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매년 12월이면 마음은 마냥 분주하고 그에 따라주지 못하는 몸은 언제나 걸리적거린다.

몸과 마음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시기는 일 년 중 이때가 유일하지 싶다.  그런 까닭에 책상 앞에 차분히 앉아 책에 몰입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오늘 이것을 끝내야 하는데...', '아, 이번주까지는 그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하고 생각하다 보면 펼쳐 놓은 책의 같은 페이지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하여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책을 놓지 못한다.

 

후지와라 신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의 작품<동양기행1,2>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사진작가이자 여행가이며 에세이스트인 후지와라 신야, 그때만 해도 나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생소한 이름이었다.  사진작가의 여행기는 주로 글보다 사진에 먼저 시선을 빼앗기곤 하지만 후지와라 신야의 글은 달랐다.  나는 그의 글에 깊이 빠져 사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인도 방랑>, <티베트 방랑>, <인생의 낮잠>, <메멘토 모리>, <황천의 개> 등 그의 작품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었다.  그의 신작이 반가운 이유는 내가 그의 팬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쓴 에세이는 언제나 애틋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시집이 팔리지 않는 현실에 또는 책이 팔리지 않는 세태에 글쟁이로 살고자 하는 치열한 몸부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로 말하자면 시인이 쓴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시인이 시인으로 남고자 하는 마음이야 왜 없으랴.  나는 그래서 시인의 에세이를 즐겨 읽으며 그 현실에 늘 가슴 아파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하면 으레 <월든>을 떠올리곤 한다.  자연과 더불어, 어느 길가에 피어난 작은 꽃처럼 살다 간 그의 삶을 생각할 때 숙연함을 넘어 막연한 동경을 품게 된다.  현실의 일상에서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하늘의 별처럼 닿을 수 없는 꿈을 꾸게 된다.  그의 초창기 작품이라는데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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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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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한 구절 밑줄을 긋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생각할수록 부럽기 그지없다.  나는 그가 쓴 대부분의 책들을 읽어왔지만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읽지 않았었다.  부족한 사탕을 두고두고 아껴 먹으려고 몰래 감추어 둔 것은 아니다.  제목만 보고 내용을 지레 짐작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종교 비판서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구미가 당기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최근에 읽은 어느 책에선가(요즘은 책을 읽어도 리뷰를 잘 쓰지 않는 탓에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의 인용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나는 비로소 내가 그동안 책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책은 종교 비판서가 아닐 뿐더러 오히려 종교는 인류가 오랜 세월을 거쳐 세밀하게 구축한 지적 창조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종교 찬양서라고 해야 옳다.  다만 종교인들이 가질 수 있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무비판적 신봉이나 타종교에 대한 일방적 비판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저자는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종교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비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무신론자에게는 일종의 오락이 될 수도 있다.  냉정한 종교 비판자들은 신자들의 아둔함을 가차 없이 속속들이 이 세상에 드러내는 일에서 상당한 기쁨을 발견하며, 자신의 적이야말로 철저한 바보이거나 광인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비로소 공격을 멈춘다.  이런 과제가 나름의 만족감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이슈는 하느님이 존재하느냐 않느냐 여부가 아니라, 만약 하느님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이라면 이런 논의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철저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롭고,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때때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전제이다.  또한 종교의 관념과 실천 가운데 일부를 세속적인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분명히 흥미롭다는 것이다."   (P.12) 

 

이 책은 1. 교리가 없는 지혜, 2. 공동체, 3. 친절, 4.교육, 5. 자애, 6.비관주의, 7. 관점, 8. 미술, 9. 건축, 10.제도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소제목만 훑어보아도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을 아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종교는 알게 모르게 인간의 행위 전체에 관여하고 법이나 제도가 무관심하거나 방치한 일부 영역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존 종교가 제시해 온 여러 가지 인류 문제의 해결책마저 무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초창기 종교의 초자연적인 맥락을 종교가 갖는 여러 유용성과 분리하여 우리가 흡수하여야 할(또는 흡수하기를 바라는) 실용적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가끔 반대론자의 반박을 불러 일으킬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의 폭 넓은 지식과 사고의 깊이를 생각할 때, 과연 그럴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 책의 내용 중 흥미롭지 않은 부분을 거의 찾을 수 없었지만 그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고, 비관주의적 세계관 일부를 적는다. 

 

"비관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해서 삶에서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관주의자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뛰어난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법이 없으므로, 가끔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소한 성공에도 깜짝 놀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현대의 세속적 낙관주의자들, 곧 자격에 대한 감각이 잘 발달한 낙관주의자들은 지상 낙원의 건설에 바쁜 나머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신비스러운 현상들을 대부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P.203)

 

부모님 모두 세속적인 유대인이셨기에 자신도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가정에서 자라게 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을 선뜻 수용하기도 어렵고, 종교학자도 아닌 그가 여타 종교의 교리나 수행법을 연구했을 리도 만무하기에 저자의 논거는 다분히 기독교적인 측면으로 편중되고 일반론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우리가 종교에서 얻을 수 있는 실용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이 책을 읽은 효과는 충분하리라고 본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영국인 알랭 드 보통, 그의 특이한 이력만큼이나  독특하고 기발한 발상이 그의 저서에서 언제까지고 빛을 발할 수 있기를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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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밤하늘에도 한 무리의 고마운 달빛이 쏟아집니다.

보름이 가까웠나 봅니다.

까마득한 기억의 과거가 또랑또랑 내 눈을 응시하는 듯하여 살짝 부끄러워집니다.

'잘 사느냐? 제대로 살고 있느냐?'

과거의 나는 그렇게 묻고 있습니다.

 

달빛 속에서의 이 우연한 만남.

그렇습니다.

시간의 길 위에서 돌부리에 걸린 듯한 이 우연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대면하게 합니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향해

추수가 끝난 논바닥을 발이 젖는 줄도 모르고 달려가던,

얼기설기 엮은 수수깡 울 안에 앉아

비껴가는 겨울 칼바람에 외려 안온함을 느끼던,

저수지가 큰 외눈 천천히 닫아거는 그 저물녘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야 했음을

서둘러 어른이 된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아이의 눈은 오직 아이였을 때에만

아이의 귀는 오직 아이였을 때에만

아이의 심장은 오직 아이였을 때에만

그 순결의 밤을 지킬 수 있음을

어른이 된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보름이 가까웠는지

무료한 달빛이 어제의 고요를 깨우고 있습니다.

 

  한 민족과 한 국가가 성숙하기까지는 숱한 시련과 반성, 그리고 성찰(省察)의 교훈이

  퇴적(堆積)되어야 한다. - A.J. 토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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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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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작가 '위화'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허삼관 매혈기>를 비롯하여 <형제>, <무더운 여름>, <인생> 등 많은 작품이 있는데 나는 그 중 <인생>을 감명깊게 읽었다.  물론 <허삼관 매혈기>도 좋았다.  그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두보의 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문체가 시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의 짧고 명료한 문체에서 유유자적하는 도인의 시선처럼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세상에 소설가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독자의 마음 언저리에 닿을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위화의 작품이 인기있는 이유는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인 듯싶다.

 

2009년 미국 퍼모나 대학에서 있었던 중국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며 썼다는 위화의 신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었다.  중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등 저자가 가려 뽑은 10개의 단어에 담아 문화 대혁명 이후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파헤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국가로서의 중국이 변화하는 만큼 그 안에 사는 민중의 삶도 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가 될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잔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P.353)

 

돌이켜 보면 나는 중국의 문화 혁명기에 버금가는 산업화의 시기에 자란 탓에 작가의 이야기가 남의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5.18 만주화 운동, 외국 기자가 몰래 촬영한 그때의 실상을 영상으로 접했을 때 나는 충격과 함께 그 잔인함에 경악했었다.  교정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자보가 연일 나붙고, 학생회관 벽면을 장식하던 걸개그림과 교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오가던 화염병과 최루탄, 피 흘리며 끌려가는 학생들, 학사주점의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서 구슬프게 들려오던 민중가요, 국가 권력의 강압에 마냥 무기력하기만 했던 학생들의 한숨 소리와 막걸리잔 부딪는 소리...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닌데 사람들의 기억은 세월보다 빨리 잊혀진다.  이런 현상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시대의 격랑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 세월이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우리는 그것을 잃어가고 있다.  작가는 그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아프게 쓰고 있는 것이다.

 

책을 덮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을 때 문득 떠오르는 시가 있다.  이화인 시인의 시 한 수.  위화 작가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은 독자라면 나즉나즉 읊어보면 좋을 듯하다.

 

길 위에서 길을 잃다/ 이화인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남겨진 한 뼘의 간격조차 좁히지 못하고

스쳐 지나쳐야만 했던 사람들

시선 속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한발 비켜서야만 했던 일들

문득 작은 파문으로 밀려와

흔들릴 때마다,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산그늘이 어둠보다

한걸음 먼저 찾아드는 산방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먼지와 땟국에 물들지 않고 산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을 때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내게 주어진 길을 가면서도

진정,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지 내게 되묻곤 한다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길을 가면서도 길 위에서 길을 잃고

길 위에서 길을 찾아 헤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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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여성 피의자와 초임 검사의 스캔들이 연일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검사의 비리가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그것은 세간 사람들의 입방아에만 오르내릴 뿐 정식으로 사건화된 적도 없었고 그로 인해 처벌을 받거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사람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그런데 이 무소불위의 권력도 점차 시들어가는지 최근에는 여기 저기서 검사의 비리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고 비등한 여론 탓인지 검사가 구속되는가 하면 직위에서 자진하여 물러나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건의 진위여부가 궁금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문제라면 나는 관심조차 없다.  검찰청에 근무하는 수사검사의 인권의식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는 모르겠으나 8,90년대의 검사들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피의자가 일단 검사실에 호출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강압적이고 공포스런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아야만 했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절도 혐의로 끌려온 어느 노인이 새파란 검사로부터 벽 보고 꿇어앉으라는 명령을 듣고도 분노하기는커녕 파랗게 질려 검사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다.  결국 인권의 향상은 제도의 문제에 앞서 사람의 의식이 각성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검찰개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쟁적 교육구조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제도가 조금 바뀐다고 하여 배려나 관용, 정의와 사랑 같은 정신적 사고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뉴스에서 보도되었듯이 30대의 초임 검사가 10살 이상 연상인 40대의 여성 피의자를 상대로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얼핏 생각하면 뭐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검사가 그것도 젊은 여성이 아닌 40대의 피의자를 상대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맘만 먹으면 젊고 매력적인 여자와 정상적(그가 유부남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정상적이지 않겠지만)인 관계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검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시점에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필이면 왜 그 여인을 탐했을까? 하는 다분히 속물적인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그 검사나 여성 피의자를 비하하거나 인신공격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이것은 내 개인적인 궁금증일 뿐이다. 

내가 제시한 문제의 해답은 당사자만이 대답할 수 있겠지만 내가 추측하기로는 그 여성이 상당히 매력적이었거나, 해당 검사가 성도착증적 병리 현상을 갖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지금껏 내려온 관행을 초임 검사가 굳게 믿었거나일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검사는 자신의 행위가 세간에 알려질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믿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대한민국 검사에게 그깟(?) 일로 책임을 묻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어제는 올해 수능을 본 아이들 중 두 명의 남학생이 내 숙소를 방문했었다.  10시도 넘은 늦은 시각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첫월급을 받았다고 했다.  내 숙소에서 공부하는 후배들도 생각났고, 1년 동안 자신들의 공부를 도와준 나도 생각났다는 거였다.(짜식들, 기특하기는)  손에는 먹을 게 잔뜩 들려 있었다.

 

어제 그 애들이 내게 한 질문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위에 적은 검사의 스캔들을 접하고 내가 느꼈던 속물적 궁금증을 들먹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자신의 단점이나 과오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나는 이번 대선에 그런 사람에게 투표할 생각이다.  지난 정권의 잘못을 과감히 파헤치고 죄가 있다면 엄격하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 그런 사람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뽑고 싶은 것이다.  해방 이후 수많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았지만 이제껏 그런 사람은 없었다.  혹시 모를 자신의 죄과도 들추어질까봐 지난 정권의 과오는 언제나 슬쩍 덮어주고 지나갔었다.  그것을 '화해와 용서'라는 포장으로 감싼 채.

 

우리는 그런 과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공로조차 불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신 풍조는 사회 전반에 팽배하다.  허물을 감춘 채 공로만 말하는 사회.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까?  '공은 공이고 과는 과다.'라는 명제를 진심으로 믿게 하려면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먼저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저서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돌아가는지를 자랑할 때, 우리는 정작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둔감하게 된다.  우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이나 후회하는 일에 대해서조차도 감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자라날 기회를 얻는다.  그 외의 다른 이야기는 단지 쇼맨십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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