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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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왠지 사는 게 조금 가벼워지곤 한다. 그가 쓴 글들이 처음부터 욕심이나 집착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세상의 부조리와 삶의 허무를 소설 속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밀어넣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의 시선은 조금 삐딱하게 기운 채 세상을 경멸하거나 비웃는다. 소설의 탄생이 애초에 그렇다는 걸 말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도덕이나 규칙의 굴레에서 벗어난 노골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말과 행동을 보여준다.

 

"그럭저럭 괜찮은 여자, 같이 자기 좋은 여자였지만 그런 여자들이 다 그렇듯이 서너 밤 자고 나자 재미도 시들해져 다시 가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집배원들은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구나. 이거 나한테 딱 맞는 일인데. 오, 이거야, 이거. 이거라고." (p.12)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 <우체국>에 나오는 '헨리 치나스키'는 크리스마스 즈음 '거기 가면 개나 소나 다 써준다'는 얘기를 듣고 임시 집배원으로 일하던 중 한 여자와 밤을 보낸 후 정식 집배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 집배원이라는 직업이 천직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보결 집배원으로 시작된 그의 일과는 만만치 않았고, 여자랑 같이 누울 수 있는 기회를 은근히 기대했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현장 주임이었던 존 스톤의 눈 밖에 난 까닭에 그의 순로는 항상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곳을 배정받았다.

 

3년간의 힘든 보결 집배원 생활을 마친 그는 마침내 '정규 집배원'이 되었으나 늘 술과 도박 여자에 빠져 살던 그는 여전히 현장 주임의 감시 대상 일순위였다. 어느 날 규정 위반으로 여러 장의 경고장을 받아든 그는 결국 3년 반만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백수가 된 헨리는 경마를 하며 소일한다. 같이 동거하던 여자 베티가 타자수로 취직하면서 그와 헤어지고 그는 텍사스 출신의 젊은 여자 조이스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다시 빈털털이가 된 그는 조이스와 함께 텍사스로 향하지만 조이스의 부모와 조부모는 그가 혹시 그들의 재산을 탐내어 조이스와 결혼하지 않았는가 의심한다. 조이스의 권유에 따라 그는 결국 우편 사무원으로 다시 취직하지만 그들은 결국 이혼한다.

 

스툴에 앉아 우편물을 분류하는 일을 하면서 그는 현장 주임의 감시하에 정해진 시간 내에 분류를 마쳐야 하는 표준화 된 노동생산성의 노예가 된다. 이 때의 미국은 빈틈없는 작업방식의 구축과 기계적 반복작업의 실행을 바탕으로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포드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비인간적인 작업환경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주변 사람들. 그러나 헨리는 이러한 체제에 견디지 못하고 반항한다. 그가 반항하는 방식은 주로 섹스와 술이었다.

 

"우체국 업무는 하룻밤 열두 시간 근무에다가, 현장 주임을 더하고, 우편 사무원들을 더하고, 살덩이들 틈에서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분위기를 더하고도, 거기에 <비영리> 식당에서 만든 쉰 음식까지 참아야 하는 일이었다." (p.126~p.127)

 

헨리가 마지막에 만난 여자는 페이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반전 운동을 하는 페이는 전남편에게서 받는 생활비 수표로 근근이 살아가는 여자였다. 페이는 이따금 워크숍에 참석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페이가 임신을 하고 딸을 낳았다. 그럼에도 헨리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반복되는 고된 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페이는 결국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간다.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났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 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도지 우체국에 지미 포츠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 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입었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p.219~p.220)

 

헨리는 결국 사표를 내고 다시 고주망태로 변한다. 그는 술에 취해 쓰러졌다가 다시 깨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신이 소설을 쓸 것 같다고 생각하였고, 소설을 썼다.

 

"2층이었다.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있었다. 우정 사업 본부 직원들. 한 여자는 불쌍하게도 팔이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 영원히 있겠지. 나처럼 늙은 주정뱅이가 되는 거나 다름없다. 뭐, 다른 동료들이 말하듯이 어디에서라도 일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게 노예의 지혜였다." (p.232)

 

찰스 부코스키의 책이 대개 그렇듯 <우체국> 역시 그의 경험에 바탕을 둔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헨리 치나스키는 반복되는 일상과 부속품으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에 끝없이 절망한다. 절망의 나락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기 위해 그는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을 씀으로써 자신을 구제한다. 자신을 돌보는 마지막 방법으로 소설 쓰기를 선택한 것은 찰스 부코스키답다.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멋있게 들리는 건 내가 도박하듯 글을 쓰기 때문이다. 너무 신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연구하고, 가르치고, 그리곤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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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영국의 모 방송사에서는 그와 관련된 기사를 내보냈나 보다. 뭐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을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 모습은 조금 딱하기도 하고 이따금 귀엽게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회사나 모임, 정당 등 여러 사람이 모인 어떤 조직에 몸을 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무자비한 사람이 대우를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닥 새로울 것도 없지만.

 

심리학자들은 무자비한 사람을 마키아벨리즘, 나르시시즘, 사이코패스 성향 등 세 가지로 분석한다고 한다. 무자비한 사람들은 이 세 가지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한 가지만 보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오늘 마키아벨리즘 성향의 원칙주의자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말은 참 근사해 보이고 조직 내에서도 원칙주의자를 신봉하거나 자신도 그와 같이 되려고 동경해 마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하긴 원칙주의자로 불렸던 여당의 당대표를 대통령으로 뽑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지금 요 모양 요 꼬락서니가 되었으니 내 결론이 어떤 것일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앙하거나 동경해 마지 않는 '원칙주의자'에 대해 나는 왜 그토록 싫어하게 되었을까. 적어도 '원칙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속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원칙주의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장담한다. 혹자는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여전히'원칙주의자'를 좋아하고  그들은 어디서든 인기가 있다고 말이다. 어느 패널이 토론에서도 말했지만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35%의 국민들은 지지할 거라고 하지 않던가. 맞는 말이다. 그것은 다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만 말해보면 이렇다.

 

첫째, 원칙주의자가 신앙처럼 믿고 따르는 원칙이라는 게 과연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인지, 아니면 소수의 사람들만 동의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동의를 구하지 않고 혼자만 옳다고 믿는 것인지 따져 묻고 싶다. 소위 '원칙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과 시간을 내어 대화를 해보면 그들이 믿는 원칙 중 상당 부분이 사회적으로 결코 동의될 수 없는 독선적인 원칙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예컨대 원칙주의자가 믿는 것은 단지 그가 믿는 원칙일 뿐 그 원칙이 정당한 것인가는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원칙의 정당성을 따지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원칙주의자가 되지 못한다.

 

둘째, 원칙주의자는 평화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통령도 평화를 자주 언급해서 하는 말이다. 그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장담한다. 원칙주의자는 대개 서열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특히 원칙주의자가 조직내 서열의 상위를 차지했을 때) 평화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힘에 의한 복종일 뿐 진실한 평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원칙주의자를 잠재된 대결주의자로 인식한다. 심하게 말하면 호전주의자인 셈이다. 예컨대 원칙주의자의 조직내 서열이 낮아지거나 동등해지기만 해도 그는 당장에 자신이 숨겨놓은 발톱을 드러낼 게 뻔하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평화는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관용과 배려에 의해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원칙주의자'의 냉정함, 또는 무자비함, 사이코패스적 성향은 서열에 의한 복종이 유지될 때는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들은 대개 자신을 아끼는 나르시시즘 성향도 강한데 달리 말하면 그들은지독한 이기주의자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러한 성향은 서열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결부되어 자신을 서열의 맨꼭대기에 위치하게 하도록 한다. 베른대학의 대니얼 스퍼크 교수는 사회적 성공이 아닌 실제 삶에서는 관대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한 경향이 있다고 말하지만 원칙주의자들에게 그것은 허황된 말로 들릴 것이다. 나 또한 조직이나 사회에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혼란한 상태를 원하는 것도 아니요, 원칙이나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미워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원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무자비함, 그것을 미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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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1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이 사회를 지켜나가는게 아니라 원칙과 함께하면서 변칙이 가끔 기적을 만들어 내는걸 무수히 봐왔는데도 곧잘 잊곤 하죠.원칙이 대세니 ㅡ그게 승리한 걸로 보일지 몰라도 ㅡ대게 변화는 변칙에서 오곤 하죠.
구원같은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늘 같은 노선이 아닌
일탈같은 상황에서 만나지고 말예요. 제 말은 다분히
환상적 측면을 가져가지만 앞으로 미래는 보통 ㅡ의 미래가 아닌 돌연변이가 세상을 바꿀것이란 말에 저는 일견 동의하는 쪽입니다.
순풍에 돗단듯 ㅡ이 아니라 역풍에서 활로가 나올 수 있는 것 처럼 ㅡ

꼼쥐 2016-01-12 12:24   좋아요 1 | URL
국가든 기업이든 발전의 초창기에는 어느 정도의 원칙과 원칙준수의 필요성이 전재합니다. 그것은 저도 인정하는 바이고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장소 님의 말씀처럼 작금의 대한민국 경제 규모나 발전단계에서는 원칙보다는 어느 정도의 변칙이나 일탈이 필요하겠지요. 자유를 경험한 세대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행태는 영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장소] 2016-01-12 13:30   좋아요 0 | URL
그래서 다들 유신이니 민주화니 ..못 놓고 머릴 그쪽으로 두면서도 회의에 회한에 젖는게 아닌가 해요.스스로 뭔가 한다는 자각 ㅡ개개인이 ㅡ

마립간 2016-01-12 0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칙주의자이나 플라톤(-노자)주의자로서 말씀드리면,

제 의견은 세상의 모든 일이 원칙으로 이뤄졌다거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적절하게 원칙을 깨거나 디오게네스(-양주)주의적인 면 최선-최적일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경험한 세상-사회는 원칙을 지켜서 최선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보다는 원칙을 깼기 때문에 최선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원칙에는 사회적 합의,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선택은 개인의 가치관이겠지만요. (강간살인자, 전쟁 도발 정치인에 대한 비대결주의의 입장에는 어떤 것이 가능할까요?)

(꼼쥐 님께서 제 서재를 자주 방문하셨다는 전제 하에 제가 사용하는 용어로 설명하자면, 저는 플라톤-노자주의 선호자이지만, 강플라톤-노자주의자는 아닙니다.)

꼼쥐 2016-01-12 12:30   좋아요 1 | URL
때로는 강요된 원칙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일정한 위치에 잇는 공인, 타인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세운 원칙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마치 패배나 굴종으로 오인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리더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오히려 몸을 낮추고 그들의 의견을 따라갈 필요가 있는 것이죠. 백수가 자기 혼자서 어떤 원칙으로 살아가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원칙을 준수하는 삶이 더 나을 수도...

마립간 2016-01-12 12:33   좋아요 1 | URL
꼼쥐 님의 글의 의도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지적질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언어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요. 사회를 보는 저의 의견입니다.

꼼쥐 2016-01-13 15:58   좋아요 0 | URL
저는 자신의 의견을 누구나 마음놓고 개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립간 님처럼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정중하고 논리적인 말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고요. 예컨대 다짜고짜 욕설이나 상스러운 말을 하면서 논리도 없는 말을 댓글에 다는 경우에는 저도 대꾸할 여력도 없어서 삭제하곤 하지요.
 
당신이라는 안정제
김동영.김병수 지음 / 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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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생각합니다. '필연'이란 수천 번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우연'의 결합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예컨대 날씨 화창했던 토요일 오후, 만나기로 약속했던 친구가 전해 온 짧은 사과와 부득이하게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문자. 취소된 약속으로 인해 갑자기 비어버린 오후의 시간.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모처럼 나간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그리고 지속되는 만남과 깊어지는 관계. 이런 상투적인 만남이나 사랑이 비단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가는 우연과 필연에 대해 설명합니다. 대략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직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중략)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오직 우연만이 웅변적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조금 더 과장하자면 삶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는 '우연'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은 '알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불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근원을 따져 묻고, 그곳에서 마주치는 수없이 많은 '우연'의 기원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불안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불안을 내포한 혼돈이란 분명 고통스러울 테구요. 고통의 출발은 언제나 그렇게 단순한 법이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두 손과 팔 그리고 가슴이 마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가져본 적 없는 공포가 찾아왔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검지를 이빨로 물어뜯어 피가 나오게 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이내 메스꺼움을 느껴 구토를 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거친 나의 호흡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른다."      (p.119~p.120)

 

김동영 작가의 <당신이라는 안정제>를 읽었습니다. 언제였던가요?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가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을 때, 나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이름 때문이었는지 책의 내용조차 조금 미심쩍어 했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쉽게 그를 잊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그를 잊고 지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한두 권의 책을 더 출간했고, 나름 괜찮은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한동안 심하게 아팠었나 봅니다. 그가 공황장애로 칠 년을 앓는 동안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났던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 박사와 작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환자와 주치의의 전문적인 치료기록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주고받을 수 있는 솔직한 감정과 사적인 이야기를 포함하여 다양한 주제에 대해 나누었던 두 사람의 생각이 이채롭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혼자가 아니라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할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혼자가 아니라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묶여 있지 않음으로가 아니라 묶여 있으므로 자유를 느낄 수 있고, 혼자보다 둘이 되어야 평화로워질 수 있는 존재다. 혼자보다 좋은 둘이 아니라, 반드시 둘 이상이 함께 가야만 하는 길이 우리 삶이다." (p.321)

 

앞에서 말했듯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는 제 생각에 '우연'인 듯합니다. 그리고 '우연'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삶의 근원을 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공포를 느끼는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은 우연이나 불안, 미래의 불확실성은 애써 외면한 채 그저 순간순간의 기쁨에만 집중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 사는가?'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우울해지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정신질환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우리에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지금의 내 모습은 왜 이래야만 하는지,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지금 닥친 일들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설명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정답일까요? 삶은 그렇게 흘러가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그 어떤 설명도 유효하지 않습니다." (p.328~p.329)

 

많은 우연으로 구성된 2015년의 수많은 일들이 이제 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내게 다가올 2016년의 또 많은 우연들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알지 못하기에 설레고 더 흥분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중에는 어쩌면 내가 모험을 하듯 도전해야 할 버거운 일들도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을 지속하는 한 나는 또 2016년의 이맘때쯤에 그 많은 일들을 내 기억의 뒤편으로 가벼이 밀어내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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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자기 주장이 강하거나 똑 부러지게 말하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 참 야무지다' 라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이러한 경향은 여자에게 특히 더 심하다. 더이상 반박할 말이 없어 그(또는 그녀)의 똑똑함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 말에는 사뭇 가시가 돋곤 한다. 아니라고 해도 목소리 톤이나 얼굴 표정에서 금세 드러난다. 다들 알지 않나. '그래, 너 잘났다'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튼 우리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은 살아남기도 어렵고, 남들과 적당히 융화하며 산다는 건 더더욱 어렵다.

 

우리 사회의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산업사회 초창기에 횡행하던 편법에 의한 성취, 불법적인 부의 축적 등 불법과 편법에 의한 공정성의 상실이 가장 크겠지만 유교적 계급의식도 한몫하지 않나 싶다. 그로 인해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에 대한 비아냥, 불신, 반목 등 부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가 하면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내면에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바른말을 하면 '네가 뭘 알아' 내지는 '감히 내 앞에서...'와 같은 식의 반응을 보이는 선민의식을 갖게 되는 듯하다.

 

생각해 보면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보수세력의 공격도 이러한 유교적 선민의식에 바탕을 두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경제적 이익을 편취하기 위한 불법이나 탈법은 여전히 성행하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은 산업사회의 초창기보다 훨씬 높아졌다. 예컨대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이 데리고 있던 비서관의 취직을 돕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모습은 이제 뉴스거리도 아닌 세상이 된 것이다. 흙수저 논란을 불러온 이러한 불법행위는 실업률이 높아질수록 더욱 힘을 얻을 게 뻔하다.

 

대한민국에서 젊은 인재는(그것도 고급 인재는 더더욱) 살기 어렵다. 젊은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는 이유는 비단 취직을 하지 못해서가 아닌 듯하다. 날씨도 추운데 이런 가슴 시린 이야기를 하게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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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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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오해에서 비롯되는 일이지만 이따금 대필을 부탁받는 경우가 있다. 틈만 나면 열심히 책을 읽는 덕에 남들 보기에 나는 글도 잘 쓰는 사람이려니 하는 선입견을 여러 사람의 머리에 각인시켜 놓았나 보다. 일부러 한 짓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갖게 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고 송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과 함께...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이러이러한 주제로 짧은 글 하나 써줄 수 있겠나?'하는 말이나 그와 비슷한 부탁을 자주 듣는 까닭에 그에 대한 변명이나 완곡한 거절의 표현을 한두 마디쯤 늘 준비하고 다닌다. 이를테면 '저를 그렇게 좋게 봐주신 것은 감사하나 저는 사실 글을 쓸 줄 모릅니다.'로 시작하여 이차저차한 이유로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내 인생 전반에 대한 이야기로 흐르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재주도 없는 놈이 덥석 떠안았다가 뒷감당도 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것보다야 낫지 싶어서 글을 대신 쓰는 일만큼은 철저히 거절한다.

 

그러나 거절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떠안는 일도 더러 있다. 몇 날 며칠을 끙끙대며 썼음직한 글을 내게 들고와서는 적당히 고쳐달라고 막무가내로 떠맡기는 경우이다. 그들의 부탁은 대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니 나보다는 낫겠지'하는 식으로 선제공격을 함과 동시에 내가 무르춤하며 거절의 말을 내비칠라면 '엉성해도 괜찮으니 고쳐만 주게' 일침을 가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렇게 억지로 맡은 일을 처리하자면 나 또한 몇 날 며칠을 고생해야 한다. 그야말로 사서 하는 고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일도 한가하고 여유가 있을 때면 그럭저럭 할 만하지만 남의 돈을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마음 놓고 유유자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야 말이지... 아무튼 나는 그렇게 맡은 일을 한껏 뒤로 미루다가 이 일 저 일이 한꺼번에 닥치는 바람에 부랴부랴 서두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럴 때 드는 생각은 늘 한결같다. '아, 글을 좀 더 잘 쓸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매번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글쓰기 관련 서적을 읽을 생각은 도통 하지 않았다. 이 무슨 똥배짱인지 모르겠다. 그와 같은 책을 읽는다고 없는 재주가 갑자기 튀어나올 리 만무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글쓰기에 관한 상식 일변도의 그렇고 그런 내용일 것이라는 지레짐작이 컸기 때문이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가 쓴 <서민적 글쓰기>를 읽게 된 것은 지인의 권유에 등 떠밀리다시피 한 일이었다. 모 인터넷 서점의 파워블로거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나로서는 책을 읽기도 전에 약간의 열등의식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시절 저자의 글쓰기 경험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책은 의외로 술술 읽혔다.

 

책은 독자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느꼈던 것은 아마도 저자의 경험을 줄기차게 언급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대 의대 재학 시절 소심한 성격과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저자는 자신의 책을 몇 권 출간했으나 모두 말아먹었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더 혹독하게 글쓰기 연습을 했음을 고백한다.

 

"짬날 때마다 책을 읽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소재가 생각날 때마다 글을 쓰다 보니 한 달도 안 돼 노트를 바꿔야 할 정도였다. 노트가 한 권 두 권 쌓여갈 때마다 글쓰기 실력도 나날이 상승하는 느낌이었다. 그맘때 "내가 나중에 유명작가가 되면 글쓰기 연습한 이 노트들도 값어치가 올라가겠지?" 하는 상상을 즐겨하곤 했다. 그런 생활을 7년쯤 하자 학교에 있는 내 캐비닛은 다 쓴 노트로 가득 찼다." (p.126)

 

내가 특히 관심을 두고 읽었던 부분은 이 책의 마지막쯤에 실려 있는 '서평은 어떻게 쓰는가'였다. 나도 이따금 책을 읽은 후 나의 블로그에 서평이랍시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글을 가끔 남기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어떤 체계가 있는 글쓰기보다는 내 나름대로의 막무가내식 글쓰기에 익숙해져 있지만 기회가 되면 깔끔하고 멋진 글을 한두 편쯤 써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다. 그것은 책으로 내고 못 내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작은 갈망인 셈이다. 칼럼과 서평을 위주로 글을 써왔던 저자는 서평을 잘 쓰는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선 편하게 쓰고, 스포일러를 조심하고, 자기주장과 책 인용을 구별하고, 모르는 이야기는 쓰지 말고, 지나친 권장은 피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저자와 조금 다르다. 글쓰기 실력이 연습을 통해 극복되고 향상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지만 끌리는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연습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소설과 같은 장문(長文)이 아닌 서평이나 일기 형식의 단문(短文)을 위주로 쓰는 일반 블로거의 입장에서 '기-승-전-결'의 구성에 맞춰 글을 쓰는 것은 그리 오래 연습하지 않아도 충분히 익힐 수 있는 기술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자가 없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2% 부족한 셈이다. 그것은 바로 필자의 경험이다.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지 않은 글은 아무리 잘 쓴 글일지라도 재미가 없다. 그것은 단지 낱글자의 배열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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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07-11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며칠전에 꼼쥐님 서재를 알게 되었는데요,
저는 써주시는 글이 무척 재미있어서 틈나는대로 읽고 있어요...!
막문단을 읽으니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와서 댓글 남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