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선물용 특별판) -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1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루시드 폴 옮김 / 시공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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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5월은 역시 장미의 계절이다. 아파트 담장에는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게 간사하기 이를 데 없어서 봄꽃이 막 시작될 무렵의 산수유나 벚꽃에는 무한애정을 보내다가도 화려하게 치장한 봄꽃들이 지천에 흐드러지면 왠지 모르게 시큰둥해지고 여름을 향해 치닫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는 꽃의 여왕이라는 장미도 길가에 핀 조팝나무의 알싸한 향기도 도통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눈과 코가 호사를 누리고는 있지만 정작 배가 불러서인지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낸다. 아침에 볼일이 있어 잠시 외출을 했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싶어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시선을 옮겼더니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조팝나무꽃이 진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 꽃의 향기에 한참이나 취해 있었음에도 그 향기에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알싸하다'는 표현은 식상하고 '익숙한 향기'라고 하면 조팝나무꽃 향기를 처음 맡아보는 사람에게는 막막하고...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가 쓴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는 제목만큼이나 예쁜 책이다. 조팝나무의 꽃향기를 적당한 언어로 표현할 길 없어 막막하기만 했던 나처럼 세상의 많은 사람들 또한 그런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그런 순간들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특별한 낱말들을 가려 뽑고 저자 자신이 직접 그린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함께 배치한 귀여운 책이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특별한 감정, 누군가에게 전하고픈 벅차오르는 느낌을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는 세계 각국의 언어에서 52개의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낱말을 선별하여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 여러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을 토대로 그 나라에만 있는 고유한 낱말을 그림과 함께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것이 화제가 되어 책으로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루시드폴의 번역이 이채롭다. 이 책에 우리나라 말은 '눈치'가 실렸다.

 

"때때로 상대방의 겉모습만으로는 그가 불안한지 화가 났는지 다정한지 슬퍼하는지 알아채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한 사람을 오래 겪다 보면 미묘한 차이까지도 알아챌 수 있겠지요.

 

책에는 '눈치'(NUNCHI)의 의미에 대해 파도의 골과 마루인 듯한 그림 위에 '눈에 뜨지 않게 다른 이의 기분을 잘 알아채는 미묘한 기술'이라고 쓰고 있다. 이 외에도 노르웨이어, 네덜란드어, 웨일스어, 그리스어, 인도네시아어, 힌디어, 툴루어, 이디시어, 페르시아어, 프랑스어, 이누이트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 일본어 등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나라의 언어 중에서 특별한 낱말을 가려 뽑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일본어 낱말이 네 개나 실렸다는 점이다. '츤도쿠'(TSUNDOKU)-사다 놓은 책을 펼치지도 않은 채 내버려 두기, '와비-사비'(WABI-SABI)-생사의 윤회를 받아들이고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 '보케토'(BOKETO)-무념무상으로 먼 곳을 바라보기,'코모레비'(KOMOREBI)-나뭇잎 사이로 스며 내리는 햇살, 이 그것인데 책을 읽다가 문득 '보케토'가 우리나라의 '멍 때리기'와 같은 뜻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낱말 중에는 야간(Yaghan)어인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가 있었다. 칠레 남부 티에라 델 푸에고 지역의 야간족 원주민이 쓰는 말이다. 책에서는 이 말의 의미에 대해 '같은 것을 원하고 생각하는(그러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암묵적 인정과 이해'라고 쓰고 있다. 말하자면 '서로에게 꼭 필요하지만 자신은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해 상대방이 먼저 자원하여 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하면서도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인 것이다. 게임이론 중 '자원봉사자의 딜레마'와 관련된 말로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기네스북에는 특이하게도 '가장 간단명료한(succint)단어'로 이 단어가 등재돼 있다.

 

클레멘스 베르거라는 오스트리아 극작가는 이 단어를 두고 '번역하기 가장 어려운 말'이라고 했다는데 어떻게 '간단명료한 단어'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을 한 낱말로 요약했으니 간단명료한 단어가 맞긴 맞는 듯하다. 요즘의 새누리당 사정이 '마밀라피나타파이'적 상황이 아닐까 싶다.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당선된 사람들을 다시 복귀시키자니 꺼림칙하고 안 시키자니 당장의 국회 사정이 녹록치 않고...

 

연초에 이사를 하고 내내 미뤄두었던 책을 며칠 전에 정리하다 보니 읽지 않고 내버려 둔 책이 어찌나 많던지... 이 책에 실린 일본어 '츤도쿠'가 쌓여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꾸준히 책을 산다.

 

"단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심각하게 쌓여 있는 책더미일 수도 있는 '츤도쿠'에 대해서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죄책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다, 읽지도 않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당신. 그런 당신을 사람들은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긴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책 속 주인공들에게 한 번쯤은 햇빛 구경이라도 시켜 줘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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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이 TV와 신문을 가리지 않고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한국 문학의 쾌거'라는 둥 '[문화 강국 코리아] 대중문화 넘어 문학-예술로 확장...세계가 빠져든 新한류 바람' 등 얼핏 보기에도 과하다 싶은 기사들이 국민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만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태양의 후예'만 하더라도 '드라마 한류', '한국 드라마 신드롬' 등 듣기에도 민망한 말을 연일 쏟아내더니 급기야 대통령까지 나서서 출연 배우에게 '진짜 청년 애국자'라며 칭찬을 쏟아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칸 영화제 출품작은 아직 아무런 결과도 나온 게 없는데도 마치 '황금종려상'이라도 받은 양 기사를 쏟아냅니다.

 

과연 이것이 합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 저는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한국인의 쾌거에 대해 같은 한국인으로서 기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좋은 결과가 단지 한 개인의 또는 한 단체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일회성의 성과가 아닌, 기사에서 보도되는 것처럼 단단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이제야 빛을 본, 그래서 전국민이 기뻐해야 할 국가적 성과물이라고 해도 좋은지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한강 작가의 수상은 누가 뭐라 해도 열악한 문화적 토양에서 일궈낸 개인의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월평균 책 구입비 1만 6천 2백 원인 나라에서 꾸준히 책을 쓰고 출간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지방재정에서 가장 뒷전에 놓인 도서구입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야말로 형편에 따라 늘고 줄어들 수 있는 가장 만만한 항목이지요.

 

"마포세무서로부터 근로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내가 연간소득이 1300만원 미만이고 무주택자이며 재산이 적어, 빈곤층에게 주는 생활보조금 신청 대상이란다."

 

지난 16일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유명한 최영미 시인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입니다. 많은 분들이 직감하고 있겠습니다만 대한민국에서 오롯이 시인으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극히 적은 소수에 국한될 것입니다.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는 시집이든 소설책이든 독서와 담을 쌓고 지내는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 노벨문학상을 욕심내고 콩쿠르상을 탐낸다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은 한국 문학의 돌연변이일 뿐 쾌거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나 일부 연예인의 인기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건전한 문화적 바탕을 기반으로 성장한 한국 대중 문화인들의 성과가 아니라 특출난 개인의 성과, 특별히 잘 쓰인 작품에 의해 탄생된 일시적인 인기를 두고 일희일비 하는 짓을 우리는 언제까지 해야 하며, 그런 기사에 현혹되어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문화 선진국의 지위를 얻은 양 몇 날 며칠 과장되게 떠드는 짓을 우리는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요? 우리의 문화적 민낯은 유명 시인 하나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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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6-05-19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이라는 작가는 예전부터 있었도 좋은 소설을 썼는데 상수상하잠 이제야 관심이 집중되고
책이 팔리는걸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작가들의 모습이 쓸씁합니다
한국에서 추리 sf 소설은 인정받지 못하고 순문학이나 인전하는 문단의 모습 진정한 작가라는
명제에 대해 묻고 싶네요 이대로 한강이라는 작가가 계속해서 좋은 책을 발매해주었으면 하지만 이런 모습들은 싫네요

꼼쥐 2016-05-22 14:55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한국 문단의 잘못된 행태나 독자들의 무관심도 큰 문제이지요. 술값을 지불하는 데는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책을 사는 데는 왜 그렇게 인색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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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도무지 주인 몰래 입에 넣은 포도알처럼 삼키지도 그렇다고 내뱉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면 흐르는 시간에 무작정 의지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이 흘러흘러 미래의 어떤 순간에 도래하게 되면 지금으로서는 그 향방을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하기 그지없지만 나중에는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럴 때 나는 마치 시간이라는 판관 앞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죄인이 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홀연히 찾아 드는 그런 느낌은 때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낯설거나 생경하지 않고 오히려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하기만 하다. 예컨대 내일이 시험인데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고 걱정으로 입안은 바싹바싹 타들어가지만 공부는 도통 손에 잡히지 않은 채 한심스레 붓방아만 찧게 되고 급기야 졸음이 밀려올라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시간의 처분에 맡긴 채 잠을 청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살찐 게으름에 불과할런지도 모른다.

 

"새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으로 간다는 그것은 우연이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진에 가면 내게 새로운 용기라든가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기 때문도 아니었었다. 오히려 무진에서의 나는 항상 처박혀 있는 상태였었다. 더러운 옷차림과 누우런 얼굴로 나는 항상 골방 안에서 뒹굴었다.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수없이 많은 시간의 대열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비웃으며 흘러가고 있었고, 내가 잠들어 있을 때는 긴긴 악몽들이 거꾸러져 있는 나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하였었다." (p.162)

 

김승옥의 단편집 <무진기행>을 읽었던 어제를 돌이켜 보면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흘렀다는 느낌이 든다. 안개가 자욱한 무진의 거리를 헤매는 양 종일 흐리기만 했던 의식과 어둑신하게 내려 앉은 우울이 적당한 속도로 흘러 가는 시간의 경과를 까맣게 잊게 했었는지도 모른다. <무진기행>을 처음 읽었던 학창시절의 어느 날 이후, 성인이라고 불리워지기 시작했던 그 시간 이후 나는 수차례 반복하여 이 책을 읽어왔다. 떨어져나간 양장본의 겉표지를 투명 테이프로 수선하였던 것도 여러 번, 그 반복의 매듭에는 항상 갈수록 희미해지는 과거에 대한 확신이 세월의 대열에 묶여 있었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더 가까이 끌어당겨주기로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버렸다." (p.191)

 

나달나달 헤질대로 헤져 이제는 책으로서 갖는 최소한의 권위마저 상실한 듯한 이 책은 내 과거로 슬몃 스며든 듯 자연스러웠다. 개인의 과거라는 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시간의 순서대로 잘 정리되지도 않고 목차마저 희미해지게 마련이어서 찾고 싶은 과거를 그때마다 바로바로 찾을 수도 없을 뿐더러 때로는 다른 사람의 과거가 내 과거인 양 뒤섞이기도 하고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의 일부가 내것인 양 훅 끼어들기도 한다. 하여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기억은 믿지 못하는 어떤 것이 되고 만다.

 

김승옥 소설전집 1권에 속하는 이 책에는 표제작인 <무진기행>을 비롯하여 총15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어쩌면 작가 김승옥의 과거가 될 수도 있는 이 책이 아무런 이물감도 없이 내 과거로 슬몃 끼어든 것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작가의 글이 2016년 지금의 현실과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거나 핵심과 의표를 찌르는 작가의 글솜씨가 그만큼 훌륭했다고 나 나름의 평을 이유로 들어 스스로를 납득시키곤 한다. 작가의 글이 내 과거에 슬몃 포개어진 것도 다 그런 이유라고 말이다.

 

"문학은 삶의 불량스러움과 냉소를 연민으로 감싸고 돌보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무진의 안개에 홀린 사람이 어찌 나뿐일까. 오랜 세월을 다른 최면에 드신 듯이 김승옥 선생이 소설로 돌아오지 않고 계셔도 과거는 우뚝하다. 힘센 시간이 수많은 소설들을 소멸시키며 흘러갔으나, 선생의 소설들은 가슴에 아로새긴 청춘의 어느 하루처럼 나날이 더 빛나고 있다." ('내가 읽은 김승옥-신경숙' 중에서)

 

누군가의 이야기가 때로는 덧붙여지고 잘려나가기도 하면서 유구한 시간이 신화와 전설을 만드는 동안 수많은 생명이 나고 또 졌을 것이다. 오월도 하순을 향해 가는 지금, 지난 번 내린 비에 아카시아꽃이 하얗게 떨어지고 아파트 화단에는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계절에 맞춰 꽃이 피고 지듯 누군가의 이야기가 또 끝없이 소설로 되살아나고 사라져 갈 것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이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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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역사라는 것도 사람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끊임없이 늘 진보만 거듭하는 게 아니고 붙박인 듯 한자리에서 맴맴 맴을 돌거나 때로는 과거를 향해 무작정 뒷걸음질 치기도 하는가 봅니다. 큰 단위로 살펴 보면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 테지만 말입니다.

 

내일은 제36주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혹은 그보다 더 어린 사람들은 그 시절의 참상을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요. 태어나기도 전의 아득한 과거로만 여겨질 테니까요. 그 시절을 살아온 저로서도 당시에는 광주의 실상을 뉴스에서조차 접하지 못했었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알게 된 것도 한참이나 지나서였습니다. 광주의 참상을 영상으로 처음 보았던 날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충격과 죄책감으로 제대로 서 있기도 힘에 겨웠습니다. 어쩌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울분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 시대의 사람들을 위로하는 유행가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은 5.18 기념행사의 지정곡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지요. 한 곡조의 노래가 그 시절을 다시 사는 듯 저릿하게 느껴지게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그 역사를 이어받은 죄 많고 반성할 일 많은 정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도, 기념곡 지정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국론 분열을 이유로. 단지 하나의 노래일 뿐인데... 올해도 대통령은 기념식장에 나타나지 않을 듯합니다. 민주화 운동 자체를 인정하기 싫은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노래를 따라 부르기는커녕 듣는 것조차 싫었던 게지요.

 

과거로 퇴행하는 답답한 역사의 길목에 한 줄기 바람처럼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년이 온다>를 더 좋아하지만 작가는 이번에 <채식주의자>로 수상을 했나 봅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사실적으로 그렸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곡으로 지정하기 싫으면 <소년이 온다>를 기념 서적으로 지정하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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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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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이따금 TV를 볼라치면 연예인들도 자신의 컨셉을 유행에 맞게 잘 잡아야 성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와는 방송문화가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인기 있는 연예인의 모습도 크게 달라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성(性)의 구별이 확실했던 것인지, 이를테면 여성은 청순가련형의 얼굴에 행동거지도 매우 조심스러운 그런 여자가 인기를 끌었는가 하면 남자는 주로 외모보다는 오히려 기운이 넘치고 박력이 있는 남성다움이랄까, 수컷냄새랄까 뭐 그런 것들이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듯하다. 그러나 과거의 트렌드에 멈춰 있는 나의 사고방식과 요즘 인기가 있다는 연예인들의 모습이 너무도 달라서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과거에 비해 여성의 주장이나 발언권이 세진 탓인지 요즘 TV에서 보는 연예인들은 유니섹스를 한참이나 지나쳐 남성과 여성의 성적 특성이 완전히 뒤바뀐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이를테면 여성은 노출이 심한 의상에 조신한 모습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11자 복근의 탄력 있는 몸매와 털털한 성격이 대세를 이루는 듯하다. 물론 외모보다는 털털한 성격 하나로 인기를 끄는 연예인들도 많은 걸 보면 외모에 대한 비중이 과거에 비해 다소 낮아진 것도 사실인 것 같지만 말이다. 반면에 남성은 수컷의 냄새가 완전히 사라진, 예쁘장한 외모에 다소곳하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남성이, 남성이라기보다는 여성에 가까운 꽃미남 스타일의 남자 연예인들이 인기를 끄는 걸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사노 요코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읽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1938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작가는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건너와 무사시노 미술대학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글을 쓰는 직업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을 듯한 그녀의 삶은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와 두 번째 결혼을 함으로써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은 그와 결혼을 하기 전에 나온 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노 요코는 이미 2010년에 고인이 되었고 독자들은 이제 그녀의 독특하고 유쾌한 글을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지만 과거에 쓴 그녀의 글이 여전히 책으로 출판되는 걸 보면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란 것을 볼 수가 없다. 미의 기준 그 자체가 없어졌다고 해도 좋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것은 이 세상 사람 같아서는 안 된다. 범접할 수 없이 신성하고 그윽한 기품이 있고 환상 같아서, 리얼리티 같은 건 한 조각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땐 이미 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p.145)

 

작가인 동시에 일러스트레이터로도 유명했던 사노 요코는 자신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40대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들을 이 책에 솔직하게 씀으로 해서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독자들을 훈계라도 하려는 듯 처음부터 어렵고 이해하지 못할 말들만 늘어놓는 책에 비하면 사노 요코의 책은 우리의 눈높이에 최적화된 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뜬 아가씨들이 긴긴 겨울밤에 남의 집 사랑방에 모여 땟국이 줄줄 흐르는 담요 밑에 시린 발을 겨우 묻고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의미도 없는 수다를 밤새도록 늘어놓는 정경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고급한 철학 같은 건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신주쿠의 지하도에 뒹굴뒹굴 누워 있는 아저씨들이 부럽다. 나는 식당 테이블에 멍청히 앉아서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집앞의 참억새를 바라보곤 한다. 눈썹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다. 지진이 와도 도망치지 않을 거야 하고 생각한다. 장식장 안의 정리해야 할 물건들이 생각나지만 그것들을 직각으로 정리해 놓는다 한들 내 마음이 정리되는 것도 아닌데 하며 그냥 둔다." (p.71)

 

주인공에게 완전히 빙의된 채 드라마를 보고, 영화 속에서 멋진 주인공들이 연애를 하는 걸 보면서 자랐기에 연애는 그들만 하는 하는 걸로 알았다거나 여행이 가고 싶으면 먼저 몸이 아파지는 바람에 병원에서 며칠이고 누워있다 퇴원한다는 작가, 스키를 타러 다니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작가, 볼일이 급해서 차를 세운 채 도로 옆에서 볼일을 보는데 버스가 지나갔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쓰는 작가의 모습에서 나는 요즘 TV애 자주 나오는 연예인들을 생각했다. 시청자들의 인기만 얻을 수 있다면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망가지는 요즘의 연예인들을 말이다.

 

"내가 열네 살 때 좋아하던 남학생은 수재에 문학소년 타입이었고, 그래서 그가 창백하고 휘청거리면 거릴수록 더 섹시해 보였다. 공을 던져도 톡하고 1미터 50센티 되는 곳에 떨어져 버리는 수재를 보면 실신할 지경으로 멋있어 보여서 가슴이 두근두근했고, 나도 따라서 1미터 50센티 되는 곳에 톡하고 떨어뜨렸더니 체조 교사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제대로 해라아!" 하고 고함쳤던 일이 생각난다." (p.272)

 

내일은 제36주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이다. 올해도 정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요구를 거절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싶은 이유일 터였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식장에서 노래 한 곡조 함께 부르는 것조차 무서워 벌벌 떠는 행태가 참으로 우습고 한심스러워 보이지만 말이다.사노 요코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런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웃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는 그처럼 나에게 지성도 교양도 가져다주지 않지만 때때로 감동하거나 감탄하거나, 아름다운 마음씨가 되거나, 분노에 떨거나 하는 것을 몹시 싼 값으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만큼은 좋다. 나는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로, 눈만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마음속에서 꺄아 꺄아 기뻐하고 싶은 거다." (p.320)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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