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 - 테오에세이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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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테오의 책은 처음이다.  사람 사이에서도 '첫만남'이 중요한 것처럼 한 작가가 쓴 여러 권의 책 중에서 어떤 책을 처음 읽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는 향후의 책읽기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책은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처음에 받았던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추천이나 우연히 읽었던 한 부분만으로 선택했던 책들 중에는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주 좋았거나 크게 실망했거나.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은 작가가 볼리비아를 여행하고 쓴 여행 에세이이다.  책은 제본에서부터 일반의 보통 책과는 사뭇 달랐다.  옆으로 넘기는 대부분의 책이 일반적이라면 이 책은 상하로 넘기도록 제본되어 있다.  마치 청첩장이나 연하장처럼 말이다.  세로보다는 가로 비율이 더 큰 사진을 선호하는 듯 보이는 작가의 취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어체로 씌어진 그의 글은 사춘기 소녀의 감성처럼 때로는 오글거리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꼬로이꼬로 향하는 길만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로 이어진 길,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길은 예외 없이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  삶 전체를 걸고 길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  그 정도 가치를 걸지 않고는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    (p.17 '죽음의 도로'중에서) 

 

'글쓰기'라는 것이 '말하기'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어서 때로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시간만 죽이는 경우가 있다.  말이란 본디 하면 할수록 할 얘기가 더 많아지는 게 아니던가.  한동안 전화 통화를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다시 전화를 걸기가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처럼 말하는 습관은 관성의 법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쏟아지는 장맛비처럼 한동안 쉼 없이 터져나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한 날만 지속되기도 한다.  내 의지만으로 그 시기를 조절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의 글은 계속된다.  그저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멈추고 다시 시작했을 그 시간의 여백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가 향한 남미의 나라.  작가는 자신의 여행이 '사람을 여행하는 여행이자 사람이 궁금한 여행'이라고 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여행에게로 향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행지에서 부닥뜨리는 과도한 감상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독자의 감정에 불을 지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직 내 삶을 기록하기 위한 한낱 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서울처럼 분주한 정글을 걷기 위해서는 더 많은 카카오가 필요한데도 나는 여전히 카카오를 찾지 못합니다.  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선물하지도 못합니다.  대도시를 걷는 사람들이 쉽게 피곤해지는 건 순전히 카카오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선한 카카오를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피곤하지만 대도시 사람들은 대정글 사람들보다 카카오만큼 더 고단합니다."    (p.142 '정글 과일 카카오'중에서)

 

나는 사실 볼리비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티티카카 호수가 있는 마을 코파까바나와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소금 사막, 언제 적 일인지도 모르는 볼리비아 혁명 정도가 다일 것이다.  지구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자연의 신비쯤으로 여겼던 우유니 소금 사막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느낌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지면에 적고 있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남미의 고원지대를 나는 전혀 상상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는 황홀경에는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립니다.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것들은 죽음 이후에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쌓인 눈물이 모여 구름이 되면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립니다.  소금 사막이 놓아주지 않아서, 진득하게 썩지 못해서, 떠날 수 없던 것들이 눈물을 흘려, 비로소 몸을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제야 사막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 기적이 시작됩니다.  사막이 호수가 되고, 오랜 슬픔이 호수를 떠나는 기적."    (p.258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중에서)  

 

옛날 잉카문명이 번성했던 곳, 볼리비아.  우리보다는 조금 더 가난하고, 조금 더 순수하고, 조금 더 자연을 존중하는 듯 보이는 볼리비아의 사람들.  작가는 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떠나온 서울의, 대한민국의 바쁜 일상과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여행자의 비현실적인 일상 속으로 독자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 여유와 행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행복은 일종의 서열과 같은 것이어서 내가 가진 행복의 서열이 어떤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느끼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자랑스럽게 행복했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조언합니다.  자기보다 높은 행복은 쳐다보지 말라고.  그러면 불행해진다고.  낮은 행복을 갖고 있으면서 높은 행복을 쳐다보는 건 삼가야 하는 거라고.  자기보다 낮은 수준의 행복을 보며 만족하며 살아가라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그러나 나는 지금 다른 방식으로 행복합니다.  우월이 아니라 다름, 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남다르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p.280  '소금 호텔에 밤이 내리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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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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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르르!' 말매미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지난 주 월요일 아침 등산로에서 처음 들었던 매미 소리보다 조금은 우렁차게 변한 듯도 하고, 이따금 시끄러운 것도 같고, 월요일 이후로 매미 소리를 다시 들었었나 되짚어 보기도 한다.  그 매미 울음 소리 때문이었는지 머릿속으로는 낱글자들이 오그르르 몰려든다.  장마가 한창인 요즘, 맑은 햇살은 참 오랜만이다.  '매미들도 반가웠던 게지.'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얽히는 이 오전의 헐떡임 속으로 한 권의 책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좀머 씨 이야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책이다.  책을 읽고 많은 생각들이 오갔지만 결국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책들이 있다.  <좀머씨 이야기>도 그런 책이다.  넉넉 잡아 서너 시간이면 다 읽을 만큼 부담이 없었던 책.  그래서 더 생각이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세어보지는 않았어도 줄잡아 서너 번은 읽지 않았겠어?  그런데도 리뷰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그랬다.  <좀머 씨 이야기>는 논리적인 언어의 흐름으로 정리되거나 저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이미지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좀머 씨 이야기>의 리뷰를 쓰고자 한다.  비논리적인 이미지를 글로 옮긴다는 것이 모험과 다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1.  관계 맺기와 "나를 좀 제발 그냥 놔 두시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 대부분이 언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신의 말에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빈말이 섞이게 마련이다.  예컨대 '언제 술이나 한 잔 하자'라든가 '오늘따라 옷이 멋져 보이는군요' 하는 식의 상투적인 말들은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좀머 씨 이야기>에서 작가는 이 빈말에 대한 폐해를 독자들에게 여러 번 주지시킨다.

 

""...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그래서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따위의 말들을 아버지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박이 떨어진 도로에 이슬비가 내리던 날, 좀머 아저씨 옆으로 차를 몰면서 그런 틀에 박힌 빈말을 아버지가 열린 창문을 통해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p.34)

 

또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내가 남 몰래 짝사랑하던 카롤리나의 빈말이 그것이다.  카롤리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호수 윗마을에 살았고 나만 홀로 아랫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하굣길에 카롤리나와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것은 오직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카롤리나가 했던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라는 말에 나는 한껏 들뜨게 되지만 정작 월요일에 있었던 카롤리나의 말은 "나 오늘 너랑 같이 안가."였다.

 

"한참 동안 변명이 이어졌지만 갑자기 이상하게 귀가 멍멍하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것을 머리에 기억해 두기는커녕 제대로 듣지도 못하였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그 애가 말을 끝낸 다음 갑자기 돌아서더니 윗마을 쪽을 향해 샛노란 옷을 휘날리며 다른 여자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잽싸게 달렸다는 것뿐이다."    (p.55)

 

마지막으로 풍켈 선생님의 말은 이 소설에서 극단적으로 작용한다.  결국 나는 풍켈 선생님의 말로 인해 삶에서의 모든 관계를 끊고자 자살을 결심한다.  물론 미수로 끝나지만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내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올림 바 건반 위에 구역질나는 코딱지를 붙여 놓은 미스 풍켈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딱 한 번 필요로 하였을 때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건만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어긋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모양만 지켜보았을 뿐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세상사람들이 자비롭다고 하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그런 모든 것들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토록 비열한 세상에서 노력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못된 악에 질식해 버리도록 두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이나잘 먹고 잘해 보라지!  나를 포함시키지는 말고 말이다!  나는 앞으로는 결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지 않으리라!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리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겠다!  그것도 지금 당장!"    (p.83)

 

2. 인간 소외와 편견

   

<좀머 씨 이야기>는 화자인 '나'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다. 그는 아주 어린 꼬마에서부터 고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으로 자라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제목은 <좀머씨 이야기>인데 말이다.  이 책에서 좀머씨는 차창에 스쳐가는 풍경처럼 그려질 뿐이다.

 

"마을에서 좀머 아저씨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름이 페터 좀머인지 혹은 파울 좀머인지 아니면 하인리히 좀머인지 혹은 프란츠 크사버 좀머인지 알지 못했으며, 좀머 박사인지 혹은 좀머 교수인지 아니면 좀머 박사 교수인지도 모르는 채, 사람들은 그를 유일하게 <좀머 씨>라는 이름만으로 알고 있었다.  좀머 아저씨의 직업이 무엇인지 아니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혹은 과거에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했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p.15)

 

좀머 아저씨는 긴 호두나무 지팡이를 짚고 텅 빈 배낭을 멘 채 밤이고 낮이고 걷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를 다니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잰 걸음으로 다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좀머 씨는 한마디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인간이었다.  으레 그렇듯 소외된 인간을 향한 무수한 억측과 소문이 따라붙는 것은 좀머 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리타 슈팅엘마이어가 말해주었는데요.  좀머 씨는 항상 경련을 한대요.  온몸이 다 떨린대요.  리타가 그러는데 꼭 안달뱅이처럼 근육이 다 움직인대요.  의자에 앉으려고만 해도 몸이 먼저 떨린대요.  그래서 자기가 떠는 것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걷는 거래요."    (p.38)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그것이 자발적이든 또는 그렇지 않든 간에 언제나 부정적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삶은 항상 불행할 것이라는 삶 전체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혹시 범죄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 이르기까지 사실이 아닌 주관적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경우에는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한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렇게 믿을 뿐이다.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지 않던가.

 

좀머 씨는 결국 호수에 빠져 자살한다.  소설 속의 '나'는 먼 거리에서 좀머 아저씨의 마지막 모습을 그저 지켜만 보았을 뿐 '좀머 아저씨!  정지!  뒤로!'라고 소리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러 마을로 달려가지도 않았으며, 아저씨를 구할 수 있는 배나 뗏목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아저씨의 모습은 사라졌다.  밀짚모자만이 동그마니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무지하게 길게 느껴졌던 30초 혹은 1분이 지난 다음 몇 개의 물방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밀짚모자만이 아주 천천히 남서쪽을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둑어둑한 원경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오랫동안 그것을 쳐다보았다."    (p.111)

 

어떤 목적이나 희망도 없이 무작정 걷기만 하는 좀머 씨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반복되는 그 행위가 바로 우리의 삶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통하여 단순히 관계 맺는 것으로 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다.  소외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군가의 삶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비록 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그와의 만남이 잦았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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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 - 최갑수 골목 산책
최갑수 글.사진 / 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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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골목을 걷고 있노라면 시간의 회벽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추억의 한 장면을 만나곤 한다.  골목을 따라가면 언제나처럼 작은 공터가 나오고 왁자한 아이들이 그곳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비석치기를 하거나, 양갈래머리를 한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다.  때로는 무리에 속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 놀이에 끼이고 싶어 이리저리 기웃대며 놀이를 방해하지만 저녁 어스름이 질 때까지의 골목은 온통 아이들 차지였다.  어둑어둑 해가 지면 아이들은 아쉬움만 한아름 내려 놓고 공터를 떠난다.  호박꽃이 환한 저녁이면 공터 한켠에 놓인 평상으로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밤새 모깃불이 타올랐었다.  이따금 어른들의 이야기가 호박 넝쿨처럼 길게 이어지는 날이면 졸음에 겨운 아이들은 제 어미의 무릎을 베고 곤한 잠에 빠져들고 풀벌레 소리만 별처럼 가득했었다.

 

골목에서는 그때 맡았던 제 어미의 땀내음처럼 아릿한 향수가 밀려오곤 한다.  낮은 담장 넘어 손바닥만한 마당 한켠에선 걸레를 빠는 누이의 모습.  일렁이는 검은 머릿결에 함초롬한 가을 햇살이 소복소복 쌓일 것 같은 오후.  영훈, 종애, 영숙, 정태 같은 낯익은 이름들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만 같다.  '아무개야!  밥 먹어라!' 하는 메아리가 앞산 머리에 쩌렁쩌렁 울릴 것만 같다.  손을 뻗으면 그 정겨운 풍경이 하마면 잡힐 듯한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골목의 옛 모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까치발을 뜨면 안마당까지 훤히 보이던 정겨운 풍경도, 깡통을 차며 놀던 작은 공터도, 세월의 더께가 일던 담배가게도 이제는 모두 아슴아슴 멀어지고 있다.  여행작가 최갑수의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최갑수 골목산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나즈막한 슬레이트 지붕이 골목으로 나란히 펼쳐지는, 골목을 따라 코스모스 여린 데궁이 일렁일 것만 같은 그때의 풍경 속으로 안내한다.

 

"골목을 다니다보면 순수한 사랑으로만 가득 찬 곳에 들어서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바람으로 흔들리는 미루나무의 움직임처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나는 할머니들과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지켜보며 보일러로 따뜻해진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을 때의 느낌을 받았다.  온통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p.240)

 

서울의 부암동이나 북촌 한옥마을에서부터 통영의 동피랑, 청주의 수암골, 부산의 태극도마을, 대전의 복지관길 등 저자의 발길은 전국을 누비고 있다.  건물의 높이가 1m씩 높아질 때마다 남보다 두세 걸음쯤 앞서 걸어야만 했던 우리는 골목의 여유란 그저 게으름의 상징, 청산해야 할 구태의 하나쯤으로 여기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미의 시큼한 땀내음이 물씬 풍겨오던 삶의 터전이 사라진 자리에는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도통 찾을 길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 위압적인 자세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이렇듯 풍경의 변화는 사람들의 일상을 생경하게, 또는 살풍경하게 만들어 놓았다.  추억은 오직 마음 속의 그리움으로만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이 되고 말았다.

 

"나는 지금 수암골 골목에 서 있다.  주홍빛 불이 들어오고 있는 가로등 아래로 단발머리 여자 아이가 뛰어간다.  먼 지붕 위로 별이 돋고 어디선가 졸리운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은 익숙하지만 새롭게 다가온다.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곳.  그곳이 바로 골목이다."    (p.359)

 

언젠가 댐 건설로 인해 자신이 살던 고향을 잃고 실향민 아닌 실향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난적이 있다.  그는 호수 어딘가를 가리키며 자신이 살던 곳이라고 말했었다.  그때 나는 느꼈었다.  '아, 개발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되는구나!'하고 말이다.  개발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음을 그때 알았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체취는 이제는 더 이상 찾기어렵다.  새로이 태어나는 자식들에게 제 부모의 흔적을 지우도록 강요하는 사회를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까.  골목을 보존해야 하는 첫째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은가.

 

뽀얀 가을 햇살 속에 온종일 펄럭였던 이불 홑청처럼 순수한 마음이 흘러가던 곳.  그곳이 바로 골목이었음을 이 책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모퉁이를 돌면 백구가 컹컹 짖던 내 어릴 적 친구의 집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제는 몇 남지도 않은 골목이 부디 무사하기를...  그곳에 흐르던 순수의 마음들이 계단을 오르고, 공터를 돌아 고샅고샅 흩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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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쓰고, 그 글을 '공개'로 설정해 놓았다면

대부분의 블로거들은 자신의 글을 읽은 다른 블로거,

또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반응에 대해 한번쯤은 의식할 듯합니다.

저만 그런가요?(그렇다면 이 글은 순전히 제 주관적인 견해가 되겠지만)

 

아무튼,

저도 가끔은(자주는 아닙니다) 제가 쓴 글에 대해 다른 사람의 반응을

살필 때가 있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번잡한 것을 싫어하고,

명예욕이 넘치거나 시기심이 많은 것도 아닌, 조금은 내성적인 성격인데도 말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도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독자의 반응을 의식한 듯합니다.

대문호 파스칼과 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시간이 날 때 재미삼아 끄적거리는 아마추어의 입장이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직도 제가 궁금해 마지않는 점은 제 글을 읽는 독자의 반응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일에 따라 블로그 방문객의 수에 약간의 편차가 있다고 할지라도,

글을 쓰는 제 입장에서 보면 그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또는 시간적 여유의 유무에 따라(조금 한가한 날은 제가 쓴 글을 훑어 보고 고치기도 함),

좋은 글(제가 보기에 그래도 괜찮다 싶은)과 나쁜 글(형편없어 보이는)로 나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판단은 번번이 빗나가곤 합니다.

 

전혀 공을 들이지 않았던 글('전혀'는 아니겠네요. 조금의)은 오히려

폭발적인 반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이 읽히는 듯 보이는 반면

꽤나 공을 들이고 스스로도 만족해 하던(자뻑인가요?) 글은

그닥 인기가 없더군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죠.

오히려 일관되게 그랬었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궁금해 하지는 않았을 테죠.

참 알 수 없는 일이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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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나를 세운다 - 자전거 세계일주, 나를 향한 50가지 질문
스콧 스톨 지음, 윤덕노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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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체만 그려 놓은 담장의 벽화 앞에 동네 꼬마 몇몇이 옹기종기 모여 낙서를 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끝이 뭉툭해진 연필에 가끔씩 제 침을 묻혀가며 낙서 아닌 낙서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얼굴 윤곽 안에 눈이며, 코며, 입을 그려 넣습니다.  그리고 빈 풍경 안에 알 수 없는 것들을 그리며 때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지켜보기도 합니다.  웬만한 화가의 진지함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빈 곳을 채워갑니다.

 

당연한 것 아닐까요?

어려서는 자신의 경험으로 삶의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이니까요.  한 살 두 살 같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색다른 경험도, 내 삶의 빈 공간도 없어질 즈음이 되면 우리는 이제 삶이라는 것에, 또는 일상이라는 것에 조금쯤 시들해지게 마련입니다.  마치 솔개가 40년 정도 살다 보면 부리는 구부러지고 발톱은 무뎌지며, 날개는 무거워서 날기도 힘든 상황에 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쯤 되면 사람도, 솔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놓이게 됩니다.  솔개는 그런다지요?  높은 바위산으로 올라가 둥지를 틀고는 자신의 부리를 바위에 쪼아 없애버리고는 닳아 없어진 자리에서 새 부리가 나오면, 다시 그 부리로 무뎌진 발톱을 하나씩 뽑고, 무거워진 깃털도 모두 뽑아내어 새로운 발톱과 깃털이 자라게 한다구요.  그렇게 생사를 건 130일을 보냄으로써 40여 년의 새 삶을 살게 된다지요.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욕심으로 무뎌진 감성과, 무료한 일상에 매몰된 두뇌와, 안락에 취해 죽어가는 열정을 되살리지 못한다면 비록 육체는 백 살을 산다 한들 이미 자신의 수명은 그 순간에 다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솔개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제2의 인생을 다시 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 <자전거로 나를 세운다>의 저자인 스콧 스톨은 자전거 여행을 통하여 생사를 건 솔개의 체험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전거 하나로 4년 동안 6대륙 50개국, 4만1444㎞를 일주하였으니까 말이죠.  어쩌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고행의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여행을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도를 던져 버리고 스스로의 방향 감각을 믿으며 발 끝으로 직접 풀을 밟는 감각을 느껴 보려는 것이다.  때로 숲 속에서 길을 잃을 때도 있겠지만 지도 제작자가 표시할 수 없는 세상을 직접 보고 싶었다."    (p.123)

 

저자는 여행을 준비하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과 직업, 절친한 룸메이트, 자신감 등 그를 구성하던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불안감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러다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향해 훌쩍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라는 품 속에서 4년을 보냈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흔한 질문에서부터 자신의 내면에서 메아리치는 떨쳐버릴 수 없는 의문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그 수많은 질문들에 대하여 답을 찾고자 노력한 듯 보입니다.  우리와 똑 닮은 보통 사람의 저자가 들려주는 나름의 답변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생각하는 정답과는 상반된 말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자 자신의 경험과 독자의 인생 경험을 합치면 더 즐거운 인생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자신에게 진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를 두려워 한다.  사람들은 또 왜 자신이 꿈꾸는 것처럼 살지를 못하는지 몰어 보기조차 두려워한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자신을 증명하려는 모험을 시도할 용기조차 없다.  그러니 실패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하지 못한다.  그저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라고 자위할 뿐이다.  그냥 그렇게 지내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p.44)

 

"결과적으로 사람들 대부분은 바깥 세상의 기대에 맞춰 자신을 개조하려고 들거나 아니면 자신의 기대에 맞춰 세상을 살려고 인생을 낭비한다.  그래야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p.420)

 

저자는 이 책에서 '용변은 어디서 보나요?'와 같은 일상적이고도 원초적인 질문에서부터 '행복하세요?'와 같은 철학적이고도 근원적인 질문에 이르기까지의 그가 선정한 50가지의 질문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손이 뒤틀리고 관절이 찢어지는가 하면 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물 한모금을 찾아 극한의 인내력을 감수해야 했던 저자의 경험으로부터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간접경험은 산처럼 커 보입니다.  우리는 저자처럼 훌쩍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악의 인간은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던 <월든>의 작가 소로우의 말처럼 나, 그리고 너는 "최악의 인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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