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 - 오늘 치는 파도는 내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딱 한 번의 파도니까
김은정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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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이 현재 근무하고 있는 현재의 직업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드러나곤 한다. 예컨대 운동선수가 우연히 했던 짧은 인터뷰에서, 사업가가 취미로 그린 한 장의 그림에서, 혹은 정치인이 쓴 몇 줄의 일기 등에서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한 사람의 솔직한 인생관을 확연히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리 감추고 포장하려 해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동안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살아갈 수는 없는 법, '설마' 하는 짧은 순간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한 사람의 전부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가끔 사는 것이 고되게 느껴진다. 그럴 때 추천하고 싶은 것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다. 어떤 것을 열렬히 좋아해 본 사람의 인생은 이전의 인생과는 달라진다고 믿는다. 애호하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세계가 있다. 무언가를 좋아함으로써 새롭게 보이는 세상, 세밀한 결을 손으로 천천히 살펴야만 비로소 보이는 작은 세계가 있다. 내게는 그것이 그림이었지만, 당신에게는 그것이 음식일 수도, 재즈일 수도, 어쩌면 연극이거나 테니스일 수도 있다. 좋아하는 것에 한껏 마음을 내어 주는 일, 그 일은 당신을 더 먼 세계로 데려가 줄 것이다."  (p.235~p.236)


홍콩에서 라이센스 캐릭터 비즈니스를 30년간 이어오며 작가로, 사업가로, 아트 콜렉터로, 혹은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1인 다역의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김은정 작가의 에세이 <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는 230여 쪽의 그닥 두껍지 않은 분량의 책이다. 나는 추석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도 전 어느 날 쫓기는 듯 후루룩 읽어놓고도 짧은 리뷰를 쓰는 데 애를 먹었다. 어떤 식으로 서두를 시작해야 할지, 어떤 내용으로 작가의 인생과 나의 경험을 한 데 엮어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고 난 지금, 겨우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아 글을 쓰려니 생각은 중구난방 사방으로 흩어질 뿐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이 없다고, 삶이 너무 짧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살아가는 걸 보면 진정 인생이 한 번뿐임을 알고 있는 사람 같지 않다. 일 년 뒤면 기억도 하지 못할 일 때문에 소중한 지금을 허비하고, 마치 영원히 삶이 계속될 것처럼 시간을 낭비한다."  (p.85)


'즐기는 사람은 더 오래, 더 멀리까지 갈 수 있다', '지붕은 해가 맑을 때 수리하는 거야', '천천히 뛰어들고 천천히 떠오르기', '삶에서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를 좋아함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작은 세계'의 각 장의 소제목에서 읽히는 것처럼 이 책은 작가의 삶 전반을 다루는 자전적 에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KBS 기자였던 부친과 임대업을 하던 모친 덕분에 어렵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 자랐던 작가는 어머니의 잘못된 빚보증으로 인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결국 작가는 장학금을 주는 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고, 엄격하고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회사에 취직하여 같은 직장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다고 한다.


삶에서 주어지는 깨달음은 대부분이 후불제인 까닭에 시간과 노력을 통한 경험이 투입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작가가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자신이 경험했던 많은 일들을 통하여 그때마다 스스로 깨우쳤던 많은 가르침과 조언들을 작가 자신에게만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의 어깨를 딛고 서 더 멀리 내다볼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산소통의 4/5 정도를 쓰면 쓰면 다시 물 위로 올라오기 시작해야 한다. 올라가는 데도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가 너무 올라가기 위한 산소를 남겨 두지 않는 다이버처럼 사리 않았나 생각했다. 돌아갈 힘을 남겨 두지 않고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았나. 그래서 너무 지쳐 버리지 않았나. 어쩌면 이렇게 다쳐 버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었다."  (p.140)


연휴 뒤의 한 주는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하루하루가 어찌나 길고 고단하게 느껴지던지 퇴근과 동시에 풀썩 다리가 꺾이곤 했다. 휴식이 없는 삶은 이쯤에서 삶을 마감하겠다는 뜻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적당한 노동과 노동의 피로를 풀어줄 적정 시간의 휴식을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핑계 같지만 진작 읽었던 이 책의 리뷰를 이제야 마감하는 것도 그동안 내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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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우리는 '상식'이라는 모자를 가볍게 눌러쓴 채 생활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크고 작은 욕심의 바람이 불어오지만 그때마다 상식의 모자가 벗겨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 주는 것은 '양심'이라는 턱끈입니다. 말하자면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주 작은 욕심에도 상식의 모자를 쉽게 벗어던진다는 사실입니다. 양심의 영역에 속하는 많은 것들 - 이른바 정의, 연민, 배려 등 -은 우리들 각자가 쓴 상식의 모자를 통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평가되거나 드러나게 됩니다.


'공정과 상식'을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었던 현 정부의 지난 몇 개월을 곰곰 되짚어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정직한 집안에서는 굳이 '정직'을 가훈으로 내세우지 않는 것처럼 현 정부는 태생적으로 '공정과 상식'은 전혀 없거나 많이 부족한 상태였던 까닭에 그와 같은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었음이 점점 명확해지는 요즘입니다. 말하자면 공정이니 상식이니 하는 것들은 소나 줘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현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상식의 모자는 양심의 턱끈에 의해 지켜지는 까닭에 현 정부의 구성원들은 양심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대선 전에는 국민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었거나 알면서도 눈 감아 준 것일 테지요.


현 정부의 과오를 지적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기에 첨언하자면 이렇습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욕심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한다는 것입니다. 뭔 일만 터지면 거짓말 일색으로 언론에 궁색한 변명을 하는 정부의 태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지요. 언젠가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들의 악행은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처벌을 받고야 말 것입니다.


바쁘고 번잡했던 명절 연휴 이후에 맞는 조용한 주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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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2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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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 출발점에 따라 간절함이나 논리의 구체성이 달라진다. 아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작금의 세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자기 객체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타자화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분별과 객관화 작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자신이 스스로를 평가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게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의 비판과 문제의식이 없다면 사회를 지배하고 이끄는 정치인과 소수 엘리트 계층의 자각과 반성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정희진 작가의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는 여성학 연구자인 작가가 자신이 읽었던 책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과 애씀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것은 자신의 말과 글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자 학자로서의 보편적 당위성을 지키는 분투의 과정이기도 하다. 약자로서 여성의 입장을 좀 봐 달라는 식의 구걸의 언어가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지이자 동등한 지위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평등의 언어를 희망하고 있다.


"극복, 사랑, 혐오......, 목적이 무엇이든 상대를 알기 위해 "벼랑까지 걸어간" 적이 있는가. 나는 한국 사회에서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주류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만이 지닐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의문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 끝을 보고야 마는 것은 최고의 저항이다.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끝을 보려는 이들은 비교나 절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끝을 보고야 만 사람의 씁쓸함. 진실은 달콤하지 않다."  (p.39~p.40)


스스로에 대한 어정쩡한 타협이나 적당한 선에서의 물러섬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의 특징은 결과론적인 외로움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게으름에 천착하는 보편적 인간상에 대한 경멸이나 기피로부터 자신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경멸하는 다수의 편에 서서 그들과 화해하고 그들의 습성을 십분 이해하노라, 마음에도 없는 말로 그들을 다독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끝을 보고야 만 사람의 씁쓸함'을 곱씹을망정 게으름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보편적 인간의 대열에 서기는 죽기보다 싫은 것이다.


1장 '몸에서 글이 나온다', 2장 '우리는 타인을 위해 산다', 3장 '내게 '여성'은 고통이자 자원이다'를 통해 작가가 읽고 정리했던 60여 편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나 주장을 리뷰 형식으로 피력한 책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는 작가의 주관적 견해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할 만큼의 완벽한 논리 구조를 갖추고 있다. 물론 독자의 성향이나 이념적 기울기에 따라 호불호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한국 사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는 선호될 수밖에 없다. 생각은 엄청난 노동이기 때문이다."  (p.165)


삶의 범주는 대개 세 가지로 분류된다고 나는 믿는다. 자신의 삶을 목표로 하는 어떤 지향점을 향해 채찍질하고 이끄는 극기의 삶, 사회적 관습이나 사회 구성원의 시선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자유를 추구하는 풀어짐의 삶, 모든 사회 구성원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존을 유지하는 도피 혹은 은둔의 삶이 그것이다. 인간은 대개 상황에 따라 세 유형을 번갈아가며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하나의 유형을 선택하고 그 방식을 극단적으로 고수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풀어짐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 곁에 조력자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현대인의 삶에 필요한 제반 지식을 팽개친 채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만 몰두하는 영화감독이나 우주 연구에 매진하는 천체 물리학자 혹은 카사노바처럼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곁에서 그들의 생존을 돌볼 조력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어떤 삶을 선택하든 필연적으로 후회와 번민을 안게 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끝없이 곁눈질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이다.


"홍준표의 '돼지 흥분제 사건'으로 나는 두 가지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 국가 안보를 내세워 표를 얻으려는 사람, 정확히 말하면 국민 안전을 대국민 협박용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사실과 이 땅에서 오래 살려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p.242)


추석이 코앞이다. 그러나 태풍 '힌남노'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람들은 명절이 그저 즐겁지만은 않을 터,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인간도 하나의 동물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허울뿐인 명예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삶도 죽음도 하나의 자연 현상에 불과할 뿐 특별할 게 없지 않은가. 정희진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것이 추석 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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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아침에 산을 찾는 사람도 제법 늘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은 겨울이 되기 전에, 혹은 짧은 가을의 한두 주를 즐기다가 산으로부터 영영 멀어지곤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쏟아지는 졸음을 쫓아가며 어두컴컴한 새벽 산길을 오르는 일이 어디 쉬운가 말이지. 아무튼 나는 그 대견한 사람들의 산행을 마음속으로 조용히 응원하며 습관적으로 산을 오른다.


매일 아침 산을 오르기 전에 늘 지나치게 되는 공터가 하나 있다. 공터 건너편에는 초등학교가 있고, 공터를 끼고 흐르는 편도 1차선의 이면도로를 따라 오래된 아파트들이 줄 지어 서 있다. 공터에 있던 가건물의 마트를 부수고 넓은 택지로 정비를 한 게 몇 년 전. 땅의 소유주는 아마도 자신의 땅을 택지로 조성하여 팔면 큰돈을 벌 수 있겠거니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동안 땅을 사겠다고 나서는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던 것인지 줄곧 공터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땅의 주인은 공터에 택지를 구획하여 비워 두고 택지를 제외한 통행로는 이미 아스팔트 포장까지 다 마쳤다. 그러나 새로운 주인을 찾지 못하고 몇 년째 방치된 공터에는 포장도로를 따라 버스며 대형 화물 트럭이 빼곡히 주차되었고, 아침이면 산을 오르기 힘겨워하는 노인분들의 산책 코스가 된 지 오래였다. 포장이 되지 않은 공간에는 껑충하게 자란 강아지풀과 듬성듬성 솟아 있는 달맞이꽃과 이제는 씨앗이 영근 개망초며 인진쑥의 무리들이 마치 자신들이 주인입네 주장하는 듯하다. 아, 그리고 여뀌! 생명력 질긴 여뀌도 공간을 메우고 있다.


제삼자인 나야 이렇듯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지만 주인 입장에서는 보면 볼수록 복장 터질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끝을 모르고 오르기만 하던 부동산 시세가 이렇듯 곤두박질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땅을 판다는 문구와 전화번호가 적힌 팻말이 주인의 허탈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다. 모르긴 몰라도 주인 역시 답답한 미래를 앉아서만 기다리지는 않았을 터 용하다는 점쟁이를 수없이 찾아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용한 점쟁이가 한 명 있다. 그녀가 작년에 했던 예언 역시 적중률 100%를 자랑한다. <서울의 소리> 이 모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녀는 "권력이라는 게 잡으면 우리가 안 시켜도 경찰들이 알아서 입건해요. 그게 무서운 거지"라는 말을 했다. 한마디로 알아서 길 거라는 얘기였다. 작금의 상황은 그녀의 예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그녀의 범죄 의혹은 줄줄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거나 받을 예정이고, 그녀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던 언론사는 압수수색과 함께 기소를 당하고 있다. 평소에 도사들을 만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는 그녀의 신통력이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미처 몰랐다. 나조차도 복채를 내고 점을 보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매일 아침 지나치는 공터의 주인에게도 소개하고 싶은 여인. 그녀에게는 앞날을 내다보는 신통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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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9-03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력의 사냥개들이 알아서 척척 꼬리 흔들며 물어주네요. 다시 청계천 나가야 할까 봐요!!!

꼼쥐 2022-09-07 16:21   좋아요 0 | URL
날씨도 선선해졌으니 다시 광장에 나가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저들은 어쩌면 눈도 깜짝 안 할지도 모르지만.
 
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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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삶을 가장 단순하게 정리하는 방법은 죽음이다. 죽음 이외에 달리 어떤 방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조리한 삶을 외면하지 않은 채 끝까지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건 신이 인간의 내면에 심어 놓은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두려움이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부조리한 삶을 지속하도록 하는 신의 마지막 안배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안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를 단박에 비틀어버리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했던 "비틀어버림, 그게 죽음이다(Le faux, c'est mort)."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 이제 떼를 지어 나가 목숨을 끊어라, 그러면 여러분의 정신에 명예 훈장이 드리워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렇게 멍청하게 군다면, 침묵하겠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위에서 움직여야만 하는 습지대, 짙은 안개가 드리워진 습지대로부터 그저 몇 가지 소소한 자료와 그저 그런 이야기들 그 이상의 것을 환하게 밝혀내기 위한 준비 작업일 따름이다."  (p.64)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을 읽는 독자라면 의당 '자연사'와 자유죽음(혹은 자살)' 사이에서의 윤리의식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와 그렇다면 자연사는 도덕적으로 옳고 자유죽음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렇게 따져 들어가다 보면 그렇다면 자연사란 무엇인가? 에 이르게 된다. 예컨대 20대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40대의 젊은 가장이 자연재해로 사망하거나 50대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자연사인가? 그렇다면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60대의 누군가가 스스로의 결정(주관적인 결정)에 의해 자유죽음을 선택하였다면 그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고 그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며 애도를 표해야 하는가? 아메리는 이처럼 비논리적인 관습에 의문을 표한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로부터 습득한 죽음의 윤리에 의해 스스로의 생각을 말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죽음은 확실히 우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이라는 특수 경우에도 그럴까? 자유죽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서 떼어낸다고 믿는다. 내 체험의 공간 안에서 자유죽음은 우발적이지 않다. 이른바 '자연죽음'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 자유죽음이다. 프로젝트로서의 자유죽음은 분명 자유에 따른 선택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으로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자유죽음은 새로운 우발적 사건일 뿐이다. 의도된 것이었으나 우발적으로 끝나고 만다는 점에서 자유죽음은 완전히 앞뒤가 바뀐 것이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타이르던 거짓말에 비해 유일하게 진솔한 게 자유죽음이다. 다른 것처럼 주장했으나 결국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p.254~p.255)


자유죽음은 아메리의 판단처럼 자유에 따른 선택이 분명하지만 자유죽음의 과정은 충동자살이나 동반자살과는 구별된다고 믿는다. 자유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과 용기가 필요했을 터, 그 실행과 성공은 별개로 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허한 말이지만 심리학에서는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 '나르시시즘의 위기' 혹은 '성장 과정의 결손'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죽는 것만 못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간다는 것, 존엄을 포기하면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내재된 지나친 편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죽음을 선택한 이의 결과는 그가 의도한 대로 귀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 삶의 안식과 평안을 원하는 이가 자유죽음을 선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얻는 것은 평안한 삶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죽음을 선택한 결과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아메리는 이 책에서 자살자는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근원적인 진정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일견 옳다. 그러나 공허한 결과에 대해 아메리 자신도 동의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자유죽음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눈앞의 현실에서 직면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언제든 자신은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  (p.264)


아우슈비츠 생환자였던 장 아메리는 1976년 이 책이 출간되고 2년 뒤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책의 출간과 함께 자살 옹호론자라는 오명과 자살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아메리 역시 자유죽음의 무의미성과 당당한 삶의 길로 나설 것을 적극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는 다만 자유죽음에 대한 편견과 그들에 대한 낙인찍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합리적'이라는 말도 삶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 실제로 자유죽음에 성공한 이의 경우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이쪽 세상의 말이자 의미임을 절감하게 된다.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긴 이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합리적'이라고 한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합리적'이란 말은 살아 있는 자들의 무의미한 담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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