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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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독자들보다 프로 작가들에게 더 사랑받는 작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공선옥 작가도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작가들 사이에서만 인기가 있고 일반 독자들로부터의 인기가 아주 없다는 애기는 아닙니다. 일반 독자들로부터 듣는 찬사보다 동료 작가들의 칭찬이 더 깊고 강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데에는 아마도 그녀의 작품 속에 깃든 날것의 느낌, 어느 것에 물들거나 규격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느낌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 가슴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소설가 공선옥의 오랜 독자 중 한 사람인 나는 한국 소설의 정형화된 틀로부터 툭 불거져 나간 듯한 그녀의 작품들을 늘 기꺼운 마음으로 읽어 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맞닿아 있는 작가의 오랜 분노가 답답한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작가로 등단하기 이전까지의 힘들었던 삶에서 발원하는 절망 또한 작품 속에서 그 분노에 더해졌던 까닭에 독자가 느끼는 한과 분노는 한층 배가되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어제는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가 있었습니다. 탄핵 소추안 표결을 염두에 둔 여러 포석이었겠지요.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내용인 즉 자신은 잘못이 없지만 국정의 공백과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정권 이양 방안을 만들어주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은 잘못이 없지만 '퇴진을 바라는 국민들 의사가 완고하니 국민들을 대신하는 국회에서 알아서 해라' 하는 의미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속내를 사과의 형식으로 에둘러 말한 것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담화였습니다. '뮤전무죄 무전유죄'의 속설에 더하여 '유권무죄 무권유죄'의 현실은 과거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합니다.

 

"세상이 미친 거여. 미치지 않은 세상은 언제였을까. 나한테도 미치지 않은 세상이 있었을까. 딸한테 몹쓸 짓을 한 아버지는 미쳤지. 아버지가 미쳤다는 것을 모른 척한 엄마도 미쳤지. 식구들 다 미쳤지. 동네 사람들 다 미쳤지. 나도 미쳤지. 내 속에 이 큰 슬픔을 누구한테 말할까.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미친 거여. 미친 세상에서 미친 사람만이 미치지 않은 거여." (p.198)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많지만 이야기는 주로 정애와 묘자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소설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남도의 시골 마을 '새정지'와 80년을 전후한 광주를 배경으로 진행됩니다. 새정지에서 나고 자란 두 소녀 정애와 묘자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도 가장 힘없고 가난한 축에 속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난 정애는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가 투전판에서 돈을 모두 잃고 도망가는 바람에 세 명의 동생과 임신한 어머니를 도맡게 됩니다. 묘자 또한 정애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과 할머니를 두고 개가를 하는 바람에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모시는 가장의 입장이 되었습니다.

 

바람막이가 없는 두 소녀에게 가해지는 마을 남자들의 더럽고 추악한 폭력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애네 집 담장을 무너뜨리고 돼지와 오리를 훔쳐갑니다. 한편 새마을 연쇄점에서 하드를 얻어 먹은 바로 밑 동생 순애는 주인에게 몸을 뺏긴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정애도 '부로꾸 찍는 남자'에게 끌려가 몹쓸 짓을 당하고 맙니다. 정애의 엄마가 쌍둥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마저 동네 사람에게 살해되자 정애는 살아 남은 동생 두 명을 데리고 광주로 나가 콩나물 장사를 시작합니다.

 

"옛날이야기 싫어하는 세상에서 옛날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디나 푸근하다. 새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무섭다. 모든 새것들은 다 무서운 것이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p.137)

 

정애가 새정지를 떠나고 5년의 세월이 흐른 1981년, 재가한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광주로 나온 묘자는 그곳에서 우연히 정애를 만나게 됩니다. 정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설에서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봄에 이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소문과 함께 군인들이 정애에게 몹쓸 짓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입니다.

 

엄마의 식당일을 돕던 묘자는 박용재와 사랑에 빠져 살림을 차리게 됩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발발 전에 카센타에서 일을 했던 박용재는 시민군으로 몰려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나온 후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치 않았습니다. 직장마저 얻지 못한 박용재를 대신하여 묘자는 정애를 돌봐주던 식당 '영암집'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재가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 들자 그를 목졸라 죽이고 살인죄로 구속됩니다.

 

"영암집 숙자가 죽은 사람은 있어도 죽인 사람은 없는 야속한 세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산 사람들은 사는 것에 바빠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그 사람들이 언제 죽었냐 하고서 잊어버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텐데도 그 사람이 누구를 죽였든지 말든지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시치미 뚝 떼는 세상이라고." (p.165)

 

정애는 동생들만 광주에 남겨둔 채 다시 새정지로 돌아갑니다. 육체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정애는 폐가로 변한 고향집에서 간신히 연명합니다. 그것도 한동안.

 

"이 세상에서 잡고 싶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잡고 싶은 데도 잡히지 않는 것은 슬픈 것이다." (p.34)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감옥에서 풀려난 묘자는 숙자가 하던 '영암집'을 자신이 맡아서 하게 됩니다. 백발이 된 묘자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애인 듯한 여인과 조우합니다. 묘자의 귀에 그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묘자는 사라진 여인과 아련한 노랫소리에 빗속에서 넋을 놓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하고 묻던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내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하고 묻던 여자의 노래는 어디로 갔을까. 여자가 남긴 노랫소리만이 빗물에 젖고 있었다. 노래에 빗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빗물은 노래와 한몸이 되어 어디론가로 흘러갔다. 빗물을 타고 노래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묘자는 한참 동안 빗속에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저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생각하면서." (p.260)

 

아침부터 흐렸던 하늘에선 기어코 비가 내립니다. 궂은 날씨를 핑계삼았던 나는 공선옥 작가의 소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끝내 다 읽고 말았습니다. 차마 중간에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삶이 말할 수 없이 힘들 때에는 누구나 노랫가락 한 소절 흘러나오게 마련입니다. 들어주는 사람 아무도 없을지라도 허공에 대고 꾸역꾸역 부르게 되지요. 아마도 우리의 핏속에는 원시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 DNA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공선옥의 소설 <그 노래는 어디에서 왔을까>에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참혹한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노래가 등장하곤 합니다. 작자미상의 오래된 노래인 양 출처도 알 수 없는 노래들이지요. 그 노래로 인해 소설은 아주 오래전의 구전가요인 양 환상과 추억으로 읽힙니다. 작가는 아픈 현대사의 슬픔을 노래로 씻어내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에 울려퍼지는 노래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국민들의 분노와 응어리가 노랫가락에 한처럼 서려 있음을 정치인들은 똑똑히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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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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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 몇 년 안에 책을 내겠다거나 하는 식의 어떤 거창한 목표를 세웠던 건 아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품었던 단 하나의 생각은 내가 보았던 그대로, 내가 들었던 그대로,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를 내 두 손을 통하여 글로 쓰고 싶다는 거였다. 처음에 나는 그게 그토록 힘든 일인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어쩌면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감히 품지 못하는 대단한 목표를 세웠는지도 모르지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나는 그때 그런 사소한 것도 알지 못하는 두려움 없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했었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오히려 글을 쓰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글을 써온 기간이 길어지면서 비례하여 증가했다. 하다 못해 자동차를 수리하는 정비 기술도 하면 할수록 몸에 익고 나날이 향상되는 법인데 기껏해야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글로 쓴다는 게 이렇게나 어려울 줄이야 상상이나 했을까. 내가 쓴 글을 읽어볼라치면 처음 생각과는 딴판인, 전혀 다른 사람의 글이 되곤 했다. 그제서야 나는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이 걸렸다."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조금쯤 이해가 되었다.

 

정말 그랬다. 타인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는 뜻의 '제 수족처럼 부린다'는 말은 우리가 평상시에 아주 쉽게 내뱉는 말이지만 자신의 두 손도 생각하는 대로 쓸 수 없는 게 인간인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수족처럼 부린다는 건 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달리 노력을 아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어지간한 글쓰기 관련 서적은 한 번씩은 다 읽어보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의 글쓰기 실력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도 다 허언처럼 들렸다.

 

그런 줄 번연히 알면서도 오늘 또 나는 글쓰기 관련 책을 읽었다. 은유의 <글쓰기 최전선>. 책의 제목은 다소 비장한 느낌이 들게 했다. 이게 아니면 나는 끝이다, 하는 결연함이 엿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책의 내용은 글쓰기에 관한 세세하고 정교한 기술을 가르치기보다는 글쓰기의 방향이나 목적, 사람과 삶의 이해 등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글쓰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글쓰기 내공'을 강화하기 위한 기초 체력의 연마에 중점을 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부족해(보여)도 지금 자기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실패하면서 조금씩 나아진다는 점에서 나는 글쓰기가 좋다. 쓰면서 실망하고 그래도 다시 쓰는 그 부단한 과정은 사는 것과 꼭 닮았다. 김수영의 시『 애정지둔(愛情遲鈍)』에 나오는 대로 "생활무한(生活無限)"이고 글쓰기도 무한이다." (p.58)

 

"수유너머R"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드러내 놓고 함께 고민한다. 글을 씀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 예컨대 자신의 삶을 옹호하게 된다거나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거나 하는 것들로부터 시를 통한 사유의 폭을 넓히는 문제, 글의 모티브를 찾는 방법 등에서부터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글은 삶의 거울이다'라는 명제에 이르게 되고 그것은 곧 '왜 쓰는가?'의 문제로 회귀한다.

 

"글쓰기를 한다는 일은 마음껏 슬퍼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슬퍼한다는 것은 온전한 내가 되는 일 같다. 나의 슬픔과 기쁨을 후련하게 말하기. 기쁨을 내밀듯이 슬픔을 꺼내놓는, 존재의 편안한 열림을 글쓰기가 돕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열어젖혀진 존재 위로 또 다른 말들과 생각들이 날아들 것이다." (p.269)

 

아쉽게도 나는 글쓰기에 바쳐온 나의 시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발자국의 전진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딱 하나 '재능 없음'의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또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첫눈이 내렸던 오늘, 어디에 기댈 데 없는 나의 글쓰기 솜씨는 나를 우울하게 한다. 복권에 당첨되면 없던 글쓰기 솜씨도 일거에 구제할 수 있는 그런 복권이 있다면 우연에 기대를 걸고 한 장 사고 싶은 마음이다. 혹시 그런 복권을 파는 곳이 있으면 제보 바란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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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편 몇 쪽이 전부였지만 사람들은 다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절편 한 쪽씩을 입에 물고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라면 밍밍한 절편에는 손도 대지 않을 게 뻔한데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 한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오물거리는 본새가 꼭 세살배기 어린애 같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남은 절편 접시에 고정한 채 거둘 줄을 몰랐다.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나도 한 쪽 거들었다. 그 바람에 접시의 떡은 금세 동이 나고 사람들은 다들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금요일 오전의 짧은 휴식은 사람들에게 묘한 활력을 안겨 준다. 곧 주말 연휴가 기다리고 있다는 기개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에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떡의 출처도 모른 채 기름이 반지르르 한 떡 한 쪽을 입에 물고 자리로 돌아왔다. 점심 식사 전의 간식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도 오늘은 왠지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고 말았다. 삶에 필요한 가벼운 규칙들은 이렇게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그럴라치면 나는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 뭐. 사는 게 뭐 별건가?'하는 생각으로 짐짓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요 며칠 추웠던 날씨는 낮이 되면서 많이 누그러진 듯했다. 국민들의 거듭되는 퇴진 요구에도 대통령은 요지부동 움직일 줄을 모른다. 어쩌면 법이라는 게 안중에도 없었는지 모른다. 내가 규칙을 어기고도 '내가 뭘 잘못했는데?' 묻는 것처럼 대통령도 그런 생각인가 보다. 어렸을 때부터 늘 특별한 존재로서 대접을 받았던 그녀의 이력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오르한과 비교하면 그녀는 너무도 뻔뻔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물러난 술탄의 왕자였던 오르한은 15세 때에 국외로 추방되어 단 한 번도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68년을 국외에서 떠돌았다. 추방된 왕족 중 남자는 50년 여자는 여자는 28년 동안 다시 고국에 돌아올 수 없다는 조항 때문이었다. 생계를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이집트와 프랑스를 떠돌았던 그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83세의 나이로 68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자신이 살았던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5일 동안 머물렀던 그는 국민들의 탄원으로 마지막 여생을 터키에서 보낼 수도 있었지만 다시 이집트로 돌아갔다. 터키에 세금을 한 푼도 낸 적이 없는 자신은 터키에 살 자격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일 년 후 그는 이집트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후세를 남겨 자신처럼 숨어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평생을 공주로 대우만 받으면서 살았던 우리나라의 대통령과는 극과극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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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얘기가 웃긴다고? 조심해! 나 까칠한 들고양이 에드가야! - 400일 동안 끄적인 일기
프레데릭 푸이에.수지 주파 지음, 리타 베르만 그림, 민수아 옮김 / 여운(주)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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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도 반려동물을 집 안에서 키우는 풍경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개를 집 안에서 키운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간혹 개를 품에 안고 지나가는 여자만 보여도 동네의 어른들은 뭔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끌끌 혀를 차곤 하셨다. 개는 당연히 마당의 한쪽 귀퉁이에 박아 놓은 말뚝에 묶인 채 다 찌그러진 양은 밥그릇이나 깨진 바가지에 담긴 잔반을 먹고 자라는 존재여야 했다. 이따금 낯선 사람이라도 볼라치면 목청을 높여 컹컹 짖고 주인이 외출에서 돌아올 때면 가볍게 꼬리를 흔드는 것으로 친밀감을 표시하는 등 피아의 구별이 확실한 개는 주인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개를 집 안에 들이지는 않았고 그저 끼니를 거르지 않게 제때에 밥을 챙겨주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정도가 다였다.

 

반면에 마을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많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집집마다 쥐도 워낙 많았고 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집도 많았으니 고양이를 키우는 집이 많았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을 천성적으로 따르는 개와 달리 야생의 본능이 살아 있는 고양이는 사람 근처에 잘 오려 하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마주치는 고양이 눈빛 또한 보는 이를 섬뜩하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긴긴 겨울밤에 듣는 고양이 울음 소리는 어느 집 갓난쟁이의 울음인 양 애처롭게 들렸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 나의 할머니도 고양이는 항상 재수없는 동물로 말씀하시곤 하셨다.

 

나는 지금도 고양이에 대한 친밀감과 두려움이라는 양가감정을 갖고 있다.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듯한 우아한 걸음걸이와 도도한 자태, 사람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는 고집스러움은 곁에 와서 엉기고 치대는 반려견보다 훨씬 사랑스럽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렸을 때 이웃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미신에 가까운 이야기로 인하여 고양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다.

 

날씨도 날씨려니와 되어 돌아가는 나라꼴이 엉망이어서 나는 요즘 기분도 꿀꿀하고 진득하니 책을 읽기도 어려웠다.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껴 고른 책이 『내 얘기가 웃긴다고? 조심해! 나 까칠한 들고양이 에드가야!』이다. 들고양이 에드가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사회의 세태와 모순을 통렬하게 풍자한 책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은 무수히 많지만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작가의 풍부한 상식과 넘치는 재치가 책의 성패를 좌우하게 마련인데 이게 또 너무 지나치면 과장인 듯 비친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게 적절한 선에서 써내려간다는 게 쉽지 않아서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우화가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르는 경우는 잘 없다.

 

"고양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도 보수적인 편이야. 난 최신기기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는 너희 인간들과는 달라. 낡은 공과 비닐봉지야말로 내가 무지 좋아하는 장난감이지. 그런 내가 '멍청이'들의 태블릿 PC에 서서히 중독되고 있단다. 발로 한 번 톡 치면 웹 서핑을 할 수 있고, 한 번 더 톡 치면 요리 레시피 앱을 실행할 수도 있어. 그리고 또 다시 발로 톡 치면 새를 던져 돼지를 죽이던 걸. 그러고 보면, 인간들은 가끔 괴상한 걸 고안해 내는 것 같아." (p.135)

 

이 책의 주인공인 6개월 된 아기 고양이 에드가는 어느 날 마크와 세브린느의 집에 입양된다. 에드가는 그집 사람들을 '멍청이'라고 부른다. 에드가가 살게 된 집에는 마크와 세브린느 부부, 다섯 살배기 로돌프, 열네 살짜리 레아, 잡종견 파타푸프가 살고 있다. '400일 동안 끄적인 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이름도 없었던 들고양이 에드가가 에드가로 살게 된 400일 동안의 생활을 일기로 기록한 책이다.

 

"젠장! 감옥이나 다름없는 이런 집에서 대체 어떻게 지내야 하지? 분명히 말하지만, 난 특급 우편물이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은 수고양이야. 문신도 새겼지. 좋아, 하여간 이런 수용소 같은 곳은 진작 벗어났어야 하는데. 그 어떤 길고양이 형제들보다 더 싫거든. 케이지는 비좁고, 불편한데다, 역겨운 냄새마저 뒤섞여 마치 빈민굴 같고, 먹이는 열차에서 파는 음식처럼 맛없어." (p.6)

에드가는 아이작 뉴턴의 만류인력 법칙을 척척 증명할 만큼 똑똑한 고양이이지만 때로는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겁을 집어먹기도 하고, 이웃집 암고양이에게 홀딱 반하기도 한다. 고양이의 삶이라는 게 늘 먹고 자고, 또 먹고 자는 게 일이지만 호기심이 발동하면 무섭게 집중하기도 한다.

 

"우리 편집장이 귀띔하던 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일으킨 바람을 한번 타 보자고. 그러니 내 일기에도 에로티시즘을 살짝 가미해 보라고.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어제 저녁, 굉장히 멋진 암고양이를 만났지 뭐야. 그토록 섹시하고 요염한 암컷은 처음이었어." (p.108)

 

내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에도 들고양이가 산다. 밝은 갈색의 그 고양이는 잊을만 하면 나타나서 슬쩍 얼굴만 뵈주고는 빠르게 사라진다. 그런데 오늘처럼 기온이 꽁꽁 얼어붙는 날에는 등산로 초입의 침목 계단에 엎드려 잠을 자다가 내가 나타나면 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괜시리 미안해진다. 나 때문에 잠을 깬 것 같아서 말이다. 작년 여름의 어느 날, 그 고양이는 자신의 새끼인 듯 보이는 어린 고양이들을 데리고 숲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니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또 혼자가 되었다. 그 고양이를 볼 때마다 나는 묻고 싶은 게 있다. '사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삶이 항상 축복일 수는 없는 일, 오늘 하루도 지워지듯 스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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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금을 그을 수 있다면 어제와 오늘 사이에 금을 하나 긋고 이쪽은 겨울, 저쪽은 가을 선명하게 갈라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늘은 일년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小雪). 아침엔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질 듯 하늘이 어둡기만 하더니 지금은 멀끔히 개인 하늘에 손돌바람이 드세다.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진 풍경에 사람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새벽부터 들려온 옆나라의 지진 소식에 잠시 잊혀졌던 공포가 스멀스멀 되살아나고 갑갑한 정치 현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떨어진 낙엽들은 심심했던지 하릴없이 우르르 저리 몰려갔다 이리 몰려오며 긴 하루를 보내고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이 그 위를 무심한 듯 지나쳐간다. 국민 5%의 지지를 등에 업고 '배 째라'는 식의 조폭 우두머리 양아치짓을 하는 대통령을 보며 사람들은 다들 혀를 찼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런 짓을 할 수 있누. 그렇게 안 봤는데 영 몹쓸 사람이구먼." 국가의 안위나 국민들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듯 나 몰라라 하는 대통령의 태도에 국민들은 다들 학을 떼는 듯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수시로 이어지는 모임과 어수선한 일정에 하루하루의 피로가 점점 쌓여만 가고 괜한 짜증으로 옆사람을 힘들게 한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적어도 대통령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시인의 시가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공선옥 작가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읽고 있는데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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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2 1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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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3 1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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