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한 당신의 인생서에서 한쪽 모서리에 삼각형으로 접힌 몇몇 페이지를 들춰 읽으면 당신 인생의 전반을 짐작할 수 있을까요? 세세하게는 아니지만 대충이라도 말이지요. '삶은 우리가 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는 것, 우리가 이야기하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라고 남미 출신의 어느 작가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따금 삶에 대한 그의 표현이 더없이 정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불끈 저항하고픈 마음이 들곤 합니다. 우리들 각자가 쓴 인생서에서 누군가에게 말해주기 위해 접어 둔 몇몇 페이지가 겨우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는 건 지나친 비약이자 우리의 삶을 비하하는 듯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어제오늘 볼이 얼얼할 정도로 추웠습니다. 나의 어릴 적 기억으로는 겨울은 언제나 이와 같은 극한의 추위가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고양이 세수를 한 젖은 손으로 방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으면 손에 쩍쩍 달라붙는 일은 다반사, 방의 아랫목에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앉아 '후' 하고 입김을 내뿜으면 공기 중으로 하얀 입김이 멀리까지 뻗어가곤 했습니다. 10월 말부터 시작된 겨울은 늦게는 4월 말에서 5월 초까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테지요. 낮이 되자 기온은 조금 올라 냉랭했던 바람결이 조금 부드러워진 듯 느껴집니다. 성탄절 당일에 휴가를 나온 아들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만 뜨면 밖으로만 나돌고 있습니다. 나는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그해 봄의 불확실성>을 읽고 있습니다. 팬데믹 시기에 앵무새 유레카를 돌보는 화자의 일상이 조금 지루하리만치 이어지는 이 소설은 묘한 매력으로 책을 손에서 떼어내지 못하게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 유레카가 느낀 고마움이 아무리 커도 나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그 기이하고 불안했던 시기의 나에겐 유레카와 함께 있을 때 시간이 제일 빨리 지나갔다. 매일 아침 기대에 부풀어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기괴하리만큼 인적 없는 거리를 몇 블록 걸어가서 나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깃털 달린 친구를 만나는 이 단순한 허드렛일 덕이었다. 그건 스스로에게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해낼 자신이 잇는 몇 가지 안 되는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p.104~p.105)


시그리드 누네즈의 문체는 무심한 듯 건조한 문장을 이어가면서 때로는 독자를 무시하는 양 불친절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작가는 자신의 소설 곳곳에 독자들이 각자의 삶에서 깊이 생각해볼 거리를 툭툭 던져 놓음으로써, 우리는 지금 지루하게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소설 속으로 소풍을 떠난 어린아이가 작가가 숨겨 놓은 삶의 비밀을 찾아 이곳저곳을 뒤져보는, 보물찾기 놀이를 하고 있는 듯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나절의 보물찾기 놀이에 심취하는 것은 물론 책을 덮은 후에도 긴 여운으로 인해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 (양장) - 살아 있음의 슬픔, 고독을 건너는 문장들 Memory of Sentences Series 4
다자이 오사무 원작, 박예진 편역 / 리텍콘텐츠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인가 닮고 싶은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처럼 쨍한 추위가 내려앉은 오후의 여린 햇살만큼이나 소중하지 않은가. 그것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한 그루 나무일 수도 있고, 바다를 유영하는 한 마리 고래일 수도 있겠다. 다만 닮고 싶은 대상과 나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넓거나 좁으면 약간의 부작용이 따른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이 비단 나와 종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물리적 간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애초에 나는 '닮고 싶었'을 뿐이지 기필코 '그것이 되겠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나무와 같은 부동심일 수도 있고, 고래와 같은 자유로움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되고 싶다는 희망이랄까, 아니면 꿈이랄까 뭐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에 필요한 열정이 펄펄 끓어 넘칠 듯 뜨거울 필요는 없겠다. 미지근한 온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박예진 작가가 엮은 <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을 읽는 동안 여러 생각들이 두서없이 쌓였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인 동시에 내가 가장 멀리하고 싶은 소설 중 하나인 까닭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요조는 성인이 된 후에도 어떤 순간, 어떤 사람 앞에서도 무방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킬 어떤 자세나 의지도 없이 타인 앞에 무방비로 등장한다는 것은 삶에 무책임하다고 비난받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동시에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극도의 모성애를 유발할 수 있는 유인책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조는 생각하기에 따라 가장 이기적인 인간으로 비칠 수 있다. 인간 삶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에 휩싸인, 그럼에도 타인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누구보다도 잘 유도할 수 있는, 극과 극의 이중적인 인간이 바로 요조라고 이해된다.


"sentence 025

나는 사람들을 몹시 두려워했고, 이상하게도 두려워할수록 더 많은 호의를 받았다. 그리고 호의를 받을수록, 나는 더 깊은 공포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사람들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p.48)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해지는 <인간 실격>은 인간의 나약함과 위선을 매우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사실 작가는 유복한 집안의 11남매 중 열 번째이자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고, 거듭된 자살 시도와 마약 중독, 불안정한 연애와 결혼 생활은 그의 삶을 파국으로 몰았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이 소설 <인간 실격>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데 최소한의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고 작가 스스로가 생각했다면 그것은 지극히 오만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다자이의 문장들은 차가운 고독으로 독자를 껴안습니다. 그러나 그 고독은 무너지지 않는 의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달려라 메로스>의 메로스처럼, 그는 인간의 신뢰와 가능성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아무리 삶이 비극적이라 해도, "사람은 믿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작가. 그의 삶과 문학은 절망을 가로지르며 희망을 말하는 인문학입니다."  (p.16 '프롤로그' 중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들에서 발췌되어 그의 사상 전반을 훑어볼 수 있는 이 책은 설령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색깔이 다양한 그의 소설 속 여러 문장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박예진 작가의 설명을 읽다 보면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한 편쯤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지도 모르겠다. Part.1 '부서진 마음의 언어들', Part.2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깨지기 쉽다', Part.3 '나를 만든,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Part.4 '희망은 때론 가장 잔인한 거짓말이 된다' 등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될 듯하다.


"<사랑과 미에 대하여>는 다섯 남매가 즉흥적으로 창작한 이야기와 현실이 교차하는 순간을 통해 허구와 진실, 가족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본격적인 전개는 노수학자를 주인공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 짓기에서 시작되는데, 남매들은 각자의 개성과 시각을 반영하여 수학자라는 인물을 세밀하게 구축해 나갑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난 순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며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p.187)


유독 겨울에 어울리는 작가가 있다. 다자이 오사무도 그런 작가 중 한 명이다. 창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뱃속이 헛헛하여 어제 먹다 남긴 찐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면 다자이 오사무가 쓴 슬픈 문장 때문인지, 물기 없는 고구마의 퍽퍽함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 이가 시리도록 찬물 한 사발을 들이켜고 우리는 또 자리에 앉아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읽고 목이 메도록 고구마를 먹는다. 겨울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내린 겨울비 탓인지 새벽의 등산로는 흠뻑 젖어 있었다. 비에 젖은 낙엽이 손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났다. 나뭇가지에 고여 있던 빗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것이 마치 빗소리처럼 들렸다. 등산로에 드러난 나무뿌리는 물에 젖어 몹시 미끄러웠다. 기온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산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피해 빠르게 달아났다. 온 산이 비에 젖어 축축한데 고양이는 도대체 어디서 잠을 잤던 것일까.


매년 이맘때쯤이면 늘 고민하는 문제가 하나 있다. 내 삶에 영향을 줄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블로그의 유지 문제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매년 연말이면 이 문제를 두고 씨름을 한다. 내년부터 블로그를 접을 것인지 말 것인지 자본주의 논리로 저울질을 해보는 것이다. 블로그를 유지하는 것의 이점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하는 독서이지만 이따금 리뷰를 쓰는 바람에(때로는 출판사에서 책을 기증받은 까닭에 의무적으로 리뷰를 써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뜩이나 게으른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한 기록을 종종 남길 수 있다는 것과 마음이 심란할 때 짧게나마 한 편의 글을 쓰고 나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반면에 블로그를 유지함으로써 얻는 불이익은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는 게 가장 크고, 일이 바쁠 때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의 리뷰를 기한 내에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꽤나 크다. sns에서 일체의 상업적 영리 활동을 하지 않기로 결심에 결심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언제나 블로그를 유지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데 그럼에도 10년 넘게 블로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다른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 나는 매년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올해로 블로그는 끝내고 내년부터는 일기장이나 한 권 쓰자'는 생각을 늘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붙잡았던 건 시답잖은 나의 글을 꼼꼼히 읽고 따뜻한 댓글을 남겨주는 이웃 때문이었다. 나는 사실 나와 가까운 이에게는 내가 블로그를 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함구하고 있다. 친분이 있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작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걸림돌을 나는 애시당초 원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내 블로그는 나만의 놀이터인 동시에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정신적 분출구였던 셈이다. 말하자면 내 블로그의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는 사람은 모두 나와는 친분이 없는,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익명의 제삼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내 글을 읽었던 어떤 이웃은 내가 만약 책을 출간한다면 가족 열 분을 제외하고 열한 번째 독자가 되겠노라 약속하신 적도 있었고, 비밀 댓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온 이웃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사실 책을 낼 정도로 글재주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 정도의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진심을 담은 그런 댓글을 읽을 때마다 블로그를 1년만 더 유지하자는 쪽으로 못 이기는 척 기울었던 것이다.

오늘은 성탄절 이브. 하늘은 종일 어둡고 칙칙했지만 만났던 사람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가 툭툭 튀어나왔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쎄인트 2025-12-24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역시 저와 한번이라도 얼굴을 대면했던 사람들은 제가 올리는 글을 못 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꾸준히 글을 남기는 것은, 나 자신에게 “당신 아직 살아있어. 아직 숨 잘 쉬고 있어.”하는 격려이자 메시지입니다. 때로 출판사 증정도서 의무방어전에 힘들 때도 있지만, 그것 역시 감사할 따름이지요. 새해에도 꼼쥐님의 글을 계속 만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몸과 마음 늘 강건하시고 평안하셔요.

꼼쥐 2025-12-26 15:02   좋아요 1 | URL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전업작가나 작가지망생이 아니라면 블로그를 유지하는 일도 꽤나 힘든 일이지요. 게다가 매일매일은 아닐지라도 너무 오래지 않게 글을 올리려면 그것도 부담이 되고 말이지요. 쎄인트 님의 댓글을 읽고 나니 조금은 힘이 나는 듯합니다. 2025년 마무리 잘 하시고 새해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뵐 수 있기를~~

차트랑 2025-12-24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탄사가 절로나오는 꼼쥐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작가가 빙의했구나 싶어 무척이나 경도되었습니다.
글 솜씨가 빛을 발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봅니다!

그나저나,
PC 버전으로 보니 금메달이 주렁주렁 열렸군요 꼼쥐님!!
이정도면 알라딘 은퇴하시기 쉽지 않으실듯요~

꼼쥐 2025-12-26 15:05   좋아요 0 | URL
칭찬 댓글 감사합니다.^^ 어쩌다 보니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금메달을 여러 개 달게 되었네요. 시간이 만들어준 선물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이죠. 차트랑 님의 블로그 글을 열심히 읽고 있는 저로서는 덕분에 늘 배우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2025-12-2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글을 읽고 시답잖은 댓글을 남기는 1인입니다. ㅎㅎ
시간을 쪼개어 쓰시는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다는 연대와 응원의 표시겠지요.

꼼쥐 2025-12-26 15:08   좋아요 0 | URL
어쩌면 마음에도 없는 빈말일지라도 그와 같은 칭찬 댓글을 읽다 보면 섣불리 블로그를 접을 수 없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저의 글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고 있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뭉클해지곤 합니다. 잉크냄새 님의 응원 감사합니다.^^

호시우행 2025-12-2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한 이웃합니다. 건강한 2026년도 응원합니다.

꼼쥐 2025-12-26 15:10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 님은 예전에 인터파크에서 자주 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알라딘에서 뵐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저 역시 2026년 호시우행 님의 건투를 빌어 봅니다.

닷슈 2025-12-25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써주십시오

꼼쥐 2025-12-26 15:11   좋아요 0 | URL
닷슈 님의 응원 감사합니다.^^
건강한 연말연시 되시길~~
 
작별 너머 -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의 문
다비드 디옵 지음, 목수정 옮김 / 희담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 이야기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을 때 더욱 애틋해진다. 순탄하고 무난한 사랑이 당사자들에게는 물론 그것을 전해 듣는 사람들에게도 더불어 행복을 안겨줄 텐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는 오히려 부러움이나 질투의 대상이 되고 마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무난한 사랑 이야기는 귀를 쫑긋 세우고 빠져들 만한 대상은 되지 못한다. 사람 심리가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죄다 나쁜 마음의 소유자들로만 구성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나 역시 무난한 사랑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어찌어찌 만나서 연애를 하고, 날 잡아 결혼을 하고, 원하는 만큼 자식을 낳아 평생 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이에게 더없이 큰 기쁨과 행복을 안겨줄 만도 한데 인간의 심성은 다소 표독스러운 데가 있어서 그런 이야기에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다비드 디옵의 소설 <작별 너머>를 읽게 된 동기 이면에는 어쩌면 그런 이유가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셸 아당송과 마람의 사랑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비극적인 사랑을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종교적 원칙과 이토록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두어온 나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히 벗은 몸으로 빗물이 가득 채워졌는지 보려 모든 항아리를 하나하나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마람을, 그녀를 향한 내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그녀는 비에 젖어 움직임을 방해하는 옷을 던져 놓고, 마치 신이 아직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않은 검은 이브처럼, 완전한 나신으로 자유롭고 아름답게 움직이고 있었다."  (p.177~p.178)


유럽 절대왕정 시대인 1700년대 세네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을 접한 독자는 책을 읽기도 전에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세네갈의 고레 섬을 문득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식물학자였던 미셸 아당송은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자연백과사전>을 저술하고, 그 저작을 통하여 식물학계 최고봉에 오르는 꿈을 지닌 야망가였다. 그는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를 떠나 세네갈의 생루이 섬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그렇게 세네갈에서 연구를 이어가던 아당송은 노예로 팔려갔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온 한 여인에 대한 소문을 우연히 듣게 된다.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아당송은 '돌아온 여인'을 반드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길을 떠났고, 천신만고 끝에 마람을 만난다. 사막을 건너면서 낙마사고를 당하여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아당송이 결국 늙은 치유사에게 맡겨졌던 것, 그리고 아당송을 맡았 치유사가 바로 '돌아온 여인' 마람이었다. 마람은 소문만 듣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백인 아당송을 처음엔 무척이나 경계했지만, 그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신뢰가 싹튼다.


"마람이 이 빛을 발하는 소금물을 가져다, 밤에 그녀의 오두막을 밝히는 불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녀에 대한 나의 애틋함을 더욱 증폭시켰다. 나는 그녀가 표현하는 방식의 세계관을 갖지 않았고, 그녀가 말하는 수호천사의 존재도,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고대 종교의 반인 반수의 존재도 믿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쓸모없는 것일지라도,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같은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켰다. 바닷물로 채워진 물 단지로부터 번지는 빛은 촛불보다 밝지 않았고, 기름 램프보다 약했지만, 그것은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p.205~p.206)


마람은 아당송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삼촌에게 맡겨져 온갖 학대를 당하며 성장했던 마람은 결국 노예로 팔려갔었지만, 가까스로 도망쳐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늙은 치유사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야생의 아프리카처럼 원시의 아름다움을 지닌 마람이 아당송에게 들려준 고난의 인생사는 당시 유럽 열강들이 세네갈을 수탈했던 수난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람을 깊이 이해하게 된 아당송은 마람에게 점차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 형벌을 방관하기에는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이 너무 커졌고, 혹여 그녀가 나와 헤어져 멀리 떨어져 산다고 해도 그녀가 어딘가에 살아있기를 바랄 만큼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우리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취한 행동 때문에 그녀가 나를 증오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그녀의 가족의 명예보다 마람이 살아있는 것을 원한다고 은디악에게 답했다."  (p.269~p.270)


다시 붙잡혀 흑인 노예로 팔려갈 위기에 처한 마람을 구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던 아당송은 결국 자신의 눈앞에서 연인의 죽음으로 목도하고 만다. 연인을 잃은 후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던 아당송은 결국 프랑스로 귀국하여 식물 연구에만 몰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초대한 어느 파티에서 마람을 닮은 초상화를 보게 되고,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한 대목이 연주되는데...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는 누가 높고 누가 낮은 곳에 위치하는 위계질서나 서열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사랑이 파탄에 이를 듯한 위기에 처한 순간 둘 사이의 서열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잃더라도 사랑을 선택하는 반면 우위에 있는 사람은 대개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은 결국 연인을 향한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겠지만 인간의 이기심은 대개 사랑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아당송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마치 참회록처럼 기록하여 자신의 딸에게 남겼다.


한낮에도 바람이 어찌나 차던지 도통 외출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코는 마치 루돌프의 코처럼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인간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그 끝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속이 빈 것에 대해,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막연한 기대를 품곤 한다. 그것이 때로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절은 언제나 발치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시간. 새벽의 등산로에서 밟히는 흙의 감촉은 뒤꿈치에서 시작되어 가슴을 거쳐 정수리에 이른다. '오늘 아침 기온은 어제보다 조금 더 떨어졌나 보네. 흙이 꽁꽁 얼어 딱딱해진 걸 보니.'라거나 '오늘은 기온이 많이 올랐네. 흙이 부드러워졌어.', '비가 많이 왔나 보네. 여전히 길이 미끄러운 걸 보니.' 등 산을 오르는 내내 발밑에 밟히는 흙의 감촉을 매 발걸음마다 생생하게 느끼곤 한다. 그것은 곧 계절에 대한 감각이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이와 같은 탐색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즐기는 나만의 의식이기도 하다.


오늘 아침은 어제에 비해 기온이 낮았던 탓인지 등산로의 느낌은 딱딱하고 거칠었다. 서리가 내려앉은 낙엽도 꽤나 미끄러웠다. 새벽의 고요를 탁한 어둠이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제 낮에는 많은 등산객이 오고 갔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쓰레기가 눈에 띄었다. 코를 풀고 버린 화장지며, 일회용 마스크며, 단골손님처럼 보이는 사탕껍질이며, 심지어 스포츠 용품 홍보 팸플릿에 이르기까지 등산로에는 정말 온갖 종류의 쓰레기가 버려진다. 나는 누군가 버린 쓰레기를 주워 내려오느라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시간을 허비하곤 하지만 다음날 깨끗해진 등산로를 다시 걷고 있노라면 괜스레 뿌듯해지곤 하는 것이다.


정혜윤 PD의 에세이 <책을 덮고 삶을 열다>를 읽고 있다. 나는 유명 작가의 신작을 남들보다 늘 한 박자 늦게 읽는 편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할 때가 많아서 평소에 내가 선호하는 작가라 할지라도 세간의 평이 그닥 좋지 않으면 구매를 미루거나 숫제 읽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라면 구매를 서두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정혜윤 PD의 글을 즐겁게 읽어왔던 사람으로서 <책을 덮고 삶을 열다> 역시 바쁜 업무 틈틈이 아껴가며 읽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신비롭다는 생각이 어찌나 강력하게 가슴에 박혔던지 나는 이제 얼핏 본 낯선 사람의 피로에 절은 등판, 축 늘어진 어깨, 실망에 익숙해져가는 얼굴, 문 닫힌 가게, 언제나 약간씩 잘못되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슬픈 자매애를 느낀다. 나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삶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히 '누리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것만 바라는 것이 아니다. 위축되어 초라함에 떨지 않기를, 고개를 떨구고 혼자 어둠 속에 있지 않기를, 혐오에 빠져들지 않기를,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기를, 너무 고통받지 않기를, 힘을 잘못된 데 쓰지 않기를, 존엄성과 생명을 잃지 않기를, 자신의 능력과 기쁨을 찾기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기회를 가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p.56~p.57)


나는 이 대목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었다. 마치 어떤 종교의 탄트라와 같은 이 구절에 나는 깊이 공감했고, 생각할수록 경건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새벽의 등산로에서 키 큰 나무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정혜윤 PD는 독자들을 향해 가슴과 가슴으로 벅찬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나날이 혐오가 많아지는 세상, 전에는 없던 가상의 적도 새로이 만들어 혐오를 부추기고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서로를 향해 함성과 욕설을 내뱉는 세상, 주일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외치면서도 평일에는 온갖 욕설과 악담으로 종교인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세상을 향해 작가는 뭔가 하고픈 말이 있었나 보다. 바람이 차다. 내일 아침 등산로는 꽁꽁 얼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