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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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소설을 즐겨 읽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과거의 어느 한때 나는 소설 이외의 다른 책에 매료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이루어진 정의나 명제, 진리라고 믿어 의심지 않았던 이론이나 역사적 사실은 얼마나 내 가슴을 뛰게 했던가. 간혹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기억하는 멋진 문장을 그들에게 들려주었을 때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또 얼마나 달콤했던지. 나는 마치 세상의 모든 지식, 세상의 모든 진리를 내 머릿속에 모두 지니고 있는 양 제 분수도 모르고 으스대며 철없이 굴었던지.

 

그러나 내가 굳게 믿었던 진리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한순간에 뒤집어지고 새롭게 등장한 이론에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을 때 나는 구시대의 인물,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한낱 허섭스레기로 치부되기 일쑤였으니 내가 한때 불변하는 진리로 믿었던 어떤 것들도 다만 한 개인의 주장, 한 사람의 목청에 불과했음을 부득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나의 현학은 찰나와 같은 짧은 시간 동안에만 유효했던 한시적인 어떤 것, 바람처럼 가벼운 유행에 지나지 않았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그와 같은 것임을 나는 뒤늦게 깨우쳤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그런 것이다. 소설은 적어도 작가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명제에 이르게 하거나 정의되지 않은 삶의 방식을 제멋대로 강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삶, 이런 인생도 있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작가 자신은 잘 알고 있다.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와 같은 진리의 가변성, 지식의 다양성, 하나로 취합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무지에 대한 인식,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전제 없이는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소설은 백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요즘 안다는 건 무엇이고 모른다는 건 또 무엇인지 혼자 곰곰이 생각할 때가 많다. 안다는 건 경험에서 나오니 사실 아는 건 과거에 안 것이다. 과거에 알았다고 해서 지금도 아는 건 아니다. 지금은 '모른다'에서 '안다'로 가는 어떤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그걸 가장 잘 표현하는 동사는 아마도 '산다生'가 아닐까? 산다는 건 경험을 통해 몰랐다가 알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미래에 어울리는 동사는 '모른다'뿐이다. 정리하자면 '과거-안다. 현재-산다. 미래-모른다'의 공식이다." (p.202)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은 소설 작법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나 자신 혹은 나 아닌 타인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마음 지도(地圖)'쯤으로 읽힌다. 내가 소설가가 될 가능성이 단 일 퍼센트도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란 인간은 평생 나 자신조차도 속속들이 다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대충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고 있고, 이렇게 살아갈 것 같다는 개연성은 있지만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고 그래서 어떤 결과를 보았고 결국 어떤 깨달음을 얻었느냐 하는 문제에는 영 자신이 없다. 작가의 말마따나 '개연성은 있지만 핍진성이 없다.'

 

"나와 타인이 서로 다르며,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본심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전제가 없다면 선을 행하는 게 어려워진다.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윤리적 행위는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시작된다." (p.157)

 

소설가 중에는 작정하고 나서서 된 사람도 있겠지만 우연찮게 된 사람도 많은 듯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계기로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내 생각에 그것은 '무지에 대한 인식 또는 좌절에 대한 반동(reaction)'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삶은 그야말로 살아지는 것이지 단순히 머리로 사고되거나 생각하는 것이 곧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즉 소설에서의 삶도, 우리의 삶도 인식론적 차원의 삶이 아니라 경험론적 차원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감각적인 것들 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날씨와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p.218)

 

마음만 먹는다고 누구나 다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 자신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무지(無知)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소설을 쓰기 위한 기술적 요건을 두루 갖추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소설은 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소설을 쓴다는 것 혹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다만 모를 뿐'이라는 자기 고백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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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 1차로인 도로에서 신호대기를 하거나 신호를 기다리는 차량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우회전을 해본 경험이 있으신지. 어느 정도 운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게 되는 일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운전자의 성격에 따라 상당히 다양하게 나타나는 듯합니다.

 

제가 만일 편도 1차로의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면 대개는 중앙선 쪽으로 제 차를 가깝게 붙여 우회전하는 차량의 소통을 방해하지 않으려 하는 노력합니다. 내 뒤에 오는 우회전 차량이 방향지시등을 켠 채 경적을 울리며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딱한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간혹 자신의 차를 차로의 중앙에 떡하니 세워 놓은 채 뒷차량이 우회전을 하던 말던 전혀 개의치 않는 운전자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저는 그 차량의 운전자가 운전 경험이 전혀 없는 완전 초보이거나 일부러 심술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우회전을 하려는 뒷차량의 차로를 확보해주고는 싶으나 운전 실력이 부족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라거나 충분히 비켜줄 수 있는 운전 실력은 되지만 못 들은 체 무시하는 경우이겠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주 고약한 심보이지요. 나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너도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는 투의 막가파 식 운전 행태라고나 할까요.

 

물론 신호대기를 하는 차량의 운전자가 어떤 위반을 한 것은 아니지요. 법적으로 비켜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구요. 단순히 배려의 차원에서 행하는 일일 뿐이지만 무대포로 버티고만 있는 차를 뒤에서 지켜볼 때 그닥 좋아보이지는 않더군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도 심술이 나서 비켜주지 않고 버텨본 경험이 있습니다. 저도 언제나 미소만 짓는 천사는 아니거든요. 주로 택시가 그 대상이었던 것 같아요. 일반 차량의 운전자는 대개 우회전 방향지시등을 켠 채 한두 번의 짧은 경적을 울림으로써 자신이 먼저 가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지만 일부 택시 운전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더군요. 예컨대 '내가 우회전 하려는데 네가 감히(?) 내 앞길을 막아?'하는 표정으로 귀가 먹먹할 정도로 경적을 길게 누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일순 심사가 뒤틀리곤 합니다.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태워야 사납금도 벌고, 집에 있는 자식들의 용돈도 줄 수 있기에 늘 바삐 돌아다닐 수 밖에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적어도 앞 차량의 운전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니만큼 짧고 가볍게 울릴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지요.

 

저는 외국에서도 몇 번 운전을 해본 적이 있지만 우리나라 운전자만큼 안하무인의 운전자를 만났던 경험은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아주 짧은 시간을 운전하는 외국에서의 경험과 오랫동안 운전했던 국내의 경험을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국토가 넓은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한 게 죄라면 죄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약간의 배려로 서로의 마음을 기분좋게 할 수 있다면 웃을 일 없는 요즘과 같은 시기를 그래도 잘 버텨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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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꽝 멸종 프로젝트 - Dr.심의 몸 개그, 그것이 알고 싶다
심현도.이형진 지음, 성낙진 그림 / 청춘스타일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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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침운동은 내게 일상처럼 흔한 일이 되었지만, 간혹 알람이 서너 번 이상 울릴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오늘만 쉬어' 라고 말하는, 너무나도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찌나 달콤한 유혹인지 나는 금세 '고마워'라고 대답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요즘처럼 아침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 치는 겨울날이나 생각만으로도 끈적끈적한 땀이 배는 것 같은 여름날에는 더더욱.

 

내가 이렇듯 아침운동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건강을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내 나무'를 만나는 즐거움이 그 무엇보다 크기 때문이다. 내가 아침마다 오르는 산에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많다. 등산로 옆으로 우거진 나무들을 볼 때마다 나는 푸근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것은 마치 몇 십년지기 친구를 만나 잠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시간에 쫓기는 탓에 대개의 나무들과는 눈인사만 주고받지만 등산로에 인접한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만큼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포옹을 하듯 한 번씩 안아보곤 한다. 가슴에 꼭 끌어안고 가만히 귀를 대보면 물관에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오늘 아침에도 운동을 나갔었다. 쌀쌀한 날씨 탓이었는지 산에서 단 한 명의 사람밖에 만나지 못했다. 가을에 보았던 구 많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간 것인지... 내가 이렇게 근 이십여 년이 넘는 동안 꾸준히 아침운동을 이어 올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달리 비결이랄 것도 없는데 말이다. 나의 아침 시간은 비교적 단순하다. '알람이 울린다. - 일어난다. - 옷을 입는다. -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 산에 올라 운동을 한다. - 내려온다. - 샤워를 한다. - 아침을 먹는다.' 이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하는 행동의 전부이다. 나는 이런 일련의 행동에 대해 '왜?'라고 묻거나 '오늘도?'라고 토를 달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행한다. 나는 인간이 어떤 고상한 목적을 가져야만 행동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로봇처럼 아무 생각이 없어야 싫은 일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에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읽었다기 보다는 보았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은 <몸꽝멸종 프로젝트>. 웹툰 형식의 책인지라 짧은 시간에 다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필요한 부분은 다시 펼쳐볼 수도 있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부록으로 딸려온 '스킨 폴드 캘리퍼'였다. 그게 뭐냐고? 말하자면 피하 지방 측정계이다. 그렇다고 거창한 기계는 아니다. 플라스틱에 눈금이 그어진, 버어니어 캘리퍼스나 마이크로미터를 연상케 하는 도구이다. 이 도구를 이용하여 피부의 피하지방을 측정하고, 측정된 값을 통하여 자신의 비만도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힘들게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인바디 측정을 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간단히 측정할 수 있다는 말씀 되시겄다.

 

이 책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맞는 다이어트와 운동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책이다. 다이어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참고할 만한 책이다.이 책의 저자인 심현도가 말하기를 러닝머신만 내내 달리다 오는 아주머니들, 잘못된 운동법으로 체형이 나빠지는 젊은이들 등 실제적으로 피트니스 센터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인구는 30%도 안 된단다. 그러므로 이 책에 소개되는 필살 홈짐 운동법은 주로 집에서 하는 운동법으로 몸 전체의 밸런스를 끌어올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가끔 어려운 이론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뭐 그 정도야 눈 딱 감고 건너뛰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살이 빠지는 게 주목적이니까.

 

나는 사실 다이어트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체중이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부작용이라면 한번 산 옷을 소매가 헤질 때까지, 혹은 무릎에 구멍이 뚫릴 때까지 입는 까닭에 의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부터 본의 아니게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지만 그 반대로 좋은 점도 있다. 건강검진을 받을 때 내 또래의 사람들은 마치 아우슈비츠에라도 끌려가는 듯 다들 사색이 되곤 하지만 나는 맘 편하게 드나들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다이어트에는 왕도가 없다. 다만 꾸준함만이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말 : 이 책의 리뷰를 제대로 쓰려면 포토 리뷰가 제격이지만 나는 예전부터 동영상이나 사진을 올리는 일에 알레르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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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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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아침나절에는 언뜻언뜻 햇빛이 비추는데 생선 비늘 같이 마른 눈이 내렸다. 무게도 없이 떠다니는 가는 눈발을 보면 왠지 모를 처연한 느낌이 들곤 한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는 실체는 언제나 쓸쓸하다. 나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를 손에 쥐고 실체도 불분명한 마른 눈발을 하염없는 시선으로 좇고 있었다.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없는 인생의 한낮처럼 소설의 시작은 가벼웠다.

 

탈리스 가의 장녀인 세실리아에게는 병약한 어머니와 고위직 공무원인 아버지, 은행원인 오빠와 소설가를 꿈꾸는 열세 살의 어린 여동생이 있다. 그리고 가족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한 로비 터너가 있다. 그는 탈리스 가의 파출부인 그레이스 터너의 아들이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다시 의대 입학을 준비하고 있던 로비 터너에 대한 세실리아의 감정은 미묘하다. 가족처럼 함께 뒹굴며 성장했던 로비가 남자로 느껴지는 한편 그녀와 로비 사이의 계급적 거리감과 가족적인 친밀감을 끝내 떨쳐버릴 수도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오후, 세실리아는 정원 손질을 하던 로비와 정원의 분수대 앞에서 마주친다. 그 동안 쌓인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감정이 폭발한 세실리아는 로비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분수대로 뛰어들고, 건물 위층 창가에서는 상상력 풍부한 어린 브리오니가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세실리아의 오빠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은 로비는 세실리아에게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의 편지를 쓴다. 몇 번을 고치고 다시 썼으나 결국 봉투에 담긴 것은 그가 장난삼아 썼던 버려진 편지였다. 시간에 쫓겼기 때문이다. 로비는 길에서 만난 브리오니에게 그 편지를 언니인 세실리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브리오니는 언니의 편지를 허락도 없이 열어서는 먼저 읽는다. 그리고 로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순화되지 않은 표현에 적잖이 놀란다.

 

편지가 잘못 담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로비는 몹시 걱정한다. 그러나 로비의 걱정과는 달리 그 편지로 인해 세실리아는 오히려 자신과 로비의 진심을 확인하게 된다. 세실리아의 아버지 잭 탈리스의 서재에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의 모습이 브리오니에게 또 다시 목격된다. 탈리스 가에는 이혼한 이모의 아이들이 와 있다. 열다섯 살의 롤라와 쌍둥이 동생이. 철부지인 쌍둥이 형제가 편지를 써놓고 가출을 하는 바람에 저녁 식사 자리는 엉망이 된다. 다들 쌍둥이를 찾아 집을 나서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만 같았던 세실리아와 로비의 관계에도 불행이 찾아든다.

 

동생을 찾아나섰던 롤라가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자 그날 로비의 행동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던 브리오니는 로비를 강간범으로 지목한다. 그것은 순전히 브리오니의 상상에 의한 진술이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의대 진학을 꿈꾸던 로비는 강간범으로 수감되고 로비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세실리아의 운명도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소설의 1부와는 다르게 2부의 시작은 무겁다.

 

"공포에 떨 일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밀려와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공포는 예상치도 못했던 작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p.269)

 

강간 혐의로 복역하는 동안 로비의 유일한 여성 면회자는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 터너였다. 세실리아는 가족 모두와 의절하고 간호사가 된다. 간호사를 준비하던 세실리아는 감옥에 있는 로비에게 많은 편지를 보낸다. 로비와 세실리아를 지탱하는 힘은 추억이었다. 이후 로비는 군에 징집되어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전쟁터로 보내진다. 작가 자신이 뒤에서 쓰고 있지만 이언 매큐언은 1940년 당시의 여러 문서와 책을 참고하여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합군이 마지노 선에서 퇴각하여 됭케르크까지 철수하는 아비규환의 상황과 폭격의 공포, 본국으로 떠날 배가 없어서 절망에 처한 병사들이 저지르는 집단적 폭력이 그려진다.

 

3부에서는 수련 간호사가 된 브리오니의 일상으로 시작된다. 안락한 가정환경을 버리고 간호사로 자원한 브리오니는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돌보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려 애쓴다. 롤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강간하고 그 모든 비극을 몰고 왔던 장본인인 폴 마셜과 결혼식을 올리고, 브리오니는 자신의 잘못을 빌고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언니인 세실리아를 찾아간다. 그 여름밤의 사건 이후 집을 나가 브리오니보다 먼저 간호사로 일하고 있있던 언니의 하숙집에서 브리오니는 뜻밖에도 로비와 마주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질렀던 그 엄청난 잘못과 전쟁의 참화도 두 사람을 결코 갈라놓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한편으로 안도하며, 또 한편으로는 쓸쓸한 마음으로 런던에 돌아온다.

 

"참으로 평온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약간 슬프긴 했다. 실망해서일까?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느낌은 향수에 가까웠다. 그리워할 집도 없는데 그리움이 일었다. 언니를 떠나는 것이 슬펐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언니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비와 함께 있는 언니였다. 그들의 사랑이었다. 브리오니도 전쟁도 그들의 사랑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이 사실이 도시 아래로 더 깊숙이 가라앉고 있는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p.490~p.491)

 

 

소설의 반전은 마지막에 있었다. 소설 속의 브리오니는 더이상 브리오니가 아닌 '나'로 변한다. 사실은 로비가 1940년에 패혈증으로 죽고 같은 해에 세실리아는 폭격으로 죽었었다. 그리고 '나', 즉 소설 속 브리오니는 그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는 전쟁박물관 문서보관소에 있었다.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는 '나'는 속죄의 의미로 행복한 결말의 소설을 썼을 뿐이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p.521)

 

별것도 아닌 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오늘의 날씨처럼 말이다. 오전 내내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더니 오후가 되자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도 날씨려니와 오후의 갑작스러운 햇살이 나로 하여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토록 했다. 기대보다는 의무가 더 크게 느껴지는 시기가 되면, 혹은 느슨해진 손아귀에서 자신의 삶이 스르르 미끄러지고 있음을 느끼는 나이가 되면, 별것도 아닌 인생이라 여겼던 젊은 날의 오만이 슬몃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인생의 팔 할은 별것도 아닌 일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별것도 아닌 일들이 오해를 낳고, 점점 부풀려지고, 어느 날 펑하고 터져버리는 순간 우리는 겨자씨보다도 작았던 별것도 아닌 그 일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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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빚에 허덕이는 서민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려는 정부의 노력이 눈물겹도록 가상하다. 진심이다. 다사다난했던 2014년을 뒤돌아 볼 때 대한민국의 국민들 대부분은 웃을 일보다는 슬퍼하거나 화낼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인지 정부에서는 블록버스터급 코미디 두 편을 선보였다.

 

그 하나는 '정윤회 문건에 얽힌 비화(가제)'이다. 이미 검찰의 수사도 마무리 단계이고 저간의 의혹도 대부분 덮인 상황이지만 국민들도 대부분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었을 줄 안다. 정부와 검찰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압권이었던 것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비서실에서 근무했던 박모 경정이 정말, 아주 정말 할 일이 없고 무료해서 '찌라시'와 같은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근무하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표해야만 한다. 나도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 자리가 그렇게 무료하고 할 일이 없는 직책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다리가 배배 꼬일 정도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박모 경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보고서 형식을 빌어 소설 한 편을 완성했던 것이다. 다 함께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그의 상사와 청와대 관계자들도 박 경정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그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일부 관계자들만 즐긴다는 건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들로서 있을 수 없는 일, 언론을 통하여 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은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들(정윤회, 박지만 등)을 불러 검찰청에서 차도 한 잔씩 대접함이 마땅하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던 듯하다. 그나저나 박 경정은 이제 대한민국 작가협회 정식 회원으로 등록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의 코미디극은 '대통령 당선 2주년 선물(가제)'이다. 알다시피 오늘은 박근혜 대통령이 당성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노고를 치하하고, 당선 2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409일 동안 준비했다고 한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선물을 대통령께 드린 셈이다. 그동안 박 경정이 쓴 소설과 되는 일 하나 없는 국가 운영에 속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졌을 텐데 늦게나마 여론과 언론의 압박으로부터 대통령의 숨통을 틔워준 일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찬조출연한 어버이 연합 등 보수단체의 멋진(?) 퍼포먼스도 있었다.

 

정말 웃을 일 없는 시기에 조금이라도 국민을 웃게 만들려는 국가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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