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입동, 겨울은 아직 저만치 멀기만 한 듯한데 달력은 이미 겨울을 알리고 있다.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는 송년 모임 일정과 약속장소를 알려왔다. 다음달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는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하자고 했다. 벌써 1년이 다 간 느낌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는 오늘, 세상에는 트럼프처럼 다양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특이한 사람들이 많이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권에서는 대개 국정감사와 내년도 예산 심사를 끝으로 한 해를 마감하게 되지만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국정감사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국민을 대신하는 국회의원들의 노고에 감사하기보다는 짜증 지수가 절로 높아지게 된다. 혹여라도 어쩌다 본 뉴스에서 자신의 지역구 국회의원이 등장하여 의미도 없는 '뻘~짓'을 하거나 심한 막말로 실검 순위에 오르내리게 되는 경우에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건 물론 자신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나는 올해 그런 경험을 여러번 했다. 그건 순전히 야당 원내대표를 하는 내 지역구의 국회의원 때문이었다. 낮술을 한 듯 불콰해진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저런 인간을 누가 국회의원으로 찍어줬는지 한심한 생각이 절로 들고 낯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워진다.

 

어제는 '전희경'이라는 특이한 인간이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 별 미친 짓을 서슴지 않았다. 마치 미친 개가 입에 거품을 문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나이를 보건대 대통령 비서실장은 그녀보다 나이도 많고, 그녀는 군부독재가 자행되던 80년대 대한민국의 실상을 잘 알지도 못할 터인데, 게다가 독재에 저항했던 많은 시민들의 희생을 직접 목격했던 것도 아닐 터인데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는 하지 못할망정 케케묵은 이념 논쟁으로 국감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녀가 속한 자유당의 행태였다. 사과는커녕 그녀의 도를 넘은 막말이 '야당으로서는 할 수 있는 질문이고 많은 국민이 공감하는 질의내용'이라고 했다. 도대체 어떤 미친 사람이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지 묻고 싶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산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도 '전희경'과 같은 특이한 인간이 존재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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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 - 손미나의 사람, 여행
손미나 지음 / 씨네21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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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손미나의 작품을 읽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남들이 들으면 손미나의 애독자라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상은 아주 달라서 나는 그녀의 작품에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다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제쳐두고 그녀의 작품을 벌써 세 권씩이나 읽었으니 우연 치고는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2006년 발간된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읽었을 때 나는 KBS 아나운서였던 저자의 이력에 끌렸던 게 사실이었지만 책에서 보여준 저자의 자유분방함과 솔직함이 꽤나 인상적이이라고 느꼈다. 기회가 되면 그녀의 작품 한두 권쯤 더 읽어도 괜찮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지난해 초에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읽은 그녀의 여행기에서는 <스페인, 너는 자유다>에서 보여준 솔직하고도 자유분방한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어느 여행기에서나 읽을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주였다. 두 번째 여행기를 읽고 어지간히 실망했던 내가 같은 작가의 작품을 다시 손에 잡게 될 줄이야. 아무튼 나는 우여곡절 끝에 손미나의 작품을 세 권째 읽었다.

 

<여행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은 일반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과 인연이 깊은 열네 명의 인물을 선택하여 저자가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손미나의 사람, 여행'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홈스쿨링을 하는 십대의 소년에서부터 칠십대의 세계장신구박물관 관장에 이르기까지 연령도,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이 여행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열네 명의 여행자를 만나 대화하는 것은 내게는 또 다른 여행과 같았다. 여행이 줄 수 있는 설렘과 호기심, 통찰과 지혜를 대화를 통해 선물 받을 수 있었으니. 그들이 이야기하는 여행이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다름을 알고 인정하며, 몰랐던 자신의 뒷모습을 마주하며, 다시 돌아올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것, 그렇게 자기만의 우주를 넓혀가는 일이었다." (p.6)

 

저자가 만난 사람은 나영석 피디, 가수 윤상, 개그우먼 송은이, 개그맨 김영철, 팝페라 가수 임형주, 영화감독 류승완,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 배우 엄지원 등 누구나 아는 유명인뿐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최인아, 열여섯 살 소년 임하영, 세계장신구박물관장 이강원, 국제변호사 이소은, 역사 여행가 권기봉 등 다소 생소한 인물들도 등장한다. 사실 인터뷰의 생명은 인터뷰이로부터 솔직하고도 진정성 있는 답변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친밀도도 중요하겠지만 인터뷰어의 적절한 질문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도록 하는 인터뷰어의 능력이야말로 좋은 인터뷰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서 자율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그동안 해왔던 공부의 방식인데, 어떤 책을 읽었는지 소개해주시겠어요?

초등학교 때는 주로 소설이나 판타지를 많이 읽었는데요,『나니아 연대기』나 미하엘 엔데 작가도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는 책을 계속 읽다 보니까 관심 가는 분야가 생기더라곤요. 홍세화 선생님이나, 박노자 선생님, 장하준 교수님 책들도 재미있게 읽었고, 외국 작가는 인문학 경우는 노엄 촘스키, 하워드 진, 문학 경우는 조지 오웰……" (p.43)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한다. 또는 등산에 비유하기도 한다. 비유의 대상이 무엇이든 인생은 그 자체로서, 여행이나 등산을 품 안에 아우르면서 끝을 향해 나아간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라고 햇던 카프카(Franz Kafka)의 말처럼 여행이 소중한 이유는 여행의 끝이 존재하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일상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서 '나에게 솔직해져야겠다는 것'을 깨우쳤다는 나영석 피디나 페루 여행을 통해 자신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가수 윤상의 말처럼 우리는 낯선 여행지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인생이 곧 영화와 같고 영화 자체가 일종의 여행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과 인생을 다루는 영화와 여행은 아주 잘 어울리는 테마인 것 같아요.

한국 제목으로 <아메리카의 밤 La Nuit Americaine>이라는,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는데요, 영화 만드는 과정에 관한 영화예요. 트뤼포 감독이 실제로 극중 감독으로 출연하기도 하는데요, 그 영화 오프닝은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 만드는 것을 여행에 비유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해요. 영화 만들기란 역마차 여행과 같다. 처음 출발할 때는 모두가 들떠 여행을 기대하지만 여행의 중간을 지나면 지치기 시작하고 끝날 때쯤 되면 모두가 제발 이 여행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행이 끝나는 그 순간 다시 또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만들기는 역마차 여행과 비슷하다고 표현하거든요." (p.356)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노력에 의해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했던 일들이 하나둘 사실로 밝혀지거나 설마 그렇게까지야 반신반의했던 것들조차 확연한 증거나 증언을 통해 입증되고 있는 요즘,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시스템으로도 망하지 않고 버텨온 게 더 이상하게 생각되는 요즘, 그럼에도 그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게 되는 요즘, 여행은 분명 그 모든 게 보기 싫어서 떠나는 것은 아닐 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망명이지 여행은 아닐 것이므로. 여행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드러내놓고 확인하지 않으면 영원히 고쳐지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지난 정부로부터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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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그의 말은 옳았다. '사람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사람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법'이라고 그는 주장했었다. 오래 기억할 만큼 가치가 있는 말은 아니라는 듯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그의 말은 커피숍의 희끄무레한 조명 속에서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러므로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이 내리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아. 편파적이기 때문이지.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잖아?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을 평가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하지만 시시때때로 듣는 게 사람에 대한 평가이고 보면 신뢰할 만한 나름의 평가 기준 한두 개쯤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의 평가는 믿지 않는다는 거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과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지. 공정함이란 있을 수 없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조차 없는 듯한, 찬바람이 불 정도로 냉정한 사람의 평가는 그나마 믿을 만하다는 게 내 지론이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탓인지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선약이 있었던 나는 이후의 토론을 듣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났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저녁 모임에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의 멤버 전원은 기꺼운 마음으로 참석한다. 따로 정한 규칙은 없지만 정치적 주제는 가급적 삼가자는 게 모임 전원이 찬성하는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저녁을 함께 먹고 자리를 옮겨 술을 한 잔 하거나 차를 마시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귀찮으면 같은 자리에서 오래 앉아 있다가 가볍게 헤어지곤 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바쁜 순서로 먼저 자리를 뜨고 마지막 한 명이 남겨질 때까지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모임 같지 않은 모임. 나는 그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렇다고 발언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고 다른 의견이나 반대되는 생각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할 수 있다.

 

어제는 배우 김주혁이 세상을 떠났다. 젊다면 젊은 나이인 그의 죽음은 갑작스럽거나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인생이 별게 아니구나' 하는 헛헛한 느낌도 들었다. '오인회'의 다음달 주제는 '죽음'이 될지도 모르겠다. 뒤돌아보면 삶은 그야말로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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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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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절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희망에 대한 응답보다는 현실의 삶에서 무자비한 절망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망에 앞서 우리는 현실의 이러저러한 작은 절망을 통해 절망과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고맙다거나 감사하다고 외칠 만큼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수는 없을지라도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 스스로 담담해질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이미 현실의 삶에서 수많은 절망을 겪었거나 죽음에 버금가는 크나큰 절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망에 익숙해지는 법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김진규의 소설 <달을 먹다>는 내게 삶의 희망을 말하지 않고 인생의 절망을 보여준 책이다.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의 기구한 삶을 그렸던 이 소설은 아홉 명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각각 한 번에서 열 번씩 들려준다. 양반 가문 두 집과 약국·역관 등 중인계급 두 집간에 3대에 걸친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뼈대로 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신분과 관습을 벗어난 인간의 사랑과 저항할 수 없는 규범 앞에 허물어지는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장안의 유명한 난봉꾼 류호의 아내는 남편의 호색 때문에 평생 속앓이를 한 때문인지 자신의 딸 묘연만큼은 흠이 없는 집안에 시집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묘연의 지아비로 낙점된 사람이 좌의정 집안의 아들 김태겸이었다. 지나치게 올곧은 성격의 시아버지와 변덕이 심한 시어머니, 벗들 앞에서만 유쾌한 남편의 틈바구니에서 묘연은 못 본 체 입을 닫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홀아비 최약국에게로 시집갔던 이복동생 하연이 잔뜩 부른 배를 부여잡고 묘연의 시댁으로 찾아와 난이라는 계집아이를 낳는다. 하연은 사실 묘연의 친정 아비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 출신의 딸이었다. 묘연에게는 이복동생이지만 신분이 달랐던 것이다. 난이는 가난했던 본가에서 나와 다섯 살 무렵부터 묘연의 시댁에서 자라게 된다.

 

묘연의 아들 희우는 어린 난이를 처음 볼 때부터 관심을 두게 되지만 난이는 희우를 볼 때마다 줄곧 울어댔다. 그러던 어느 날 꽃을 꺾으려던 난이가 연못에 빠지고 허우적대던 난이를 희우가 구한다. 그날 이후로 난이는 희우 앞에서 울지 않았고 '오라버니'라 부르며 따르게 된다. 둘의 사랑은 깊어가지만 엄연한 오누이 사이인 그들은 내색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른다. 감선사에서 은거하던 희우가 건강만 악화되어 돌아온 직후에 한성판부사 집안으로부터 혼담이 들어오고 희우는 묘연의 뜻을 거절하지 못한다. 묘연도 두 사람의 사랑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진찬연에서의 가락이 뒤늦게 속을 휘고 돌았다. 삼킨 눈물이 오장육부도 모자라 뼈마디까지 헤가르고 있었다. 통증이 일었다. 간신히 살아남아 매달려 있던 한 방울이 결국 얼굴을 둘로 조각냈다. 신음이 뱉어졌다. 하연의 퍼런 얼굴과 희우와 난이, 두 아이들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뿌옇게 번졌다." (p.70)

 

여장부 홍씨의 막내아들 여문은 북촌의 약국 '최국'을 지나다 담장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이끌려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곳에는 최약국의 본처 후인이 바람이 나 달아난 후 홀로 남겨진 향이가 있었다.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던 새엄마 하연과 점점 망가져 가는 아버지 최약국을 보면서 향이는 외롭게 자랐고, 태어날 때 다리가 눌리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절었던 향이는 집밖을 나다니지도 않았다.여문은 향이에게 무작정 끌렸다. 자신의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던 여문은 어머니 홍씨에게 향이와 결혼하겠노라 말하지만 단박에 거절당한다.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한 여문은 향이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최국 주위만 맴돈다. 어머니 홍씨가 죽자 여문은 최약국을 살해하여 연못에 빠트린다.병수발을 들던 향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약국이 죽자 향이마저 자살하고 만다. 여문은 일부러 다리를 절면서 향이의 방에 눌러 앉는다. 숫제 그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형제들이 때리고 말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수선한 계절을 정리하듯이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온 가을이 빠르게 깊어가고 있었다. 가지를 막 떠나온 나뭇잎들이 무거운 공기 속을 팔랑거리며 날다가 떨어졌고, 그럴수록 나무들의 골격은 점점 적나라해졌다. 치밀해진 시간이 나무를 파고들어 자상刺傷을 남겼다. 촘촘하고 선명한 그 흉터는 머지않아 나무의 연륜이 될 것이었다." (p.232)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묘연, 태겸, 여문과 향이, 희우와 난이, 후인과 후평, 묘연의 오빠 현각 스님 등으로 많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복잡하게 얽힌다.각 인물의 시선으로 다채롭게 서술되는 이 소설은 에피소드와 같은 이야기들이 하나로 모여 긴 이야기를 이룬다. '당대의 온갖 사물, 짐승, 꽃과 약제,기후, 풍습 등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박물지를 보는 것 같을 때도 있고 타계한 최명희 작가를 연상시킬 때도 있다.'고 했던 박완서 작가의 심사평처럼 소설의 묘사는 탁월했다. 구성상의 몇몇 허점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후가 되자 바람이 강해졌다. 미세먼지의 농도도 덩달아 높아졌는지 목이 칼칼하다. 바람이 흩어질 때마다 가벼운 낙엽이 비처럼 쏟아졌다. 스산한 분위기였다. 계절이 겨울을 향해 가듯 모든 이의 삶은 절망을 향해 나아간다. 절망에 익숙해진다는 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씩 상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고 공기도 탁한 휴일 오후, 소설 한 권을 읽은 소감이 엄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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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영화 한 편 씹어먹어 봤니? - 학력도 스펙도 나이도 필요없는 신왕국의 코어소리영어
신왕국 지음 / 다산4.0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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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스티븐스(Michael Stevens)를 아시는지. 서굿(Thurgood)을 제작한 영화감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Vsauce라는 인기 YouTube 채널을 만든 사람이라고 하면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군요. 2010년 여름에 만들어진 Vsauce 채널은 원래 비디오 게임 관련 채널로 출발하였으나 세상의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의 영상을 제작하여 인터넷에 올리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바람에 지금은 Vsauce, Vsauce2, Vsauce3의 3개 채널을 운영하는 유명 YouTube 채널이 되었죠. 세상(기술, 예술, 과학 등등)에 대한 질문들을 답해주는 Vsauce, 세상의 과학적 발견을 다루는 Vsauce2, 픽션의 세상을 다루는 Vsauce3는 각각 마이클 스티븐스(Michael Stevens), 케빈 리버(Kevin Lieber), 제이크 로퍼(Jake Roper)가 담당하고 있지요. 3개 채널의 구독자가 1500만 명을 상회한다고 하니 정말 놀랍죠? 재작년에는 세계 72억 명을 한 곳에 쌓아올린 CG를 제작하여 온라인 상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나는 짬이 날 때마다 아들과 함께 Vsauce 영상을 감상하곤 합니다. 다양한 주제의 영상들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반복해서 보아도 질리지 않더군요. 아이들로 하여금 과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영상들도 다수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한번쯤 같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컨대 '무한을 넘어 세는 법(How to Count Past Infinity)'과 같은 영상은 조금 어렵기는 해도 수힉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기도 하죠. 아주 재미있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군요. Vsauce에 대한 소개의 글을 쓰려던 게 아닌데 말입니다. 신왕국 저자의 <근데, 영화 한 편 씹어먹어 봤니?>에 대한 리뷰를 쓰기에 앞서 문득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짧게 쓰려던 게 조금 길어지고 말았지만.

 

부모님을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던 저자는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고, 전학생을 무시하는 듯한 동급생들의 텃세에 대한 반감으로 복싱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교 짱과의 싸움에 휘말린 저자는 결국 고교 자퇴생이 되고 말았고, 그에게 남겨진 것은 프로 복서 자격증뿐이었다고 합니다. 힘들게 생활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공부를 결심했던 저자가 처음 꺼내든 게 영어였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장 못하는 아이로 정평이 나 있던 저자는 자신을 무시했던 영어 선생님에 대한 오기로 영어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좋다는 영어 학습법을 이것저것 안 해본 게 없었지만 그닥 소득이 없었던 저자를 180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건 다름 아닌 애니메이션 <라푼젤>이었다고 합니다. <라푼젤>의 대사를 들릴 때까지 반복해서 듣고 따라하기를 6개월, 신기하게도 영어가 한국어처럼 들리기 시작했고, 1년 만에 원어민도 인정할 만큼 자유롭게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저는 하루에 열 시간씩 영화 씹어먹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매일 하니까 영화 한 편을 다 씹어먹는 데 영화 대사량에 따라 한두 달 정도가 걸리더군요. 하지만 이 훈련이 계속될수록 영화 한 편 씹어먹기를 완성하는 시간도 차츰 줄어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 <라푼젤>을 처음 보았을 때는 두 달이 걸렸다가 다음 애니메이션들을 볼 때는 한 달이 좀 안 될 정도로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p.131)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저자는 명문 UC버클리에도 합격했다고 합니다. 재학 시절, 듣기와 말하기가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도와주다가 주변의 권유로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고, 그것을 계기로 온라인 카페도 개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영어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세계적 명문대 학생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뛰어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 바로 이것이 영어가 제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그 선물을 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그랬듯이 영화 씹어먹기를 통해서라면, 여러분도 영어가 주는 선물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p.232)

 

저자의 영어 학습법은 여러 번 듣고 여러 번 따라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아기가 자신의 모국어를 배우듯이 말입니다. 지금 중학교 2학년인 제 아들이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들은 리틀팍스(www.littlefox.co.kr)에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또 보았고 눈이 나빠질까 걱정이 되었던 아내는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빠져들 듯한 아들을 뜯어 말리기에 바빴습니다. 면 년 후 나는 아들의 영어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영어로 듣고 말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쓰는 것에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이따금 일부 단어의 철자가 틀리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Rick Riordan, Stuart Gibbs, Isaac Asimov)의 책을 원서로 읽곤 합니다. 학창 시절, 무식하게 외우고 단어와 문법에만 치중했던 나의 영어 학습법에 비하면 아들은 정말 너무도 재미있게 영어를 배운 듯합니다.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영어로부터 아들이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지식의 지평을 넓혀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가끔 컴퓨터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아 유튜브 Vsauce 채널의 동영상을 틀어놓고 깔깔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영어가 우리 부자에게 제공한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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