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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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보람과 충만함은 '살아 있음'에 대한 인지와 지속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의 도돌이표는 '살아 있음'에 대한 인지를 한없이 무디게 한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하나의 의무 혹은 남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많은 삶 중 하나(one of them)로 전락하고 만다. 죽지 못해 사는 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감각한 삶의 시간들이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것이다. '죽을 때 후회하는 00가지'라는 제목의 많은 책들은 그런 무감각한 삶을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임종 직전에 쓰게 되는 유서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삶을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 이른 나이부터 다짐한 이들이 간혹 보인다. 설령 어떤 커다란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삶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자신만큼은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잊지 않은 채 그와 같은 감각을 늘 새롭게 할 수단을 찾아 나선다는 건 우리 주변에 흔하디 흔한 보편적 인간의 삶과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너무나 빠른 시간 내에 삶의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는 까닭에 잠깐의 방심으로도 살아 있다는 자각은 한없이 무뎌지게 마련,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줄 마땅한 수단이 그들 주변에서 점차 사라진다는 게 그들만의 고충이라면 고충. 급기야 삶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줄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기에 이르는데...


<가벼운 나날들>, <위대한 한 스푼> 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설터의 시선이 암벽 등반가의 삶에 다다른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임스 설터의 소설 <고독한 얼굴>은 '실존 인물이었던 한 산악인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하고 편지를 비롯한 관련 자료를 열심히 찾아 읽은 다음, 이 남성적인 등반 세계의 명암을, 명뿐 아니라 암에 대해서도 특유의 남성적인 문체로 핍진하게 그려냈다'(p.284)는 번역자의 평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실존했던 한 산악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삶의 긴장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수단으로써 암벽 등반보다 더 적합한 게 또 있을까.


소설은 주인공인 버넌 랜드가 캘리포니아의 어느 교회 지붕에서 게리와 함께 일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학을 1년 다닌 후 그만두고 군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이십 대 중반의 랜드. 지붕에서 미끄러진 게리를 구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랜드의 성품과 소설의 향후 전개를 어렴풋이 짐작한다. 멕시코 여자와 동거하고 있던 랜드는 그녀의 열두 살짜리 아들과 암벽등반을 떠나게 되고 정상에서 오랜 친구인 캐벗과 조우한다. 캐벗은 그에게 프랑스 샤모니에 가보라고 권한다. 랜드는 캐벗의 권유를 받아들여 겨울을 나기에 충분할 만큼의 장작을 패서 쌓아 두고는 멕시코 여자를 떠난다. 소설은 이제 프랑스의 알프스 마을 샤모니와 인근의 장엄한 봉우리들을 무대로 본격적인 등반의 세계를 보여준다.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등반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식으로도 그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경의였다. 그는 기꺼이 등반에 경의를 표했다. 은밀한 기쁨이 그를 채웠다. 누구도 질투하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p.174)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던 랜드는 드뤼 서벽을 악조건 속에서 친구와 함께 등반하고, 그 과정에서 얼굴을 다친 친구를 격려하여 정상에 서게 하였으며, 때로는 동행도 없이 혼자 등반을 감행하기도 하였고, 산에서 조난을 당한 이탈리아 산악인을 구하기 위해 구조대를 결성하여 그가 개척했던 드뤼 서벽을 다시 오르기도 한다. 그에게는 등반이 삶의 전부였다. 그를 산으로 이끌었던 건 어떤 산을 올랐다는 명예나 자존심 혹은 다른 어떤 산악인보다 먼저 오르겠다는 지독한 경쟁심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등반 과정에서 느끼는 삶의 긴장과 희열로 인해 산으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였다.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를 통해 산악인의 삶과 대자연의 침묵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등반이라는 하나의 축과 랜드라는 인물의 개인적 서사(난잡한 성관계)라는 두 축으로 전개된다. 산을 오르지 않을 때에 그를 돌보아준 사람은 그와 사귀었던 여자들이었다. 그가 성관계를 맺었던 여자들은 루이즈, 카트린, 콜레트, 시몬, 수전 등으로 다양했고 그들 중에는 임신을 한 여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가 될 생각이 없다며 낙태를 권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그녀의 곁을 떠난다.


"랜드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점잖고 다정했다. 넌더리가 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를 따라다니고, 둘이 쓴 비용을 그녀가 내게 하는 것에 넌더리가 났다. 그녀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p.216)


이 소설의 주인공인 랜드의 모델이었던 실존 인물은 게리 헤밍으로 알려져 있다. 알프스의 프티 드뤼 서벽에서 두 명의 독일인 등반가가 조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초인적인 등반으로 가사상태에 빠진 조난자들을 구했던 게리 헤밍. 당시의 상황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고, 조난 상황 발생 후 일주일 만에 조난자들을 구조했던 그의 영웅적인 구조 등반은 '샤모니의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잡한 성관계와 마약 과다복용, 반전사상과 사회적 부적응, 정신착란과 우울증 등으로 그는 결국 36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물론 이 소설의 결말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다만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라고 썼던 게리 헤밍의 글처럼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신이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시시각각 인식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지 않은 상태를 겨우 유지하며 잉여의 삶을 붙들고 있는 듯한 현대인들에게 버넌 랜드의 감각적인 삶은 '살아 있다는 것은 과연 그런 것이로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그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의문을 동시에 던져준다. 우리 모두는 지극히 윤리적인 것을 선망하는 동시에 지극히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그 어디쯤에 위치하는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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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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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아버지의 기일이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밉고 싫었던 사람인데 당신의 모든 것을 간병인에게 맡긴 채 하물며 눈을 뜨는 것조차 힘에 겨워 내내 숨을 몰아 쉬던 나의 아버지. 삶은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는 것임을 푸르렀던 당신의 청춘 시절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자면 이랬다. 물려받은 땅과 재산을 이래저래 모두 탕진한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 산골짜기의 탄광지대로 이사를 했고, 그때부터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형들과 누나들은 직장과 학업을 핑계로 도시로 나가 살았고, 할머니는 지인의 농사를 도우며 1년의 반 이상을 떨어져 살았으며, 집에는 나와 어린 여동생 그리고 엄마와 아버지만 남았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엄마와는 달리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언제나 술에 취해 있었고, 그때마다 몇 명 남지도 않은 가족들에 대한 폭력이 이어지기 일쑤였다. 아버지를 피해 달아났던 나와 여동생은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마을 아곳저곳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런 생활에 신물이 났던 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고, 결국 나는 중2 겨울 방학과 함께 형과 누나들이 있는 도시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누구보다도 증오했던 내가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려 노력했던 계기는 아버지가 6.25 참전 용사 국가유공자로 등록하였을 때였다. 부자간의 대화라고는 딱히 없이 살았던 까닭에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20대 초반의 아버지가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그 치열했던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겪었을 충격과 공포가 아버지를 결국 알코올 중독에 이르게 했고, 술을 통해서도 지울 수 없었던 그날의 기억으로 인해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했던 것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국가유공자라는 허울뿐인 명예가 우리 가족의 비극을 얼마나 보상할 수 있을까.


나는 김승섭 교수의 저작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는 내내 국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2017년 5월 24일 육군보통군사법원은 사적 공간에서 업무와 관련 없는 합의된 상대와 맺은 A대위의 동성 간 성관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고, 이를 규탄하는 긴급 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 김승섭 교수는 집회 참가자들을 향한 자신의 연설 말미에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p.219)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아버지는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았던 게 아닌가 싶다. 그때의 참혹했던 기억은 알코올 중독으로, 그리고 알코올성 치매로 이어지면서 당신을 괴롭혔을 테고, 벗어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는 가족에 대한 가혹한 폭력으로 변질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를 책임져야 할 국가는 참으로 멀기만 했고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아버지의 화와 분노는 오롯이 내 가족들에게 지워진 천형처럼 여겨졌었다.


"한국사회에는 그동안 여러 참사가 있었습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까지요. 저는 세월호 생존 학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 발생했던 여러 참사들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놀라울 만큼 기록이라 할 만한 게 없었어요. 간혹 발견되는 신문기사 말고는 참사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에 대해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도 없었겠지요."  (p.166)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6.25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왜 당신의 아버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것도 아무런 죄가 없는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질병을 노출시켰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다만,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전체가 아버지를 증오했으며, 돌아가신 지 1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가족들의 증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애써 애증의 그림자로 조금씩 변모하고 있음에 안도하고 있다고.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  (p.7 '들어가며' 중에서)


추분도 지난 계절은 이제 제법 가을빛을 띠고 있다. 아버지의 기일 즈음에 읽었던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어쩌면 그 책으로 인해 나는 우리 가족이 떠안아야만 했던 비극의 실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까이 있어야 할 국가는 너무나 멀리 있었고, 개인의 비극은 개인에게서 그치지 않고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무심한 상처와 그늘을 남기고 말았다. 아픔은 여전히 길이 되지 못한 채 갈팡질팡 혼돈의 세계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기록하고 반성하지 않는 아픔은 그 아픔이 누군가에게 전가되고 확대될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 가을에 책을 통하여 다시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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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대가 존 맥스웰이 제시하는 리더의 조건 21가지 중에는 '소통'과 '경청', '문제 해결 능력' 등이 나온다. 문제 해결 능력의 부제는 '절대 문제를 문제로 만들지 말라'는 것인데, 작금의 대한민국 상황과 어찌나 잘 들어맞는지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신냉전 체제의 정 중앙에 놓인 대한민국에서 리더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요구되는데 역대 가장 무능하고 덜 떨어진 자가 대통령으로 앉아 있으니 그야말로 사면초가. 게다가 그는 자신의 무능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라면 문제가 아닌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도 전 정부에서 이뤄진 남북정상회담이 '정치적 쇼'라고 했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건만 대통령으로서의 책무를 망각한 채 남과 북의 갈등을 조장하고, 긴장관계를 조성하며, 한반도를 둘러싼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게 과연 이 나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란 자가 할 짓인가 말이다.


남과 북의 대치는 대중국 수출을 어렵게 하고, 환율 급등의 요인이 되며, 이로 인하여 수입 물가가 상승하고 이는 곧 서민 생계의 위협 요인이 된다는 건 고등교육을 이수한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경제 상식이 아니던가. 대통령은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지고 있음에도 그는 남과 북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대외 경제를 악화시킴으로써 반헌법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대한민국의 환율은 1달러에 1390원을 넘어 1,400원에 육박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많은 경제학자들은 연말까지 1,500원 이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신호는 제2의 IMF 금융위기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국민적 불안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안정시키고 대한민국 경제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하고 현 정부가 집권하면서부터 시작된 대중국 적자 구조를 해소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일임에도 전 정부를 헐뜯음으로써 자신의 무능을 가리려 하는 이런 한심한 작태를 언제까지 보아야 하는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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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 - 오늘 치는 파도는 내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딱 한 번의 파도니까
김은정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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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이 현재 근무하고 있는 현재의 직업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드러나곤 한다. 예컨대 운동선수가 우연히 했던 짧은 인터뷰에서, 사업가가 취미로 그린 한 장의 그림에서, 혹은 정치인이 쓴 몇 줄의 일기 등에서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한 사람의 솔직한 인생관을 확연히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리 감추고 포장하려 해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동안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살아갈 수는 없는 법, '설마' 하는 짧은 순간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한 사람의 전부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가끔 사는 것이 고되게 느껴진다. 그럴 때 추천하고 싶은 것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다. 어떤 것을 열렬히 좋아해 본 사람의 인생은 이전의 인생과는 달라진다고 믿는다. 애호하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세계가 있다. 무언가를 좋아함으로써 새롭게 보이는 세상, 세밀한 결을 손으로 천천히 살펴야만 비로소 보이는 작은 세계가 있다. 내게는 그것이 그림이었지만, 당신에게는 그것이 음식일 수도, 재즈일 수도, 어쩌면 연극이거나 테니스일 수도 있다. 좋아하는 것에 한껏 마음을 내어 주는 일, 그 일은 당신을 더 먼 세계로 데려가 줄 것이다."  (p.235~p.236)


홍콩에서 라이센스 캐릭터 비즈니스를 30년간 이어오며 작가로, 사업가로, 아트 콜렉터로, 혹은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1인 다역의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김은정 작가의 에세이 <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는 230여 쪽의 그닥 두껍지 않은 분량의 책이다. 나는 추석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도 전 어느 날 쫓기는 듯 후루룩 읽어놓고도 짧은 리뷰를 쓰는 데 애를 먹었다. 어떤 식으로 서두를 시작해야 할지, 어떤 내용으로 작가의 인생과 나의 경험을 한 데 엮어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고 난 지금, 겨우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아 글을 쓰려니 생각은 중구난방 사방으로 흩어질 뿐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이 없다고, 삶이 너무 짧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살아가는 걸 보면 진정 인생이 한 번뿐임을 알고 있는 사람 같지 않다. 일 년 뒤면 기억도 하지 못할 일 때문에 소중한 지금을 허비하고, 마치 영원히 삶이 계속될 것처럼 시간을 낭비한다."  (p.85)


'즐기는 사람은 더 오래, 더 멀리까지 갈 수 있다', '지붕은 해가 맑을 때 수리하는 거야', '천천히 뛰어들고 천천히 떠오르기', '삶에서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를 좋아함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작은 세계'의 각 장의 소제목에서 읽히는 것처럼 이 책은 작가의 삶 전반을 다루는 자전적 에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KBS 기자였던 부친과 임대업을 하던 모친 덕분에 어렵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 자랐던 작가는 어머니의 잘못된 빚보증으로 인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결국 작가는 장학금을 주는 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고, 엄격하고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회사에 취직하여 같은 직장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다고 한다.


삶에서 주어지는 깨달음은 대부분이 후불제인 까닭에 시간과 노력을 통한 경험이 투입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작가가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자신이 경험했던 많은 일들을 통하여 그때마다 스스로 깨우쳤던 많은 가르침과 조언들을 작가 자신에게만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의 어깨를 딛고 서 더 멀리 내다볼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산소통의 4/5 정도를 쓰면 쓰면 다시 물 위로 올라오기 시작해야 한다. 올라가는 데도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가 너무 올라가기 위한 산소를 남겨 두지 않는 다이버처럼 사리 않았나 생각했다. 돌아갈 힘을 남겨 두지 않고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았나. 그래서 너무 지쳐 버리지 않았나. 어쩌면 이렇게 다쳐 버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었다."  (p.140)


연휴 뒤의 한 주는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하루하루가 어찌나 길고 고단하게 느껴지던지 퇴근과 동시에 풀썩 다리가 꺾이곤 했다. 휴식이 없는 삶은 이쯤에서 삶을 마감하겠다는 뜻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적당한 노동과 노동의 피로를 풀어줄 적정 시간의 휴식을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핑계 같지만 진작 읽었던 이 책의 리뷰를 이제야 마감하는 것도 그동안 내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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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우리는 '상식'이라는 모자를 가볍게 눌러쓴 채 생활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크고 작은 욕심의 바람이 불어오지만 그때마다 상식의 모자가 벗겨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 주는 것은 '양심'이라는 턱끈입니다. 말하자면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주 작은 욕심에도 상식의 모자를 쉽게 벗어던진다는 사실입니다. 양심의 영역에 속하는 많은 것들 - 이른바 정의, 연민, 배려 등 -은 우리들 각자가 쓴 상식의 모자를 통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평가되거나 드러나게 됩니다.


'공정과 상식'을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었던 현 정부의 지난 몇 개월을 곰곰 되짚어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정직한 집안에서는 굳이 '정직'을 가훈으로 내세우지 않는 것처럼 현 정부는 태생적으로 '공정과 상식'은 전혀 없거나 많이 부족한 상태였던 까닭에 그와 같은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었음이 점점 명확해지는 요즘입니다. 말하자면 공정이니 상식이니 하는 것들은 소나 줘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현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상식의 모자는 양심의 턱끈에 의해 지켜지는 까닭에 현 정부의 구성원들은 양심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대선 전에는 국민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었거나 알면서도 눈 감아 준 것일 테지요.


현 정부의 과오를 지적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기에 첨언하자면 이렇습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욕심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한다는 것입니다. 뭔 일만 터지면 거짓말 일색으로 언론에 궁색한 변명을 하는 정부의 태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지요. 언젠가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들의 악행은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처벌을 받고야 말 것입니다.


바쁘고 번잡했던 명절 연휴 이후에 맞는 조용한 주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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