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불던 비바람 때문인지 오늘의 아침 공기는 유난히 맑았다. 여느 날처럼 산을 오르는데 등산로에 흩어진 잔가지와 나뭇잎들이 마치 태풍이 지나간 흔적처럼 어지러웠다. 간혹 아까시 나무의 채 벙글지도 않은 하얀 꽃망울이 줄기에 조롱조롱 매달린 채 떨어져 있었다. 개화가 멀지 않았는지 바람에 실려 오는 진한 꽃내음이 코끝을 자극했다. 떡갈나무 넓은 잎사귀에 잎맥을 따라 손금처럼 퍼져 있던 송화가루 노란 무늬도 어제의 비에 씻겨 말끔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설령 이런저런 고민이 있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 싶은 게 옮기는 걸음마다 괜한 자신감만 는다. 사는 게 뭐 별건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등산로 입구의 계단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일흔 살 안팎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자전거 짐받이에 소소한 농기구를 묶어 싣고는 계단 끝머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등산로 초입의 산자락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분인 듯했다. 넓은 챙이 둥그렇게 달린 모자 아래로 보이는 할머니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처럼 깊은 주름이 져 있었고, 담배 연기를 한모금 들여 마실 때마다 볼우물이 깊게 패였다. 동이 트기 전의 선선한 아침에 농사일을 끝내기 위해 할머니는 새벽부터 서둘렀을 것이다.

 

기온은 빠르게 오르는데 낮에도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부는 바람이 싫지 않았다. 바람이 한 차례 몰려올 때마다 답답했던 마음이 훌훌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임시공휴일 지정으로 4일간의 제법 긴 연휴가 생겼다. 아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낀 이번 연휴는 어른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오롯이 쉰다는 야무진 꿈은 애초에 버려야 할 듯하다.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다 보면 연휴가 끝난 후에는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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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너머 편 (반양장) -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채사장 지음 / 한빛비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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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세간의 주목을 받는 책이 있기에 나도 대화에 동참하는 기분으로 슬쩍 한 번 읽어 보았다. 저자가 '채사장'이란다. 이름에서부터 사기꾼(?) 냄새가 폴폴 나는 게 영 미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서 읽는 데에는 나름의 어떤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싶어 꾹 참고 읽어보기로 했다. 책의 제목은《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다.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사기꾼 냄새 폴폴 나는 저자의 이름과는 달리 책의 제목은 제법 진실된 느낌을 주니 말이다. '넓고 깊은 지식'이나 '좁고 깊은 지식'도 아닌 '넓고 얕은 지식'이란다. 모름지기 지식이란 깊이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 책의 전편, 그러니까 1권에 해당하는 현실 세계 편(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편)은 내용이 어땠는지 모르지만(난 엉뚱하게도 2권부터 읽었다) 이 책, 2권에 해당하는 현실 너머 편(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편)은 뭐랄까, 요점 정리가 잘 된 국민 윤리 과목의 족보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족보가 뭐냐고? 흠, 세대 차이가 나는군. '족보'란 말이지, 과거서부터 쭈욱 전해 내려오던 주요 기출문제나 시험에 나올 법한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정리하여 놓은 것으로서 수험생들이 공유하는 요약본 정도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거란다.

 

지금껏 세상의 모든 시험이란 시험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설마 있을까마는 친구들과 시험공부를 같이 해보면 그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친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교과서 내용을 전혀 외우지도 않은 채 문제부터 푸는 학생, 문제부터 풀지는 않지만 문제지 앞면에 압축하여 요약된 교과 내용(대개는 한두 쪽 분량)만 외운 후 문제를 푸는 학생, 참고서나 교과서를 서너 번 읽고 문제를 푸는 학생, 문제는 풀지 않더라도 교과 내용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달달 외우는 학생, 달달 외우는 걸로도 부족해 문제란 문제는 모두 풀어보는 학생 등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공부 방법도 제각각인 것이다.

 

나는 암기과목의 시험공부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달달 외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국정 역사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운 후 학력고사를 보러 갔을까. 그런 성격 탓인지 남들이 판단할 때는 시험에 절대 나오지 않을 듯한 내용도 기를 쓰고 외워야만 안심이 되곤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남들이 잘 때 자지 않고 시험공부에 매달렸을까? 그렇지 않다. 내 주관은 명확했다. 학교 공부는 학교에서 끝내고 온다, 는 것이었다. 요는 수업시간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노트 필기를 끝내고 선생님이 필기 내용을 설명할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졸거나, 장난치거나, 멍 때리지만 나는 선생님의 말을 토씨까지 다 연습장에 받아 적었다. 나중에 읽어보려고 한 게 아니라 집중력을 떨어트리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중요한 것만 요약하기는 쉽지만 말 자체를 모두 받아 적는 건 속기사가 아닌 한 쉽지 않은 법이다.

 

시험 공부를 늘 이런 식으로 했으니 책인들 건성건성 읽힐 리 만무하다. 아무리 재미없는 책일지라도 일단 손에 잡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다. 예외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해도 성격 참 더럽다. 만일 내가 아니라 옆의 친구가 그랬더라면 "재수없다."고 한마디 했을 성 싶다. 학창시절부터 굳어진 독서 습관이나 공부 습관 탓인지 나는 이 책의 재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마치 윤리 문제집의 단원별 요약본을 읽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신비에 대해 다뤘다. 신비한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 간에 공통된 체험이 불가능한 까닭에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공통된 체험이 불가능하지만 너무나 명확하고 나에게는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 그것이 신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죽음과 삶이 풀리지 않는 심오함의 중심이 된다." (p.367)

 

일부분일지라도 이 책의 내용을 일언반구도 없이 책의 내용과는 하등 연관도 없는 듯한 나 자신의 경험만 줄줄이 써내려간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요점정리 한 것을 다시 요점정리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양철학에 몰두했던 나로서는 이 책이 영 탐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형이상학적인 내용일수록 앞뒤 맥락과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자칫 오해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일부터 연휴가 시작되는 탓인지 일주일이 무척이나 짧아진 듯하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하더라도 삶과 죽음의 문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주제의 대화는 일상적인 것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대화가 지적 대화에 속하나 보다. 격세지감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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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날씨는 벌써 초여름처럼 더위를 느끼게 한다. 올해는 다른 해에 비해 봄비도 자주 내렸고, 기온도 높은 탓인지 식물의 생장 속도가 유난히 빠른 듯하다. 매일 아침 산에 오르면서도 빠르게 변하는 숲의 모습에 하루하루가 그저 새롭기만 하다.

 

아내는 오늘 아들이 다니는 중학교의 시험 감독을 다녀왔다고 한다. 지금은 한 학급의 학생수라야 서른 명 안팎이니 선생님 혼자서 시험감독을 못할 것도 없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 내신성적의 비중이 높아진 탓인지 각급 학교에서는 부정행위 방지 및 공정성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한 학급의 학생수가 60명을 넘나들었으니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와 다름 없었다. 시험을 치를 때에도 다른 학년의 학생 절반이 옮겨와 분단별로 섞어 앉기는 했지만 틈새를 노린 컨닝은 여전히 성행했었고 말이다.

 

4월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특별히 바쁜 일이 몰려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몸도 마음도 분주하였고 쉬이 지치고 피곤했었다. 그런 상태로 월말을 맞다 보니 그동안 미뤘던 일을 처리하느라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다. 밀린 리뷰를 쓰는 것도 그중 하나였고, '리뷰를 써야 하는데...' 생각만 하다가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또 미뤄진 상태다.

 

머리도 식힐 겸 인터넷 포털의 뉴스를 보다 보니 아직 실행도 하기 전에 있는 '김영란법'의 개정 필요성을 주장하는 여당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기사를 읽어 보니 비단 여당만 그렇게 주장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야당도 적극적으로 주장만 안 하고 있을 뿐 내심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듯한 눈치였다. 부패척결을 완화해야 경제가 산다는 논리는 듣다 듣다 처음 들어본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명절이면 선물 보따리가 산을 이루는 지경인데 그걸 막는다면 아깝긴 할 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 듯했다. 가뜩이나 여기 저기 뜯어 고쳐 누더기로 통과된 '김영란법'이 경제위축을 이유로 실행도 되기 전에 또 손을 볼 기세다.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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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9 2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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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1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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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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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 곧바로 앉아 글을 쓰면 안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음식도 글도, 심지어 쉬지 않고 늘 하는 말도 숙성의 기간이 필요한 셈이다. 한 뼘 더 성장한다는 건 모름지기 참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걸 나는 글을 쓰면서 배웠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밤, 내내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짝사랑의 연인에게 기나긴 편지를 쓸 때 하고 싶은 말은 가슴에서 요동쳐 두서없고, 바람처럼 허황한 말만 편지지에 남았던 그 밤이 지나고 나면 밤새 내가 썼던 편지는 얼마나 유치했는지... 이제 막 연인으로 발전한 풋사랑의 상대와 첫 데이트 약속이 있던 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앞뒤 재지 않고 횡설수설 하는 바람에 데이트는 엉망이 되고 가득한 후회만 안고 버스를 탔던 기억은 우리를 얼마나 주눅들게 했던지...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욕심이 조금 과했구나, 싶은 책이 눈에 띌 때가 있다. 말하자면 저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고, 그것을 갈무리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나처럼 소양이 한참이나 부족한 독자가 그런 책을 읽을라치면 호흡은 가쁘고, 머릿속은 멍멍하고, 읽기 어려우면 당장이라도 손에서 책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악마의 유혹은 계속되고, 급기야 두 손 두 발 다 드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저자에 대한 원망만 한아름 쌓이곤 한다.

 

서정 작가가 쓴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도 내게는 그런 책이 아니었나, 싶었다. 작가의 기획 의도나 방향이 나빴다거나 글의 내용이나 문체가 좋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유럽의 문학이나 예술 또는 역사와 지리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내가 나와는 지적 수준의 차이가 명백한 작가의 글을 읽으려니 내 딴에는 여간 힘에 겨웠던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일종의 여행기인 이 책에서 작가는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러시아 작가와 샤갈, 니콜라이 박 등 화가와 쇼팽이나 괴테, 고흐와 토마스 만, 카잔차키스 등 유럽의 변경을 따라 산재한 지식인과 예술가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민스크 아테네를 두루 옮겨다니며 살았다는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 쫓아다니기도 했고, 반복하여 만나게 됨으로써 우연히 관심을 갖게 된 인물도 있었다고 말한다. 러시아 문학가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푸시킨이나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작가와 관련된 내용이 너무 적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던 반면에 일리야 레핀 등 생소한 예술가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지루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샤갈에게는 비텝스크도 파리도, 생폴 드 방스도 고향이 되는 동시에 그 어느 곳도 고향이 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상실감이란 잃어버린 대상 때문에 잃어버린 자에게 찾아오는 텅 빈 마음일 텐데 그에게는 잃어지지 않는 고향이 이미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듯하다. 또 그는 그 위로 다시 채워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벨라루스와 프랑스에서 마음속에서 반짝거렸던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에 불을 밝히고 있다." (p.182)

 

어떤 책이든 일단 손에 쥐면 다 읽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의 고집은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발휘되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루하거나 따분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젊은 시절에 읽고 그 뒤로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토마스 만을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공간과 함께 낭만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저자로 인해 나는 토마스 만을 다루는 그 부분의 글을 토마스 만의 실제 작품보다도 더 재미있게 읽기도 했다. 의미도 모른 채 그저 읽는 것에만 급급했던 토마스 만의 작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저자의 소개가 아니었더라면 내 기억에서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로코 열풍이 부는 가운데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한 채로 "밭에서 갓 딴 신선한 딸기"를 아주 맛있게 먹던 아셴바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니 삶에 생기를 잃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도시를 한 번쯤 탐할 만도 하다. 물론 주의를 요한다. 실제로 베네치아에서의 첫 식사는 상한 조개가 들어 있는 봉골레였으니까." (p.322)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조국 그리스가 소개되고 있다. 우스꽝스럽게도 나는 그 부분을 읽는 내내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우천염천'을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 지역이나 공간을 소개하는 데에도 그곳과 궁합이 맞는 작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처럼 불량한 독자는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온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번번이 다른 작가를 기웃대는 것이다.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집적대는 바람둥이처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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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더블 side B 더블 - 박민규 소설집 2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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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야당의 대표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툭 던진 한마디로 인해 야당을 지지했던 대다수 국민들이 슬램덩크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국회 당대표실에서 주한일본대사를 만난 그는 자신이 마치 최고권력자라도 된 듯 우쭐했었을 것이다. 그 바람에 그는 '위안부 협상 이행 속도가 빨라져야 한다.'는 말로 자신을 예방한 벳쇼 고로 대사에게 국보위스러운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 재협상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야당의 당론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그 말을 듣게 된 야당 의원들은 충격으로 인해 잠시 동안의 집단 실어증에 걸린 듯 계속되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아크로바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의 망언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3.1절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가 간의 협상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를 가지고 저희가 현재로서는 고칠 수 있는 여건은 안 된다.'고 말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시민단체의 공분을 샀었다. 당의 대변인이 나서서 그의 말에 변명을 쏟아내기는 했지만 정작 망령기가 있는 그 노인네는 자신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듯 당당하기만 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뭔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듯 미안한 기색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치매기가 있어서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약간의 세월이 흐른 후 그가 했던 말에 대해 혹 묻기라도 한다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눈을 감으면 생각이 난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천만에... 인공지능 '알파고'라면 모를까 요즘 사람들. 특히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은 어제 일어난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지라 그도 또한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 공산이 크다. 정치인들은 예컨대 지난밤에 수십분 통화를 이어갔어도 그 다음날 "너 어제 나에게 전화했었니?" 물을라치면, "모르겠는걸.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미안허이." 하는 대답에, "미안하기는 그게 오히려 인공지능스럽지 않고 인간다운 일이지." 하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알파고 같으니라구!'라는 말은 그들에게 가장 참기 어려운 욕이 될런지도 모른다.

 

이런 와중에 박민규의 소설집 [더블 side B]를 읽는다는 건 멍한 기분으로 봄을 즐기는 것과 다름없지만 하긴 뭐, 이제 총선도 끝났고 그들에게 더는 기대할 일도 없으니... 아무튼. 얼마 전에 읽었던 [더블 side A]에 비하면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조금 더 정제된 느낌이었다. 부인과 사별한 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들어간 요양원에서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을 만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낮잠'을 비롯하여 '루디', '용용용용', '비치보이스', '아스피린',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별', '아치', 슬(膝)' 등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나른하고,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요새는 자꾸 낮잠이 온다. 오늘도 밤잠을 자긴 다 글렀군, 이선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나는 실없이 미소를 흘린다. 이선은 더욱 천진해졌고, 나도 조금은... 천진해졌다. 안 그런가 소년? 그런 목소리로 온몸을 쓰다듬는 듯한 봄볕이다. 나는 결국 눈을 감는다." ('낮잠'- 2권 p.46)

 

잔혹한 폭력의 모습을 미국을 배경으로 현장감 있게 그린 '루디'와 다소 '무협지'스럽지만 무협지 속의 과장과 낭만이 사라진 현실에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다시 태어난 '용용용용'의 주인공들은 현실과 동화되지 못한 채 이야기는 진행된다.

 

"혹시 컴퓨터도 써보셨습니까? 물론, 四룡 중 아마 내가 유일할 거외다. 천마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감옥을 나와 처음 컴퓨터를 배울 때 말입니다. 어느날 이런 메시지가 뜨는 것이었습니다. 예외정보: 개별 참조가 개체의 인스턴스로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처음 봤을 때의 기분... 그러니까 작금의 세계를 살아가는 제 기분이 딱 그런 것이었습니다." ('용용용용'- 2권 p.109)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네 명의 청년이 입대를 앞두고 해변으로 놀러간 이야기를 다룬 '비치보이스'와 납작한 원통 모양의 거대한 아스피린이 도심 한가운데에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의 현장을 오직 작가의 유머와 상상력으로 그린 '아스피린', 계약직 영업사원으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부부관계마저 소원해진 중년의 한 남자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명품에 빠진 여자를 사귀는 바람에 공금을 횡령하여 감옥에까지 가게 된 남자가 출소 후 대리운전을 하다가 그 여자를 다시 만난다는 줄거리의 '별', 아치에 올라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단속하는 어느 경찰관의 이야기를 다룬 '아치' 그리고 BC 17000년의 원시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슬(膝)' 등 어느 것 하나 빅민규스럽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아무튼.

 

제1야당의 대표가 망언을 이어가고 어버이 연합의 알바 논쟁이 뜨거운 요즘, 세금으로 구조조정에 나서겠다는 정부 발표나 양적완화로 경기를 살리겠다는 그들의 선동 등 세상은 온통 '국보위'스러운데 이처럼 한가하게 박민규의 소설을 읽는다는 게 왠지 죄스럽거나, 미안하거나, '양적완화'스러웠다. 공기업 부채비율이 6905%라는 보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해 암울함을 한 바가지 퍼부은 느낌이다. 한쪽 어깨에 또 다른 고민이 한 근 내려 앉은 듯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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