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은 도끼다 - 박웅현 인문학 강독회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이따금 부지런하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자랑같지만 정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치며 부인하지만 일단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거둬들이려 하지 않는다. 재차 고집스럽게 우기는 것이다. 마치 우기는 사람이 언제나 이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럴라치면 나는 '내가 정말 그런가?' 곰곰 생각해보곤 한다. 정말 그럴까?

 

'부지런하다'는 것은 '어떤 일을 좋아하여 열정을 갖고 임한다'를 달리 표현한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자신을 꾸미는 일을 무엇보다 좋아하여 밤잠을 줄여가며 동대문 상가 새벽시장에 나간다거나 별을 관찰하는 걸 즐겨 하여 매주 토요일마다 천문대를 찾는다거나 산새 소리를 들으려고 아침마다 산에 오른다거나 하는 일들을 생각해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감탄까지는 아니어도 고개는 끄덕여지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밤이고 낮이고 밭에 나가시는 어머니는?'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릴 분들이 있을까봐 하는 말이지만 어머니는 농사일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가족을 거두는 일을 좋아하시는 것이다. 당신이 가꾸고 키운 곡식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입히고 먹이는 게 무엇보다 좋은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이따금 착각하는 이유는 대상을 잘못 짚는 데 있다. 우리 어머니는 농사일을 정말 좋아하셔, 라고 말하는 불효막심의 자식이 되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제2탄(속편일지도 모르지만)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허구한 날 책을 사대면서도 나는 매번 비슷한 이유의 핑계를 대곤 한다. 이제는 질릴 만도 한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박웅현의 책을 읽고 공감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깊이 있는 독서 습관에 있을 텐데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읽는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마치 입에 든 음식을 씹는 것처럼 꼭꼭 씹어 삼킨다. 바쁜 현대인들의 방식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게다가 자신이 읽은 책의 권수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게 좋은 것이다.

 

"1강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어떤 구절을 깨우치는 것은요, 그저 읽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아는 것과 느낀 것은 달라요. 제가 앞서서 불혹이라는 단어를 느꼈다고 말씀드렸지요. 정말 피부로 느꼈어요. 그런데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은 못 느꼈어요. 이 깨달음이 한꺼번에 오진 않겠죠. 하지만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아, 이거구나' 하고 알게 되고, 그다음엔 비로소 내 몸의 일부가 되겠죠."    (p.117)

 

전편을 읽어본 분이라면 알겠지만 <책은 도끼다>에서 저자는 책을 통해 자신이 깨달았던 것들, 이른바 삶의 태도나 창의력 등에 중점을 두고 말하였지만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저자는 그가 선택한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아주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마치 현미경을 통하여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어떤 것들을 새로이 발견하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나는 저자가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선택한 책이 다양한 장르에 걸쳐져 있다는 사실에 약간 놀랐다. 1강에서 쇼펜하우어의 '문장론'과 마르셀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라는 쉽지 않은 책을 선보이더니 2강에서는 '곽재구의 포구 기행', '길귀신의 노래' 김사인의 '시를 어루만지다', 법인 스님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등 다소 부드럽고 문학적인 책들을 선택함으로써 1강에서 경직되었던 사고의 틀을 2강에서는 다시 노곤노곤하게 만든다. 이렇게 8강까지 이어진다. 8강에서는 그 유명한 괴테의 '파우스트'를 다룬다.나는 개인적으로 예술에 대해 말하는 4강도 좋았지만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다룬 5강이 기억에 남는다.

 

"조용한 해변을 가만히 산책하다가 어느 순간 아주 행복해졌어요. 영적인 순간 같았죠. 완벽했어요.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었고,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었어요. 그거 같아요. 순간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순간 자체가 완벽해야 해요. 바라는 바가 없어야 하죠. 어차피 부족함이 있는 상태에서 원하는 것들은 비합리적인 것들일 가능성이 커요. 지금보다 젊었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잘났으면 좋겠다 하는 소망들 처럼요. 그런 마음을 정리하면 어느 순간 바라는 것 없이 완벽한 순간이 옵니다. 희망을 극복하면 만날 수 있는 순간이지요. '희망의 극복'이라는 말, 이 또한 카잔차키스입니다. 희망을 극복의 대상으로 봤다는 것은 순간에 온전하겠다는 의지예요."     (p.210~p.211)

 

오늘 아침에도 무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산을 올랐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내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은은히 전해져 오는 솔향기와 온 산으로 울려퍼지는 매미 소리와 사색에 빠져들수록 더욱 고즈넉해지는 숲의 적막감. 나는 그런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흐트러진 마음과 흐트러지려는 마음 사이에 존재하는 약간의 시차와 메울 수 없는 그 틈새를 뚫고 샘물처럼 솟아나는 생각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면 듬성듬성 내 마음의 틈새가 메꾸어지는 듯 보이고 어느 정도 내 실존에 대해 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현재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한 듯 보였다. 그리고 내 속에 존재하는 희망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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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내가 타인을 의심하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다는 걸 확인한 부끄러운 하루였습니다. 여기에 어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나는 누군가의 선의를 먼저 의심부터 했었고 속으로는 내심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속이려 들어.' 생각하면서 나 자신의 민첩함이랄까, 영민함에 대해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마치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지 않을 셜록 홈즈의 머리와 LTE급의 눈치를 지닌 듯 행동했던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경계하기는커녕 똑똑하다거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 경향이 있어 온 듯합니다. 그런 추세는 지금까지 줄곧 이어져왔고 타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순진하다거나 시대에 한참이나 뒤처진 사람쯤으로 치부하기도 하지요. 그것은 내가 속한 이 사회로부터 배운 일종의 학습효과였습니다.

 

어제는 위안부 협상에 대한 후속조치의 일환으로 한일간의 실무자급 협의가 있었던가 봅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협상 결과물을 두고 정부는 국익을 위해 또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정부가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평하곤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꼼수 정치, 거짓 논리에 당해 왔었습니다. 그렇게 학습된 결과는 이제 개인간의 극심한 불신으로까지 확대되었고 말이지요. 사드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국가 안보라는 미명하에, 또는 미국의 주장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정부의 모습을 '국익'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함으로써 국민을 한껏 우롱합니다. 국민의 안전은 뒷전인 채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가리기 위함이었을까요? 어제는 하루 종일 유명 연예인의 열애 기사가 전 국민의 눈과 귀를 흐려 놓았습니다.

 

꼼수나 임시변통의 처세가 단기적으로는 국익에 부합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칙이 없는 꼼수의 정치는 결국 제 나라의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타국으로부터의 불신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의 바깥 풍경은 마치 가을의 한낮인 양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대기중의 습도를 3할쯤 걷어낸 듯한 모습입니다. 한낮의 기온은 여전히 뜨겁지만 말입니다. 계절은 시나브로 가을로 향해 가고 있나 봅니다. 여름을 견뎌온 모두들, 폭삭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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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08-11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의 글쓰기특강>에서 ˝글쓰기는 무릇 용기있어야 한다˝는 구절을 읽었어요. 지금 읽고 있는 무라카미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중에서는 ˝설령 네거티브라고 해도 분명한 반응을 이끌어내는게 더 좋을 것이다˝란 구절도 저에게 영향을 끼치는 문장이구요. 꼼쥐님의 이 글은 제목부터가 너무 멋지네요~특히나 아무렇게나 규칙없이 굴곡져 있는 퍼즐이 결국엔 빈틈없이 짜맞추어져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듯이, 글을 마무리짓는 능력도 한편의 시처럼 멋져요~
이거 적다보니 꼼쥐님의 글에 대해 제 멋대로의 잣대로 평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 오해는 말아주시구요^^항상 고정적인 독자라 또 한번 배우고 간다는 팬심을 담았을 뿐입니다♡

꼼쥐 2016-08-13 14:24   좋아요 1 | URL
이렇게 과분한 칭찬을 남겨주시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사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의 글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때로는 블로그에 올린 자신의 글이 부끄러워 약간의 수정을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읽는 느낌은 많이 달라지더군요. 전업작가라면 아마도 자신의 글을 끝없이 고치고 또 고치고 하겠지요. 저는 성격이 급해서 한 번에 후다닥 쓰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니 글솜씨라고 할 것도 없는 글이 늘 그모양으로 발전이 없나 봅니다.

2016-08-11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3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봉고차 월든 - 잉여 청춘의 학자금 상환 분투기
켄 일구나스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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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에 새로 취임한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의 분별 없는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다는 기사를 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말인 즉 "국가 장학금 규모를 줄이고 무이자 대출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빚(채무)이 있어야 학생들이 파이팅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과거의 어느 시점(예컨대 1980년대와 같은), 아무리 큰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일단 대학 졸업장만 손에 쥐면 적당한 일자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에는 능히 할 수 있는 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요즘처럼 이십대 태반이 백수(줄여서 '이태백'이라고 하던가요?)인 시대에 그의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어보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감각이 없는 구세대의 한 사람이었을 뿐 한국장학재단을 맡아 운영할 만큼 요즘 젊은이들의 생활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게지요.

 

우연이겠습니다만 며칠 전에 나는 이런 문제를 안고 있었던 한 젊은이의 분투기를 책으로 읽었습니다. 켄 일구나스가 쓴 <봉고차 월든(Walden on wheels)>이라는 책이었죠. 제목이 좀 촌스럽죠? 그래서 나는 책을 읽기도 전에 '재미없겠는걸' 하는 선입견이 들었지 뭡니까. 그런데 웬걸요. 책은 의외로 쭉쭉 읽혔습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지요. '잉여 청춘의 학자금 상환 분투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미국 뉴욕 주 서부의 작은 마을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던 저자는고등학교 졸업 후 앨프리드 대학교에 진학했으나 터무니 없이 비싼 등록금 탓에 뉴욕주립대 버펄로 캠퍼스로 옮겨갑니다. 앨프리드 대학교의 학점을 인정받지 못해서 뉴욕주립대를 4년을 다녀야만 했고, 재학 시절 그는 슈퍼마켓의 카트 정리 아르바이트,신문배달, 패스트푸드점 조리사, 정원사, 공공 스케이트장 경비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몇 차례의 인턴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대학을 마쳤건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 그가 손에 쥐었던 것은 취업에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역사학과 영문학 학사 학위증과 3만 2000달러라는 거액의 학자금 대출뿐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닥친 상황이 너무나 한심했기 때문에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경멸스러웠다. 5년이나 대학을 다니고, 두 차례나 무급 인턴으로 일하고, 3만 2000달러나 되는 빚을 지고도 나는 십대 때와 변함없이 취업시장에서 환영받을 요소는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딱히 기술이 필요 없고 책임도 별로 지지 않는 저임금 노동만 벌써 몇 년째 하고 있었다." (p.83)

 

취업시장에서 수십 번 고배를 마신 그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집을 떠나 알래스카로 향합니다. 그가 머물렀던 곳은 언 발을 녹이는 장소라는 뜻의 콜드풋((Coldfoot)이었습니다. 경비행기 투어의 북극 지역종착점이기도 한 그곳에서 그는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시급 9달러의 모텔 청소부, 여행가이드 등의 저임금 노동을 하며 1년을 보냅니다. 때로는 주방 보조를 하기도 했고, 철거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한 덕분에 그는 1만 8000달러의 빚을 청산합니다. 휴대폰도 통화가 되지 않는 알래스카의 오지에서 안 먹고, 안 입고, 안 쓴 결과였습니다. 다달이 갚아야 하는 학자금 대출의 몇 개월분을 미리 선납했던 그는 비행기값도 아까워 히치하이킹으로 부모님이 사는 뉴욕에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의 여유로운 시간 동안 18세기 뱃사람처럼 캐나다의 온타리오를 뗏목 항해로 가로지르는 두 달간의 모험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 항해를 통해 우리에게는 필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밖으로 내보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 정원을 가꾸고, 지붕을 고치고, 이웃과 교류해야 할 필요가 있다." (p.187)

 

항해를 마친 후 그는 멕시코만 보호봉사단에 가입하여 미네소타로 향합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빚을 청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소비생활을 줄이기 위해 1인용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등 절제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던 여인 새미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새미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몇 번의 자살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회복을 위해 애쓰는 그녀를 위해 저자는 알래스카에서의 일자리를 구해주고 그녀와 함께 알래스카로 향하는 히치하이크를 감행합니다.

 

"나는 내 손으로 빚을 갚으며, 혼자 힘으로 여행하고, 일을 해도 가난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더이상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괄시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p.188)

 

빚을 모두 청산한 뒤 그가 했던 결심은 다시는 빚지지 않겠다는 것과 인문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 새미와 헤어진 그는 듀크대 대학원에 진학합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연못가의 오두막에서 은둔했던 것처럼 대학원 생활 2년 반 동안 그는 낡은 봉고차에서 생활했습니다. 봉고차를 구입하고 대학교 구내에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증을 구입하고,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블라인드와 천으로 가리고, 식재료와 물건을 정리할 수 있도록 선반을 만들고, 의자를 이용하여 침대를 만든 후 그는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체육관에서 샤워를 하고 화장실에서 면도를, 도서관에서 휴대폰과 노트북의 충전을, 학교 근처의 빨래방에서 세탁을 하면서 그는 최소한의 소비를 이어갔습니다. 차에 쥐가 들어오는 바람에 심하게 아팠던 적은 있지만 금욕적인 생활 덕분에 몸은 더 건강해졌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사는 풍경의 본질과 성향이 비슷해진다. 농장이 근면성을 길러주듯이 사막은 검소함을, 산은 강인함을 길러주며, 바위투성이의 해안 지대는 낭만적인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마찬가지로 교외 지역은 따분함, 구태의연함, 순응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나는 주변을 둘러싼 환경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했다." (p.229)

 

학기중에는 봉고차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방학 동안에는 알래스카의 국립공원에서 일하면서 그는 빚을 지지 않고 무사히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모신 졸업식장에서 그는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하였습니다. 저자도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이 그 비용을 자신의 빚으로 떠안아 결국에는 그 빚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저당잡힌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대학을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빚의 무서움을 고지하거나 장학금 지급을 늘리거나 뭔가 대책이 필요한 시점에 장학재단 이사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가볍게 말을 했다는 건 현재 대학생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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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서양화가를 뽑으라면 단연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1순위로 뽑히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서양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여 들어본 서양 화가의 이름이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과 그가 남긴 편지의 글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설령 이전에 그의 그림을 단 한 점도 본 적 없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그의 영혼에 먼저 반하고 말 것이다.

 

고흐의 그림 또한 인기 있는 작품이 한둘이 아니어서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나는 유독 그가 그린 '자화상'에 눈길이 가곤 한다. 나와 같은 일반인이 알고 있는 고흐의 자화상은 사실 몇 점 되지도 않지만 반 고흐는 자신의 초상화를 적어도 36장을 그렸다고 한다. 그 자화상 중 18점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하는데, 고흐가 이렇게 많은 자화상을 그린 이유는 주로 모델료가 없어서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직접적인 또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내면에 살아있는 또 다른 자신을 찾고 싶은 욕망, 그것은 어쩌면 모든 예술가의 가장 기본적인 소재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게 하고 자신의 창작열을 일깨우는 예술의 원천이 아닐 수 없다.

 

화가만 그런 것이 아니고 글을 쓰는 시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애비는 종이었다'고 씀으로써 스스로를 종의 자식으로 단정하는 서정주의 자화상,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로 끝을 맺는 윤동주의 자화상, '5척 1촌 5푼 키에 2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고 운을 떼는 노천명의 자화상,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 한하운의 자화상, '이 찬란한 후회가 나일 줄이야'라고 외치는 고은의 자화상, 고흐를 흉내내어 '낯선 거울 앞에서 나도/ 귀를 잘라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정희성의 자화상, '나 요즘 창녀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며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문정희의 자화상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술가는 매번 자신의 언어로 '나'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실패한 언어일 뿐, 마침내 성공한 언어일 수는 없다. 삶도 그렇거니와 예술은 결국 명계에 있는 높은 바위산 꼭대기로 큰 바위를 굴러 올리는 '시지프스의 비극'인 셈이다. '내가 지금 소모해버리고 있는 이 순간은 내가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시간이다.'라고 말했던 니체의 명언처럼 우리의 권태로운 삶은 예술과 맞닿아 있다.

 

어디 예술가뿐이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들을 우리는 끝도 없이 마주한다.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구질구질하고 추레한 듯한 내 일상의 낱낱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말하다 보면 '나'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궁극에 이르게 된다.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는 최후의 모순.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설명하기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신의 역할에 따라 이유도 없이 도매금으로 매겨지는 자신의 모습을 진실인 양 믿으며 사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신분으로서의 정체성은 비록 허울뿐인 실체에 가깝지만 뭐, 그런들 어떤가. '애비는 종이었다'고 외칠지도 모르는 이 시대의 '흙수저'들이 a4 용지 한 장에 가지런하게 적어 내려가는 슬픈 현장은 이 시대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섭씨 36.5도는 오늘의 기온인 동시에 이 시대의 체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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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8-05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예요 . 저도 초판본을 가지고있는데 아직도 가끔 들여다봐요. 테오에게 늘 소식을 전하던 고흐의 마음이 읽혀서요!^^

꼼쥐 2016-08-11 15:03   좋아요 1 | URL
고흐는 정말 어떤 문학가보다 더 뛰어난 글솜씨와 어느 철학자보다 더 뛰어난 사고력을 갖고 있는 듯하지요? 저는 그 책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곤 합니다.테오에 대한 고흐의 마음이나 테오가 형 고흐를 생각하는 마음이나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지요.

[그장소] 2016-08-11 21: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영혼이 예민한 건지 감도가 높은 주파수처럼 ..그런부분이 있어요!^^
 
명화가 내게 묻다 - 당신의 삶에 명화가 건네는 23가지 물음표
최혜진 지음 / 북라이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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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만큼 바쁘다는 푸념이 누군가에게 때로는 '나도 저렇게 푸념 좀 해봤으면...' 한없이 부러운 말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말을 하던 당신은 내심으로는 은근히 뻐기거나 으쓱해지는 감정이 들지는 않았나요? 또는 '나도 너처럼 한가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당신의 말 속에 나는 적어도 너보다는 쓸모가 많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슬몃 찔러 넣었던 적은 없었는지요. 우리는 유능함의 기준이 바쁨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대놓고 자랑질을 하기가 뭐해서 겸손한 척 자랑을 했던 거라면 그건 정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최혜진의 <명화가 내게 묻다>를 읽는데 그런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의뭉스러운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 그런 척 위장을 하고 유치찬란한 자신의 허세를 감추기 위해 쉬운 상대를 골라 비난하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그 시절 나는 일을 많이 해내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다른 직원보다 업무량이 많은 것, 업무 시간이 긴 것, 남들이라면 손을 내저으며 이 시간 내에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할 일을 맡아서 초인적으로 처리해낼 때 자부심을 느꼈다.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능력 있는 인재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시간을 쥐어짜듯 살면서도 커리어우먼의 삶은 다 그렇겠거니 했다." (p.151)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앞에서 작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우울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진이 아닌 그림에 탐닉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가는 피사체의 겉모습이 아닌 그 사람의 인생이나 감정을 화폭에 담으려 노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는 규정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을 그림에서 찾아내고 제 나름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렘브란트의 역할극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자아라는 것도 조금씩 발견하고 개척해나가는 신대륙 같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기 발견의 가장 좋은 방법은 낯설고 새로운 상황과 처지에 스스로를 던져놓고 그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란 생각도. 빈곤에 처했을 때의 나, 승승장구하며 성취감을 누릴 때의 나, 을의 자리에 있을 때의 나, 갑의 자리에 있을 때의 나 ……. 그 많은 내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이 결국 자아 성찰 아닐까." (p.70)

 

잡지사 제이콘텐트리 m&b에서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했다는 작가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는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여 기자 생활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갔고 어느덧 미술관 여행 10년 차가 되었다는 그녀는 미술관에서 그녀가 얻고 싶은 것이 '교양'이 아니라 '관계'이고, 하고 싶은 것은 '감상'이 아니라 '대화'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난해한 미술사나 현학적인 미술용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그림에서 발견한 '나'라든가, '일'이라든가, '관계'라든가, '마음'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나는 비록 그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일자 무식꾼이기는 하지만 그림을 감상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는 것마저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지요. 흐트러짐 없는 선을 긋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는 시간이 더없이 좋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가 담긴 한 장의 그림에 오롯이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을 즐깁니다. 친구들에게도 '그림은 언어가 없는 한 편의 '시'이거나 삶의 '은유''라고 종종 말하곤 합니다. 그림 속에서 우리는 피사체 너머의 어떤 세계를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작가가 좋아한다는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하메르쇠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상의 별것 아닌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보는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그림에서 발견하곤 하지요. 최혜진 작가처럼 말입니다.

"일상 공간을 고요하게 가로지르는 햇빛, 그로부터 퍼지는 신비로운 기운, 정적에 잠긴 인물, 이런 몽환적인 표현 덕분에 분명 닳고 닳은 일상임에도 뭔가 낯설고 특별한 느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일 이면에 숭고한 의미가 있을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p.343~p.344)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시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발견이자,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술을 이해한다는 건 그런 것이겠지요. 반복되는 일상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어쩔 수 없는 권태를 새로움으로 치장하여 매일매일을 처음인 양 살도록 돕는 일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내 눈에는 참으로 숭고하게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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