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없던 욕구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중독이라면 '활자중독'뿐 아니라 '작가중독'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물론 애연가의 흡연욕구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마냥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니어서 (중독이 된)그 작가의 글을 읽지 않고 일정 시간이 흐르면 어느 순간 '이제는 정말 XX 작가의 책을 읽어야 할 시점이 온 것 같군.'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구를 무시한 채 좀 더 오래 버티게 되면 제 아무리 재미있다는 책을 읽어도 그저 시큰둥할 뿐 별다른 감흥이 없고, 몸속의 열의란 열의는 모두 사라진 듯한 느낌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손을 떤다거나 조급해하면서 쉽게 짜증을 내는 식의 금단현상이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무시하고 모른 척하기에는 뭔가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제 더 이상 못 배기겠는 걸.' 하는 생각이 들라치면 작가가 한참 전에 쓴 낡고 오래된 책이라도 빌려 읽어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정말 금단현상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그 단계까지 가 본 일이 없어서 진짜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독자의 이런 심정을 알고 있는 작가라면 적어도 글을 쓰기 싫어 농땡이를 부리거나 책의 출간 시기를 저울질하며 차일피일 미루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쉼 없이 작업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같은 작가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작가들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간 시기를 알 수 없어 이제나저제나 애태우다가 포기하고 이제 막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기우는 독자들이 하나 둘 늘어날 즈음 기다리던 작품이 비로소 나오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제게도 그런 작가가 몇 명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 중 한 명입니다. 한동안 다른 작가의 작품에 빠져 지내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죠. '아직 신간이 나오려면 멀었으니 아쉽지만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도 한 권 다시 읽어야겠군.'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퇴근 후 발걸음은 항상 도서관으로 향하게 됩니다. 비록 작가로서 하루키는 상당히 성실한 편에 속하고 독자들의 심정을 나몰라라 하는 작가도 아니지만 근래에 들어 그의 작품은 상당히 부정기적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제가 엊그제 읽었던 책은 <슬픈 외국어>입니다. 신간이 보이지 않을 때 제가 취하는 선택 기준은 전적으로 감에 의존하게 되는데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제목만 보고 이 책을 고른 걸 보면 엊그제 도서관에 갔을 때의 제 느낌은 '약간 슬펐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 더 슬펐더라면 저는 어쩌면 <노르웨이의 숲>을 들고 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정도까지 슬퍼지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는다면 그 우울하고 탁한 기분이 적어도 한 달쯤은 계속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사물을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몸을 움직여서 생각하고,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고,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되도록 많은 나라의 말을 배워, 되도록 많은 나라에서 살거나 여행하며 작품을 쓰는 까닭은, 보다 참된, 그리고 보다 인간적인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p.201)

 

사실 이 책은 제목만 제외하면 '슬픔'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체류하면서 그가 받았던 미국 체험의 느낌과 자신의 지난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18편의 에세이가 이 책의 구성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 책이 그가 쓴 다른 에세이들과 확연히 구별된다고 느끼는 점은 하루키 특유의 유머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인 체험을 통한 삶과 세계관, 그리고 국제 관계와 문학 등에 관한 에세이'를 비교적 진지하게 쓰고 있습니다.

 

"한없는 그런 거리와 자연의 끝없는 연속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산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문득 빠지게 된다. 그런 무력감은 미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다. 유럽에서도 맛볼 수 없고, 일본에서도 맛볼 수 없는, 절대적인 아메리칸 오리지널이다." (p.192)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감정이나 사생활을 솔직하게 내보여야만 하는 어떤 순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면으로든 인터뷰를 통한 방송으로든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말입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관점, 과거의 모습 등 어쩌면 밝히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아주 솔직하게 쓰고 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가장 기뻤던 건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전업 작가가 되면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일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오히려 생활 쪽을 조정하면 해결될 일이다. 이만큼 내게 잘 맞는 생활도 없기 때문이다. 처음 몇 년 간은 여러 가지로 시행 착오를 겪었지만, 그러는 사이에 점점 익숙해져서 내 나름대로의 작가 생활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시스템의 근본 사상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하고 싶은 일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며 한다"는 한마디로 설명이 다된다." (p.235~p.236)

 

작가는 <슬픈 외국어>라는 책의 제목이 '절실한 울림을 갖고 다가온다'고 쓰고 있습니다. 막연히 무엇인가 쓰고 싶었던 작가는 카페를 운영하던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몸을 통하여 생각하는 경험을 했고 야구장에서 문득 소설을 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설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미래는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습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요행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불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불행했다고 하여 내일 또 불행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매일매일은 모두가 기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양귀자 지음 / 살림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을 살면서 외부에 믿을 만한 방패막이 하나 두르지 못한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그것은 곧 외부의 숱한 유혹이나 불의의 것들, 예컨대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도 남을 만한 수많은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조언과 보살핌이 그런 역할을 할 테지만 나이가 들어 부모의 품을 떠날 때쯤 되면 세상살이의 간단없는 괴로움을 방패막이 하나 없이 오직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로 막아야 할 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때로는 자신이 극복했던 시련이 단단한 굳은살이 되어 어지간한 고통쯤은 고통으로도 느껴지지 않게 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늘 새로운 것이고 보면 인간은 고통 앞에 내던져진 참으로 서글픈 존재인 것이다.

 

"물론 많이는 섭섭하고 더욱 많이는 그이의 떠남이 안타까웠지만 그러나 삶이란 어차피 늘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일의 되풀이가 아니던가. 나는 허퉁함과 또 그이의 새로운 길찾기에 대한 격려가 범벅이 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이의 미용실이 여전히 '행복'이란 이름으로 남을 수 있는가를." (p.234~p.235)

 

매년 이맘때쯤이면 왠지 모르게 사람의 한살이에 대해 종종 생각하게 된다. 경험으로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고집스런 애착과 낯설고 서먹한 것에 대한 야멸찬 거부가 수박을 쪼개듯 둘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세상의 경험이란 게 줄을 서서 기다리다 순서가 되면 받아 쥐는 번호표가 아니어서 언제 어느 때 내게 일어날지 가늠할 수 없는 법, 희비에 대한 대비는 언제나 한발 늦게 마련이고 그 간발의 차이가 제 운명을 가를 수도 있음을 수없이 보고 또 느껴도 삶은 한 치의 익숙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산자락에 낙엽이 한숨처럼 흥건하고,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드센 바람에 소스라쳐 놀라고, 저녁의 퇴근길에 만나는 군밤장수의 주홍 연탄불들, 그리고 문득 겨울이 온다. 머뭇거릴 새도 없이 그렇게 겨울이 오고 한 해가 간다. 예정되어 있는 시간들과 이 어김없는 과정, 그럼에도 연말은 느닷없이 닥치는 보고처럼 늘 착잡하다." (p.238)

 

양귀자의 인물소설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은 언제 읽어도 그 재미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도무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가 철부지 어린애도 아니고, 사람도 겪어 볼 만큼 겪어보았다 생각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말할 수 없이 다정하게 느껴지면서도 과거의 내 경험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을 듯한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사실 이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 형식과는 매우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 마치 어느 작가의 산문집처럼 읽힌다. 인물 간의 갈등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법이 없고 다양한 인물에 대한 서술자의 섬세한 관찰과 묘사, 그들에 대한 서술자의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던 90년대의 어느 해에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었고, 그 후 매년 11월을 전후한 어느 시점에 나는 이 책을 습관처럼 들춰보게 되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의무인 양. 원미동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던 작가가 서울의 어느 골목 길모퉁이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들의 '드러난 모습과 숨겨진 정신'을 짧은 이야기 속에 담고 있는 이 책은 순간순간 달아나고 싶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망에서 나를 온전히 머무르게 하는 버팀목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여기 덜 위축당하고, 덜 세뇌당한 사람들 몇이 있다. 그래서 미리미리 우울해 하는 방법은 배우지 않아도 좋았던 사람들. 아찔한 파격이나 파격한 탈선은 전혀 없이,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식대로 꾸려나가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김선배, 김밥아주머니, 야채아저씨, 김대호 씨, 박영국 씨, 김박사......" (p.31)

 

작가 양귀자의 문체는 부드러우면서도 이따금 폭풍이 치듯 몰아칠 때가 있다. 정신이 번쩍 나는 순간이다. 가만히 넋을 놓고 있다가 얼결에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자세를 고쳐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칼에 베일 듯한 날카로움이나 위압적인 서슬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만이 빛난다.

 

"왼쪽과 오른쪽에 그와 그녀를 두고 가운데에 내가 있다. 세월은 흐르고 그는, 또는 그녀는 세월의 그물에 걸려 은빛 지느러미를 퍼덕인다. 나는 그것을 본다. 그 은빛의 슬픔과 우수와, 그리고 삶의 그림자를 본다. 그림자를 거느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표류하는 시간을 본다. 잡아지지 않는 무엇, 만져지지 않는 무엇, 거머쥘 수 없는 무엇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 그렇게 한때의 시간은 가고 때묻지 않은 새 시간이 온다. 우리는 다시 물위로 기어오르며, 잠수에서 벗어나며, 낯선 세상에 작은, 몹시도 작은 그림자를 조심스레 떨구어 본다." (p.249)

 

우리는 얼마큼의 시간을 말없이 흘려보내야만 제 앞의 삶을 두려움 없이 대할 수 있는 것인가. '잊혀지지 않는 밥 세끼의 무서움'을 끌어 안고 오늘 하루를 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작가는 그들의 기진한 노고를 위로하고 있다. 내게 가을은 작가 양귀자로 인해 매년 따뜻한 위로의 계절이 되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래도 좋을 그림 - 여행을 기억하는 만년필 스케치
정은우 글.그림 / 북로그컴퍼니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격 급한 우리는 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미리 걱정하고 올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슬픔을 미리미리 우울해 하며 사는 까닭에 삶을 구성하는 질료에는 언제나 걱정과 우울이 팔 할은 차지하는 듯하다. 주말부부로 살기 시작한 몇 년 전부터 나는 걱정과 우울뿐인 하루를 전면 보수하지 않으면 내 삶에 뭔가 큰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미리미리 우울해 하는 방법은 배우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밀려왔다. 나의 가슴엔 미리 자리를 잡은 우울에 새롭게 떠밀려 오는 우울이 하루가 다르게 그 농도를 더해갔다. 그럴수록 하루에 소모되는 담배의 양은 빠르게 늘었다. 담배 연기가 나의 깊은 우울과 걱정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는 한순간에 꺾여버리고 가벼운 우울은 자성체처럼 더 깊은 우울을 불러들이곤 했다.

 

삶의 방식은 적잖이 질긴 것이어서 바꾸자 마음을 먹는다고 선선히 뒤집히는 게 아닌가 보았다. 아기를 달래듯 살살 문지르고 보듬지 않으면 전혀 변하지 않는 질긴 속성을 갖고 있기도 했다. 똥고집도 그런 똥고집이 없다. 나는 걱정과 우울의 습관을 그대로 둔 채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북 한 권과 4B 연필 한 자루. 비교적 저렴한 투자였다. 대학 시절, 미대에 다니던 친구들로부터 그림에는 재능이 없다는 일차 판결이 있었던 터라 나는 잘 그리겠다는 욕심은 갖지 않았다. 싸인펜 하나를 들고 집 안 곳곳에 그림을 그리던 세살배기 아이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하루 중 우울과 걱정이 차지하는 시간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줄여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그 덕분에 올해 초 그렇게나 어렵다는 금연에도 도전할 수 있었고 지금껏 잘 유지하고 있다. 네이버 파워블로거라는 솔샤르 정은우의 <아무래도 좋을 그림>을 읽다가 문득 내가 최근에 지나쳐 온 삶의 흔적을 생각해 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혼자 잘 놀고 싶어서'이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처도 간섭을 하지 않는다. 서로 각자의 시간을 즐긴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소속이 아닌 '내가 몰입하는 일' '세상 속의 내 역할'로써 나를 증명하며 사는 연습을 지금부터 해가고 있다." (p.15)

 

책은 그가 기록한 짧은 글들과 만년필로 직접 그린 여러 장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주로 그가 다녀온 어느 여행지에서 기록한 그림과 글들이지만 그의 사색은 담백하면서도 웅숭깊다. 게다가 뉴욕 5번가의 거리 모습, 터키 아야소피아 성당의 내부, 대만 스린 야시장의 한 장면, 노르웨이 주택가에서 마주친 길고양이, 샌프란시스코의 노면전차, 서울의 종묘와 창경궁, 교토 은각사와 기요미즈테라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만년필 하나로 그려낸 그의 그림은 넘쳐나는 사진의 홍수 속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된다.

 

"우리의 삶은 결국 직접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지나칠지도 모를 수많은 일상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누가 내게 여행이 뭐냐고 물어온다면 그건 이 세상의 사소한 것들을 들여다 보는 가치를 깨닫는 과정이라 말하고 싶다." (p.252)

 

제대로 된 그림을 단 한 장도 그려보지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시건방지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림 그리기의 좋은 점이 삶을 기억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대상을 그리고 있는 동안은 온전히 그 시간을 주목하면서 내가 긋는 선 하나하나, 내가 보는 빛과 어둠의 세밀한 부분부분을 그 순간의 감정과 함께 포착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살았던 시간들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과 흡사하다. 물론 내 삶의 궤적은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나선처럼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의식 안팎에 자리 잡은 욕망에 따라서 인식의 대상을 고르는데 이것이 여행지에서 나로 하여금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만든다. 그러나 둘이서 함께 떠나는 여행은 두 사람이 한나절 똑같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고 해도 각자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이 다르다. 이것은 둘이 찍은 사진만 현상해 봐도 알 수 있다. 우린 분명 같은 길을 걸었는데 그녀의 필름에는 내가 보지 못한 피사체들이 가득하다." (p.68)

 

우리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신의 생을 살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또 고통을 견디는 것이지만 자신의 인생 전체를 오직 감정도 없는 디지털 기계 속에 묻는다는 건 왠지 가볍고 가치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내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지 않는 이유도 그것과 맞닿아 있다. 영혼을 거세당한 느낌, 사진을 찍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내 인생 전체가 저당잡힌 느낌, 나는 그런 게 싫다. 이 책 <아무래도 좋을 그림>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해 뭣할까. 처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처신을 잘 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안하무인의 개망나니를 찾는 게 훨씬 빠를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알게 된다고. 정말 그럴까? 오히려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자신이 해야 할 도리 또는 도의를 제대로 갖추어 지키지 못할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상하를 구분하고,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가려 하며, 격식을 갖춘 행동을 몸에 익히는 것은 젊은이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것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서 질서의 차원일 뿐 유교사회에서 강조하던 공경의 문제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는 지역사회가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었다. 엄연히 참가비가 있는 대회이니 만큼 내가 자발적으로 참가할 리는 만무했었다. 오히려 내게 돈을 쥐어주면서 제발 참가해달라고 사정을 해도 나가지 않을 판인데 돈까지 내가면서 고생을 사서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랬던 게 일이 틀어지느라고 그랬는지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되었다.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암튼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꼴로 5킬로미터 단축 마라톤에 참가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5킬로미터를 완주했다. 그것도 간신히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했던 체력장의 오래 달리기 이후 그렇게 긴 거리를 정식으로 달려본 건 처음이지 싶었다. 올해 초에 담배를 끊은 덕분인지 호흡이 심하게 가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1킬로미터도 채 뛰지 않았는데 종아리 근육이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아침 산행을 했으니 다리 근육은 크게 약해지지 않았으려니 생각해왔는데 의외였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오기로 조금 더 뛰니까 그제야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나는 암튼 내 자신의 체력에 대해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이제 제 몸 하나 운신도 하지 못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요즘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려 노력한다. 하루에 적어도 2시간 이상은 걸어야겠다 결심했다. 처신을 잘한다는 건 운신을 잘하는 데서 비롯된다. 운신도 못하는 처지에 이른 사람이 처신인들 제대로 할 리 없다.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국회의원들의 막말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곧 죽을 몸이 되어,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에게 처신을 잘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정화를 반대하고 검인정제를 옹호하는 이들이 북한에 의한 적화통일을 대비해 미리 교육을 시키려는 것 아니냐”고 한 어처구니없는 말도, 야당을 '화적떼'라고 폄훼하는 말도 다 운신도 못하는 노인네들의 안타까운 신음일 뿐이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개의 마음
이토 히로미 지음, 나지윤 옮김 / 책비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이 사는 방에서 개나 고양이가 함께 지내는 것이 요즘에는 그닥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그것은 놀랍고도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을에서 누가 애완견을 안고 다니는 모습만 눈에 띄어도 노인들은 하나같이 '망칙스럽게 개새끼를 어찌...' 하면서 혀를 끌끌 차거나 내일 곧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낙담한 표정으로 '말세야. 말세'를 외치곤 했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그랬던 게 엊그제 일처럼 선명한데 요즘에는 애완견이니 반려견이니 하면서 제 자식 대하듯 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괜히 말 한 번 잘못했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어디 개뿐인가. 고양이며, 닭이며, 돼지까지도 애완동물로 받아들여지더니 요즘에는 뱀과 거미 등 예전에는 기겁을 하며 피하던 동물들까지 애완동물로 대접을 받는다. 물론 이런 풍조가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예컨대 길거리에 버려진 유기견이나 길고양이들,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에 의한 동물학대 등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들이 하나둘 늘어가는 추세이니 말이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용인의 한 아파트에서 길고양이를 돌보던 여인들이 한 아이가 던진 벽돌에 맞아 한 명이 죽고 한 명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던가.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도, 그렇다고 적극적인 반대의 마음도 없는 나로서는 애완동물로 인하여 벌어지는 이러한 일들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서도 개를 키웠던 적이 두어 번 있었던 것 같다. 애완용으로 길렀던 것은 물론 아니고 키워서 팔면 약간의 돈을 손에 쥘 수 있겠다고 판단한 어머니의 결심이 크게 작용했었다. 장에서 사 온 잡종견은 마당 한귀퉁이에 매어진 채 우리가 주는 밥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거나 낯선 사람을 보고 컹컹 짖거나 할 뿐 사람들과의 특별한 교감은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목줄이라도 풀어 놓은 날이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우리 형제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기도 했고, 어두운 산길을 걸어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어머니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기도 했었다. 오랫동안 정이 들었던 개가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도는 이름도 모르는 개장수에게 팔려가고 나면 우리집은 한동안 적적함에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일본의 여성 문학가 이토 히로미가 쓴 <개의 마음>은 개를 키우지 않는 나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준 책이다. 작가가 일본을 떠나 타국 생활을 시작했던 초창기부터 1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의 가족과 동고동락했던 애완견 '다케'의 마지막 2년을 기록한 책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노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다케. 태어난 지 13년 된 저먼 셰퍼드. 인간의 나이로 56세. 개 수명으로 따지면 애저녁에 저세상으로 떠났을 나이. 내가 두 딸을 데리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지 15년이 지났다. 처음 미국에 첫발을 내딛고 1년 반 후에 다케를 만났으니, 이국 생활의 대부분을 다케와 동고동락한 셈이다." (p.12)

 

전남편과 이혼한 후 작가는 두 딸을 데리고 미국에 정착했다고 한다. 개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유대계 남자와 재혼을 하고 막내딸 도메가 태어나고 파피용 견종인 '니코'와 앵무새 '삐짱'이 한 가족으로 살게 된다. '다케'가 죽기 전, 일본 구마모토에서 홀로 사시던 그녀의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그녀는 미국과 일본을 수시로 오가야 했다. 당시 89세의 늙은 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애견 '루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루이'를 온전히 돌볼 수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허망하게 떠난 후 늙고 병든 '루이'는 그녀의 책임으로 남는다.

 

그녀가 집을 비웠던 많은 날들 중 '다케'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케'의 안락사를 권하지만 그녀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다. 힘들어 하는 '다케'를 이끌고 산책을 나가고, '다케'의 용변을 치우고,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다케'의 모습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한다.

 

"아버지가 죽기 전 몇 년간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맛집 탐방 프로그램이나 음식 광고를 보면서 "저거 맛있겠다" 하고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는 걸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구마모토에 갈 때마다 아버지는 타코야키나 야키소바, 이것저것 싸구려 주전부리를 사오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앞으로 더 살고 싶다는 갈망을 보여주는 유일한 반증이었다. 매번 맛도 없는 건조음식에 통조림을 섞어주면서, 나는 부디 개에게는 그런 갈망이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다케가 꽁치 머리나 쇠고기 뼈다귀, 접시에 묻은 케이크 재료를 제발 떠올리지 않기를." (p.193)

 

개와 함께 같은 방에서 뒹굴어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솔직히 작가의 심정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군말 없이 개의 수발을 들 자신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개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오롯이 가족의 일원으로 대하면서 울고 웃었던 2년여의 기록이 나와 같은 독자에게도 새삼 뭉클한 감동으로 전해졌던 이유는 명확했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개나 사람에게 다를 게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내 가슴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다케와 함께한 마지막 2년 동안, 나는 삶과 죽음의 민낯과 마주했다. 다케를 보내고 내 삶은 딱히 달라진 게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상념도 아스라이 사라지고 늘 그렇듯 밥과 산책으로 이루어진 일상이 반복된다. 촉촉한 혀와 살랑거리는 꼬리,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는 선량한 눈망울이 내 곁에 있다. 니코와 루이가 몸을 기대온다. 무겁고 귀찮다는 생각도 잠시,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에 이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p.2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