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공기가 맑았다. 일 년 중 반 이상의 날을 미세먼지와 함께 살다 보니 오늘처럼 청명한 날이면 내가 마치 딴 세상에 온 듯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 든다. 명절 연휴가 짧았던 탓인지 명절 후유증은 앓지 않았다. 간만에 모인 가족들은 뭔가에 쫓기는 듯 분주했고 그저 얼굴을 뵈주었으니 됐다는 식으로 서둘러 떠나갔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삼형제 중 막내인 나는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명절 때마다 큰형의 집을 찾고는 있지만 진득하니 오래 앉아 있지 못한다. 누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 어미 자식도 아롱이다롱이라고 어느 집이나 형제들의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속마음은 제각각이다. 각자 떨어져 살다가 일 년에 두어 번 만나다 보니 핏줄의 끌림보다는 오히려 격조했던 세월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인지 만날 때마다 데면데면하고 마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겸연쩍어 하는 것이다. 말 한마디 꺼내기도 조심스럽다. 그런 까닭에 궁금했던 각자의 삶에 대해 묻는 경우는 드물다. 대화의 중심에는 늘 검부러기처럼 가벼운 정치 이야기나 나라 경제 등 나로부터 한참이나 멀게만 느껴졌던 주제들이 등장하곤 한다.

 

지난 설에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탄핵정국의 대통령에 대한 일치된 성토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투표권이 주어진 후 단 한 번도 야당을 찍은 적 없는 큰형과 서울의 모 대학에서 학생회장을 하는 장조카의 격렬한 논쟁도 올해는 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통 대화라곤 없었던 큰형과 장조카는 정상적인 부자관계로 되돌아간 듯했다. 큰형은 오히려 평소의 정치적 신념이 강경 좌파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대통령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지난 대선에서 지지를 보냈던 자신의 선택에 대한 배신감을 그런 식으로라도 해소하려는 듯. 서로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일이 사라졌으니 가족간 유대 차원에서 대통령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명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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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의 겨울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이상해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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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이따금 더없이 모질고 독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소설가가 다 같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작가가 원하는 극적 반전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훌륭한 주인공일지라도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과감히 밀어버릴 수 있는 준비를 단단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야 눈을 질끈 감은 채 그 끔찍한 장면을 조심스레 열어보겠지만 정작 그것을 쓰는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쩌면 롤러코스트를 즐기는 사람처럼 활짝 웃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독자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게 작가의 역량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엘리자 수아 뒤사팽이 쓴 <속초에서의 겨울>은 신예작가 답지 않은 거침없는 필력과 대담한 묘사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가의 대담함은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그녀의 정체성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여자 주인공이라는 굴레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성적 욕망과 가치관에 그닥 장애가 되지는 않는 듯 보인다.

 

"나는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스타킹은 벗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내 흉터, 어릴 적 갈고리 위에 넘어져 생긴 길고 가는 흔적을 어루만졌다." (p.33)

 

주인공인 '나'는 프랑스계 혼혈이다. 프랑스인 아버지가 엄마를 유혹하여 내가 태어나게 되었지만 정작 나는 아버지를 모른다. 부둣가 어시장의 42호 점포에서 노점상을 하는 엄마를 돌보기 위해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엄마가 있는 속초로 내려왔다. 나는 낡은 펜션에서 일한다. 펜션의 주인인 박씨 아저씨는 일 년 전에 아내를 잃고 혼자가 되었다. 겨울의 속초는 춥고 황량하다. 비수기의 펜션에는 일본인 등산가와 성형수술 후 회복차 묵고 있는 내 또래의 서울 아가씨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묵고 있다. 어느 날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만화가 얀 캐랑이 펜션을 방문한다. 그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화를 그리는 인물이다.

 

"노르망디의 해변들, 전쟁은 그 위를 지나갔어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긴 해도 삶은 계속되고 있죠. 이곳 해변들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기다림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결국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호텔도 짓고 반짝이 전등 장식도 하죠. 하지만 그것들 다 가짜예요.. 그건 두 절벽 사이에 길게 늘어져 있는 줄 같아요. 언제 끊어질지 알지 못한 채 몽유병환자가 되어 그 위를 걷는 거죠. 이곳 사람들은 둘 사이에서 살고 있어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 겨울 같은!" (p.101)

 

얀 케랑은 펜션의 별채에서 묵게 된다. 나에게는 모델 지망생인 남자친구가 있지만 그와의 관계는 언제나 겉돈다. 거기에는 나의 엄마가 있다. 늙고 병든 엄마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 남자친구인 준오는 나의 엄마를 서울로 모셔오면 되지 않겠느냐 말하지만 나는 엄마가 속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만화가인 케랑은 나에게 이것 저것을 부탁하면서도 내가 만든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케랑의 모든 것이 궁금했던 나는 그의 주변을 끝없이 배회한다.

 

케랑은 아버지의 고향 출신이라는 지역적 연고로 인해 멀어질 수 없는 대상이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성장했던 나는 그가 그리는 만화 속에서나마 그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케랑을 이성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대역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희미해졌다. 그것은 내 손가락 사이에서, 내 시선 아래에서 방황하듯 희미해졌다. 새가 눈을 감았다. 종이 위에는 이제 오로지 푸른색밖에 없었다. 쪽빛 잉크로 뒤덮인 페이지들. 그리고 그 남자, 겨울 속을 더듬어 나아가던 바다 위의 그 남자는 파도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투명하게 표현된 그의 자취는 서서히 여자의 형태를 취해갔다." (p.171)

 

혼혈이라는 작가의 정체성은 소설 속의 '나'를 통하여 그대로 투영된다.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었던 경계인으로서의 삶은 늘 외롭고 고독했을 터, 관광객의 북적임이 사라진 겨울 속초는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으리라. 파리와 서울, 스위스를 오가며 자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에 가깝지만 처음 출간한 이 소설로 인해 그녀는 스위스의 문학상 로베르트 발저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작가는 일제강점기 이후의 재일한국인들의 애환을 차기작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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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몃 밀어두었던 감정이 제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한바탕 분탕질을 칠 때가 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지갑 속 카드처럼 필요할 때마다 꺼내거나 도로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할 일이 태산인 마당에 제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꼴이란... 때로는 한심한 생각마저 든다. 저 나무처럼 의연할 수는 없을까 하고 눈길을 돌리고 만다. 그게 속 편하다. 그렇게 매번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한바탕 씨름을 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늘 일방적으로 지고 마는 것이다.

 

설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턴가 기대나 설렘보다는 부담만 잔뜩 짊어진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숫제 할 수만 있다면 명절을 건너뛰고 다음날부터 살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아무리 격의 없는 사이라고는 해도 아이들이 자라고, 혼인하여 남의 식구가 들어오고, 모이는 식구가 그렇게 해마다 늘다 보면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은 해마다 떨어져만 가는데 몸을 축내는 일은 늘어만 가니...

 

매섭던 한파가 무르춤하여 그나마 조금 살만해졌다. 점심 식사 후에 잠깐 머리도 식힐 겸 웹서핑을 하는데 실시간 검색어에 '최순실 청소아줌마'가 올라왔기에 뭔가 하고 열어봤었다. 특검에 강제로 소환되었던 최순실이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자 특검 사무실이 위치한 빌딩의 청소아줌마인 임씨가 최씨의 뒤통수를 향해 "염병하네!"라는 사이다 발언을 3번이나 날렸었나 보았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를 느껴 자신도 모르게 외친 말이라고 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설 분위기마저 뒤숭숭한 요즘 나라 꼬라지가 말이 아니니 그렇게라도 화를 풀 수밖에.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사람들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세상 참...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옛말 그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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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5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6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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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세상은 실상 보고 듣고 매만져진 것들을 그때 그때마다 변형하고 축소하고 왜곡시켜 나의 기분에 맞게 이미지화 한 연속적인 그림을 나의 기억 속에 저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고 어느 누구로부터의 이해를 바랄 수 없으며 어떤 장황한 설명으로도 객관화 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내게 간직된 세상은 오직 나만의 세상, 나만의 실존일 뿐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까닭에 세상은 보는 사람에 의해 한없이 밝고 찬란하게 채색될 수도 있지만 관찰자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따라 그 찬란하던 세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채색의 암울한 세상으로 변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되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나의 인식에 따라 언제든지 지워질 수 있고 부재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커서 삶에서 겪는 조그마한 충격에도 나의 관점은 수시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내가 사는 세상은 유동하는 그 무엇이며 그로 인해 나는 궁극적으로 불안정한 세상에 내던져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은 앞에서 언급한 이러한 논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작가로도 잘 알려진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그의 나이 59세에 비로소 여류 시인 조이(Joy)를 만나 결혼한다. 이혼 후 아들 둘을 키우고 있었던 조이는 결혼 전에 이미 골수암 투병중에 있었는데 이 모든 악조건을 무시한 채 둘은 결혼하였고 한 때 조이의 증세가 회복되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결혼은 불과 4년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막을 내린다. 조이가 사망한 후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무렵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한 글은 나중에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A Grief Observed'라는 원제에서 보듯 작가는 제3자적 관점에서 자신의 슬픔을 관찰하고 있다. 그것은 곧 내재된 슬픔으로 인해 그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진 자신의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는 서른한 살까지 확신에 찬 불가지론자이자 회의론자였지만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극심한 슬픔으로 인해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의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상실의 고통을 겪어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슬픔은 여전히 두려움처럼 느껴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중간한 미결 상태 같기도 하다. 혹은 기다림 같기도 하여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슬픔은 삶이 영원히 암시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을 가치 없어 보이게 한다. 나는 차분히 인정할 수가 없다. 하품을 하고 몸을 뻗대며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시간밖에 없다. 그 텅 빈 연속만이 있는 것이다." (p.55~p.56)

 

작가는 비탄에서 점차 벗어나는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때로는 비탄이 의무인 양 느껴지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애도가 죽은 자를 죽음 저편에 영원히 머물러 있도록 하며 절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한 방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러한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우리는 다가오는 매시간 매순간을 만난다. 그 좋았다 나빴다 하는 모든 양태를 만나는 것이다. 최고로 좋은 순간에도 나쁜 순간들이 많고, 최악의 시절에도 좋은 순간들이 많다. 우리는 결코 소위 '사물 자체 the thing itself'의 총합적인 영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릇되게도 그렇게 부른다. '사물 자체'란 단지 이러한 좋았다 나빴다 하는 순간들의 총체일 뿐이다. 그 나머지는 그저 이름이거나 개념일 뿐이다." (p.29)

 

'슬픔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작가는 결국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었'음을 깨닫는다.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감정이 있는 우리 모두에게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교인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을 고통 속에 빠트린 신에 대한 원망이 찾아오고 더불어 망자에 대한 그리움, 공허한 의식...

 

"이 세상에서 사랑은 언제나 감정을 동반한다. 그건 사랑 자체가 감정이거나 감정을 동반할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동물적인 영혼이, 우리의 신경계가, 우리의 상상이, 그런 방식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기에 그랬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많은 선입견들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하는가!" (p.104)

 

작가에 의해 그려진 '슬픔의 지도'는 시시각각 변하는 슬픔의 행로를 보여준다. 때로는 깊은 계곡을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가시덤불을 지나기도 하며, 막막한 어둠 속을 걷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한 번 걸었던 그 길을 세세히 기억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슬픔이 지나가고 또 다른 슬픔이 온다고 해서 똑같은 경로를 다시 겪는 것도 아니다. '슬픔의 지도'는 기억할 수 없는 '망각의 지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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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츠 2017-03-05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

꼼쥐 2017-03-06 12:32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진화를 멈춘 머릿속 기억들을 소재로 무엇인가 색다른 글을 써보려고 시도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작가라거나 그쪽 계통의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작가 코스프레가 취미인 것도 물론 아니고. 아무튼 나는 모처럼 맞는 여유로운 시간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붓방아만 찧다가 마는 게 고작이니 번번이 나는 귀한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의미도 없는 그런 짓을 아주 오래된 취미라도 되는 양 반복하는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젊은 사람이 참 안됐다, 하면서 혀를 끌끌 찰 일이지만 나는 성과도 없고,그렇다고 경제적 이익도 없는 그 짓에 익숙하다 못해 편안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삶은 비경제적 일상으로 떠받쳐진다는 허튼 신념을 자랑이라도 하는 양.

 

오늘도 나는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무참히 흘려보내고 나른한 오후에나 있을 듯한 몽롱한 의식 속에서 이와 같은 낙서 수준의 글을 끄적이고 있다. 오전에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을 읽고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고, 그래서인지 점심을 먹은 직후부터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잠시 동안 꾸벅거리며 졸았었다. 힘들기로만 따진다면 밋밋하고 맨송맨송한 나날을 견디는 것보다 벅차도록 기쁘고 다시 없을 듯한 행복에 겨운 날들을 보내는 것이 더 버겁고 힘에 부치는 일일 텐데 다들 행복에 목말라 하는 걸 보면 고생을 사서 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산다는 건 결국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기억과 정보로 끝없이 치환하는 작업이다. 언젠가 몸 속 에너지가 다 소진되고 나면 잠에 빠져들 듯 영원한 안식에 들겠지만 나의 에너지와 내가 얻을 수 있는 기억이 등가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때로는 실망하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절망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모르긴몰라도 그럴 것이다.

 

"로맹 가리는 카뮈가 깊은 절망 상태에서 종종 자살을 언급하곤 했다고 귀띔해주었다. 때로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로맹 가리를 상심하게 할 만큼 그 농담 속에 뼈가 들어있었다. 그러므로 저변에 깔린 멜랑콜리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의 신화』에 죽음을 지배하는 생의 승리라는 엄숙한 메세지(희망이 부재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 - 가까스로)가 담겨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보이는 어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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