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午睡)를 즐기기에 가을이라는 계절은 아깝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는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께느른한 햇살이 거실 바닥을 반쯤 점령하여 세상은 온통 나른한 기운으로 가득했던 걸. 투명한 가을 풍경이 눈꺼풀에 걸려 아른아른 멀어져 갈 즈음, 동네 놀이터에선 까르르까르르 아이들 해맑은 웃음소리가 자장가처럼 또는 할머니의 옛이야기처럼 귓가에 퍼지더라. 이쯤 되면 밀려오는 졸음을 나로서도 어찌할 재간이 없었던 게야.

 

그렇게 한두 시간을 잤던 것 같아. 아무 걱정도 없이. 정말이지 평화로운 세상이었어. 일어나 보니 글쎄 텔레비전만 홀로 떠들고 있지 뭐야. 구경꾼도 없는 방에서 지치지도 않고. 잠도 덜 깬 멍한 정신으로 커피 한 잔을 마셨어. 달달하고 텁텁한 커피 믹스 특유의 향이 잠도 깨지 않은 나를 깊은 수렁으로 이끄는 듯했어. 온몸에 묻은 나른함을 털어내기 위해 베란다 창문을 열었어. 소슬한 바람이 목을 타고 어깨까지 파고들더군. 가벼운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가을이 깊어간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을 거야. 문득 드는 쓸쓸함,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우울. 이창래의 소설 <영원한 이방인>을 읽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내려놓게 되더군.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야. 다만 우울했거나, 잠이 덜 깼거나, 시간이 아까웠던 게지. 계절은 여전히 석양에 빛나는 노란 은행나무의 껑충한 우듬지에 걸려 있었을 테지. 오수를 즐기기에는 가을의 오후는 너무 짧았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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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을 팝니다 - 왠지 모르게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의 비밀
신현암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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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설렘'이 사라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럴 수밖에. 그만큼 경험이 많아진 탓이고, 이미 알고 있거나 한두 번 가본 곳을 다시 찾았을 때 처음 느꼈던 설렘은 반감되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설렘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같은 장소, 같은 사람을 만날지라도 매 순간 처음의 설렘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설렘을 느끼기 위해 굳이 다른 장소, 다른 사람, 다른 음식을 경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도 '나이가 들수록 설렘이 사라진다'는 말이 마치 사실인 양 하는 데 한몫하는 듯하다. 말하자면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설렘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엄밀히 말하자면 영혼이 깊어질수록) 설렘의 대상이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차츰 옮겨질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시시한 나뭇잎이나 작은 꽃잎을 보면서 미처 몰랐던 자연의 신비에 가슴이 두근거리곤 하니까 말이다.

 

신현암 팩토리8 연구소장이 쓴 <설렘을 팝니다>를 읽으면서 내가 받았던 느낌은 사람은 여전히 시각적인 정보를 통한 감성의 자극에 많은 부분 지배되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정상인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말이다. 30년 동안 삼성과 CJ의 마케팅 담당자로, 프로젝트 기획자로, 삼성경제연구소 책임연구자로 일해 온 그의 경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는 단 한 번도 마이너의 세계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고자 2018년 한 해에만 102일간 일본에 머물렀습니다. 설렘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자동차로 가려면 도쿄에서 여덟 시간 걸리는 아오모리현 이나카다테(논에 다른 색의 벼를 심어 나폴레옹, 메릴린 먼로 등을 형상화한 라이스 아트로 유명한 곳)부터 야마구치현 산골짜기의 조그마한 양조장, 히로시마현의 숨겨진 한천 전문점 등을 다녔습니다. 모두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이 모두를 책에 담고 싶었지만 지면의 한계상 도쿄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p.14 '머리말' 중에서)

 

책의 내용과는 다른, 살짝 샛길로 빠진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나는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선호하는 편이다. 사실 책이라는 게 문자를 통한 일종의 환상을 독자들 머리에 심는 일인데, 이에 더하여 아무런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 전자책으로 읽을 경우 모든 게 다 환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종이의 질감을 수시로 맛보면서 지금 내가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작은 위안 혹은 안정감을 얻곤 한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이런 물리적 현실 세계를 환상의 세계로 점점 치환해가는 현상을 보이곤 한다. sns를 통해 알게 된 맛집을 직접 방문했을 때의 실망감은 다들 한두 번쯤 겪어보았을 터, sns라는 환상과 물리적 세계의 간극은 점차 확대되는 추세이다.

 

각설하고 다시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이 책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도쿄의 21개 공간을 분석하고 한 번 방문했던 고객이 그 공간을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이유를 밝힘으로써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의 비밀, 말하자면 설렘 전략을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략은 전통 경제학의 기본 전제인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전제를 무력화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과학의 발전은 환상의 세계를 넓혀가는 경향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이성보다는 감성의 지배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래식당은 가장 겸연쩍을 수 있는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대면 상황을 배제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50분을 '한 끼 알바'에 할애한 뒤 식권을 붙이고 가면 그만입니다. 그 식권이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때에 사용하면 됩니다. 서로 만나지 않기에, 식권을 제공하는 사람의 진정성은 돋보이고 받는 사람의 불편함도 없습니다." (p.82)

 

일본 아베 총리의 수출 규제로 촉발된 한일 관계의 악화는 일본 관광에 직격탄을 날렸고, 우리나라 관광객의 대부분은 동남아나 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런 마당에 '왠지 모르게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의 비밀'이라는 부제로 일본 도쿄의 21개 핫플레이스를 소개하는 것은 어쩌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sns의 발달로 전국 맛집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맛과 가격의 가성비만 따질 게 아니라 소비자의 '설렘'을 기본 마케팅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는 게 아닐까. 굳이 도쿄를 방문하라는 게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배우는 게 좋지 않은가 하는 점에서 말이다.

 

"정원 규모는 5000평 정도로 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정원 중심부로 들어가면 다실도 있고 연못도 있습니다. 오감을 모두 끌어올려 정원을 즐겨봅니다. 크게 심호흡을 합니다. 울창한 숲 덕분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봅니다. 새소리,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 취합니다. 손으로 이것저것 만져봅니다. 돌, 나무, 풀 어느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 거닐어도 좋습니다. 복잡한 도쿄의 한복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하면서 말이죠." (p.270)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곳에는 사람이 덧입힌 인공의 조형물이 하나 둘 추가되기도 하고,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추억이 더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공간은 사람에 의해 덧입혀진 환상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은 무형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은 공간이라는 물리적 세계를 점차 환상의 세계로 뒤바꾸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엊그제 들렀던 괴산 문광의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지금도 여전히 생각나는 까닭은 그 공간에 담긴 내 영혼의 시간이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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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리얼미터가 조사한 '국가사회기관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대통령을 가장 신뢰하는 기관으로 꼽았고(25.6%), 신뢰도가 가장 낮은 3개 기관은 경찰·국회·검찰로 조사됐다고 한다. 2년 전 한 여론조사 기관이 '국민 신뢰회복을 위한 개혁이 가장 시급한 기관'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에 따르면 '법원, 검찰 등 사법기관'이 1위, '국회'가 2위, '신문사, 방송사 등 언론기관'이 3위로 나타났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실 한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법원이나 검찰 등 사법기관과 언론의 역할이 지대하다. 그럼에도 국민의 의식 수준은 한참 앞서가는 데 반해 우리나라의 검찰과 언론 수준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국민들은 끝없이 '공정'과 '정의'를 외치고 있건만 검찰과 언론을 통제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하는 국회도, 당사자인 검찰과 언론도 개혁은 그저 공염불로 그칠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구조인 그들이 국민들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개혁에 동참할 리 없다는 게 중론이다. 사익을 지킬 게 많은 그들로서는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대의를 위한 '공정'과 '정의'보다는 그들 가까이에 있는 사익의 유혹이 더욱 큰 것이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검찰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여의도로, 서초동으로 모여들고 있다. 우리는 결코 잃을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비열하고 편파적인 권력구조를 우리 다음 세대까지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금 당장 우리에게 떨어지는 사익은 별게 없을지라도 우리는 다만 희망을 노래하고 '공정'과 '정의'를 외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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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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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를 갖는다는 것은 곧 후줄근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폼나고 멋져 보이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어차피 자신의 일상은 추레하고 너저분한 어떤 것으로 인식될 뿐 일상 자체에서 활력을 얻는 사람은 없는 까닭에 우리는 언제든 이 넝마와도 같은 후줄근한 일상을 과감히 벗어던질 기회를 엿보게 마련이다. 등산을 하든, 독서를 하든, 음악회에 참석하든, 혹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불법적 행위(이를테면 마약이나 매춘과 같은)에 가담을 하든 원인은 모두 우리의 일상 자체가 너무도 따분하거나 빈약한 데서 오는 결과물이 아닐까. 비록 그 형태가 다를지언정 나른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무런 직업이 없는 백수의 욕망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주야장천 에세이나 리얼리즘 소설만 읽다가 이따금 판타지 소설이나 역사소설에 눈길을 주는 이유도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욕망에서 보면 다 이해가 된다.

 

그렇게 보면 서철원의 소설 <최후의 만찬>은 독서가의 일탈에 딱 들어맞는 소설이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이끌려 책을 선택한 이도 더러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현대가 아닌 조선 정조 시대를 축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기존의 제도와 풍습에 맞서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취하는 다양한 욕망의 스펙트럼을 매우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의 사기에 가까운 자기계발서에 찌든 대한민국 대다수 독서가에게 일말의 탈출구를 제시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 오래전 풍남문 앞에서 희디 흰 상천上天으로 밀려나간 두 선비의 삶과 믿음과 십자가의 희망을 생각하면, 삶은 문학보다 어려워지고, 문학은 구원만큼 멀어진다. 구원의 삶이 멀어질 때 서쪽 하늘 별이 된 자들의 숨소리가 이 시대의 오류에 떠밀려 한 점 구름으로 밀려오던 환영은 분명 꿈일 것이다. 그 삶의 거리에 쌓여 있는 삶의 흔적은 미망未忘의 자국일 뿐인데, 격동과 불굴의 말들이 엉키어들면 저 먼 시대 유자儒者들이 남긴 유언은 밤하늘 별빛보다 뚜렷이 들려온다." (p.434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은 신해년(1791년, 정조 15년)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제례를 지냈다는 이유로 취조를 당하고 결국 완산 풍남문 앞에서 처형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취조를 담당했던 사헌부 감찰어사 최무영은 윤지충의 집에서 발견된 그림 한 점이 있음을 정조에게 보고한다. 열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즐기는 그림. 윤지충의 말에 의하면 예수와 열두 제자의 식사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모사본인 이 그림을 본 정조는 서학과 유교가 충돌하는 난세의 어려움을 풀고자 도화서 별제 김홍도를 시켜 그림에 대해 검토하라고 지시한다.

 

"임금의 의도를 김홍도는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림을 그린 자와 감상자 사이의 거리는 천차만별이었다. 그 사이에 얕거나 깊은 강이 지날 수 있으며, 가깝거나 먼 산이 가로막힐 수 있었다. 앞이 비치는 투명한 천으로 덮여 있거나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흑단으로 가려질 가능성도 많았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사람들의 머리에 도는 이상과 맞물리기 쉬운 소재이며 시대와 섞이기 좋은 재료였다. 그 때문에 그린 자와 감상자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p.309)

 

소설에는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와 당시의 실권을 장악했던 노론 세력이 등장한다. 서학의 유입으로 유학의 근간이 흔들리고 이로 인해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였던 정조와 순교를 지켜본 정약용의 나약해지는 신념을 대비시킴으로써 하나의 사건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는지 잘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새로운 이념이나 정치 철학, 혹은 신흥 종교가 그 시대의 기득권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치며 이를 도입하기 위한 신지식인들의 반응은 또 어떠했는지 작가는 소설 속에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선 후기 정조 시대의 천주교 탄압을 다룬 그렇고 그런 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무엇보다 문장 속에 감추어진 작가의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적 울림이 좋았고,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장영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에 얽힌 비밀이 있었음을 밝히는 장면도 흥미로웠다. 소설을 극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작가가 창조해낸 여섯 탈춤패 초라니 암살단과 같은 가상의 인물들 역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

 

"여섯 외인이 훔친 세상의 향기는 악의 집행이었을 것이다. 악을 과시함으로써 선을 밝히는 악의 집행이었을 것이다. 여섯 외인이 사면한 악의 진실은 더럽고 추한 냄새를 씻어내려 함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사라진 향기를 되찾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악취를 밀어내고 선으로 물든 깨끗한 향기를 내보내려 한 사투였을 것이다." (P.404)

 

전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유일한 국가 조선. 조선의 건국이념이자 조선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유교의 전통을 잘 알면서도 신념과 양심에 따라 서학을 수용하고 자신의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조선의 선비들이 새삼 대단하게 보이는 건 소설 한 권이 단순히 재미로만 읽히지 않았다는 반증이리라.

 

역사의 진보란 계절의 순환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 속에는 익숙함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인간의 잠재된 욕망, 그 작은 일탈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후줄근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짓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변화의 물꼬를 트고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어떤 것들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사실.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친일 후손들의 공고했던 기득권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는 요즘, 그들의 거대한 반격이 검찰과 언론, 거대한 정치세력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몰아치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처한 나른한 일상을 결코 오래도록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기에 언젠가는 새로운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서학이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으로 인정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후줄근한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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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잘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정신질환만큼 전염성이 강한 질병도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복제된 듯 같은 질병이 그대로 옮겨지는 여타의 전염병과는 다르게 정신질환의 전염 양상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의 정신질환자로 인해 환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전염의 반경은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치매 질환을 앓고 있는 한 사람을 가족으로 둔 경우 여타의 가족 구성원은 경중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게 마련이고, 심하게는 가족 중 누군가가 자폐증이나 조현병, 혹은 현대인의 대표적 정신질환이라고 하는 공황장애, 조울증, 강박증 등을 앓고 있다면 그 절망감으로 인해 가족 역시 쉽게 전염되곤 한다. 뿐만 아니다. 가족 구성원과 접촉하는 다양한 사람들 역시 우울한 분위기로 인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회적 편견과 좋지 않은 시선으로 인해 새로운 정신질환에 노출될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따지다 보면 정신질환자가 아닌 현대인을 찾는 게 오히려 빠를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최근 출간되는 책도 정신병에 관련된 책들이 많다. 오늘 알고 지내던 스님을 만나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깐 얼굴만 뵙고 오려던 게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그만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스님은 현대인의 정신질환의 원인이 자연에서 멀어진 탓이라고 진단했다. 주말에 잠깐 나들이 삼아 찾는 자연만으로는 정신질환에 대한 면역력을 기르기에 역부족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결국 우리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 묻히게 되지만 살아가는 동안 자연과 멀어진다면 그 삶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게 스님의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자연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현대인의 정신질환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암울한 진단도...

 

그야말로 만산홍엽(滿山紅葉), 가을이 물들고 있다. 자연 속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풍광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자연에 한껏 취해보는 것도 이 계절이 지나면 어려울 듯하니 말이다. 자연 속에서 명상에 들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나고 나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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