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 방역 활동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 아니면 최근 지속된 가뭄으로 물웅덩이가 사라진 탓인지 그 원인은 차치하고서라도 예년에 비해 모기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든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내가 사는 지역만 그럴 뿐 다른 지역은 지나치게 많은 모기 개체수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침 산행에서 모기떼의 집중 공격을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다. 오늘처럼 바람도 없고 날씨마저 후덥지근한 날 모기떼와 함께 산행을 한다는 건 그닥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기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한여름에도 긴소매 옷을 고집하는 나로서는 모기의 개체수가 많아진다는 건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지병에 가까운 모기 공포증의 증세가 심해지고 있다.

 

그에 반해 정치인들에 대한 해묵은 혐오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자유당의 당 대표가 부하들을 이끌고 장외로 나가는 바람에 뉴스 화면에서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욕에 가까운 험한 말들은 이따금 들려오지만 같은 나라에서 살면서 그 정도쯤이야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국회에서 의정활동을 하더라도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내세우기 위해 싸움질이나 했을 터, 차라리 안 보이는 곳에서 조용히 지내는 게 국민들의 정신건강에 유익하지 싶은 것이다. 어찌 보면 자유당의 황 대표는 국민들의 정치 혐오증을 예방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역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오늘도 바깥 기온은 초여름 날씨처럼 덥다. 그나마 모기도 없고, 정치인들도 보이지 않으니 괜한 짜증은 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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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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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취임 2주년을 맞는 문재인 대통령의 일대일 대담이 있었던 날입니다. 저녁에 일이 있었던 나는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던 대담을 보지도 못한 채 잠이 들었고, 진행자로 나섰던 모 기자에 대한 논란이 인터넷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장악한 오늘 아침에서야 겨우 '뭔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사에 실린 내용은 각 신문사의 이념 성향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생각해보면 그것은 인터뷰어로서의 자질 부족이거나 태도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억울한 면도 없지 않을 듯합니다. 자신이 원했던 것도 아닌데 괜한 시빗거리에 휘말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으니 말이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는 간절히 원하지만 만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만남이 죽는 것보다 더 싫었던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만남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유익한 경험으로 축적되고, 필요할 때면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삶의 지혜로 대체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현재 자신이 교류하고 있는 인적 구성의 틀, 경제적 여건, 인성이나 사상의 바탕, 타고 태어난 그릇의 크기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자신의 경험은 여러 번 걸러지고 최종적으로 남는 것들로 자신의 됨됨이를 꾸려가게 마련이니까 말입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의 성장 배경과 타고난 성품을 평생 간직한 채 사는 까닭에 자신의 삶으로부터 아주 조금의 진전만 획득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도대체 몇 번의 윤회를 거쳐야만 극락왕생할 수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 <나를 뺀 세상의 전부>를 읽어보면 어제 대담자로 나섰던 모 기자에 대한 논란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천성에서 조금의 진전밖에 성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는 데 유리한 기능이나 재능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만나는 사람에 대한 외형적 조건이나 배경 등 우리가 휘둘릴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배제한 채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단 한 번의 삶으로도 끝없는 윤회의 굴레를 거뜬히 벗어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도, 되도록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글로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시인은 자신이 직접 만나고 보고 느꼈던 것들을 계절별로 나누어 책에 80여 꼭지의 글을 실었습니다. <마음 사전>에서 보여주었던 적확하고 세밀한 글쓰기와는 다소 거리가 먼 듯합니다. 시인의 나이 듦에 대한 반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의 어릴 적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살면서 자신이 여러 번 겪었던 일들은 모두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뻔히 아는 일쯤으로 지레짐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이 쓰는 말과 글이 두루뭉술 분명하지 않게 변해간다는 건 자신도 나이가 들었다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쓸 때에 자주 떠올린다. 낯선 것을 낯익도록 낯익은 것을 낯설도록 궁리를 하게 된다. 내 시를 읽어줄 누군가가 내 시 속에서 혹독한 기시감에 시달려 길을 잃고 미아가 되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미아가 되어 울음보를 터트려주길 욕망하는지도 모르겠다. 꿈 끝의 골목으로 갈 수 있게 길안내를 하려는 걸 수도 있다. 꿈 끝의 골목에 도착하면 어쨌거나 출발이란 걸 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p.202)   

 

그림책을 선물했을 때, 책을 받아 든 이의 표정을 지켜보며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 된다는 걸 가장 짧은 시간에 경험하는 즐거움을 누려보기도 하고, 서로 익히 아는 오래된 상처를 꺼내어 내밀한 관계임을 새삼 확인하기보다는 다음 달에 무얼 할지, 내년에 무얼 할지, 새롭게 꾸고 있는 꿈이 무엇인지 묻는 건강한 호기심을, 두 사람을 사랑으로 에워싸는 의미 없는 대화를 시인은 그리워하고 있는 듯합니다.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까닭에, 오롯이 서로를 응시하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는 어쩌면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므로 완성되어간다'는 시인의 주장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신화시대의 전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영악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이미 비루함과 지루함,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하기 때문이다." (p.252)

 

'한 발 앞서간다'는 말이 더 이상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뒷모습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뒷모습만 보인다는 건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실수가 많아진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앞서간다는 건 실수를 해도 괜찮다는 특권을 갖는 게 아니라 자신의 뒷모습만 보여주는 까닭에 뒷사람보다 더욱 조심하고 안 보이는 데서도 세밀히 살펴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삶에서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완성은 아닐지라도 조금 더 큰 진전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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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편의 중학교는 체육대회를 하는지 종일 소란스러웠다. 쾌청한 하늘에 학생들을 통제하는 선생님의 마이크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운동장 담벼락을 따라 커다란 그늘막이 쳐지고 봄을 닮은 아이들이 푸르게 뛰었다. 5월의 뙤약볕이 운동장 가득 쏟아지고 햇살도 아랑곳 않는 푸른 생명력이 봄처럼 빛났다. 살아있다는 기척은 바로 저런 게 아닌가 생각했다.

 

송홧가루 뽀얗게 날리는 요즘 산에는 각시붓꽃이며, 제비꽃이며, 애기똥풀꽃이며 이름도 모르는 꽃들로 가득하다. 조심을 하느라고 해도 길섶에 내려앉은 송홧가루를 피할 방법은 없다. 생명이 묻어나는 5월은 언제나 분주하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챙겨야 할 기념일도 많지만 지인들의 경조사도 만만치 않다. 부산스러운 하루하루가 쉼 없이 흐르고 차분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게 마련이다.

 

김소연 시인의 신작 <나를 뺀 세상의 전부>를 읽고 있다. 오래전에 나온 <마음 사전>을 나는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었다. '아, 시인은 비슷한 의미의 단어들을 이렇게도 세심하게 다루고 있구나.' 감탄하면서 말이다. 그랬던 까닭에 시인의 새책은 그저 반가웠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 사람을 만난다는 것과는 무관한 일인 것만 같았다. 설렘은 기대감이라기보다는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움을 달래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그리운 사람과 헤어져 돌아섰을 때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운'이라는 수식어를 제거하여 '사람'만을 남겨둔 채로 그 사람을 대하는 일. 그때부터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보였다. 내가 생각해온 그 사람이 아니라 그를 살아온 그 사람을 알아갈 수 있었다."

 

'그리운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리운'이라는 수식어를 제거하고 '사람'만을 남겨둔 채로 그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걸 시인을 통해 배운다. 생명이 묻어나는 5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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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신달자 에세이
신달자 지음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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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 전의 아침 기온은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낮았다. 마른 갈잎의 버석거림처럼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짧은 연휴의 뒤끝, 인적이 없는 새벽 등산로는 고요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트리며 간간이 이름도 모르는 산새가 울었다. '그래. 옛날 같으면 보리가 익어가는 이맘때를 보릿가을이라고 했을 테지. 나날이 기온을 높여가며 순하게 여름으로 가던 계절이 갑자기 한 계절을 건너뛰어 곧장 가을이라도 된 듯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낮에는 마른 햇살이 내리쬐는 날들이 아주 잠시 이어지는 게지. 마치 보리를 수확해야 할 시기를 하늘이 알아서 점지해 주려는 것처럼 말이야.' 나는 오늘 아침에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래도 시간은 정말 순하게 흘러가는 거야. 예측할 수 없는 일탈이란 게 고작 이런 것이니 말이야. 그에 비하면 우리들 삶은 얼마나 변화무쌍한 것인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제 읽은 신달자의 산문집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를 떠올렸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기가 죽었고 결혼을 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사람이지. 그게 뭐야. 왜 그런 일이 있어! 그것은 한마디로 보잘것없는 맹목적 감상주의에 휩쓸려 내가 누군가를 구원해 주어야 한다는 값싼 보호 의식이 만들어 낸 건방진 작품이었지. 그러나 나는 안다. 나는 불바다의 결혼 생활을 지나온 사람이지만 결혼은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화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변함이 없어." (p.34)

 

시인의 에세이는 가볍거나 아름답지 않다. 글이 아니라 차라리 울부짖음이나 넋두리에 가깝다. 경제학 교수였던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시인의 나이 35세, 그녀가 책임져야 할 사람은 혼수상태였던 남편 말고도 아이 셋과 여든에 가까운 시어머니가 있었다. 혼신을 다한 간호 덕분에 남편은 겨우 살려냈지만 반신불수의 몸이었고, 그때부터 시인은 남편의 신경질을 받아주며 하루 두 번 목욕을 시키고, 약과 음식을 대령하며 온갖 투정을 군말 없이 들어주어야 했다. 시인은 남편이 깨어난 지 딱 3년 만에 남편이 살아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셔 준다면 조금은 짐이 가벼울 것 같다'는 고백은 시인의 인간성을 의심하기보다는 고통의 크기를 가늠케 한다.

 

지금은 절판이 된 이 책을 나는 적어도 3번 이상을 읽은 듯하다. 생각날 때마다 되는 대로 펼쳐 읽었던 것까지 친다면 그보다 배는 늘어나겠지만 말이다. 남편이 호전될 무렵 시어머니가 척추를 다쳐 병석에 누웠다. 시인은 '여름밤 벼락을 맞을까 봐 겁이 났을 만큼 시어머니를 미워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막상 시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한 여자의 슬픈 죽음'이 안타까워 눈물을 쏟는다. 짐스럽기만 했던 남편이 2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뇌졸중 후유증을 앓다가 떠난 뒤에도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했다.

 

"희수야. 다시 말하지만 인생이란 너무 눈부시게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내용이 들어 있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단코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고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만들며 사는 일,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지." (p.35)

 

시인은 남편이 죽고 5년 뒤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절규에 가까운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따금 생각하곤 한다. 고통을 부여잡고 고통과 함께 더 깊이 가라앉을 것이냐, 아니면 견디기 힘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마치 고통과는 일절 관련이 없는 것인 양 유리된 채, 의식적으로 고통을 밀어내면서 살아갈 것이냐 하는 문제는 다만 내 선택의 영역으로 남겨진 게 아니냐고 말이다.

 

"나는 세상에 관심이 없었고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내가 언제 대학을 다녔으며 내가 언제 시인이었던가. 내가 언제 꿈이 있었으며 내가 언제 인간에 대한 이상이 있었던가. 내 머리 위에 언제 푸른 하늘이 있었으며 해는 정녕 날마다 떠오르는 것인지 나는 몰랐다." (p.178)

 

시인은 '튀고 번뜩이고 남들의 시선을 끌며 빛나는 총천연색 인생은 좋은 삶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간절한 바람에 신의 가호가 더해져 남 부러울 것 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총천연색의 인생은 좋은 삶이 아니란다. 자신의 삶을 고통의 크기를 반감시키거나 희생으로 점철되었던 시인의 삶을 미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은 아니다. 딸 같은 제자 희수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산문에서 시인은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어쩔 수 없이 불거져 나오던 자신의 이기심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눈물을 섞은 고해성사가 이보다 더 안타까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이 세상에 절체절명으로 불행한 일은 없다. 사람들은 아직 벗어날 방도가 있는데도 너무 일찍 절망하는지 모른다. 인간은 희망에 속는 일보다 절망에 속는 일이 더 많다. 내가 그랬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 너무 빨리 나는 불행하다고 외쳐 버렸는지 몰라. 그러고는 지쳐 쓰러지고 희망이 없다고 단정했는지 모른다." (p.257)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스스로의 위로를 구한다. 고통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위로의 크기 역시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고통은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 그 고통으로 인해 세상은 잠시 슬퍼하다가도 다시 용기를 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시인의 삶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세상을 향한 원망의 칼끝을 무디게 하고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처럼 당신의 고통은 순결한 것이다. 결코 헛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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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더위와 탁한 공기로 종일 나른했던 하루. 2019년의 어린이날은 그렇게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경기도 시흥의 한 농로에서 두 살, 네 살의 어린 자녀 두 명을 포함한 일가족 4명이 렌터카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던 까닭에 서늘한 한기와 함께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오늘이 어린이날이라는데... 부부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날도 아닌 어린이날,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찾는 아이들과 엄마 아빠와 함께 낯선 차 안에서 죽음을 맞았던 두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극명한 대비였기에 나는 차마 더 이상 생각을 진전시키지 못한 채 한동안 망연했던 것입니다. 신달자 시인의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죽음을 둘러싼 한 인간의 애환과 절절한 사연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기록된 까닭에, 감정을 걷어낸 듯한 건조한 묘사가 서걱거리듯, 읽는 이의 마음을 한순간에 쿵 하고 무너뜨립니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인간에게도 생애 단 한 번은 완전히 주목을 받으며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한 생애를 통해 오직 한 번밖에 허용하지 않는 절정이 있다.면 그것 역시 죽음이다. 더는 다른 생각으로 흘러들지 못하게 모든 사람의 시선을 붙잡고 단 한 번의 눈맞춤, 단 한마디의 대화를 안타까운 애원으로 빌어 보는 긴장의 순간. 그것도 죽음이다. 가족이란 때때로 위선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때가 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가족이 그 죽음을 지킨다. 그래서 가족보다 더 가까운 관계는 없다. 죽는 자나 살아 있는 자나 하느님 앞에 서듯 한순간 진실해지는 것도, 가족으로서의 든든한 관계를 다지는 것도 죽음 앞에서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상적인 드라마 속에서도 슬프다. 그러나 절대로 더는 볼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누구나 연습 없이 오열하고 뉘우치고 탄식하게 하는 죽음. 절정은 서서히 가족의 울음이 커지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이 말문을 닫고 눈을 감고 손을 저으면서 입을 열듯 열듯 괴로운 몸놀림을 할 때 가족의 울음은 더 진하게 휘몰아친다. 그 깊은 오열이 가파르게 잦아지는가 싶을 때 주인공은 이미 온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두 손을 늘어뜨리고 마지막 입을 여는가 하다가 힘겹게 닫고 드디어 고개를 한순간 툭 떨어뜨리며 '따르륵'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순간 가족의 통곡이 온 집 안을 메운다. 절정은 그렇게 간단히 끝난다. 왜 생의 절정은 언제나 그렇게 짧은 것인가."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중에서)

 

지금도 여전히 강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왜 생의 절정은 언제나 그렇게 짧은 것인가'. 시인의 한탄에 나는 답을 하지 못합니다. 시인의 말을 그저 조용히 되뇔 뿐입니다. '왜 생의 절정은 그렇게 짧은 것인가' 누구나 마흔이 넘으면 타인의 죽음조차 허투루 넘기지 못하게 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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