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아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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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소설의 장점은 작가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이 한 뼘 넓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이 일천하여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삶의 모습도 무척이나 제한적일 것이라며 지레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고 정해진 틀 안에 자신의 생각을 가두곤 했었는데,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세상 어떤 사람의 삶이든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폭넓은 가슴의 소유자로 변해가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험은 독서를 통해 작가가 펼쳐 보이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겪어볼 수 있기 때문이지만, 적어도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을 쓰는 작가의 태도입니다. 소설이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만으로 독자를 변화시키고,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삶을 진심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현실감의 차원에서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게 느끼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소설을 현실 속 누군가의 실제 삶으로 인식하느냐 혹은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소설을 읽는 독자의 감동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소설을 쓰는 작가의 태도는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작가의 상상력과 동일한 힘을 발휘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리는 늘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쳤고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자신의 분노로부터, 불안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도망쳤고 최대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 대신 미리는 일에 몰두했다. 동료들은 그녀가 일중독자에 가깝다고 말했는데 그건 일견 사실이었다. 일이 좋기도 했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면 공허함을 느꼈고 불안해졌으니까."  (p.213 '무급휴가' 중에서)


<애쓰지 않아도>는 고등학교 시절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던 유나를 선망한 나머지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던 나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엄마를 비롯한 자신의 비밀을 유나에게 고백하기에 이르는데 그 비밀은 곧 학교 친구들에게 퍼져나갔고,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 나는 유나를 멀리하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 데면데면한 관계가 된 유나에 대해 반추하면서 모든 게 미숙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다는 내용의 표제작 '애쓰지 않아도'를 비롯하여 '데비 책', '꿈결', '숲의 끝' 등 13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단편집입니다.


"우리에겐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지도.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이렇게 눈치 없는 저도 알아요. 제가 덜 미숙했더라면, 조금이라도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더라면, 같은 가정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죠.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면,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가 서로를 기억한다면, 그때는 슬픔보다도 그리움이 더 큰 감정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겠지요."  (p.164 '손편지' 중에서)


'학대받은 아이가 자라서 학대하는 어른이 된다'는 식의 지하철 공익광고를 보고 상처받는 사람을 다룬 '손 편지'와 '우리가 그네를 타며 나눴던 말'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작가는 우리 사회의 아동과 약자,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폭력에 대해 고발하고 점점 교묘하게 은폐되는 혐오와 차별에 대한 폭력성에 분개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단지 우월한 쪽에 서 있다는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약자를 괴롭히면서도 그것이 마치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이라도 되는 양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영원히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유나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게 어떤 모습이든 늘 과하고 넘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이제 애쓰지 않아도 별다른 감정 없이 기억할 수 있다. 아마 영원히 그 애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알고 싶다. 유나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 애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P.32 '애쓰지 않아도' 중에서)


마지막에 실린 단편 '무급휴가'에는 그림을 전공한 두 여성이 등장합니다. 친구 사이인 미리와 현주. 비행기 승무원으로 근무하던 미리는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는 현주와 재회하게 됩니다. 마음 넓고 푸근한 현주를 보면서 미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합니다.


"미리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을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 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P.220 '무급휴가' 중에서)


비가 그친 하늘은 쏟아지는 햇살로 가득합니다. 먹장구름에 막혔던 하늘이 답답했었다는 듯 그야말로 마음껏 쏟아지는 햇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것들뿐인데, 나란히 앉아서 그네를 탈 수 있는 시간,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빛으로 마음껏 빛날 수 있는 시간, 서로에게 커다란 귀가 되어줄 수 있는 시간 말이야.'(p.127 '우리가 그네를 타며 나눴던 말' 중에서)라고 썼던 작가의 대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커다란 귀가 되어주는 시간을 필요한 만큼 내어 줄 수 있는 가슴 넓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하는 시간. 오늘은 금요일. 그리고 이어지는 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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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만 없다면 오늘처럼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씨는 제법 운치가 있다.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막걸리에 파전이 당긴다거나 얼큰한 동태찌개에 소주 한 잔이 그립다는 등 비 오는 날의 술과 관련된 풍경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지만, 빗소리에 어울리는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서재에 앉아 마음에 드는 한 권의 책을 꺼내 읽는 재미는 다른 어떤 일과도 견주기 힘든 나만의 도락이다. 그러나 적당한 날씨와  모든 구색이 갖춰진다고 하여 매번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예정에도 없던 약속이 잡힌다거나, 다른 날보다 지치고 피곤해진 까닭에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거나, 의외의 손님이 불쑥 찾아오는 등 훼방꾼은 곳곳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 모든 게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국민들은 이제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는 상황이 되었지만 대통령실과 여당은 지금도 여전히 변명과 거짓으로 일관하는 듯하다. 게다가 일가족 3명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신림동 반지하 참변 현장을 대통령이 방문해서 상황에 맞지 않는 실언을 하는 바람에 공분을 샀던 곳의 사진을 카드뉴스 형식으로 제작하여 대통령의 국정 홍보에 활용하려 했던 대통령실의 뻘짓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 카드뉴스는 결국 삭제되고 말았지만.

 

 

비대위로 전환한 여당 국회의원들도 이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건 마찬가지다. 수해복구 현장에 참석한 김모 의원은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라는 속내를 털어놓음으로써 빈축을 샀고, 길을 막고 발언하는 동안 시민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게 보여주기 식의 행사성 봉사황동인 까닭에 욕을 먹는 것이요,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여당의 지도부들이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행동을 하는 까닭에 지지율 20%대를 보이는 것이다. 대통령의 사과를 두고 대통령실은 사과가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자택인 아크로비스타가 컨트럴타워라는 괴변을 늘어놓기도 하고, 그럼 비 온다고 대통령이 퇴근을 안 하느냐고 발끈하기도 하는 등 이전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상한 짓들을 국민들은 많이도 목도하고 있다.

 

 

나는 요즘 미셸 자우너가 쓴 <H마트에서 울다>를 읽고 있다. 작가와 나이차는 있지만 작년에 엄마를 잃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나로서는 작가의 표현 하나하나에 공감하며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아빠가 내 목구멍에 팔을 쑤셔넣어 내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태산 같은 시간을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려 애쓰면서 보내왔다. 확고한 긍정의 화신이 되어, 우리가 기적의 대열에 서 있다는 착각 속에 스스로를 빠져들게 하려고 발버둥치면서.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도 어떻게 이토록 허무한 결말을 맞아야만 할까! 검은 혈관, 머리카락 뭉치들, 병원에서 보낸 밤들, 엄마의 고통. 이 모든 것은 대체 뭘 위한 것이었나!"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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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8-1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는 앙뚜아네트 만큼이나 공감 능력 제로인 놈들입니다.

꼼쥐 2022-08-12 17:14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습니다. 서민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약간의 온기를 담은 인간성마저 없다는 건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런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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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 고기를 낚듯 작가는 단어와 문장을 낚는다. 그것은 경험을 낚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가 건져 올린 단어와 문장들은 삶의 경험을 채색하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혹은 가까운 이가 들려주는 가벼운 농담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쓰고 다듬을 이야기의 경험을 추리거나 선별하고, 선택된 경험에 맞는 단어와 문장을 고르는 게 작가의 일인 셈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선택한 몇몇 단어와 문장들로 자신의 삶 전체를 표현할 수도 있겠다는 꿈을 꾼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초라하지도 그렇다고 엄청 대단하지도 않다는 걸 알 만한 나이가 되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닫힐 때, 우리는 홀로 앉아 무언가를 써야 합니다.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혹은 나 아닌 것에 대하여, 너 아닌 것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이 아닌 것에 대하여."  (p.64)


작가 황경신의 글을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작가가 쓰는 문장의 리듬을 좋아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리듬과 작가가 살아온 삶의 리듬이 어느 정도 공명을 일으키고, 같은 파장으로 진동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도 아닌 산문에 무슨 리듬이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프로 작가의 글은 대부분 오르내림과 길고 짧음의 일정한 호흡이 존재하고, 그 호흡이 나와 맞지 않거나 나의 호흡이 작가의 호흡을 따라가지 못할 때 억지로 책을 읽는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겨울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조용조용 날려 보내고 있었다. 네가 살아 있다면, 너는 또 한 번의 봄과 재회할 것이다. 인연과 마음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 남쪽과 북쪽은 재회할 것이다. 너는 눈을 감고 천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해 여름의 소원을 다시 한 번 빌었다. 지금은 속절없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듭 되풀이되고 차곡차곡 모아져야 할, 지난하고 지극한 소원이었다."  (p.180)


황경신 작가의 신간 <달 위의 낱말들>은 '여는 글'에 이어 1. '단어의 중력', 2. '사물의 노력'의 총 2부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내리다, 찾다와 같은 동사 11개와 선택, 미래, 연민, 컴퓨터 등 27개의 명사를 건져내어, 자신이 선택한 단어와 관련된 각각의 경험과 느낌을 적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 듯한, 작가와 독자라는 이질적인 경험의 장에서 존재하는 두 부류에 있어 작가의 도구인 낱말을 매개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독자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지 않을까 싶다.


"어느 적막하고 쓸쓸한 밤, 당신이 그리워 올려다본 하늘에 희고 둥근 달이 영차 하고 떠올랐다. 달은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달의 표면에 달을 닮은 하얀 꽃들이 뾰족 솟아 있었다. 썩은 열매의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달로 날아가, 꼬물꼬물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고 꼬잎을 여는 중이었다. 터지고 쫓고 오르는 것들, 버티고 닿고 지키는 것들이 거기 있었다. 뭔가 다른 것이 되어, 말랑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예쁜 것이 되어."  (p.5 '여는 글' 중에서)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작가의 글이 전에 비해 무겁고 깊어졌다는 것이다. 문장의 리듬을 중시하는 작가였기에 의미와 깊이보다는 팔랑팔랑 가볍더라도 입에 착착 붙는 리듬만 살아 있다면 그저 좋아했을 듯한데, 이제는 문장의 깊이와 의미 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늘은 내내 어둡고 간간이 비가 내린다. 설령 대단치 않은 것들도 그 너스레가 너무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게 되는 책이 있고, 가볍고 평범한 것들로부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깊은 의미를 던져 주는 까닭에 날이 새는 줄도 모른 채 빠져들게 되는 책이 있다. 황경신 작가의 글도 달이 차는 것처럼 봉긋 살이 오르는 듯하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고 오늘은 달을 보기는 어렵겠다. 작가가 보았던 희고 둥근 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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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든 국가든 위기에 대응하는 자세를 보면 그 국가나 개인의 미래를 알 수 있다. 또한 주변국이나 주변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지, 한마디로 신뢰할 수 있는 국가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개인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위기에 직면한 한 국가가 지도부에서부터 지방의 촌부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대응 전략도 없고, 지휘 체계도 없이 허둥대기만 한다면 그 나라의 미래란 결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부실한 대응의 저변에는 '설마' 하는 안일한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위기 대응 실패에 대한 이런저런 변명이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내린 기록적인 강수량도 문제였지만 그에 대응하는 대통령과 서울시장의 자세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국민 대부분이 느꼈을 무정부 상태의 혼란은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목도했던 대통령의 부재로 인한 위기 대응 중앙 컨트롤타워의 느슨함, 지도부의 미흡한 역량 등은 무고한 생명의 희생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결국 정권의 몰락을 부추기는 데 하나의 축이 되었었다.


박근혜 정권 시절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대통령이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물었던 어이없는 현장을 우리는 이번 수재로 3명이 목숨을 잃었던 신림동 침수피해주택 사고 현장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입에서 다시 듣게 되었다. "왜 일찍 대피하지 못했나?" 하는 공허한 질문은 마치 다른 종의 사람들에게 하는 형식적인 인사말처럼 들렸으며 과거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서울시장의 공허한 메아리도 다르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 "그동안 강남역 일대에 침수로 피해본 분들 안심하셔도 됩니다."라며 자신 있게 말하던 그는 강남역 일대의 침수 피해로 인해 자신의 말이 허구임을 증명하고야 말았다.


리더의 자질이나 역량은 끝없는 희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이나 서울시장은 국민 위에서 군림하려고는 하지만 그들을 받들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은 숫제 없는 듯하다. 이러한 자세로 직을 유지하려 한다면 국민 전체가 불행할 뿐이다. 그렇게 강조하는 법으로는 직에서 물러나게 강제할 방법이 없다면 스스로 그만두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지 않은가.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를 내리는 70% 이상의 국민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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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8-10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남은 침수가 성인 남자 목까지 차오를 정도면 하수정비를 제때 하지 않었던 거죠. 부자들이니 침수가 그들 삶에 타격을 가하지 않을 거지만.. AI를 대통령 시켜도 이 보다 더 잘 할 것 같습니다.

꼼쥐 2022-08-11 16:12   좋아요 0 | URL
AI가 아니라 허수아비를 세워 놓아도 이보다는 나을 듯합니다. 자택이 상황실이자 컨트롤타워라고 하니 앞으로는 쭈~ 욱 출근도 없이 자택에만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언론에 노출도 하지 않고.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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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대부분을 읽었다. 일부러 작정하고 전작 읽기에 나섰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우연찮게 그리 되었을 뿐인데, 그와 같은 우연도 하나의 경험 축에 드는지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 전반에 익숙하게 되었음은 물론 작가가 다루는 평범하지 않은 연인들(어쩌면 소수자에 가까운)의 삶과 사랑에도 특별한 거부감이나 저항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익숙함이란 언제나 반복에서 비롯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최근에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집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에는 표제작을 포함하여 총 9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1989년에서 2003년 사이에 쓴 작품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은 2008년 출간되었던 것을 리커버판으로 새롭게 찍어낸 것이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위해 기꺼이 엘비스 프레슬리가 되어주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러브 미 텐더'를 비롯하여 에쿠니 가오리의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선잠'등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우리 이웃의 이야기에서부터 작가만의 상상력이 지어낸 듯한 독특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들이 단편소설을 읽는 묘미를 더해준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인간.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은 미치도록 선량을 동경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불량에 이끌리고 그리하여 결국, 선량과 불량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평생 선량을 동경하고 불량에 이끌리면서 살아간다."  (p.61 '선잠' 중에서)


나는 단편집의 리뷰를 쓰는 일에 몹시 서툴지만 책에 실린 단편소설 '선잠'을 위주로 에쿠니 가오리의 세계를 펼쳐보기로 한다. 대학생인 히나코는 아내가 있는 연인 고스케 씨와 6개월 동안 동거했다. 시인인 고스케 씨는 팔리지도 않는 시집을 두 권이나 냈다고 한다. 아내가 친정에 가 있는 사이 히나코는 고스케 씨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순애보적인 사랑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스케 씨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고, 히나코는 이별 파티를 준비한다. 히나코는 알지도 못하던 신문배달원 토오루를 파티에 초대했고, 토오루는 여자 친구 대신 동생인 후유히코와 함께 왔다.


"나는 가 버린 여름을 떠올렸다. 토오루가 있고, 후유히코가 있고, 선잠처럼 혼돈스러웠던 여름. 자동차 운전면허를 딴 여름. 애정을 매장해 준 여름. 해 질 녘 바람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해 질 녘이라는 애매한 시간이 나는 좋다. 주부가 장 보러 가는 시간,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노는 시간, 장밋빛과 회색빛과 연푸른 빛이 한데 섞인 듯한 공기."  (p.98 '선잠' 중에서)


고스케 씨와 헤어진 후 히나코는 고등학교 3학년인 토오루와 사귀게 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스케 씨를 향해 있다. 고스케 씨의 꿈을 꾸고 고스케 씨의 반려묘가 되어 곁에 있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사랑의 열병을 호되게 앓고 난 후 히나코는 용기를 내어 고스케 씨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완전한 이별을 결심한다.


"나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람이 일순 내 속을 휩쓸고 가 버린 듯한 , 온몸이 텅 비어 버린 듯한 휑뎅그렁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 7월의 달밤 아래 확연히 드러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마치 내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여 사락사락 거품이 이는 논 한복판에 떨어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p.45 '선잠' 중에서)


우리는 어쩌면 일시적으로 소유했었지만 영원히 가질 수는 없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자신의 사랑을 통해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선잠'의 주인공인 히나코가 유부남인 고스케 씨를 자신의 연인으로 소유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영원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집착이란 다만 습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히나코의 여름처럼 우리도 역시 그런 여름을 통과하고 있을 테지만 히나코의 '선잠'처럼 혼돈스럽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에서 오는 쓸쓸함은 어쩌면 관계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진 허허로움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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