축소된 것도 사실이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높아진 시민의식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역행하려는 자는 어느 곳에서도 있게 마련, 내가 사는 아파트인데 담배 좀 피운다고 뭐가 잘못됐냐? 따지는 이도 있고, 지하철에서의 '쩍벌' 행위 및 흡연 등 반사회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 사회 부적응자들을 종종 목격하게도 된다. 물론 인터뷰 도중의 도리도리는 반사회적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맞은편 의자에 구둣발을 올린 이가 지금도 존재한다면 그는 사회 부적응자 혹은 작금의 대한민국 시민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시대적 인물임에 분명하다. 한마디로 '진상' 승객인 셈이다. 아무리 제 돈을 내고 승차한 승객이라 할지라도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손님이 있을 수 있겠어? 의아해하는 분이 있겠지만 진짜로 있다. 그것도 제1야당의 대선 후보란다. 믿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렇듯 대선을 기회로 양분된 대한민국을 경험하고 있다. 평생 동안 대접만 받으며 귀족처럼 살았던 '쭉뻗족'과 달라진 시민의식을 하루도 잊지 않는 평범한 시민들. 그들에게 과연 공동체 의식이란 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 물어볼 수는 없지만 공동체 의식을 강요하기에는 예순이 넘은 그의 나이가 왠지 걸린다. 공중도덕을 가르치고 그것을 하나하나 연습하도록 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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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 방앗간의 편지
알퐁스 도데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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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나 우화처럼 담백하고 꾸밈이 없는 글을 쓴다는 건 오히려 어렵다. 더구나 길이에 제한이 있는 짧은 글을 통해 글쓴이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쉽고 담백한 글을 쓰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찬사와 경탄은 찾아보기 어렵다. 찬사는 고사하고 무시와 조롱이 뒤따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쉽게 읽히는 글일수록 작가의 더 많은 피와 땀이 요구된다는 걸 독자들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뭔 뜻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현학적인 글을 천의무봉의 완벽한 글인 양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나는 이따금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그랭구아르, 이건 자네와 나, 우리 둘만의 속내 이야기인데, 까만 털의 젊은 수컷 영양이 여복이 있었던지 블랑케트의 마음에 든 모양이야. 두 연인은 한두 시간 동안 숲에서 쏘다녔어. 녀석들이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 알고 싶거든 이끼 밑에 숨어서 졸졸 흐르고 있는 수다쟁이 샘물에게 물어보게."  (p.45 '스갱 씨의 염소' 중에서)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집 <풍차 방앗간의 편지>는 「레벤망」지와 「르피가로」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으로, 책에 실린 단편 소설들은 대부분 알퐁스 도데의 고향인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씌었다. 프로방스의 날씨, 풍경, 전설 등을 소재로 하여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가미된 아름다운 작품은 읽는 이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의 소설은 동정심이 많은 인간성과 사물 및 개인의 신비에 대한 외경심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모파상이나 찰스 디킨스와도 유사점이 있다고 평가된다.


"나는 프로방스 농부들이 이야기할 때 곁들이는 멋진 지방 속담이나 대중적인 속담 혹은 격언 중에서 이보다 더 생생하고 독특한 속담은 들어보지 못했다. 나의 풍차 방앗간에서 60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앙심을 품고 복수를 벼르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이렇게 내뱉는다. "저 사람! 조심들 하게! 7년 동안이나 뒷발질을 벼르고 별렀던 교황의 노새 같은 사람이니까!" 나는 도대체 이 속담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교황의 노새가 어떤 것이며, 또 7년 동안이나 참았다는 뒷발질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려고 꽤 오랫동안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수소문했다."  (p.68 '교황의 노새' 중에서)


작품 중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시골의 풍경이 변하게 되고 농경사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지켜오던 전통이나 풍습이 파괴되고 급기야 농촌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지중해 연안 지방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이는 증기 제분 공장이 들어서면서 일거리를 잃게 된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로 대표된다. 뿐만 아니라 <메뚜기 떼>처럼 작가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사실에 기반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세관원>, <황금 두뇌를 가진 사내의 전설> 등 비극적인 내용의 작품도 있다.


"경제적 고통과 오랜 지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끈기 있게 극복해 가면서 창작 생활에 온 힘을 기울인 도대의 모든 작품에는 소외된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 현실에 대한 씁쓸하고도 냉정한 인식, 당시 프랑스 사회에 대한 예리한 풍속 묘사 등 생생한 감동이 녹아 있다."  (p.292 '역자 후기' 중에서)


알퐁스 도데의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평생 종지기로 살면서 아름다운 동화를 남긴 아동 문학가 권정생 선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지병과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맑은 눈을 잃지 않았기에 도데의 작품 속에서도, 권정생 작가의 작품 속에서도 순수함에 깃든 푸른 감동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평생을 고위 공직자로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난한 자의 편에 서지 않았던 자가 표를 위해서라면 서민의 대변자인 양 잘도 꾸며대는 작금의 세상에서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성 회복, 바로 그것이 아닐까. 알퐁스 도데의 <풍차 방앗간의 편지>를 읽는다는 건 누군가를 향해 보복의 정치를 꿈꾸는 이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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