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물리학 -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지적 교양을 위한 물리학 입문서
렛 얼레인 지음, 정훈직 옮김, 이기진 감수 / 북라이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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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떤 것들과 종종 마주치게 된다. 대개는 아주 작고 가벼워서 먼지를 털어내듯 툭툭 털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지만, 가끔은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줄 만큼 크고 중대한 문제를 만날 때도 있다. 그럴라치면 나는 '이건 좀 어렵겠는걸.' 하면서 쿨하게 포기하거나, 며칠 밤을 새면서 끙끙 속앓이로 몸만 축내다가 결국엔 '나에게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하는 말과 함께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이번에는 반드시 내 손으로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며 열공모드에 돌입하기도 한다.

 

비교적 가벼운 문제에기는 하지만 물리학 서적이나 수학 관련 서적은 아들의 엉뚱한 질문을 잠재울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쓰이곤 한다.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은 그 나이대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스타워즈>나 <어벤져스>에 열광하고, 신화를 바탕으로 한 아동판타지소설로 유명한 릭 라이어던의 퍼시 잭슨 시리즈, 케인 연대기 시리즈, 매그너스 체이스 시리즈를 즐겨 읽고, 어린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스튜어트 깁스의 책들을 좋아한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에 푹 빠져서 그가 쓴 모든 작품을 다 읽어치우더니 며칠 전부터는 <제3인류> 완간 기념으로 방한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몹시 아쉬워하고 있다.

 

아들의 이런 취향 덕분(?)에 나는 종종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곤 한다. 아들은 간혹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기상천외한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비된 입장에서 아들의 질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비판하거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대어 나의 무식을 변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나의 처지를 이해했음인지 아들은 이따금 질문을 퍼붓는 대신에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 요구하기도 한다. 최근에도 나는 아들의 요구로 랜들 먼로가 쓴 <위험한 과학책>을 사주었었다.

 

렛 얼레인의 <괴짜 물리학>은 <위험한 과학책>의 속편쯤 되는 책이다. 미국 사우스이스턴루이지애나대학의 물리학 교수이자 '와이어드'(Wired) 최고의 과학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이 책에서 인기 게임 '앵그리버드'를 비롯해 영화 <스타워즈>, <어벤져스> 등 일상에서 발견한 갖가지 소재에 대한 물음을 물리학적 해법으로 답하고 있다. <위험한 과학책>과 다른 게 있다면 저자는 각각의 질문에 대하여 적당한 가정을 세운 후 구체적으로 계산했다는 점일 것이다.

 

"데스 스타의 지름이 160km라면 알데란Alderan(무장하지 않은 평화로운 행성)을 파괴하는 장면에서 광선의 속도를 대략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데스 스타에서 발사되는 광선은 두 가지로, 각각 속도가 다릅니다. 우선 데스 스타 위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원에서 뭔가가 발사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합쳐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빛줄기를 이루죠. 간단히 분석해보면 첫 단계에서 빛의 속도는 600km/s이고, 합쳐진 후 빛줄기의 속도는 1,000km/s가 됩니다. 두 가지 수치 모두 데스 스타만 나오는 장면을 보고 계산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그 빛줄기는 알데란을 향해서 이동합니다. 이 빛줄기가 알데란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0.2초입니다. 빛줄기의 속도가 일정하다면 알데란과 데스 스타 사이의 거리는 196km에 불과합니다. 알데란의 크기는 불확실하지만 국제우주정거장은 지구 표면에서 약 300km 떨어져 있죠. 그렇다면……." (p.162)

 

총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일상의 사소한 궁금증에서부터 영화나 게임에서의 궁금증, 나아가 광대한 우주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별난 호기심에 대한 물리학적 답변을 쉽고 재미있게 제시한다. '인구가 많아지면 지구가 달을 끌어당길까?',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는 얼마나 무거울까?', '자동차를 움직이려면 비가 얼마나 내려야 할까?', '블래스터 광선은 레이저일까?', '자판을 두드려서 휴대폰을 충전할 수 있을까?', '번개를 이용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등 남들이 들으면 별 이상한 놈도 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별별 질문들을 저자는 진지하게 답변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그건 상식일 뿐이지 과학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아들과 나는 이 책을 함께 읽었다. 수학 기호나 물리 공식, 물리 용어 등 아들이 이 책을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많았으나 영화 <스타워즈>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아들은 이 책이 퍽이나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책을 읽는 중간에 낄낄대며 웃던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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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 하루 종일 사라지지 않았던 윤모 전 청와대 대변인의 이름이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나 봅니다. 꽤나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에서도 가물가물 합니다만 현 정부의 초기에 발생했던 그 분의 미국 내 성희롱 사건은 그 분 특유의 느린 말투와 논리적이지 못한 해명으로 인해 국민들의 공분을 샀었던 듯합니다. 그후 성희롱 하면 으레 그 분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 분은 마치 성희롱의 대명사처럼 대우(?)를 받았지요. "허리를 툭 한 차례 치면서 '앞으로 잘 해. 미국에서 열심히 살고 성공해.' 이렇게 말한 게 전부였다."라고 했던 액센트 없는 그 분 특유의 말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듯합니다.

 

해당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됨과 동시에 그 분은 그동안 폐쇄되었던 자신의 블로그에 장문의 글을 올렸더군요. 그는 자신의 글에서 가족, 특히나 그의 아내가 어떤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지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과 더불어 언론에 대한 불만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근 3년 5개월만이라는군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겠습니다만 그동안 본인으로 인해 그의 가족들이 겪었을 심적 고통이나 정신적 충격을 생각할 때 같은 인간으로서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거나 자숙하지 못하고 죄가 없다는 식으로 본인과 자신의 가족에 대한 억울함만을 말하는 건 견강부회라고 일갈하는 분들도 꽤나 많았지만 말입니다.

 

여성에 대한 범죄가 유난히 많았던 요즘, 자신의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곧바로 글을 올렸던 건, 글쎄요,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전라남도 섬마을에서 있었던 여교사 성폭행 사건이며, 강남역 화장실 살인 사건 등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할 이 시기에 성희롱과 관련된 자신의 사건을 억울하다고 하는 건 좀...

 

이 모든 일들이 모두 의도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겠습니다만 이 나라의 교육과 윤리의식, 경제와 효용만 중시하는 천민자본주의 논리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약자에 대한 배려도, 불의에 대한 저항도 없이 그저 제 한 몸 지키는 일에만 급급했던 게 아닌가 반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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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06-07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글~너무 멋집니다.!!

꼼쥐 2016-06-08 19: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늘 날씨도 덥고 일에 지쳐 기운이 없었는데 북프리쿠키 님의 친찬 덕분에 힘이 나네요.

2016-06-08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0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토록 가지고 싶은 문장들 - 책 숲에서 건져 올린 한 줄의 힘
신정일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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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할 때면 종종 찾는 도서관이 있다.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몇 년을 다니다 보니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며, 나와 같은 도서관 이용자들과도 자연스럽게 안면이 익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하는 내게 인사만 나누고 그냥 헤어지기에는 뭔가 섭섭하다는 듯 차라도 한 잔 같이 하자며 휴게실로 이끄는 분들이 더러 있다. 개중에는 직장을 은퇴하고 소일 삼아 책을 읽는 분들도 있고, 은퇴를 대비하여 자격증 공부를 하는 분들도 있고, 단순히 책이 좋아서 무작정 드나드는 나와 같은 부류도 있게 마련이었다. 그분들과 가벼운 한담을 나누다 보면 으레 아이들의 교육 문제나 경제 상황이나 아주 가끔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하고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책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하게 된다.

 

그렇게 안면을 익힌 사람들 중에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열혈 독서인 한 분이 있다. 평생을 농협에서 근무했다는 그 분은 슬하에 일남일녀를 두고 있는데 지금은 다 출가하여 나가 살고 도서관 인근의 아파트에는 노부부만 덩그러니 남아 단출한 살림을 살고 있다고 했다. 농협을 은퇴하기 전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한때는 사무실까지 개업했었지만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듯하여 지금은 완전히 손을 뗀 상태라고도 했다. 막상 일에서 손을 놓으니 딱히 할 일도 없었지만 다른 노인들처럼 하는 일도 없이 공원을 배회하거나 아파트 노인정에 나가 시간만 축내는 게 싫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서관에 나온다고 했다. 오전에는 책을 읽고, 오후에는 친구들과 바둑을 두거나 테니스를 치고, 일주일에 한 번 동사무소 요리 아카데미에도 나가신다고 했다. 빡빡한 스케줄이었다.

 

며칠 전에도 도서관 열람실에서 우연히 그분을 만났다. 열람실의 책상에는 요즘 읽고 있는 책과 마음에 드는 문장을 기록하는 노트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을 기록한 노트만 해도 열 권이 넘는다고 했다. 은행에 다니는 아들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어 자신의 노트를 읽어보라고 권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기도 했다.

 

문화사학자이자 도보여행가인 신정일의 신작 <그토록 가지고 싶은 문장들>을 읽는 내내 그분 생각을 했다.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또는 깊이 공감하는 한 문장을 기록하는 일은 일견 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에게 깊은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었던 문장을 언제고 다시 읽으면서 오늘과 같은 울림을 다시 경험하거나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내가 기록한 문장을 읽고 내가 느꼈던 전율을 그들도 똑같이 느꼈으면 하고 바라는 일은 얼마나 성스러운 일인가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감동은 단지 기록하는 사람에게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글이란 본디 앞뒤 맥락을 통하여 이해되게 마련이고, 전후의 사정에 의해 감동의 깊이도 달라지게 마련인지라 자신의 감동이 절정에 이르렀던 단 하나의 문장만 추려낸다면 그것은 다만 생명이 없는 나뭇가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생명력을 상실한 문장을 읽고 감동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강하게 살아남으라. 한 치의 타협도 없이"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는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살을 꿈꾸었다가 이 구절을 생각하며 견디어냈습니다. 또 몸과 마음이 나태해지고 세상과 타협하고 싶을 때 섬광처럼 나타나 나 자신을 호되게 질타한 구절도 많습니다. 이러한 말과 글이 나를 살아 있게 했습니다."   (p.5)

 

저자는 자신이 읽고 감동했던 여러 명저의 문장들을 발췌하여 이 책에 담았다. 도서관에서 내가 만난 그분도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을 산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에 자신은 비록 수없이 많이 쓰러지고 좌절하였으며 그때마다 밤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고 그 속에서 발견한 문장들을 통하여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지만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 자신의 후손들은 이 책 또는 자신이 기록한 한 권의 노트를 통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손쉽게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나와 같은 범부는 앞뒤 맥락, 전후좌우를 살피지 않고서는 감동도, 깨달음도, 심지어 책을 읽는 재미도 느끼지 못하는 까닭에 저자의 노력과 간절한 바람에 그저 미안한 마음만 들 뿐이다.

 

천재가 아닌 이상 타인이 기록한 짧은 문장을 읽고 그 속에 내재된 여러 의미와 깊은 깨달음을 단박에 알아채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책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책에서 발췌된 짧은 문장을 읽을 때는 적어도 책을 읽는 수고와 노력에 버금가는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책을 읽고 이해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 문장의 진의를 파악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지혜는 하루 아침에 오는 게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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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요령은 없고 열정만 넘치는 사람을 만날라치면 연민보다는 짜증이 먼저 솟구친다. 그러고 보면 나의 성질머리도 결코 좋다고 할 수만은 없겠지만 일 하면 무조건 속도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요령부득의 사람은 일찌감치 열외의 대상이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도 사람보다는 일, 인성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대한민국의 못된 풍토에 어느 정도 중독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마치 정의인 양, 그런 행동이 마치 정당하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오늘 하늘은 정말 가을 하늘처럼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그동안 미세먼지다, 연무다 해서 늘 뿌옇고 흐릿한 하늘만 보다가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보니 그야말로 감개가 무량하다. 물론 때 이른 더위는 오늘도 예외가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 새벽 산행길에서 본 밤나무는 꽃이 하얗게 피어 비릿한 밤꽃 냄새를 온 산에 뿜어내고 있었다. 바야흐로 생명이 무르익는 시기이다. 이처럼 좋은 계절에 국내 뉴스는 노상 어두운 소식만 쏟아내고 있다. 지하철 안전문을 수리하던 19살의 청년이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공시생이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걸로도 모자라 지나가던 40대 가장을 덮쳐 두 사람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 남양주 지하철 공사 현장의 폭발 사고...

 

기업은 투자를 안하고 가계는 소비를 안하는 꽁꽁 얼어 붙은 국내 경제 상황에 다들 죽겠다고 난리인데 정치인들만 신이 난 모양새다. 그래서인지 너도 나도 정치판을 기웃댄다. 오죽하면 국내 정치를 떠나 외국에서 조용히 지내던 UN 사무총장마저 정치를 하겠다며 제 욕심을 한껏 드러내지 않았던가. 반면에 이런 꼴을 보다 못한 외국 언론들은 반총장의 무능과 반총장에 대한 한국인의 묻지마식 지지를 강하게 질타하는 보도를 연일 쏟아내고 말이다. 어쩌면 반총장은 유엔 사무총장 퇴임 후 낙향하여 조용히 지내는 게 그동안의 무능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른데 대한민국의 미래는 오늘도 구름 많음이다. 어쩌면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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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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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나 기억해야 할 많은 것들이 당신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지지 않았던가요? 시간의 점멸과 함께 말이지요. 그런 대부분의 인생을 두고 '덧없다' 평하는 것도 아주 일리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세월의 이편에 서서 세월의 저편에 속한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는 게 마치 당신과 함께 몇 번 다녀온 기억이 있는 어느 음식점을 우연히 다시 찾았던 어느 날, 종이에 휘갈겨 쓴 폐업 문구와 낡은 문짝에 덩그러니 매달린 녹이 슨 자물쇠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나요? 그것은 분명 우리의 안타까운 시선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었던 일이지요. 그렇다고 행방을 알 수 없는 주인을 향해 우리의 추억을 돌려달라거나 부당함을 항변할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이 휩쓸고간 몇몇 기억들에 대해 더러 억울한 생각은 들겠지만 누구에게도 반환을 요구할 수 없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혼쭐이 난 아이처럼 시무룩한 하루가 또 저물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풍경처럼 붙박인 자동차 소음과 간혹 낯설게 파고드는 이웃집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간의 경과는 아랑곳없이 우리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얼마쯤 세월이 흐른 뒤에 아주 조금 남아 있는 미약한 기억에 의지하여 지금의 나를 재구성하는 일은 타인의 삶을 소설로 옮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여름날 쉽게 상하는 음식처럼 박제되지 않은 상온의 시간에서 제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폴 오스터의 <내면 보고서>는 그런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십대 후반의 나이에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더듬는다는 건 작가가 보았거나 기억 속에 응집된 어떤 장면을 소설처럼 풀어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말이지요. 하여, 이 책을 쓰는 작가는 '당신'이라는 이인칭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작가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타인처럼 낯설거나 완전한 타인으로 기억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였나? 어떻게 당신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나? 당신이 생각할 수 있었다면 당신의 생각은 당신을 어디로 데리고 갔나? 오래된 이야기들을 파고들어 가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헤집어 보고 파편들을 들어 올려 빛에 비춰 보기로 하자. 그렇게 해보자. 한번 해보는 거다." (p.11)

 

책은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면 보고서'라는 소제목의 1부는 작가의 유년기부터 열두 살 이전까지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밀려난 듯한 그 기억들은 작가 스스로도 자신의 기억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육십대 후반의 작가에게는 세월의 간극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기억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문득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한동안 머무르는 걸 좋아하게 됩니다. 여섯 살의 어느 행복했던 토요일이나 구체적인 사건도 없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풍경이나 사람들. 우리의 기억이란 때때로 '지금, 여기'의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안온한 도피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 시절을 기록하는 작가도 아마 그러했겠지요.

 

"그러나 트로피가 부서진 밤으로부터 꼭 26년 후에 스무 번째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을 때, 캐런이 서른여덟 살의 젊은 미망인이 되어 그곳에 있었다. 당신은 다시 그녀와 춤을 추었다. 이번에는 느린 춤이었다. 그녀는 당신들이 열두 살이었던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고, 마치 어젯밤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p.109)

 

2부는 '머리에 떨어진 두 번의 타격'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1957년 작가가 열 살 때 보았던 영화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The incredible shrinking man)> (1957년 4월 개봉, 상영 시간 81분, 잭 아널드 감독, 리처드 매시선 원작, 그랜트 윌리 주연)와 1961년 열네 살 때 보았던 영화 <나는 탈옥수(I am a fugitive from a chain gang) (1932년 11월 개봉, 상연 시간 93분, 머빈 리로이 감독, 폴 무니 주연)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십대 시절에 보았던 두 편의 영화가 작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타임캡슐'이라는 소제목의 제3부는 작가의 첫 번째 아내였던 리디아에게 보냈던 작가의 편지들이 실려있습니다. 편지는 주로 1966년 여름부터 1970년대 말에 쓰인 것들이고, 작가의 나이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이던 1967년과 1968년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아직 작가가 되지 않았던 풋내기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폴 오스터는 시나리오나 시, 소설을 마구잡이로 쓰면서 창작열에 불타올랐던, 조금은 우쭐하거나 오만했던 자신만만한 젊은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앨범'이라는 소제목의 제4부는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의 사진이나 이미지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일기를 쓸 때의 문제는 당신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주어야 할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인지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향해서라면 너무 이상하고 당혹스러워 보였다. 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굳이 수고스럽게 자신에게 들려준단 말인가. 왜 벌써 경험한 것을 다시 되새기는가 말이다.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누구이며,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일기 쓰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그 당시에 너무 어려서 나중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될지 몰랐다. 현재에만 갇혀 있어서 당신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대가 실은 미래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일기장을 내려놓았고, 그 후로 47년 동안 조금씩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p.193)

 

늘 그렇듯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또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들을 잘 간추려 책의 내용과 어울리도록 문장을 만들고 나열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기만 합니다. 우리의 기억이 두서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웃자란 생각들이 이리 건들 저리 건들 방향도 없이 흔들리고 먼 기억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명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지요? 폴 오스터는 자신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세한 자료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면 보고서>를 읽는다는 건 '폴 오스터 도서관'을 견학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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