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 아침달무늬 1
유희경 지음 / 아침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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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더해지면 더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렇다. 본디 시는 묵독을 목적으로 쓰인 글이 아니기에 시는 오히려 고독을 방해한다. 시는 오직 낭독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의해 최초로 읊어진 시는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발현된 소리는 폭발하듯 터지는 활화산이 되고, 뉴런과 뉴런 사이를 연결하는 시냅스처럼 나와 너 우리를 연결하는 촉매가 된다. 그러므로 연대와 공감이 없는 사회에서 시는 가치를 잃고 생명을 잃는다. 관계의 단절은 복원력이 없다. 그것은 오직 스러져 갈 뿐이다.

 

외롭거나 쓸쓸한 사람들은 시보다는 소설을 읽는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서의 관계의 단절이 소설 속에서는 오롯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 복원된 나와 너의 관계는 참혹한 현실의 고독을 말없이 어루만진다. 그들은 독서를 통한 조용한 위무가 그들에게는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혜택이라 여긴다. 어쩌면 그럴지도... 다시 시로 돌아가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가자. 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지 못하지만 한 줄 시구를 읊는 너와 나의 목소리가 사랑이 되고, 고독한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을 적신다.

 

유희경의 시집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을 읽었다.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의 주인장이자 문화기획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서점에서 여는 시 낭독회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시인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낭독의 중요성을 그는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로 데뷔했던 그는 익숙한 언어로 익숙한 리듬의 시를 쓴다.

 

뿌리

 

눈물이 너무 많은 나의 고모는

손등을 쓰다듬어 별을 쏟는다

하지만 고모 그냥 그림자인걸요

어떤 후회가 우리를 흔들겠어요

돌멩이가 몸을 굴리는 방식으로

의지에는 작은 계산들이 숨어 있다

좁은 어깨를 견주어보는 사람들처럼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지만

멀리서 걸어오는 누군가의 기척

귀를 기울여보아도 그것뿐

지나지 못하고 있다

이게 다 家系의 내력이었다

 

'잠시 어떤 시간이 지나가'는 유희경의 시에는 '천천히 깜빡이며 흩어진 내부를 통과하는' 당신이 있고, 아버지와 함께 호두나무를 심던 오래된 추억이 있고, 우리가 찾아야 할 몇 개의 비밀이 오도카니 놓여 있다. 우리는 어쩌면 '당신이 비운 자리 옆에서/ 빛을 가지고 놀고 놀던' 어떤 나무였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고 했던 어느 소설가의 주장처럼 이 봄, 한 편의 시를 읊는 너의 목소리는 어쩌면 넝쿨장미 흐드러진 이 계절마저 앞질러, 다가올 가을의 어느 모퉁이에서 천천히 오는 나의 시간을 기다리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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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자신을 향해 위로의 말 한마디를 던지거나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그러하듯 진심을 담아 등을 토닥여 줄 필요가 있다. 단순히 감상이나 형식적인 행위가 아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격식과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도덕적인 잣대만으로 판단할 일이 결코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그리움보다 오히려 잊혀짐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움은 흔히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 이를테면 자신의 성향에 잘 맞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림움의 강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잊혀짐은 시간의 길고 짧음은 있을 수 있겠으나 시간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의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결말로 귀착된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리움의 끝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이별일 테지만 잊혀짐은 결국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힘을 간과하는 우리는 흔히 지금 이 순간에 펼쳐지는 현상만 주목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변화의 기로에서 벗어난 적 없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정체된 상태로 남아 있을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그저 한없이 떠밀려갈 뿐이다.

 

장강명의 에세이집 <5년만에 신혼여행>을 읽고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매우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독자 입장에 있는 내가 오히려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하는 걱정이 드는 걸 보니 작가는 자신의 소신에 대해 매우 당당했던 것 같다. 가령 이런 대목이다.

"솔직히 내 부모님과 HJ가 왜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명절에 싫다는 아내를 자기 부모님 댁으로 굳이 데리고 가는 남자들은 왜 그러는 걸까. 보기 싫은 친지들을 만나러 큰집에 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해마다 명절이 지나면 이혼 상담이 급증하고 형제간 폭행으로 누군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꼭 나오는데, 다들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친지들을 만나는 걸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뭔지 정확히 모를 것이다. 그냥 막연히 명절에는 가족이 다 모여야 한다고 하니까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p.29)

작가의 주장은 일견 쿨하고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유교주의 도덕관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 실정에서 작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작가의 주장인 즉,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관습에 따라 행동할 뿐 자신이 살 자리인지, 죽을 자리인지 구분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한마디로 무뇌아라는 의미.

 

그러나 작가의 솔직함은 칭찬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솔직함은 언제나 좋은 것이니까. 이런 논리라면 나도 무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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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5-16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명절 친지간 왕래 찬반 혹은 기피 여부에 대해선 어느 하나로 의견을 딱 부러지게 정하지 못하겠네요. 왜냐면 여자쪽, 시댁쪽, 남자쪽, 친가쪽 생각들이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으니까요. 명절에 음식 준비에 고생하는 여성들쪽 사정을 들여다보면, 즉 남성들이 직접 명절 제삿상을 차리거나 음식을 직접 장만·요리·대령해보면 그 고충과 노동 강도가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죠.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명절 쇠는 걸 싫어하죠. 결과적으로 시댁 혹은 큰집에 가는 것 자체가 싫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옛날처럼 유교적·봉건적·가부장적 규율이나 풍습이 많이 쇠락한 지금에는 명절이나 제삿날을 간략하게들 보내거나 아예 없이 지내려고들 하죠. 그런데도 보통 부담스러운 게 아니고 보통 힘드는 게 아니죠. 옛날 유교시대, 봉건시대 당시 여성들이 감당해야 했던 명절, 제사 때의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 강도와 심리적·감정적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정도를 넘어서서 뭐라 형언키 어려운 공감적 고통이 깊숙이 밀려옵니다. 이런 필설로도 다 표현 못할 고통을 옛날엔 전혀 어디에 하소연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였던 것이죠. 이젠 이런 전통적 규율 아닌 규율에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 꼼쥐 님 글에서처럼 명절 때 시댁이나 큰집에 여성들은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죠. 그러나 남편 혹은 남성들은 혈통 혹은 핏줄에서부터 올라오는 종족보존본능의 거부할 수 없는 힘에 끌려 귀소하는 것이겠고요. 그렇다면 전통과 규율에서 벗어나 희생 강요에 반항하는 여성들과 종족보존본능이라는 유사 의무감에 충실하려 하는 남성들 간의 갈등이고 충돌이고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헌데 이 갈등 충돌 전쟁은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이죠? 남녀간 역지사지, 친지간 교류, 왕래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자주 반복됐다면 애초에 저런 문제들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인데요.

해서 위에서 꼼쥐 님께서 얘기하신 《작가의 의견》은 여러 맥락에 따라 다양한 시각으로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요. 어떤 맥락에선 전혀 논점을 일탈한 무관한 소리 같고, 어떤 맥락에선 나름 ‘쿨한’ 소리 같고, 걍 무뇌아스런 소리 같기도 하고요. ^^ 글쎄요. 솔직한 건 나름 솔직하다고 볼 수도 있긴 한데요. 어떤 측면에선 단세포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뭐라고 딱 부러지게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겠네요. 역설적으로 덕분에 많은 생각을 생각할 기회를 주기 때문에 좋은 것 같기는 합니다.

꼼쥐 2017-05-19 13:39   좋아요 0 | URL
집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했던 작가는 명절에도 부인을 대동하지 않고 본가를 다녀왔던 모양입니다.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겠죠. 굳이 싫다는 사람을 이끌고 서로 불편한 만남을 갖게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을 테고 말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처럼 만남이 없으면 가까워질 기회도 없는 것이겠죠.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오늘의 젊은 작가 8
김엄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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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리듬의 반복이 음악이 되고 사람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주듯이 단조로운 권태가 반복되면 오히려 삶의 자극이 되고, 깨달음이 되고, 때로는 삶의 철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쓴 알베르 까뮈나 <고도를 기다라며>를 쓴 사뮈엘 베게트가 이를 입증했다. 며칠 전 나는 이와 유사한 소설 한 권을 읽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몇몇 작가에 의해 단조로운 권태를 주제로 한 작품을 써보려는 시도는 있어왔지만 막상 시중에 내놓은 그들의 작품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인간의 삶이 단순한 기다림'일 뿐이라는 깊은 철학적 자각이 없다면 한 권의 소설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설명하거나 돋보이게 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독자의 입장에서 재미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말이다. 그러므로 단순화된 배경과 인물 구성, 의미없는 대사와 내러티브만으로 한 권의 유익한 소설을 써낸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비가 멈추질 않아. 동료 a가 말했다. 멈추질 않네. 동료 b가 말했다. 새벽에 잠깐 그쳤었어. c가 말했다. 점심시간에 E의 동료들은 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p.25)

 

젊은 작가 김엄지의 소설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는 자신의 권태로운 삶을 주어지는 대로 그저 살아가는 주인공 E의 모습을 조망한다. 그렇지만독자에게 주어지는 E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나이가 몇 살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지금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회사원이라는 건 알겠는데 어떤 업종의 회사인지, 그곳에서 맡은 업무는 무엇인지 등 어느 것 하나도 속 시원하게 밝히지 않는다. 관심 끊으라는 듯 말이다. 

 

"E는 올해 봄부터 나이가 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봄부터 망설임이 늘었다. 사소한 고민에 빠졌고, 별것 아닌 일에 쉽게 화가 났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시로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만한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과 별개로 E는 자주 포기하고 싶었다. 울적했고,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p.57)

 

결혼을 하지 않은 듯 보이는 E는 그저 밥 먹고 출근하고 다시 밥 먹고 일하고 퇴근하고 자고 이따금 동료들과 어울릴 뿐이다. 주말이면 밀렸던 잠을 자거나 빨래를 하고, TV를 본다. 이런 일련의 것들로 구성된 인간의 삶이 바쁘게 오가는 청설모의 삶보다 낫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게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터, 따지고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별게 아니구나, 싶다.

 

2010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였다는 작가는 박민규나 황정은만큼이나 독특하다. 소설에서 회사원 E는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스케일링을 하고, 치료를 요한다는 의사의 말에 우울해져서 여자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들른다. 장갑을 선물하려 했지만 여자의 휴대폰은 꺼져 있다. 새해가 되어 일출을 보기 위해 산에 오른다. 다시 출근을 하고 퇴근길에 동료들과 상사를 욕하며 술을 마신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이런 일상이 끝도 없이 반복된다. 그러는 사이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가령 동료 a가 사라지고, 사라진 a를 대체할 다른 인물 d가 들어온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진 게 없고 여전히 상사는 부하 직원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행동한다. 여자는 끝내 연락이 되지 않고, 실종된 a로부터의 새로운 소식도 전해지지 않는다.

 

"E는 눈을 감고 걷고 싶었다. 거의 충동이었다. E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고, 전봇대와 쓰레기, 젖은 길, 빗물이 흐르는 단 하나의 방향, 비둘기, 갈색 개, 그 모든 것들이 더 명징하게 떠올랐다. 아아." (p.141)

 

화창한 일요일이다.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은 적당한 속도로, 적당한 거리를 산책했고, 적당한 미소를 지었으며, 적당히 행복해 보이려 노력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마치 박물관에 세워진 밀랍 인형처럼 하나의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표정이 살아있는 건 오히려 청설모와 같은 동물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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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는 선(善)이 악(惡)을 이길 것이라는 우리 세대의 판타지는 우리가 사라지고 난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로 남아 있을 듯하다. 그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종교가 없던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 명제는 신흥 종교의 광고성 멘트로서 적절히 활용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인간의 수명을 100년으로 잡았을 때 그 시간내에 자신이 목격한 모든 악이 결국에는 선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사실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동전 던지기의 횟수를 늘리면 늘릴수록 앞면이 나올 확률도, 혹은 뒷면이 나올 확률도 1/2에 수렴하는 것처럼 선과 악의 승패도 반반의 확률로 수렴하는 게 아닐까 싶다. 다음 세대에는 기필코 선이 악을 잠재울 수 있다고? 그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자신은 이미 사라져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데. 결국 모두의 바람이나 희망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경험하는 선과 악의 승패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험에 의해 누군가는 선이 이긴다고 믿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악이 이긴다고 믿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악보다는 선쪽에 베팅을 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 아침에는 산에서 비를 만났다. 우르릉 쾅쾅 요란한 천둥 소리를 무시한 채 우산도 없이 산을 올랐던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조금 흐리기는 했지만 멀끔한 하늘을 보니 설마 비가 오겠어,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웬걸, 미처 산을 다 오르기도 전에 후둑후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속수무책으로 비를 맞았다. 비라고 해야 채 5분도 내리지 않았으니 대부분은 나뭇잎에 가려 바닥에 닿지도 않았고 내가 맞은 빗방울은 불과 몇 방울 되지도 않아 아마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을 터였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탓이지 일주일이 금세 지나간 느낌이다. 날씨는 끄물끄물 흐려 있고 뭔가 색다른 게 먹고 싶어지는 한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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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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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행복한 이 순간이 손을 벗어난 사기그릇처럼 어느 순간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는 경험을 두어 번 겪고 나면 현실을 너무 가까이서 바라본다는 게 상당히 위험한 일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내 의식과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는 언젠가 나의 현실이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염려를 잠재우는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이다. 마치 지금의 이 행복이 현실이 아닌 꿈 속에서의 벌어진 일인 양, 몽롱한 의식에서 비롯된 영상 속 이미지인 양 받아들이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을 오롯이 행복한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불행한 현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볼 수 있는 배짱 두둑한 사람의 용기와 그것에 대한 대가일 뿐이다.

 

흔히 '오늘을 즐기라'고 번역되는 라틴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할 때가 있다. 말은 더없이 쉽지만 말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요만치도 끌어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일지도 모른다.

 

"생이 나를 부르면 그것이 공평하든 그렇지 않든, 예, 하고 큰소리로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좋아하는 선생이 부르든 싫어하는 선생이 부르든, 출석 시간에 대답했던 학창 시절처럼 생이 부르거든 큰 소리로 예,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는 그렇게 겨울을 걸어가고 있다. 그것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의 부름에 대답하고 나서 혹시 오는 봄을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언젠가 기습하고야 마는 봄 앞에서 내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혹시라도 행, 복 같은 게 온다면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아아, 거기에는 도구가 필요할 것이었다." (p.41)

 

공지영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일부러 작정한 것도 아닌데 문장과 문장 사이의 뿌연 여백에서 작가 자신의 순탄치 않은 인생이 창틀의 먼지처럼 묻어나곤 한다. 삶의 한쪽 끝이 쩍쩍 갈라질 때마다 모가 난 자신의 삶을 뭇사람의 시선에도 무뎌져 원만해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뭔가 도구가 필요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은 모가 난 자신의 삶을 고운 사포를 이용하여 단단한 돌을 연마하는 것만큼이나 지난한 일이었을 것이다. 미처 무뎌지지 않은 삶의 조각들은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을 테니 말이다.

 

공지영의 소설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어떤 도구로서 쓰여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이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단편 '월춘 장구(越春裝具)'에서의 장구로서의 기능 말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자신의 삶을 견디기 위한 작가만의 장구, 일종의 '월생 장구(越生裝具)'인 셈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빗대어 쓴 어른들을 위한 동화쯤으로 읽힌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가진 게 돈밖에 없는' 할머니의 외손녀이다. 식도암에 걸린 할머니는 생과 사의 고비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목숨을 대가로 삶을 유지한다. 처음에는 막내 외삼촌이, 파출부 아줌마가, 큰외숙모가 줄줄이 죽어나간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새로운 생명을 얻고 보란 듯이 생명을 이어간다. 할머니로부터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나'에게로 뻗어왔을 때 '나'는 강하게 저항한다. 청각장애인인 '나'의 여동생을 앗아가려 했을 때도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한다. 그러자 진돗개가, 도둑고양이가, 까치가 줄줄이 죽어나간다. 할머니는 자신보다 약한 생명을 대가로 당신의 삶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다.

 

이 밖에도 책에는 출생의 비밀을 소설로 쓴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지방의 공장을 전전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도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 순례의 희망가를 그린 '부활 무렵', 개개인의 삶에 드러나는 고통을 통해 공감과 연대를 모색하한다는 내용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 등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소설가는 오히려 자신이 쓴 소설에서의 상황이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여겨질런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독자의 기억에 오래 남는 소설은 작가가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상황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재현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선뜻 나설 수 없는 길일지라도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는 담대하게 걷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설을 읽고 용기를 얻은 독자는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더욱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현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비겁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닐까 싶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과 현실 사이의 필터를 제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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