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울타리는 넝쿨장미로 가득합니다. '붉음'이라는 두 글자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마치 도장을 찍듯 꾹꾹 눌러 담는 꽃의 자태에 나는 새삼 감탄하곤 합니다. 만만치 않은 꽃의 무게를 감당하는 장미 넝쿨은 그저 그늘로서만 존재합니다.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듯 푸르름만 유지한 채 선명한 보색대비를 위해 전면에는 언제나 꽃의 '붉음'이 드러나도록 애쓸 뿐입니다. 여름에 피는 까닭에, 여름을 대표하는 까닭에 넝쿨장미는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을 닮았습니다. 꽃을 꺾어 가까이에 두고 감상하고픈 마음이 나도 모르게 들었던 건 어쩌면 넝쿨장미의 '붉음'이 나를 유혹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붉음'이란 모름지기 중독성이 강한 색깔이라고 믿었던 나의 오래전 생각도 어쩌면 그런 까닭에서 연유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선이 코앞입니다. 그럼에도 선거 분위기는 그저 차분하기만 합니다. 국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도록 지시했던 내란 우두머리는 자신의 잘못을 망각한 채, 아니 어쩌면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만큼 미친 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꾸벅꾸벅 졸거나 낄낄대면서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가 속했던 정당의 인물들 역시 자신들의 과오를 망각한 채 그를 두둔하거나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읍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탈을 썼다면 어떻게 그리 할 수 있을까요. 자신들의 죄를 고하고 국민들께 용서를 비는 게 마땅한 도리이거늘 자격도 없는 후보를 내세워 지지를 호소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며, 반성의 의미로 후보를 내지 않는 게 마땅한 도리였을 것입니다.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조금 읽었습니다. 진도를 쭉쭉 낼 수 없었던 건 슬픔의 돌부리가 나의 발길을 툭툭 걸어 자주 비틀거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흔들렸고, 울먹울먹 억지로 울음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책의 표지를 볼 때마다 나는 속이 까끄름하고 마음이 심란하기만 합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허방을 짚는 것처럼 덧없고 허망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전이 판정을 받고 나서 우리는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었고, 우리는 그런 아슬아슬한 나날을 '죽음 이행기'라고 불렀다. 죽음 이행기에서는 타인의 눈에 비상식적으로 비칠 수 있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엄마의 자살 방법에 대해 농담처럼 이야기를 나눴듯이."  (p.44)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그는 유죄시 무기징역 또는 사형에 처해진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그럴 테지만 이 재판이 제발 빠르게 진행되어 그의 꼴을 우리 사회에서 더는 볼 수 없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토요일 오후, 비가 한 차례 내렸고, 날씨는 제법 선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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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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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까지만 하더라도 한낮 기온은 조금 더운 감이 없지 않았으나 아침, 저녁 기온은 제법 낮았었다. 나는 화요일 아침에도 월요일에 입었던 도톰한 운동복을 그대로 챙겨 입고 아침 운동을 나섰는데, 등산로 입구의 계단을 채 오르기도 전에 막심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보다 10도는 높아졌을 것 같은 날씨. 하늘은 잔뜩 흐렸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습도마저 높았다. 운동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등허리에 땀이 차서 운동복은 금세 축축해졌다. 계절의 변화는 이렇게 느닷없다. 앞으로 기온은 차츰 올라 소소리바람이 치는 어느 가을날 아침, 열어 두었던 안방 창문을 서둘러 닫을 때까지 우리는 한동안 끝날 것 같지 않은 더위에 시달릴 것이다.


그렇게 산의 초입서부터 땀을 흘리기 시작했던 나는 산의 능선에 있는 산스장에서 땀범벅이 된 몸으로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땀냄새를 맡은 모기 한 마리가 앵앵거리며 귓가를 맴돌았다. '벌써 모기라니!' 어찌어찌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목이 쉰 듯한 멧비둘기가 '구구구구' 울었다. 백수린의 산문집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다 읽은 지가 여러 날 지났는데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바빴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무엇보다 나의 천성적인 게으름이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비가 내리고 있다. 여름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뒤라스를 읽던 여름을 기억한다. 눈부신 어느 날, 불탄 책 한 권을 발견한 소년.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고 글을 읽을 줄도 모르면서, 소년은 책을 읽어나가며 인생이란 헛되고 헛될 뿐이라는 삶의 비밀을 깨닫고 어른이 되어버린다. 파괴와 결별을 겪으며 어른이 되기 전 아직 모든 것이 완벽했던 유년 시절의 한순간을 그리는 이야기. 뒤라스의 글을 읽고 번역하던 날들의 여름은 아름답고, 덧없는 계절이었다."  (p.32)


1부 '나의 작고 환한 방', 2부 '산책하는 기분', 3부 '멀리, 조금 더 멀리'의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 들려주는 양 담백한 문체로 부드럽게 이끌어 간다. M 이모를 통해 알게 된 언덕 위의 작은 동네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된 작가가 그곳에서 만난 이웃들과 공동주택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월동준비며 제설작업, 재개발로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르는 동네의 현실 등을 담담히 그리고 있는 1부와 작가가 17년 동안 함께 했던 반려견 '봉봉'과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사랑과 죽음에 대한 소회를 담은 2부, 한 사람의 '여성' 혹은 '여성작가'로 살아가는 자신의 자각과 한계를 다루는 3부. 어쩌면 그것은 특별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특별하지 않은 독자들의 삶에 슬몃 얹어 놓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이윽고 이제 5월은 내가 사랑하는 두 명의 사람이 태어났고, 내가 사랑하는 두 명의 사람이 떠난 계절이 되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물론 그 일들은 모두 각기 다른 해에 일어났지만 앞으로 내가 갖게 될 모든 달력에 그들의 생生과 사死는 열흘도 채 되지 못하는 짧은 시간 안에 전부 기록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 5월이 되면 어김없이 매번 이 사실을 떠올리리라. 인생이란 탄생과 죽음 사이를 날아가는 화살이라는 사실을. 그 가냘픈 화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과녁에 꽂힌다. 하지만 우리는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p.161~p.162)


내가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의 리뷰를 쓰기로 작정하고 떠오르지 않는 생각들을 억지로 끌어모으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오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유튜브 영상에서 보는 봉하마을은 노란 물결의 추모 인파로 가득하고 나는 문득 '사람의 변화도, 계절의 변화도 갑작스럽고 느닷없는 일'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어느 날 당신 곁에서 누군가가 떠나듯 벌써부터 치솟는 여름 더위에 대한 공포는 어느 가을날 아침의 소소리바람과 함께 멈출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단단한 과거 속에 갇힐 것이다.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행복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행복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밤 찾아오는 도둑눈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사라지는 찰나적인 감각이란 걸 아는 나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스무 살이었던 나의 빈곤한 상상 속 마흔과는 다르지만 나의 40대가 즐겁고 신나는 모험으로 가득하리란 걸 나는 예감할 수 있었다."  (p.224~p.225)


사나흘 더웠던 날씨는 오늘 다시 수그러들었다. 때 이른 더위가 미안했던지 주말을 맞는 사람들에게 선선한 날씨를 선물처럼 풀어놓는다. 우리는 그렇게 또 한 주를 살아냈다. 보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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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의 시대 - 미래 화폐의 승자가 만들어낼 거대한 부의 물결
김창익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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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년 반쯤 전, 그러니까 2021년 9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부수입을 올린 경험이 있다. 로또복권은 사지도 않지만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여담이지만 내가 내 돈을 내고 로또복권을 샀던 건 지금껏 살면서 두세 번쯤 된다. 처음 로또복권을 샀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로또복권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초창기의 어느 날 은행(지금은 국민은행으로 통합되었지만 당시에는 주택은행)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근무하던 고등학교 동기의 권유를 차마 뿌리치지 못해서 거금(?) 1만 원을 투자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한 게임당 가격이 2,000원이었고, 복권 담당이었던 친구는 반 강제적으로 1만 원의 복권 구입을 종용했었다. 그 후에 두어 번 샀던 것은 주로 회식이 파한 자리에서 삼삼오오 편의점에 들러 서로의 행운을 점쳐보기 위한 하나의 재미 혹은 놀이 차원에서였다.


복권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닌데 어쩌다 샛길로 빠졌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되돌아가서 2021년 당시 나는 주변의 권유에 못 이겨 많지 않은 돈을 암호화폐에 투자했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무척이나 귀가 얇은 사람인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코로나 시기에 주식에 투자하여 쏠쏠한 재미를 보았던 나는 그 돈의 일부를 암호화폐에 투자하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이런 판단의 근거가 되었던 게 일평균 거래금액이었다. 암호화폐 시장의 일평균 거래액이 주식시장의 거래액을 초과하였다는 기사가 내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래. 돈은 역시 돈이 모이는 곳에서 벌어야 해.'라는 생각으로 암호화폐 투자를 시작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는 무척이나 단순한 인간이다. 투자라는 게 사실 고려해야 할 사항이 얼마나 많은 일인데...


나는 그렇게 암호화폐에 대한 투자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투자금 전액을 통장으로 이체했고, 묘하게도 내가 암호화폐에서 손을 뗀 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비트코인 가격도 연일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 후 암호화폐는 나의 관심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적어도 2024년 11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트럼프의 재선 이후 1억 원을 돌파한 비트코인 가격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야말로 쳐다볼 수 없는 넘사벽의 투자 대상이 되고 말았다. 경제 스토리텔러이자 비트코인 투자자이기도 한 김창익이 쓴 <비트코인의 시대>를 읽어보자고 생각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


"짐작했겠지만 투자는 과거 데이터와 미래 전망에 대한 함수다. 2025년 초 비트코인에 막대한 자금이 유입된 가장 큰 이유는 과거에 비트코인이 큰 폭으로 올랐고, 이 같은 추세가 적어도 당분간 유사하게 반복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p.27)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할 테지만 책은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공자라고 하더라도 암호화폐의 개념을 쉽게 이해하고 이에 대한 접근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화폐의 본질을 파헤치고, 비트코인의 달러 대체 가능성과 비트코인으로 인한 세계 경제의 변화 및 투자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비트코인 현상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비트코인이 직면한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이를테면 에너지 소비 문제, 확장성 문제, 규제 리스크 등이 그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비트코인의 영웅 서사에서 가장 강력한 조력자로 등장한다. 비트코인은 페트로달러라는 구체제의 모순에서 태동했다. 바로 이 점이 트럼프와 비트코인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능케 한 이유다. 트럼프는 미국 제조업을 몰락시킨 페트로달러 체제, 즉 세계화의 종식을 선언하며 미국인의 강력한 지지를 끌어냈다."  (p.143)


책의 목차를 읽어 보면 대략적인 책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1장 '비트코인, 투기가 아닌 투자가 되다', 2장 '비트코인은 오를 수밖에 없다', 3장 '트럼프는 왜 비트코인 대통령이 되었나', 4장 '비트코인은 세계 경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5장 '비트코인에 투자하기 전 알아야 할 것들', 6장 '비트코인의 시대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의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현시점에서 왜 비트코인의 가격이 이처럼 오르고,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는지, 즉 이 시대를 왜 비트코인 시대로 명명하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국면이 지나면 비트코인 투자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인플레이션 헤징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화폐의 구매력 관점에서 비트코인 투자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개미들의 영역이 아니다. 현재 상황을 보면 이때까지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다."  (p.396 '에필로그' 중에서)


계엄령 이후 대통령의 파면과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대선 국면에 있는 우리나라는 모든 게 불안정한 시기이다. 트럼프의 재선 이후 세계를 대상으로 관세 전쟁에 매진하고 있는 이 시국에 다른 나라라고 해서 안정적인 발전을 꾀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말하자면 트럼프의 재선 이후 세계 경제는 극도의 혼란기에 접어든 것이다. 이렇다 보니 내 주변에서도 무엇에 투자해야 할지 투자처를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트코인이 투기의 대상에서 투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이 변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전에는 비트코인이라면 말도 꺼내기 전에 손사래부터 치던 사람들이 지금은 투자 방법과 전망을 묻는 걸 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그런 의미에서 김창익의 저서 <비트코인의 시대>는 비트코인에 대한 유익한 길잡이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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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예년에 비해 날씨가 짓궂었던 탓인지 피는 꽃들이 비실비실 생기가 없고, 언제 피었다 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금세 지고 만다. 그런 느낌이 든다. 봄의 절정을 알리는 벚꽃의 개화기에도 한두 번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미처 감상할 새도 없이 서둘러 지고 말았고, 아카시아 꽃이 만개한 요즘에도 잊을 만하면 비가 내려서 버선발 같은 꽃잎이 하얗게 쏟아지는가 하면 더러는 줄기째 떨어지기도 하여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게다가 화려한 자태를 오랫동안 뽐내던 철쭉과 영산홍도 올해는 그 기한이 어찌나 짧던지 지금은 메마른 꽃잎만 겨우 매달고 있다.


오늘도 아침부터 흐렸던 하늘에선 간간이 비가 내렸고, 주말의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려는 듯 '우르릉 쾅!' 벼락이 치기도 했다. 그나저나 대선이 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재명 후보의 워낙 일방적인 우세 탓인지 선거 분위기는 과열되거나 격화되지 않고, 그저 차분하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란을 주도했던 정당이 해산도 되지 않은 채 다시 또 후보를 낸다는 것도 지극히 비정상적인데, 그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미친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정말 상상하기 힘들다. 더구나 내란 우두머리였던 자가 지금도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고, 그가 속한 정당에서도 그를 내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다들 미쳐 돌아가는구나' 싶은 것이다.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고 있다. 얼마 전에 구입한 백수린 작가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을 아직 들춰보지도 않은 채 작가의 산문집을 인근 도서관에서 빌렸다. 나는 종종 이런 어이없는 짓을 저지른다. 그러다 보니 구입한 책은 그 순서가 마냥 뒤로 밀려서 숫제 읽지도 않은 채 책꽂이에 꽂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나의 변명은 이렇다. 책을 구입할 당시에는 바로 읽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도서관에 가 보면 읽고 싶은 책이 어찌나 많은지... 나는 몇 권의 책을 덥석 빌린다. 구매한 책은 반납 기일이 없지만, 대여한 책은 언제나 기일이 정해져 있는 까닭에 대여한 책을 먼저 읽을 수밖에 없다. 구매한 책은 결국 순서에서 밀리고 밀리다 때론 잊히기도 하고, 구입한 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겨우 읽히기도 한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이 고쳐지지 않고 반복된다.


"오늘 아침 창밖엔 사늘한 빛이 설핏하다.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전기포트에 뜨거운 물을 끓인다. 집 안 여기저기에 놓인 사물들에는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는 밤새 차가워진 공기를 데우기 위해 전기난로를 켜고 식탁 겸 책상에 앉아 뜨거운 차를 한잔 마신다. 조금 있으면 소란을 떨며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오겠지만, 아직은 조금 더 부드럽게 게을러도 괜찮은 겨울의 끄트머리다."  (p.193)


백수린 작가의 글은 따뜻하다. 소설에서나 산문집에서나 작가의 부드러운 마음의 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자신의 글에 자신이 지닌 본래의 성품을 담는다는 건 삶 자체가 그렇다는 뜻이다. 자신의 글과 삶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글이 추구하는 방향에 배치되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작가의 인격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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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5-16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알라딘이나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책은 자꾸 밀리고 있고 매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먼저 읽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꼼쥐 2025-05-17 12:50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 님도 저와 비슷하시군요. 저 역시 그런 패턴을 반복하다 보니 읽지 않은 책이 한 보따리 쌓여 있습니다. 언제 읽을지 모르겠어요.
 
위대한 개츠비 소담 클래식 2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유혜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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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은 재독, 삼독, 나아가 아무리 읽는 횟수를 늘려가더라도 설렘의 강도가 여전히 줄지 않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줄기는커녕 다시 읽을 때마다 전에 읽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은 물론 추억에 더하여 새로운 느낌과 기대감으로 인해 설렘의 강도가 예전에 비해 절반쯤 높아지는 책이라면 명작임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명작임에 틀림없다. 내가 판단하는 기준에서는 그렇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인 듯하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러한데 네 번이나 다섯 번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제 읽었던 책의 저자도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은 나로서는 나의 기억력을 도통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개츠비', 내가 확실하게 경멸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개츠비는 내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만약 개성이라고 하는 것이 일련의 남다른 행위와 표현이라고 한다면, 그에게는 정말 눈부신 면이, 그러니까 인생의 성공을 감지하는 뛰어난 감수성 같은 것이 있었다. 마치 수만 마일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할 수 있는 그런 정교한 기계처럼 말이다."  (p.11)


당연한 일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주목하게 되는 등장인물은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달라지곤 한다. 주인공인 개츠비였다가, 데이지의 남편인 톰이었다가, 이야기의 화자인 닉이었다가... 그러나 주목하는 인물이 달라짐에 따라 책을 읽은 느낌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벌어진다. 개츠비를 주목했을 때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뭐란 말인가' 하는 느낌과 함께 삶에 대한 열정이 뭉글뭉글 피어나지만, 이번처럼 닉에게 주목했을 때는 모든 게 허망하고 덧없다는 느낌이었다. 삶에서 획득하고 경험하는 모든 게 손안에 거머쥔 가는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사이로 쉽게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살면서 맺게 되는 멀고도 가까운 인간관계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개츠비가 한 말을 통해, 지독히 감상적인 그의 생각을 통해, 내 마음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주 옛날,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리듬, 잊힌 말의 단편을...... 일순 내 입에서 한마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면서 내 입술이 벙어리처럼 벌어졌다. 마치 아무리 소리를 내려고 해도 입술만 달싹거릴 뿐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결국 말을 하지 못했으며, 거의 생각날 뻔했던 것은 영원히 전달되지 못한 채 묻히고 말았다."  (p.181)


워낙 유명한 소설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까닭에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대강의 줄거리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젊은 시절, 순수한 열정만으로 연인 관계를 유지하던 데이지와 개츠비. 결국 개츠비는 전쟁터로 나가고 데이지는 톰 부캐넌이라는 부자와 결혼한다. 한편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닉은 증권업을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나 뉴욕 교외의 웨스트 에그에 있는 작은 집을 빌려 생활하는데, 그것이 하필 부자가 된 개츠비의 대저택 옆집이었다. 데이지와 헤어지게 된 것이 오로지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개츠비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결국 부자가 되었고, 데이지가 사는 곳으로 이사를 했고,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매일 밤 파티를 열었다. 개츠비는 자신과 데이지 사이의 관계를 과거로 되돌릴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어느 더운 여름날, 뉴욕 시내로 외출을 했던 데이지가 자신이 운전하던 차로 교통사고를 내고, 결국 그 사고로 톰의 정부였던 윌슨 부인이 사망하게 된다. 개츠비는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지만 데이지는 톰과 공모하여 개츠비가 사고를 낸 것으로 몰고 가는데...


"그 섬의 사라진 나무들, 개츠비의 집으로 향하는 길가 양쪽에 늘어서 있던 나무들은 한때 모든 인간의 꿈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마지막 꿈에 탐닉하여 소곤거렸을 것이다. 덧없이 흘러가는 황홀한 한순간, 인간은 이 대륙의 존재 앞에 넋을 잃고 숨을 죽였을 것이며, 역사상 마지막으로 자신의 경이로운 능력에 어울리는 무언가를 마주 대한 채, 이해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어떤 심미적인 명상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어갔으리라."  (p.290~p.291)


다음에 이 책을 다시 읽을 때 나는 어쩌면 숨 죽인 채 바보처럼 살았던, 자신의 아내 머틀이 누군가(톰)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오직 일만 하며 살았던, 그러다 결국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고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고자 했던, 그러나 끝내 그것마저 이루지 못했던 자동차 정비공 조지 윌슨을 주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착하고 성실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가 반드시 선하고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어쩌면 망연자실 넋을 놓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조금쯤 분개할지도 모른다. 내가 언제 이 책을 다시 읽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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