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자국들 - 한하리, 첫 번째 이야기 낮이밤적 글모음 2
한하리 지음 / 보민출판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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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결국 수줍은 언어라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제 마음을 쉽게 내보일 수 없는 내밀한 언어. 어림짐작은 허용되지만 단 하나의 정답으로 결코 정의되지 않는 폭 넓은 언어. 시를 읽는 어떤 이의 마음도 시인의 마음과 동화될 수 있는 만능의 언어. 많지 않은 낱말과 문장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헤집어놓을 수 있는 마법의 언어. 어쩌면 시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시를 읽는 내가 시인이 생각하는 그쪽으로 기꺼이 건너가지 않는다면 해독불가의 암호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과거 어느 시점의 나는 무척이나 시를 좋아했었다. 의미보다는 감정으로 먼저 전달되던 시어간의 밀접한 조합이 좋았고, 노랫말처럼 기억되던 시의 리듬이 좋았다. 그러므로 시를 읽기 전에는 언제나 준비가 필요했었다. 책상 위에는 시의 여백을 닮은 정갈함이 놓여야 하고, 마음에는 새벽녘의 고요가 깃들어야 했다.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날에는 시를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읽은 시어가 하나하나의 낱글자로 읽힐 뿐 그것들이 사다리가 되어 시의 가슴에 닿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게 갖추어진 날에는 첫행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시인이 손을 내미는 그쪽 어딘가로 펄쩍 건너뛸 수 있었다.


비 냄새


비가 온다.

젖은 슬리퍼의 안쪽에

마침내 스러져 가는 내가 있다.

새로 산 우산에 당신의 손때가

안개처럼 자욱하다.

물 밖의 헐떡이는 구피는

내던져졌는가? 스스로 튀어나왔는가?

젖은 바닥은 과연 자유로운가?

자비 없이 돌발하는 아련한 향기에

물 머금은 비통한 오르가즘이 잉크처럼 번진다.


'지나온 감정의 시간들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쓴 기록'이라는 한하리의 시집 <감정의 자국들>은 그래서 더 깊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1부 '사랑 이전의 불안', 제2부 '겁 많은 사랑은 끝내', 제3부 '다정의 학습'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혹은 수많은 이별을 통하여 다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면서 애쓰고 노력하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게 크게 잘못되었음을 시인은 자신의 지난 기록이자 자신이 쓴 시를 통하여 자분자분 이야기하고 있다.


추억, 변곡


당신이 젖은 입천장을 더듬어가며

애써 기억해 낸 그날의 그 온도는

어쩌면 당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환상 덕에 당신이

다시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을 통해 사랑의 온기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의 온기는 단순히 확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내 가슴을 덥히고 한 걸음 한 걸음 다정한 인간으로 나아가게 한다. 한 토막의 미움을 지우면 그에 비례하여 한 토막의 사랑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는 온통 다정함이 넘치는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 쓰는 위로의 말, "어쩔 수 없었어"를 상처를 주기 위한 면죄부로 쓰지 말 것'이라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나에 대한 면죄부로 쓰였던 말, "어쩔 수 없었어"


6월의 마지막 주말. 장마가 쉬어가는 하늘엔 언뜻언뜻 흰구름이 번지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그늘 속으로 스며들었다. 삶은 시간의 거미줄에 갇혀 끝없이 파닥거리는 작은 몸부림에 불과하지만 오늘처럼 누군가의 시를 읽다 보면 또 이렇게 한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사방이 막힌 사무실에서 나는 소리를 죽여 자유를 외친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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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시간에 침대에서 현관문까지의 거리는 마치 천리 길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침 운동을 아무리 오래 한 사람도 그 거리는 잘 좁혀지지 않는다. 불규칙적인 빗소리에 이따금 잠에서 깼다 다시 잠들곤 했던 나는 알람 소리를 듣고도 한참이나 갈등했다. 저 현관문을 열고 나가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몸에 붙은 잠기운을 툭툭 털어낼 거냐 아니면 아침 운동을 거른 채 밀린 잠을 내처 잘 거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것이다. 유혹은 아주 깊고 달콤했지만 나는 결국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새벽 산행에 나섰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여전히 어두웠다. 간밤에 내린 비로 숲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는 듯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천연덕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까치의 울음소리가 악다구니처럼 들렸다. 잠에 취해 좀처럼 힘이 붙지 않던 다리도 등산로 초입의 계단을 다 오를 즈음부터 생기가 돌았다. 가파른 경사로에서 쓸려 내려온 낙엽 더미가 평지의 끝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퇴비처럼 쌓여 있었다. 인근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선 벌써부터 중장비 소리가 요란했다.


능선에 위치한 '산스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은 늘 만나던 사이인데 올해부터는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마주칠 뿐 좀체 만날 수가 없었던 분이었다. 성함도 알지 못하는 그분을 나는 언제나 '멋쟁이 할아버지'로 기억하곤 했다. 머리는 완전한 백발이지만 연세에 비해 풍채가 좋은 그분은 내가 산행에 나서는 그 시각에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마주치곤 했었다. 손안에 호두알을 움켜쥔 채 열심히 굴리기도 하고, 정상에 올라 손바닥을 세게 마주쳐 크게 박수를 치기도 했었는데... 그럼에도 걸음은 언제나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산스장'에서 나와 함께 몸을 풀면서 조금 힘겨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전에는 거의 매일 만나던 분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욕쟁이 할머니'로 기억하던 분이었다. 60줄에 들어선 따님을 앞세우고 열심히 산에 오르던 분이었다. 그러나 80대 후반의 연세가 된 그분 역시 이제는 더이상 산에 오를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하셨다고 했다. 따님과 함께 아파트 인근의 공원을 몇 바퀴 도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멋쟁이 할아버지' 역시 이제는 매일 산에 오르는 게 힘에 겨워 일주일에 한두 번 오르는 게 전부라고 했다. 매일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줘서 고마웠다며 멋쩍은 고백을 하는 '멋쟁이 할아버지'. 그분도 이제 80대 후반의 연세가 되셨다고 했다. 나는 그분께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살 날이 많이 남은 사람은 특정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이 크고,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은 미안함보다는 고마움이나 감사함이 더 큰 법이다. 내가 '멋쟁이 할아버지'에게 나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멋쟁이 할아버지'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내게 고마움을 고백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나도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미안함보다 고마움이 앞서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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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소담 클래식 3
제인 오스틴 지음, 임병윤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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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지루한 듯 느껴지는 책도 어떤 한 문장으로 인해 처음 들었던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회의실에 감도는 좌중의 싸늘한 분위기를 어쩌다 던진 기발한 농담 한마디로 인해 순식간에 반전시켰던 우연한 경험처럼 말이다. 그러한 경험은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책들을 읽을 때 흔히 발생하곤 한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자아를 흔들고,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뿌연 안개를 가뿐히 날려버릴 몇몇 문장을 발견하기 위해 지루한 시간들을 꿋꿋이 견뎌야 하는지도 모른다. 고전을 읽는 데 들이는 그 지루한 시간을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책에서 발견하는 보석과도 같은 몇몇 문장에 그토록 열광하며 뿌듯한 희열을 느껴 왔는지도 모른다.


"허영심과 오만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성질이에요. 허영심은 없는데 자존심이 강한 사람도 있잖아요. 자존심이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라고 한다면, 허영심은 남들로 하여금 자신을 자기 생각대로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인 거죠."  (p.34)


그런 측면에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역시 고전으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하겠다. 18세기 말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이 비록 현대인의 가치관과는 조금쯤 어긋난다고 할지라도 대화체 위주의 빠른 전개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을 읽는 재미를  톡톡히 느끼게 하는 것은 물론 대화 속에 숨겨진 작가의 철학과 인생관이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충분히 제곤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소설은 자칫 우리가 놓칠 수 있는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베넷가의 네 자매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을 유추하고 탐구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을 받는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모습은 별반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보고 있듯이, 사랑만 있다면 젊은 사람들은 당장 재산이 없다고 해서 약혼을 못 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죠. 그러니 제가 유혹을 느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다르게 현명한 행동을 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요? 아니면 그런 유혹을 거부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나 들겠어요? 그러니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것뿐이에요. 제가 그분의 첫 연인이라고 성급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분과 함께 있게 되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어쨌든 최선을 다할 거예요."  (p.216)


사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워낙 유명한 까닭에 소설 원본이 아닐지라도 영화나 연극 또는 대강의 줄거리를 통해 어떤 내용인지 다들 알고 있을 듯하다. 19세기 영국 시골의 지주 계급이었던 베넷가는 딸만 있을 뿐 아들이 없는 관계로 베넷 씨가 죽으면 그의 모든 재산은 친척인 사촌 콜린스에게 상속되고 딸들은 거주할 곳을 잃게 된다. 이런 까닭에 베넷 부인은 다섯 딸의 불투명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딸들의 결혼 문제에 매달리는데...


베넷가의 둘째 딸인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모욕적으로 굴었다는 이유로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하지만 결국 다아시의 편지를 받은 후 자신 역시 그동안 다아시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다아시는 사실 영지의 주인인 데다 연수입도 많은 상류층 계급으로서 누구나 탐낼 만한 신랑감이었다. 이러한 신분이 오히려 엘리자베스의 청혼 거절을 계기로 자신의 오만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고치게 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신의 편견으로 인해 다아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존중하게 된다. 책에는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커플 외에도 베넷 부부를 비롯한 다양한 커플이 등장한다. 이를 통하여 당시의 시대상과 결혼관을 알 수 있게 되지만 시대에 상관없이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가장 이상적인 결혼은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 씨가 평소와는 다르게 몹시 어색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며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그날 이후 자신의 감정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지금까지 변함없이 자신을 생각해 준 그의 마음에 깊은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대답을 들은 다아시 씨는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벅찬 행복감에 휩싸였다. 그는 기쁨에 겨워 열정적이면서도 침착하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다. 그의 모습은 열화와 같은 사랑에 빠져 버린 남자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p.532)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건 대학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나는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풋내기 대학생이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던 힘든 나날을 보내던 시기였다. 잠깐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바빴던 시기에 읽었던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삶의 낭만과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주었던 귀한 책이었다. 시간을 한참이나 건너뛰어 다시 읽게 된 <오만과 편견>. 아스라한 추억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나는 벌써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 시절에 나는 책을 잡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지만, 지금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눈길이 가는 까닭에 읽는 속도는 마냥 더디고 늘어지기만 했다. 어쩌면 나의 걸음도 지난 세월만큼이나 느려졌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례하여 낭만은 멀어지고, 셈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관계에 존재하는 '오만과 편견'이 세월에 비례하여 감소하거나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시 읽게 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이 가슴에 남았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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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의 생각을 스냅사진처럼 써보려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 순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뇌'라는 걸 각인시키려는 듯 한 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런 편견 없이 그냥 그대로 옮겨보자 생각했던 나의 의도를 무시한 채 바로 그 순간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듯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침입자에 대비한 소개명령이라도 떨어진 듯 여느 때는 잘도 떠오르던 시시껄렁한 생각들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어느 심령술사가 내 앞에서 "레드 썬!"하고 주문을 건 것도 아닌데.


요란하던 장맛비가 그쳤다.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씻어낸 듯 대기는 더없이 깨끗했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햇살은 무채색의 보도블록에 부딪혀도 빛의 손실이 전혀 없이 그대로 반사되는 듯했다. 나는 이와 같은 극과 극의 비현실적인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고 하루 종일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던 게 바로 하루 전인데, 금세 이렇게 전형적인 여름 한낮의 풍경을 연출할 수 있다고?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날씨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이러다가 언제 어느 순간 또 비가 쏟아질지 알 수 없는 상황.


6월도 이제 하순을 향해 치닫고 있다. 엊그제 시작한 듯한 2025년도 이미 반환점을 돈 상황. 지난 시간에는 언제나 미련과 후회가 뒤섞인다. 장례식장에선 언제나 망자에게 못해준 일만 기억되는 것처럼. 이렇게 햇볕이 투명하게 맑고 쨍한 더위가 내리쬐는데 인근 중학교의 농구장에선 어린 학생들이 더위도 잊은 채 농구를 하고 있다. 나도 저런 청소년기를 건너왔을 텐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머릿속 멍한 상태가 좀체 나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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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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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는 읽을 책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도서관은 뻔질나게 찾게 된다. 말하자면 병이다. 병도 중병이라고 하겠다. 이러다 보니 구매한 책과 빌린 책이 뒤섞여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반납 날짜가 임박하였다는 도서관의 카톡 문자를 받고서야 비로소 대출 도서를 찾느라 서재를 한바탕 뒤집어놓는 통에 책은 늘 여기저기 널브러진 채로 주인을 맞는다. 이따금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집이 벼락이라도 맞았느냐며 어지러운 집안 풍경을 빗대어 놀리곤 한다. 그런 말이 듣기 싫었던 나는 큰맘 먹고 책정리에 나서기도 하지만 정돈된 모습도 잠시일 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내가 '엔트로피의 법칙'을 확고하게 믿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없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들은 잠시만 눈을 떼면 엉뚱한 곳에 가 있거나 아예 사라져버리곤 했다. 나와 함께하는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틈만 나면 다른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주인에 대한 복무 외의 나머지 시간에는 자신들만의 삶을 살기로 작정들을 한 것 같다. 하여간 그것들은 찾으면 없다. 급하게 필요할 때일수록 더 그렇다. 안경, 열쇠 꾸러미, 지갑, 휴대전화만 그런 것이 아니라, 책꽂이의 책들과 작업실의 오만 가지 도구들, 얼마 전에 적어둔 메모들, 아껴두었던 기억들마저 다 한통속으로 그 모양이다."  (p.39)


안규철의 에세이 <사물의 뒷모습>의 한 대목을 읽으면서 이런 고민이 나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저으기 안심이 되었었다. 나는 사실 이 책 <사물의 뒷모습>을 페이지의 순서에 상관없이 짬이 날 때마다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었다. 그렇다 보니 어떤 부분은 두 번 혹은 서너 번씩 읽기도 했고, 또 어떤 부분은 건너뛰듯 후루룩 급하게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리뷰를 쓰는 일은 마냥 미루고 말았다. 무작정 뒤로 미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리뷰를 쓴다는 건 책과의 영원한 결별 혹은 복잡한 내 서재의 어느 귀퉁이에서 언제일지도 모르는, 적어도 나와의 눈 맞춤이 있기 전까지는 표지 가득 먼지만 쌓아가야 하는 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세로 전락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고 싶었던 마음, 그게 뭔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나에게도 나무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가지들이 있다. 그것들 중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하고 잘라낼 것과 살릴 것을 정해야 한다. 생각처럼 잘되지는 않지만,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버릴 것을 버리는 나무의 결단을 배워야 한다. 나무가 된다는 것은 한곳에 자리 잡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나무의 미덕은 인내와 여유로움만이 아니다. 치열한 자기성찰과 말 없는 실천에 나무의 미덕이 있다."  (p.80)


언젠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놀라운 발견이나 깨달음을 안겨주는 작가의 글을 읽었다 할지라도 "어머, 어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하며 경원시하거나 어떤 작가의 글이 나의 생각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어머, 어쩜 내 생각을 이렇게 베껴놓은 듯 똑같을까!" 하고 동일시하지 않아야 작가를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생각한다면 나날이 증가하는 '덕후'는 아예 생겨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다만 그런 놀라운 작가의 글을 만날지라도 그저 담담하게 '아, 이 사람은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구나.' 하는 정도로 가볍게 여기기로 했을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깨닫는 법이니까. 다만 그것이 글이나 다른 예술의 형태로 세상에 알려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일이 어떻게 끝날지를, 그 일의 반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멈추는 법을, 말하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법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잊는 법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앞으로 가는 방법만을 배웠지 멈추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뭔가를 이루고 소유하는 방법만을 배웠지 그것과 헤어지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만을 배웠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다시 멈춰야 하는 시간, 우리가 배우지 않았던 것들을 위해 지평선 너머를 응시해야 하는 시간이다."  (p.224~p.225)


어제부터 내리는 장맛비가 날짜를 달리 한 오늘도 끊임없이 내린다. 눅눅한 습기가 방안 구석구석을 떠돌다가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느 곳에 불쑥 곰팡이를 피울 것 같은 토요일 오전의 멍한 시간. 나는 배고픔도 잊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아 리뷰를 쓴다. 이렇게 멍한 정신으로 어떤 좋은 글이 나올까마는 나는 그와 같은 일말의 기대감도 없이 다음에 해야 할 일에 손을 대기 전에 우선 이 글을 매조지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는 생각만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장맛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끼니 대신 눅눅한 습기만 잔뜩 흡입한 탓인지 배고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감각에 이상이 있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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