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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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이성이 아니라 다분히 감정에 의해 초래될 때가 많다. 이성적으로는 그들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수백 번 생각할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냥 싫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나는 그 시발점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분리라고 본다. 어렸을 때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섞임이 자연스러웠더라면 어른이 된 후에도 그런 습성이 지속될 확률은 상당히 높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노출이 극도로 제한되면 될수록 그들에 대한 차별이나 분리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낯선 사람에 대한 회피나 소외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스물세 살, 나는 결국 꿈을 이루었는데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엄마는 갑자기 쓰러져 열흘간 중환자실에 혼수상태로 누워 있다 돌아가셨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열흘간 중환자실 앞을 지키며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신께 기도했다. 부디 엄마를 살려달라고. 의사가 엄마의 머리맡에서 사망선고를 내릴 때 나는 더이상 내 인생에서 신을 믿는 일은 없을 거라 결심했다. 내 남은 시력은 겨우 엄마의 형상만을 감지했다. 나는 손을 뻗어 엄마를 만졌다. 손끝으로 영혼이 사라진 차가운 살결을 더듬어보았다. 단 하루라도 이 사람과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다."  (p.102~p.103)


조승리의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화가 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치솟는다. 그것은 다수의 비장애인 속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의 비애인 동시에 공평하지 못한 신의 손길 때문이기도 하다. 15세에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직업인 마사지사를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가 있는 고향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써내려 간 이 책은 때로는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화를 돋우기도 한다.


"출산 당시 생활고에 시달렸던 엄마는 나를 보육원에 맡기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엄마는 하루만 더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싶었다. 다음날 또 하루만 더.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보육원에 보낼 생각이 점차 사그라졌다. 그렇게 60일이 지났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먹고 자랐다. 내 어머니도 가슴이 내려앉을 것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지켜냈다. 그리고 장애를 판정받은 날, 엄마는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고 가슴을 쥐어짜며 통곡했다."  (p.227)


나는 사실 작가의 이름만 들었을 때는 작가가 남자인 줄 알았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한 번 읽어볼 만한 괜찮은 책이라는 평을 종종 들었지만, 남성 시각장애인이 마사지사로 일하면서 경험하고 깨달았던 것들을 그저 그렇게 엮은 책이겠지, 하는 지레짐작으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계속되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나는 사실 다른 무엇보다도 작가가 여성이라는 데서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책의 내용만 좋으면 됐지 작가의 성별이 뭐 그리 중요할까 싶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의 선입견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시각장애가 있는 여성이 마사지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당당히 드러내면서 자신의 애환을 글로 쓴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라고 믿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환히 웃으며 시술이 끝난 노인을 배웅했다. 뉴스에서는 늘어난 핼러윈 희생자들을 보도했다. 나는 어제의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내 기준으로 당신을 판단하고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미안합니다. 진실로 반성합니다.' 나는 내가 겪은 고통을, 희생을, 인내를, 모두가 겪길 바라는 졸렬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간절히 바란다. 밤새워 놀다 지친 그녀가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는 일요일이 되었기를."  (p.193)


모든 게 평안할 듯 보이는 우리네 삶은 지랄맞아 보이는 순간들과 이따금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겹치고 겹쳐 잘 꾸며진 한 편의 드라마가 되어 추억이라는 책장 속으로 사라진다. 그 지랄맞았던 순간들이 쌓여 누군가의 책장 속에서는 축제가 되고, 또 누군가의 책장 속에서는 아득한 절망이 되기도 한다. '10대 때는 최고의 유작을 한 편 남기고 서른 살 전에 요절하는 게 꿈'이었으나 지금은 '무병장수하면서 누가 봐도 호상이라고 할 때까지 글을 계속 쓰는 게 꿈이자 목표'라는 작가의 희망은 짭조름한 눈물로 간을 맞춘 듯 독자들의 입맛에 착착 감긴다. 2024년 12월 3일, 뜬금없는 계엄으로 전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근 6개월여의 시간 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도록 했던 그 지랄맞은 시간이 저물어가고 있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기를 나는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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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투표 이틀째,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투표소에 들렀다. 사전투표 첫날이었던 어제에 비해 투표 열기는 다소 주춤해진 모습이었다. 어제 서둘러 투표를 했던 사전투표 선배(?)들의 조언 아닌 조언 '지금 가면 1시간은 기다려야 할 거야.'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던 나는 투표소에 도착하기 전부터 각오를 단단히 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점심을 굶거나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울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기줄은커녕 도착하자마자 신원 확인과 함께 투표지를 발부받았음은 물론 곧바로 빈 기표소에 입장할 수 있었다. 일사천리로 투표를 마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은 듯했다. 길게 대기줄을 섰던 어제의 경험 탓에 많은 이들이 점심시간을 피했거나 본투표로 날짜를 변경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화요일에 있었던 대통령 후보자 3차 TV토론에서 이준석 후보의 저급한 발언으로 인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물론 그러한 말들의 대부분은 이준석 후보를 비난하는 것들이었다. 당연한 이치였다.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던 TV토론에서, 그것도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심야시간도 아닌데 그와 같은 저열하고 납득하기 힘든 표현으로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트렸다는 건 백 번 양보해도 이준석 후보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되짚어봐야 할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나 싶다. '이준석'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동안 윤석열과 이준석을 경험함으로써 소위 명문대 출신자를 선호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에 대해 한번쯤 반성해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한 사회의 지도자를 선출함에 있어 학벌은 그다지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겸허히 수용하고 인정해야 할 때가 아닐까. 좋은 품성과 인격, 그리고 좋은 인재를 발굴하는 안목, 이러한 것들에 더하여 학벌마저 좋다면 그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만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여 학벌을 1순위로 놓는 습관은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오히려 고졸 출신 대통령이라고 그렇게 폄훼하고, 놀리고, 깎아내리려 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발자취는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가.


자랑 같지만 나는 중학교 입학할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다. 형제도 많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내가 학업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학금밖에 없었다. 나의 선친은 나뿐만 아니라 형들에게도 국민학교 졸업과 동시에 학교를 그만 다니고 돈을 벌으라 하셨고, 아버지 몰래 가족이 힘을 합쳐 어찌어찌 중고등학교를 보낼 수 있는 여력도 한두 사람에게 그쳤던 까닭에 막내나 다름없었던 나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아주 먼 과거의 일이지만 오직 앞만 보고 달렸던 나의 성장기가 나 개인에게는 옳았을지 몰라도 사회 전체로 볼 때는 결코 유익한 일이 아니었음을 지금은 잘 알고 있다. 감수성이 풍부한 그 어린 시기에 오직 자신의 생존만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이웃이나 사회를 돌아볼 여유가 없이 성장한다는 건 우리 사회가 지극히 이기적인 한 인간을 사회 구성원으로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나는 지금도 내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는 걸 자랑으로 떠벌리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부끄러운 과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준석 후보는 다만 공부만 잘하는, 성숙하지 못한 인간일 뿐이다. 결국 그가 우리 사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꿈꾼다는 건 이준석 본인에게도, 우리 사회 전체에게도 불행한 일이 될 뿐이다.


어제는 저녁나절에 외출을 했다가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났었다. 지인을 만나고 헤어진 후 밖에 나와 보니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 차가 있는 주차장까지는 꽤나 먼 거리. 마음 같아서는 비를 맞으며 느긋하게 걷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 빗속을 빠른 속도로 달려 차에 도착했을 때는 어깨가 다 젖어 있었다. '우르를 쾅!' 천둥이 치는 요란한 저녁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와 달리 너무나 차분하고 조용하다. 그렇게 주말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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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다시 시작 - 잠깐의 멈춤,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Begin Again Series 1
정소령 지음 / 그래더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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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삶에 글쓰기를 편입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튜브 영상을 볼 시간은 있어도 편한 시간에 글을 쓰고자 노트를 펼친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익숙함에서 오는 차이이기도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글쓰기를 해본 적 없는 사람에게 글쓰기란 어느 날 오후, 그림 그리기에 젬병인 내가 '그림이나 그려볼까' 하면서 스케치북을 펼치는 것만큼이나 막막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써야 할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어떻게 끝을 맺을지 등 머리를 어지럽히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어렵게 만드는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글쓰기의 효과 또는 글쓰기의 혜택일 것이다. 말하자면 글쓰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이익이나 혜택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그러한 혜택이 들인 노력이나 시간에 비해 월등히 크다는 확신만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처럼 글쓰기를 주저하거나 회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예컨대 글쓰기로 인하여 삶의 활력을 얻게 되었다거나 전에 비해 여유 시간을 더욱 건전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혜택에서부터 자신이 쓴 책 덕분에 큰돈을 벌게 되는 것과 같은 확실한 효과가 눈으로 증명되지 않는 한 마냥 주저하던 글쓰기를 무작정 시도할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란 대체로 진입장벽이 제법 높은 분야이기도 하다.


"글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치유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나누는 과정이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매끈한 이야기만 글이 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울퉁불퉁한, 지극히 현실적인 희로애락이 내 글의 존재 가치가 된다."  (p.68)


우리의 뇌는 사실 추상적이고 현실을 과하게 부풀리는 경향이 있어서 하나하나 글로 써보지 않으면 조금 힘겨워 보이는 대부분의 일들을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섣불리 예단하게 된다. 불안이나 슬픔의 원인도 글로 써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내면과 직접 대면하지 않으면 치유나 위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정소령의 에세이 <쓰기로 다시 시작>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글쓰기의 동인(動因)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글쓰기 관련 서적이 차고도 넘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거론하는 이유는 글쓰기는 단순히 그 효과만 강조해서는 글쓰기를 실천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글쓰기 관련 서적은 많지만 정작 글쓰기의 장으로 많은 이들을 불러들일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는 뜻이다.


"책이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겠지. 그때는 이 책에서 말한 것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왜 달라졌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책을 쓸 당시와 지금 사이에 많은 시간이 지났고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해야지. 성장하는 중이라고, 나는 생명 없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서 계속 달라지고 있다고. 알 수 없는 미래의 나를 두려워하느라 지금을 쓰지 않는 겁쟁이가 되지는 않기로 했다. 지금도 그 마음을 간직한 채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한다."  (p.176~177)


'마케터로 살다가 엄마가 되면서 일을 그만뒀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정소령 작가는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자신을 이끈 순간들에 대해 꾸미지 않고 비교적 소박하게 그리고 얼버무리지 않고 또박또박 밝히고 있다. 자신 명의의 수입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학창 시절의 취미와도 같았던 글쓰기에 대해 생각했다는 작가. 책의 목차만 보아도 작가가 책을 읽는 독자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 글은 일상의 기록, 책은 인생의 단편 "나를 글에 담아보기로 하다.", 2. 나만의 정의, 표현, 생각 정리하기 "우리는 모두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다.", 3. 처음의 다짐을 놓지 않는 법 "누구나 어떻게 쓸지 방향을 잃을 때가 있다.", 4. 결국, 글과 책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 "함께 쓰고 읽고 느끼면 된다."


"이 책이 당신에게 닿아 글쓰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담아 써 내려간 책이니 말이다. 나의 쓰는 날을 탈탈 털어 담았다. 처음부터 잘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처음이 없으면 더 쉽게, 혹은 더 잘 쓰게 될 내일도 없다. 그러니 이 책을 덮으면 몇 문장이라도 쓰기 시작해보자. 글쓰기의 시작을 시작할 당신을 응원한다."  (p.227 '에필로그' 중에서)


나 역시 돈도 되지 않는 블로그를 십 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물론 돈이 목적이었다면 진즉에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는 영리를 목적으로 글을 쓰지 않는 까닭에 나의 생각이나 하고픈 말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 중 그 누구에게도 블로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가까운 사람이 나의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써야 할 말과 써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는, 이른바 자체검열의 과정이 이어지고, 그렇게 되면 글쓰기의 재미나 자유로움을 쉽게 잃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소통하며 강산이 변하는 세월을 겪어왔던 것이다. 정소령 작가의 <쓰기로 다시 시작>을 읽는 내내 길다면 길었던 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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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선선하던 날씨는 원래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듯 다시 더워지고 있습니다. 날씨가 이렇게 더워지고 습도마저 높아지는 여름철이면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쾌지수'가 그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누가 일부러 기온을 올리거나 작심하고 습도를 높인 것도 아닌데, 어리석게도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괜스레 짜증을 내거나 잦은 화풀이를 하면서 신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같은 인간에게 되돌려주곤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원래의 고통(무더위)에 상응하는 짜증을 타인으로부터 자연스레 건네받음으로써 두 배 혹은 세 배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여름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이나 명상 서적 등에서는 분노 혹은 화의 원인을 다양한 데서 찾고 있는 듯합니다. 스트레스, 인간관계의 갈등, 좌절, 불공정한 대우, 잘못된 인식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타인의 행동에 화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화를 낸다는 건 자신이 속한 사회와 사회 구성원의 행동 양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입니다. 무지하거나 어리석다는 뜻이지요. 어제 대구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민주당 당직자들의 선거운동을 방해하다가 이를 제지하는 민주당원들을 자신의 차량에 매달고 무모하게 도망침으로써 자신의 내부에 쌓인 화를 풀어보려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20대라는 얘기를 듣고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세상에 대해 미숙하고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나이니까요. 그렇게 법적인 처벌을 몇 번 받다 보면 그도 세상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스스로 깨닫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는 '정치깡패'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심심찮게 퍼져나가곤 했습니다. 선거철마다 정치권에서 동원한 깡패들을 일컫는 말이었지요. 그들은 주로 야당 후보의 연설 현장을 찾아 깽판을 치고 연설을 듣는 청중들을 쫓아버리곤 했습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던 시절이었지요. 윤석열 정부가 통치했던 지난 3년 동안 정부 여당은 국민들에게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사실을 주입하려 애썼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부지법을 폭력으로 점거하기도 하고, 어제처럼 자신의 차량을 이용하여 막무가내식 폭력을 행사하는 이도 나타났던 게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치깡패'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걸 원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조승리 작가의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고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미친 정치인들이 가자지구의 민간인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고, 사람이 다칠 것을 뻔히 알면서 사람을 매달고 차를 내달리는 이런 지랄맞음이, 이런 지랄맞음들이 쌓여 이 세상을 축제의 현장처럼 시끄럽게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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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좋았던 시간에 - 김소연 여행산문집
김소연 지음 / 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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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성향이나 취향과도 관계가 있을 터이다. 옷이나 가방을 고를 때도 나의 기준은 언제나 '튀지 않고 무난한 것'으로 귀결된다. 영화를 고를 때도 '액션 대작'이라거나 '이제껏 볼 수 없었던'과 같은 지극히 과장된 표현이 들어가면 잘 끌리지 않는다. 그런 까닭인지 공포영화는 거의 보지 않거나 기피하는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렇게 굳어진 취향은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내가 즐겨 읽는 책의 서사마저 결정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자극적이지도 않고, 세상 어디에나 있을 듯한 평범한 이야기를 읽고 또 읽는 이유를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남들이 보면 세상 진부한 이야기라고 타박할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를, 이제 막 세상을 배우는 어린아이도 아닌 내가, 지금도 여전히 그런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은 줄잡아 서너 권쯤은 읽은 듯하다. 시집이 아닌 산문집은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 나는 어쩌면 시인이 펴낸 산문집은 거의 다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한 시인에 대한 탐사 아닌 탐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시인이 쓴 산문집 <마음사전>을 우연히 읽은 후였다. 한 단어에 담긴 묘한 뉘앙스를 매우 예민하게 포착하여 이를 자신의 생각에 곁들여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마음사전>은 책으로서도 충분한 가치를 지녔지만, 나는 그 책을 읽은 직후의 소감으로 저자인 김소연 시인이 매우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었다. 그처럼 섬세한 감각을 지닌 작가의 책이라면 작가가 쓴 다른 어떤 책을 읽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어림했었다.


"솔방울 옆에는 달팽이 껍질이 있다. 달팽이 껍질 옆에는 도토리가 있다. 마모된 사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단지 사물들이 아니다. 허리를 굽혀 내가 그것을 주워 들었을 때의 내 감정들이 그것들을 바라볼 때면 재생이 된다. 그것들은 마치 과거의 나에게 가끔 안부를 건넬 수 있는 우체국 같다. 그 여름은 어땠니. 누군가 내게 물어올 때에 빙그레 웃으며 보여줄 수 있는 대답의 일부이다."  (p.225)


내가 이번에 읽은 <그 좋았던 시간에>는 작가가 쓴 여행 산문집이다. 어떤 일정한 기간에 특정 지역을 방문하여 쓴 산문집이 아니라 작가가 방문하였던 여러 도시와 그곳에서 느꼈던 시인의 감성이나 사진들이 책의 지면을 메우고 있다. '경주 노서동 사거리 봉황대 앞에서 살았'던, '관광지가 고향'이었던 소녀는 이제 관광객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셈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작가가 경험하고 쓴 여행의 기록이지만 2부에서 선보이는 일기 형식의 기록은 특별하다. 인도에서 보낸 두 달여의 기록이 날짜와 함께 선보이고 있다.


"인드라간디 공항의 새벽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다. 두렵던 마음이 안도감으로 바뀌자 무거운 배낭도 가볍게만 느껴졌다. 아홉시 반에 로비에서 만나자던 인도인 가이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아침부터 파하르 간즈를 헤매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고서 길을 찾는다는 게 의미가 없다는, 쉼터 주인의 말씀이 백번 옳았다."  (p.126)


소박하고 평범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이 읽는 특별한 이야기로 전환되는 매개는 작가의 예민한 감각이다. 나른하고 평범한 시간 속에서 특별하게 빛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 결코 변하지 않는 듯한 풍경 속에서 나만의 특별한 감성으로 채색할 수 있는 능력,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을 내가 원하는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 등이 평범한 이야기를 누구나 읽고 싶은 특별한 글로 재탄생하게 하는 비법이다. 나는 사실 김소연 시인의 그러한 감각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려고 수첩을 꺼냈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일기에 쓸 말이 하나도 없어서 수첩은 펼치기만 했다가 다시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나는 세사르 바예호에 대하여 생각했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라던 그의 문장을 떠올리고 그런 문장이 어떤 순간에 태어났는지에 대하여 상상해보았다. 더없는 햇살 아래에서 나 말고도 그런 식으로 벤치에 누워 있었거나 앉아 있었던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던 것도 같다."  (p.63)


기신기신 흐르는 시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건 여행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여행이 '우주를 독식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자신의 집에서건 여행지에서건 우리가 소비하는 시간은 뭐 그리 다를까마는 우리는 다만 자신의 집보다는 여행지에서 몸으로 감각하는 느낌의 강도가 크게 상승할 뿐이다. 우리가 시인의 여행 산문집을 읽는 까닭은 여행지에서의 시인은 평범한 사람이 느낄 수 없는 예민한 감각이 즉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시인의 특별한 감각이 그려내는 평범한 일상과 특별하지 않은 풍경이 나른한 나의 감각을 낯설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소박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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