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만나는 일이 때로는 한심하고 역겨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컨대 오늘 같은 날이 그랬습니다.  잠깐 얼굴이나 보자는 전화에 '합석할 사람이 또 있느냐'고 묻지도 않은 채 '그러마'고 대답했던 것이 제 실수라면 실수였습니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30분쯤 운전을 하여 도착한 약속 장소는 무슨무슨 가든이라는 간판이 걸린, 그닥 마음이 내키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내게 전화를 했던 사람은 도착한 지 꽤 되었는지 고기를 굽는 불판은 검게 그을러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도 두어 개 놓여 있었습니다.  '이거 잘못 걸렸구나.'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를 두고 그냥 돌아설 수도 없어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마음은 영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대작을 하던 사람이 내게 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언젠가 지금과 같은 술좌석에서 몇 번 마주쳤는지 안면이 익은 듯도 하였습니다.  내가 술을 못한다는 것을 익히 아는 지인은 술을 권하지는 않았지만 앞에 앉았던 사람은 내게 한사코 술잔을 쥐어 주며 술을 따랐습니다.  받아만 놓으라면서.

 

삼겹살이 까맣게 타들어가도 두 사람은 도통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마지못해 나는 고기를 굽고 팔자에도 없는 술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습니다.  두 사람은 거나하게 술기운이 올랐는지 말도 되지 않는 주장으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지인의 고향이 경상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앞에서 대작하던 사람의 고향은 내 관심사도 아니었고 지역색으로 누군가를 경멸하거나 헐뜯는 사람을 인간 이하로 보는지라 그 사람이 전라도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술기운이 오른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침을 튀기며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다가 급기야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판에 박힌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사람들은 야비하기 이를 데 없다는 둥, 어디 사람은 뒤통수를 잘 친다는 둥, 어디 사람은 빨갱이라는 둥, 무식하다는 둥 그들의 주장은 하나같이 논리도, 근거도 없는 헛소리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과학적 근거나 논리를 들어 말하라고 몇 번이나 말하였지만, 그들의 뇌 어딘가에는 그들의 조상이나 어느 정치인 또는 일부 언론의 주장이 마이크로 칩으로 내장되어 있는지 앵무새처럼 같은 얘기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인조인간이나 로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결국 그들 둘만을 남겨둔 채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가겠다는 인사도 없이 말입니다.  어찌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허깨비에 불과한 놈들이었습니다.  그런 놈들을 만나기 위해 비싼 연료를 소모한 것도,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 같지도 않은 그런 놈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허깨비들이 비싼 밥을 먹고 있습디다.  아직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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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여름 2013-10-10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완전 싫죠...그런 상황이요 ㅠㅠ
휙 뒤로 던지고 잊어버리세요^^

꼼쥐 2013-10-11 14:0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돌아와서는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지우는 것으로 화풀이를 대신했죠. 그런 인간은 더 이상 만날 가치도 없는 그런 사람이죠.
 
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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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 아랫동서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오랜 암투병 끝에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철저히 개별적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문학 작품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죽음의 모습을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얘기다.  살아 있는 자들은 말과 행동으로써 죽음을 미화하거나 철저히 도외시할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썼던 김훈 작가의 말은 곱씹어 볼 만하다. 

 

살아 있는 자의 입장에서 덧붙이자면 누구나 겪는 '상실의 아픔'도 그렇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을 겪게 마련이지만 그 보평성과는 상관없이 각자가 혼자서 슬퍼하는 것이다.  모든 슬픔은 끝끝내 개별적이며, 흐르는 세월 속에서 홀연 보편성 속으로 스며들다가 결국 망각의 늪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책 <상실의 시대>에서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라고 썼다.  그렇다.  여름의 녹음 속에도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숨어 있었던 것처럼.

 

낮게 드리운 잿빛하늘을 배경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어제부터 나는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을 읽었다.  3년쯤 전에도 나는 이 소설을 읽었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이 책을 읽으면 따뜻한 햇볕이 녹작지근하게 풀어지는 오후에 깊은 단잠에 빠져들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아무런 근심도 없이 말이다.  650쪽에 가까운 작지 않은 책의 볼륨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어쩌면 작가는 평화 속에서 이 책을 썼을지도 모른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삶과 죽음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느꼈었다.  그때 나는 '진리'란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통하여 스며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느낌을 말로 풀어헤칠 자신이 없었고, 나는 결국 리뷰를 쓰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리뷰를 쓸 자신이 없다.  나는 다만 잊고 싶지 않은 책의 구절들을 천천히 메모하면서 나의 느낌을 적고자 한다.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가? 누군가가 어떤 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  매일같이 죽은 이들을 찾아다니지만 이 세 사지만 알 수 있으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일한 인물로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설령 그 사람이 병자였건, 장애를 안고 있었건, 직업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또 인생 경험이 적은 아이 혹은 갓난아기라 하더라도 이 세 가지 질문의 답만 갖추면 어떤 형태로든 만족스럽게 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한 가지라도 좋으니 답을 찾아내 가슴에 새긴다.  때로는 억지나 오해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원래 그런 억지나 오해들까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르니, 이를 두려워하기보다 먼저 그 사람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p.265~p.266)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현상으로서만 기억할 뿐 그가(또는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살다 갔으며, 그로 인해 그의(또는 그녀의)삶은 우리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그 자체로서 엄청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의 삶을 살아 있는 우리로부터 분리시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공 시즈토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편협된 시각을 지적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들은 언어와 물건으로 사체를 장식하고, 그로 인해 고인에게 영원성을 부여하려고 하거나 그 인생에 점수를 매기려 해.  인간이 사는 이유는 사랑도 꿈도 아니야.  세포의 힘이지.  원생동물과 같은 세포의 탐욕스러운 생명력이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고.  인간이라는 종을 존속시키기 위해 발달한 뇌가 이른바 부작용을 일으켜 짚신벌레 같다는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 하고, 사랑이나 일 때문에 사니, 신이나 부처님 같은 성스러운 존재 덕분에 사니, 하고 어리석은 핑계를 만들어낸 거지.  뉴스를 오 분만 보면 그런 변명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어.  인간의 중심을 이루는 세포는 원하는 것을 뺏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먼저 공격하는 쪽으로 작용해.  이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증명된 진리인데,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망상으로 도망쳐.  그럴듯하게 생을 포장하고 죽음을 장식해.  아마 개죽음을 두려워하는 거겠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무의미하다는 것,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원생동물의 죽음과 똑같은 것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두려운 거지."    (p.351~p.352)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사쿠야의 말이다.  소설에서 사쿠야는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고 아내인 나기 유키오는 그렇게 한다.  그의 아내 유키오가 4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후 주인공 시즈토와 동행할 때 사쿠야는 혼령이 되어 아내 유키오에게 등장한다.  삶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쿠야에게서는 허무주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그의 말은 곱씹어 볼 가치가 있다.

 

"당신이 태어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당신이 '애도하는 사람'이 된 데는 가족과 환경, 인생의 상처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당신도 분명 모른다.  그렇게 보였다.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 죽은 이를 잊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차별당하거나 잊혀가는 것에 대한 분노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별 볼일 없는 사망자로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상에 만연한 이런 부담감이 쌓여서, 그리고 그것이 차고 넘쳐서 어떤 이를, 즉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당신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당신 말고도 '애도하는 사람'이 태어나 여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떤 이유로 죽었건 차별하지 않고, 사랑과 감사에 관한 추억에 따라 가슴에 새기고, 그 인물이 살아있었음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걸 원하니까...... 적어도 지금 난 당신을 찾고 있다.  만약 살아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를 할 텐데.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아도, 꼭 '애도하는 사람' 이야기를 할 텐데."    (p.431~p.432)

 

소설 속의 또다른 주인공인 마키노의 말이다.  마키노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악덕 기자로 나온다.  그의 기사는 조작도 서슴지 않는 옐로우 저널리즘의 전형이었지만 시즈토를 우연히 만난 후 그는 변하기 시작한다.  위에 적은 말은 그가 조직 폭력배에 의해 보복을 받고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아무리 악한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삶의 의미와 사랑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시오도 변비가 더 신해져 고생하고 있었다.  모녀가 식탁에 앉아 변비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극히 일상적인 화장실 문제로 고민하는 서로의 모습에, 죽음에 관해서도 탄생에 관해서도 폼나게 말해봐야 소용없어.  인간도 생물이니까 동물이니까 하며 깔깔거렸다.  참 이상한 데서 마음이 통한다 싶었다."    (p.440)

 

(어쩌면 그날의 광경이 그 아이 마음에 새겨졌을지도 몰라.  주목받지 못한 죽음, 아무도 돌이켜 생각하지 않는 죽음이 있다는 현실을 알고, 죽음의 무게는 다르지 않은데 어째서!  하는 슬픔과 함께...... 그 일이 지금 그 아이에게 전국을 걷게 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좋을까.)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조부모의 죽음과 소아 병동 아이들의 죽음, 소중한 친구의 죽음...... 다만 어떤 사람의 죽음을 그 연유에 상관없이 똑같이 애도해야 한다는 생각은, 히로시마를 맞은편에 둔 이 모래사장에서 많은 피서객들의 웃는 얼굴에 둘러싸인 가운데 처음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p.476)

 

위의 두 대목은 주인공 시즈토의 어머니이자 끝까지 시즈토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사카쓰키 준코의 말이다.  준코는 암 말기 환자로서 자신에게 남겨진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남편과 딸 미시오와 함께 집에서 지낸다.  시즈토의 여동생인 미시오는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채 버림을 받았다.  그녀의 오빠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준코는 임신한 딸의 모습을 지켜보며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느낀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이어지나 보다.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p.551)

 

죽음에서 간신히 살아난 마키노의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말은 내 가슴에도 메아리처럼 남았다.  삶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림자처럼 죽음 또한 가득한 세상이다.  누군가는 살아 있는 자의 말이나 장식에 의해 화려하게 장식되고 기억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는 죽음과 동시에 잊혀지기도 한다.  죽어서도 인간은 평등하지 못한 것이다.  그 쓸쓸함을 달래기에는 이 책 <애도하는 사람>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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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나는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페이퍼를 썼었다.  자본주의가 보편화된 현대 세계에서 늙는다는 것, 또는 나이든다는 것은 잊혀지고 감추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도 세월에 따라 늙어간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 들지 않는다.  아직은 젊다고 자신할지라도 '곧', 정말로 '곧' 나이가 들고 신체의 변화를 감지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된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느닷없음'에 당신도 나도 허망하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말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빠라고 불러본 기억이 없다.  가족 모두에게 모질게 굴었던 당신의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나의 아버지와 가슴을 열고 대화할 기회는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의 아버지는 일찍 찾아온 치매로 이제는 가족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기회마저 영원히 닫아버렸다.  엄정한 세월을 이길 수는 없지만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는 있다. 늦지 않았다면 말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책을 읽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대해 조금쯤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흠모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나는 그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비록 니는 그와 마주한 적도, 그의 책을 여러 번 읽은 적도 없지만 단 한 번 읽었던 그의 책은 너무도 강렬하게 내 가슴에 남았다.  어린 시절을 소로와 함께 보냈다는 저자는 분명 행복한 사람일 듯하다.

 

 

 

 

 

 

 

 

오늘처럼 바람이 좋았던 날에는 한 뼘 시인의 글이 그리워진다. 엷게 흐려지는 여름의 색깔들과 먼 시선으로 바라보던 하늘. 무엇을 배우겠다는 의무감을 턱 하니 내려 놓고 편하게 읽을 책이 필요하다. 이 가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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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배신 - 습관처럼 야근하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
니시다 마사키 지음, 김세원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명절이면 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바람에 당혹해 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럴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세세한 것들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그렇게 내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오는 이야기들을 마땅히 제지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기분좋게 만난 자리이니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도 없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형과 함께 자취생활을 했던 내 중,고등학교 시절의 얘기인데 얼마나 자주 들었으면 나의 성장과정을 알 길 없는 조카들도 모두 기억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내 얘기는 횟수를 더할수록 사그라들기는커녕 때로는 더 부풀려지고 지금도 새로운 얘기가 샘솟듯 만들어지고 있는 듯하다.

 

학창시절의 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요, 중증의 활자 중독증 환자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기질적 성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둘러싼 환경이 주원인인 듯하다.  부끄럽게도 나의 아버지는 하루도 술을 거르는 날이 없었고, 그렇게 술에 취해 귀가하면 많지도 않은 가제도구를 부수기도 하고 가족들에게도 폭언과 손찌검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피해, 친구네 집을 일없이 전전하며 밤늦도록 그들의 집에서 책을 읽곤 했다.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에게 맞지 않으려면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고, 악에 받쳐 바락바락 대드는 엄마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 덕분에 친구들의 집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다 읽게 되었다.  시골에서 자란 터라 친구들이 갖고 있는 책도 그 나이에 읽을 만한 책은 많지 않았고, 그런 연유로 나는 어른들이 읽는 어려운 책도 가리지 않고 읽어야 했다.

 

내가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던 형을 좇아 도시로 전학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보다 기뻤고, 다른 어려움쯤이야 기꺼운 마음으로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도시로 나와 처음 계획했던 일은 잠을 세 시간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그동안 읽었던 책에서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수면시간을 11시에서 새벽 2시까지로 한정하였다.  돌이켜보면 치기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정해놓은 규칙을 지키기 위해 지독하게 버텼다.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으면 웃풍이 심한 자취방은 냉기가 감돌았다.  어깨에 담요를 두르지 않으면 책을 읽기 어려웠고, 졸음을 쫓기 위하여 마당 한켠에 있던 수도를 틀어 차가운 수돗물에 한참씩이나 머리를 담그곤 했다.  지금도 큰형은 그랬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때는 동생인 내가 무서웠었다고 말하곤 한다.  새벽의 고요 속에서 한동안 책을 읽다가 정각 다섯 시만 되면 전기밥솥에 쌀을 앉히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 동안 운동을 하고 돌아오면 할 일이 많았다.  간단한 반찬을 준비하여 도시락을 싸고, 형을 깨워 아침을 먹었다.  가방을 챙기고 자전거로 등교를 하면 길었던 아침시간이 마무리되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생활은 계속되었다.  늘 상위권을 유지했던 성적과 부러움으로 가득 찬 친구들의 시선이 보답이라면 보답이었다.  '노력과 그에 대한 보상'이라는 긍정적인 피드백은 '어떤 불가능한 일도 내가 하면 가능한 일로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이어졌고, 신이 있다면 신은 항상 내 편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4년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의 회사 생활을 거친 후 창업을 했다.  단 한 번의 실패도 경험하지 않았던 나에게 사업의 실패는 뼈저린 것이었다.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금 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미련이 발목을 잡았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만 가던 그때 나는 아내에게 심한 독설을 퍼붓기 일쑤였고,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던 아내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책 <노력의 배신>은 '해로운 완벽주의자'의 전형이었던 나를 되돌아 보게 한 책이었다.  어떤 책이든 자신의 얘기를 가감없이 기록한 것이라면 읽는 내내 마음이 거북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다.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실력보다 높은 목표를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인내는 화를 불러올 우려가 있다.  게다가 타인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인내와 참을성을 요구하게 되면 인간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다."    (p.238)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잠시의 여유도 찾을 수 없었던 나로서는 대학교 앞의 커피숍에서 노닥거리는 학생들이나 당구장에서 시간을 죽이는 학생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밥벌레'라고 그들을 비웃었다.  나의 아집과 독선은 결국 사업의 실패와 함께 누그러졌다.

    

삶은 누구에게나 변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 변화가 좋은 방향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멈출 수 없는 변화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현장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상담해왔다는 저자는 그간의 임상 경험과 최신 학술지식을 통해 ‘노력을 멈추는 기술’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해로운 완벽주의자'가 '건전한 완벽주의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베스트 셀러 작가이자 영적 스승인 안젤름 그륀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신뢰하고 숨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당신의 삶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라. 그러면 당신의 샘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내가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 나에게 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나를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은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도 가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을 늦은 나이에 실패와 시련을 통해 배웠다.  항상 되물어야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인내인가?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것은 아닌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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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종교가 필요했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많은 분들이 "네."라고 대답하겠지요.  물론 "아니오."라고 단언하듯 말하는 분들도 있을 듯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순간 '나도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닥 선량한(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충실히 믿고 따른다는 의미에서) 종교인이라고 말할 처지는 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종교가 어떤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두고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저는 무신론자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과연 우리의 삶에서 종교는 그 자체로서 필요한 것일까?'하는 질문과 '필요하다면 어떤 시기와 상황이 적절할까?'하는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할 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종교 따위는 필요없는 것일 수도,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일 수도, 또는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짧지 않은 인생 전반에 있어 종교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종교를 선택해야 하겠다고 느꼈던 시점도 정확하고 시기 적절했던 것일까요?  종교 자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그 시기의 적절성 말입니다.  엄마의 성화에 마지못해 선택한 것은 아닌가요?  아니면 다니던 유치원의 원장 선생님의 강요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마감 임박'이라는 멘트에 나도 모르게 전화를 거는 홈쇼핑의 충동구매와 같은 행태를 보이지는 않으셨나요?  또는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가끔 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분들이 어떤 계기로 종교인이 되었는지, 그때의 순간이 자신의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는지 의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일 수도 있지만 제가 그랬으니까요.  정신적으로 황폐화되고 누군가의 위안이나 구원이 절실할 때 저는 종교라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었던 듯싶습니다.  다들 그렇게 종교를 선택한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던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배려심이 가득했고,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그의 모습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전의 그가 아니란 걸 확인한 사람들은 그의 곁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결국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종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사람뿐 아니라 신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책에서는 삶이 축제요, 소풍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삶의 일부분인 종교생활도 그런 게 아닐까요?  일종의 정신적 유희나 놀이와 같은 그런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를 선택하는 순간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신적으로 이성적 판단이 왕성할 때, 편안한 삶이 지속되어 지루하고 심심하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 종교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었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의 예에서 신은 인간에게 어떤 혜택을 준 것도 아니지만 해를 끼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엾은 인간은 신을 원망합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예컨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눈앞의 곤경을 벗어나고자 사채의 덫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채업자는 그런 사람들을 귀신같이 찾아내지요.  처음에 사채업자는 선심을 쓰듯 그들을 유혹합니다.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는 그들은 사채업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문제만 해결했을 뿐 더 크고 어려운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사채업자는 이제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들을 조롱하고 협박합니다.

 

이건 순전히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어리석음은 종교의 선택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을 찾아 떠난 여행』의 저자 에릭 와이너는 미국 공영방송 NPR의 해외특파원으로 일하며 전 세계의 전쟁과 가난, 질병 등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고, 그 때문에 만성적인 불안증과 우울증이 더욱 악화됐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인생을 신에게 의지하지는 않았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각종 폭력들을 목격하며 종교와 더욱 거리를 두기도 하였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다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고 합니다. ‘신과 종교의 관계는 음식과 메뉴판의 관계와 같구나.’라고 말이죠.  “당신의 신을 만나지 못했나요?”는 애당초 틀린 질문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신은 잃어버린 자동차 열쇠나 뉴저지 톨게이트 출구 같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죠.  그는 이 책에서 '신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나의 신을 찾아다니는 대신 신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구축하고 조립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내가 조립의 기반으로 삼은 것은 유대교이지만, 지지대는 불교다.  심장은 수피즘으로 되어 있고, 그 밖에도 이 신은 도교의 소박함, 프란체스코회의 너그러움, 라엘교의 쾌락주의 조금을 갖고 있다."    (p.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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