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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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실재하는 현실이 아닌 우리의 상상이나 '이럴 것이다' 하는 추정 속에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보이지 않는 사실을 진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게 어쩌면 아이러니일 수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현실은 인간의 온갖 탐욕과 위선으로 인해 보잘것없는 거짓이 영원불멸의 진실인 양 포장되는 경우가 하도 많아서 나는 오히려 우리의 상상 혹은 추정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고 지금도 여전히 믿게 되는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역시 우리가 아는 시인 '백석'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국전쟁 이후 그가 걸었던(혹은 그러했으리라 추정되는) 삶을 복원함으로써 새롭게 구축된 사회주의 이념과 독재 정치가 자유를 갈구하던 한 시인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였는지 독자들에게 그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줌은 물론 잊혀가던 한 시인을 다시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행은 지난가을, 옥심과 함께 바라보던 불을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 누군가 살았던 집으로 번지던 불. 문짝을 태우고 기둥을 태우고 지붕을 태우던 불. 그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세계가 그렇게 불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바이러스와 병원균이 불타겠지만, 곧 그 불은 종파주의와 낡은 사상으로 옮겨붙을 것이고, 종내에는 서너 줄의 시구를 얻기 위해 공들여 문장을 고치는 시인이, 맥고모자를 쓰고 맥주를 마시고 짠물 냄새 나는 바닷가를 홀로 걸어가도 좋을 밤이,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외로운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타오를 것이다. 그렇게 한번 불타고 나면, 불타기 전의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p.165)

 

전쟁이 있었고, 하루아침에 세상은 바뀌었다. 북한 문단은 기행에게 당의 이념을 인민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문학만을 강요했다. 당이 요구하는 시를 쓰지 않으면 평양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기행은 차마 마음에도 없는 시를 쓰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시를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더이상 시인이 아니라고, 당과 인민이 원하는 시를 쓸 수 없노라고 고백한다.

 

"저 역시 시를 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제 안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습니다. 음식 이름들, 옛 지명들, 사투리들...... 폐허에 굴러다니는 벽돌 조각들처럼 단어들은 점점 부서지고 있어요."  (p.162)

 

기행이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세계,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 하루에 일만 톤에 가까운 네이팜탄과 칠백 톤이 넘는 폭탄이 떨어지는 등 종일토록 불비가 쏟아져 평양 곳곳이 불타오르던 순간에도,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게 했던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구원했던 언어와 문자들.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는 교시가 내려진 뒤,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세계는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p.191)

 

소설가 김연수의 진실은, 그가 창조한 시인 기행의 세계는, 천불에 휩싸여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이어진다. 나는 소설가 김연수가 지어낸 허구가 아닌, 그가 창조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그가 엮은 진실의 꾸러미들을 찬찬히 읽어갔던 것이다. 1930~40년대에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기행이 전쟁 후 현실의 무게에 눌려 '희망과 꿈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했던, 그럼에도 어떻게든 시인의 삶을 되찾으려 했던 그의 빛바랜 희망이 한 권의 소설 속에서 무지개처럼 되살아나는 진실. 나는 그렇게 김연수의 진실을 읽어내려갔다.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p.165)

 

무거운 현실의 벽 앞에서 한 시인이 겪었을 절망의 푸른 멍자국이 이 소설의 진실이라면, 소설가 김연수의 진실은 시인 기행이 '죽는 순간까지도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였으리라. 소설을 읽는 우리는 어쩌면 소설가 김연수의 진실을, 혹은 한국전쟁 이후 드러나지 않은 시인 '백석'의 삶과 그의 발자취에 얽힌 절망을 각자의 가슴속에 진실인 양 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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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려나 봅니다. 계절의 변화를 처음 목격한 돌쟁이 간난 아가도 아닌데 계절의 변화가 뭐 그리 새삼스러울 게 있을까마는 비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한동안 강더위가 이어지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오늘처럼 서늘바람이 부는 날씨가 새삼 반가웠던 것입니다. 물론 계절이 바뀌고 선뜻한 냉기가 도는 만추를 기약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날들이 흘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늘은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거나 풀도 울며 돌아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나날이 더워지는 날씨 탓인지 그 정도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온종일 비가 내렸고 12호 태풍 '오마이스'의 상륙마저 예보된 처서의 풍경은 위기를 앞둔 팽팽한 긴장감이 넘쳤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에 곡식이 준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이맘때의 비는 그닥 반가운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은 에어컨 없이 밖에서 부는 바람만으로도 견딜 수 있는 이런 변화가 마냥 반가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맥락도 없는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것은 계절을 오가는 불필요한 소모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처서에 내린 비로 한결 차분해진 나는 왠지 전에는 없던 기운이 불끈 솟아난 듯 퇴근하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처서에 비가 내리면 독 안에 곡식이 준다는 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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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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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한 글자 한 글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꼼꼼히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가 하면 또 어떤 소설은 눈밭을 스치는 바람처럼 반나절 만에 후루룩 읽어도 전에 이미 두어 번쯤 읽었던 것처럼 쉽사리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독자가 읽는 재미는 또 다른 것이어서 띄엄띄엄 어렵게 읽으면서도 끝내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쉽게 이해되면서도 몇 날 며칠을 방치하다 억지로 읽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므로 쉽고 재미있는 소설을 고르겠다는 생각은 애저녁에 버리는 게 좋다. 소설은 그저 그저께 산 로또복권의 추첨을 기다리듯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펼칠 일이다. 번번이 꽝이 될지언정 1등 당첨을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최은영의 소설을 선택한다는 건 실패가 없는 복권 추첨과 같다는 걸 알기에 나는 두려움 없이 집어들곤 한다. 재미의 차이는 조금 있을지언정 재미에 감동을 더하면 결과적으로 만족의 강도가 비슷하다는 건 소설가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큰 선물을 부여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혼잣말처럼 되뇌곤 했었다. 그리고 <밝은 밤>은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했다. 처음이라는 두려움보다는 이전과 다른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설렘으로 책을 펼쳤다.


"엄마는 남자와 사는 삶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도리어 엄마야말로 남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p.17)


소설은 서른두 살의 '나'(지연)가 이혼 후 서울을 떠나 바닷가 근처 작은 마을 희령으로 도망치듯 향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소설의 화자인 지연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외)할머니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엄마와 사이가 틀어진 할머니는 지연의 결혼식에조차 초대받지 못할 정도로 데면데면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는데, 지연은 뜻하지 않게 이웃사촌이 된 할머니를 통해 저간의 어색한 관계를 복원하고 할머니로부터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외할머니로 이어지는 지난했던 모계 3대의 삶을 전해 듣는다. 그 신산스러운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지연 역시 단단해져 간다.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p.156)


백정의 딸로 태어나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 속에서 자랐던 증조모는 병들어 누운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의지가지없는 신세였다. 일본군에게 잡혀갈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이 증조부였고, 증조모는 어쩔 수 없이 증조부와 함께 개성으로 달아난다. 병든 어머니를 돌본 건 증조부의 친구였던 새비 아저씨였다. 새비 아저씨 부부가 증조모가 있던 개성으로 이사를 온 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증조모는 새비 아줌마와 가장 절친한 동무로 지낸다. 증조모가 딸 영옥을 낳은 2년 후 새비 아줌마도 딸 희자를 낳는다. 그들 역시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낸다. 새비 아저씨의 집안이 가세가 기울어 빚을 갚을 길이 없자 새비 아저씨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고 새비 아저씨는 결국 원폭 희생자가 되어 귀국한다. 해방이 된 후 새비 아저씨가 죽고 집안사람이 사상범으로 몰리자 새비 아줌마와 희자는 남한으로 탈출하여 새비 아줌마의 고모가 있는 대구에 정착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증조부 내외와 영옥 역시 피난길에 올라 대구에서 새비 아줌마와 재회한다. 국군에 자원입대했던 증조부는 휴전이 되자 부모님의 소식을 쫓아 희령으로 이사한다. 그곳에서 영옥은 처자식이 있던 남자와 혼인하여 '나'(지연)의 엄마인 미선을 낳는다. 결국 영옥의 남편인 조남선은 본처를 따라 떠난다. 증조부도 교통사고로 죽고 희령에는 이제 증조모와 영옥 모녀만 남는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 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p.252)


소설은 시대적 환경이나 경제적 여건에 관계없이 줄곧 약자의 입장에 있었던 여인의 삶을 조망한다.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새비 아줌마가 증조모에게 보내온 편지, 영옥에게 보내온 희자의 편지 등을 통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수해야만 했던 지난한 삶과 그들 사이의 진한 우정 혹은 동지 의식이 진한 감동으로 남는다. 그리고 '나'(지연)의 이혼을 바라보는 엄마와 '나'의 시각차와 그로 인한 갈등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이 우리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p137)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한결같이 문제 투성이다. 바람을 피우고도 사과 한마디 없었던 '나'(지연)의 전 남편과 증조모를 무사히 구출했다는 이유로 평생 자기밖에 몰랐던 증조부, 본처가 있다는 사실도 숨긴 채 초혼인 척 결혼을 했던 할아버지 조남선 등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남편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의 잘못도 인지하지 못한 채 여자들로부터 괜한 욕을 먹고 있다고 반박할런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소설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서로를 보듬고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삶을 위로한다.


"새비 아주머니의 시선은 증조모의 몸을 지나서, 마음을 지나서,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증조모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를 안고서 내 동무야, 내 동무야, 말을 걸고 있다. 그런 작은 따뜻함이라도 간절해서, 하지만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증조모는 마당 구석에 쪼그려앉아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있다."  (p.288)


누구에게나 삶의 풍경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평범한 일상 사이로 드문드문 기쁘고 슬픈 기억들이 마치 아름다운 장식처럼 펼쳐지는 것. 소설 역시 그와 같은 삶의 풍경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낸다. 기나긴 어둠의 관습을 통과하면 네온사인 찬란한 '밝은 밤'이 기필코 찾아오고야 말 것이라는 작가의 기대는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으로 향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실의 중력이 조금 더 가벼워지기를 작가는 소설을 쓰는 내내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희망 고문을 하면서 무거운 현실을 이기고 있노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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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더위가 잔불처럼 남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불에 덴 듯 뜨거워진 열기를 선선한 바람이 불어 식혀준다는 것이랄까. 때 늦은 가을장마가 예보된 주말. 여전한 한낮 더위에 화덕 위의 솥뚜껑처럼 달궈진 인도를 걷는 게 마냥 힘들기만 했다. 정치권은 대선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고, 서민들은 식지 않는 부동산 열기에 너도나도 청약 경쟁에 뛰어들고...

 

탈레반에 의해 점령당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보면서 국가 지도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는 케케묵은 이념 논쟁과 지독한 엘리트주의에 있다. 자신보다 학벌이 낮은 사람은 지도자로 인정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의 하인이나 머슴쯤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에게 조롱과 멸시로 일관하였던 것은 물론 없는 죄도 덮어 씌워 급기야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엘리트주의는 공직 사회, 특히 법조계에서 유독 심하다. 판, 검사의 엘리트주의는 가히 망국병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들을 지금과 같은 학벌 괴물로 만든 배경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그들 모두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의 언론 역시 무소불위의 권력인 검찰에 기생하면서 동급으로 성장한 게 사실이다. 어떤 악의적인 보도로 사람이 죽어 나자빠진들 그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사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하였다는 소식에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언론 및 야당 정치인들이 거품을 물고 반기를 드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도 이제 자신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엄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도, 청렴결백한 사람을 뇌물을 밝히는 파렴치범으로 몰아도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 않던 언론인들이 이제는 그와 같은 허튼소리를 하다가는 무거운 책임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언론 신뢰도 세계 꼴찌 수준인 대한민국이 더 떨어질 신뢰도도 없건만 언론사에선 그들의 신뢰도 후퇴를 걱정한다. 참으로 웃기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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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8-20 16: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적어 주신 내용에 대해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아침에 라디오에서 새로운 언론
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숙의가 더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하는 언론
인의 말을 들었는데...

아니 그렇게 시간이 많았는데
그동안 숙의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하니
숙의를 하겠다고 하는 건지.

전형적인 시간끌기 전법으로 밖
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서구를 능가하는 언론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서구에서는 통용되는
징벌적 손해배상에는 게거품을
물면서 반대하는 것에도 1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꼼쥐 2021-08-22 20:39   좋아요 0 | URL
언론이 제3의 권력으로 수십 년 동안 소비자인 일반 시민을 무시하면서 제멋대로 행사해왔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못하게 생겼으니 속이 타겠지요. 가뜩이나 유튜브와 같은 개인 미디어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추세이니 자신들의 권력도 차츰 낮아지고 있는 마당에 이와 같은 법률 제정은 더욱 맘에 안 들겠지요.
 
다른 딸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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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와의 만남은 대개 약간의 심적 충격을 동반한다. 나를 포함한 독자들 대부분은 작가의 솔직함에 놀라고,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대범함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작가이니만큼 그녀에게 있어 솔직함이란 그저 평일에 입는 일상복처럼 스스럼없는 어떤 것이겠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좀 더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하려는 많은 작가들의 글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아니 에르노라는 이름은 다만 하나의 돋을새김으로 기억될 뿐이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 중 내가 처음 읽었던 책은 <단순한 열정>이었다. 작가의 팬이 되기에는 그 한 권의 책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후 나는 <남자의 자리>, <한 여자> 등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그녀의 작품을 읽었다. '아니 에르노'는 그렇게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개인의 기억 속에서 집단의 기억을 복원”하려는 사회학적 방법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경험과 판단의 총합으로서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더없이 솔직하게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글로 포착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한 글이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언제나 죽은 사람이었어요. 내가 열 살 되던 해의 여름 어느 날, 당신은 죽은 채로 내 삶에 들어왔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과 레트의 어린 딸 보니처럼 이야기 속에서 태어나고 죽은 거지요."  (p.13)

 

아니 에르노의 작품 <다른 딸>은 작가가 태어나기 2년 반 전에 죽은 언니 지네트에 대한 회상이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편지를 써달라는 출판사의 제안으로부터 출발한 이 글은 작가가 열 살 무렵 죽은 언니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부터 '언제나 죽은 사람'으로 자신과 함께 살았던 언니에 대한 부재와 존재의 탐구, 어머니로부터 사고로 죽은 언니에 대해 들었을 때의 불안과 혼란 등을 작가 특유의 유려하면서도 직설적인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내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1945년 봄에 찍은 내가 나온 사진들에도 그들이 있습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젊음이나 평온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씁쓸한 비애만 감돕니다. 얼굴에는 주름이 졌고, 피부도 탄력을 잃었지요. 그녀는 내가 오랫동안 봐왔던 줄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둥글게 말아 위로 틀어 올렸어요. 그들은 피난과 점령과 폭격을 겪었고, 당신의 죽음을 겪었어요. 아이를 잃은 부모인 겁니다. 당신이 거기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 그들의 고통으로."  (p.47)

 

열 살의 어느 여름, 우연히 듣게 된 죽은 언니의 존재로 인해 외동딸로 살았던 십 년의 세월이 부정당하고, '나'를 선행한 '당신'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로 인해 '나'는 탄생의 순간부터 '당신'의 그림자가 겹쳐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 '나'는 단순한 딸(One)이 아닌 다른 딸(The other)의 지위로 밀려났음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딸'이 된 '나'는 영영 비교의 대상이 되면서도, 존재하지만 끄트머리에서 탄생하는 대체품의 '나'는 부재하지만 불멸하는 '당신'을 영원히 넘어설 수 없었다.

 

"'당신'은 덫입니다.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를 가진 채, 역겨운 슬픔의 냄새를 풍기며 당신에 대한 가상의 친밀감을 만들어내요. 나를 비난하려 가까이 다가오죠.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믿게 하며, 당신의 죽음을 우위로 두어 내 존재 전부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내가 그렇게 여기는 까닭은,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엄밀하게 저울질하여 만든 나에 대한 인식을 당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완성할 수 있다는 유혹 때문이에요."  (p.71)

 

작가는 자신이 쓴 편지의 수신자가 '당신'이 아닌, '당신'만큼이나 보이지 않았던 독자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당신'에게 닿기를 소망한다. 자신 역시 수신자가 아니었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당신은 글쓰기로 채울 수 없는 텅 빈 형체'이지만 열 살 이후의 모든 삶에서 존재했던 불멸의 실존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가슴에 말할 수 없는 '당신' 한두 사람을 담고 평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것의 시작이 열 살 무렵의 어느 여름 날일 수도 있고, 임종을 며칠 앞둔 어느 겨울 날일 수도 있겠다. 어떤 존재로 인해 자신의 고유성이 훼손되고, 넘어설 수 없었던 높디높은 벽으로만 존재했던 대상.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둠 저편에 존재했던 또 다른 '나'가 아니었을까. 삶이란 '나'를 이기기 위해 끝없이 분투하는 과정이니까. 그리고 끝내 넘을 수 없는 대상 역시 바로 '나'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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