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시간에 침대에서 현관문까지의 거리는 마치 천리 길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침 운동을 아무리 오래 한 사람도 그 거리는 잘 좁혀지지 않는다. 불규칙적인 빗소리에 이따금 잠에서 깼다 다시 잠들곤 했던 나는 알람 소리를 듣고도 한참이나 갈등했다. 저 현관문을 열고 나가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몸에 붙은 잠기운을 툭툭 털어낼 거냐 아니면 아침 운동을 거른 채 밀린 잠을 내처 잘 거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것이다. 유혹은 아주 깊고 달콤했지만 나는 결국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새벽 산행에 나섰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여전히 어두웠다. 간밤에 내린 비로 숲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는 듯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천연덕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까치의 울음소리가 악다구니처럼 들렸다. 잠에 취해 좀처럼 힘이 붙지 않던 다리도 등산로 초입의 계단을 다 오를 즈음부터 생기가 돌았다. 가파른 경사로에서 쓸려 내려온 낙엽 더미가 평지의 끝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퇴비처럼 쌓여 있었다. 인근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선 벌써부터 중장비 소리가 요란했다.


능선에 위치한 '산스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은 늘 만나던 사이인데 올해부터는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마주칠 뿐 좀체 만날 수가 없었던 분이었다. 성함도 알지 못하는 그분을 나는 언제나 '멋쟁이 할아버지'로 기억하곤 했다. 머리는 완전한 백발이지만 연세에 비해 풍채가 좋은 그분은 내가 산행에 나서는 그 시각에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마주치곤 했었다. 손안에 호두알을 움켜쥔 채 열심히 굴리기도 하고, 정상에 올라 손바닥을 세게 마주쳐 크게 박수를 치기도 했었는데... 그럼에도 걸음은 언제나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산스장'에서 나와 함께 몸을 풀면서 조금 힘겨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전에는 거의 매일 만나던 분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욕쟁이 할머니'로 기억하던 분이었다. 60줄에 들어선 따님을 앞세우고 열심히 산에 오르던 분이었다. 그러나 80대 후반의 연세가 된 그분 역시 이제는 더이상 산에 오를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하셨다고 했다. 따님과 함께 아파트 인근의 공원을 몇 바퀴 도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멋쟁이 할아버지' 역시 이제는 매일 산에 오르는 게 힘에 겨워 일주일에 한두 번 오르는 게 전부라고 했다. 매일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줘서 고마웠다며 멋쩍은 고백을 하는 '멋쟁이 할아버지'. 그분도 이제 80대 후반의 연세가 되셨다고 했다. 나는 그분께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살 날이 많이 남은 사람은 특정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이 크고,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은 미안함보다는 고마움이나 감사함이 더 큰 법이다. 내가 '멋쟁이 할아버지'에게 나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멋쟁이 할아버지'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내게 고마움을 고백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나도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미안함보다 고마움이 앞서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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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소담 클래식 3
제인 오스틴 지음, 임병윤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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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지루한 듯 느껴지는 책도 어떤 한 문장으로 인해 처음 들었던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회의실에 감도는 좌중의 싸늘한 분위기를 어쩌다 던진 기발한 농담 한마디로 인해 순식간에 반전시켰던 우연한 경험처럼 말이다. 그러한 경험은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책들을 읽을 때 흔히 발생하곤 한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자아를 흔들고,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뿌연 안개를 가뿐히 날려버릴 몇몇 문장을 발견하기 위해 지루한 시간들을 꿋꿋이 견뎌야 하는지도 모른다. 고전을 읽는 데 들이는 그 지루한 시간을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책에서 발견하는 보석과도 같은 몇몇 문장에 그토록 열광하며 뿌듯한 희열을 느껴 왔는지도 모른다.


"허영심과 오만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성질이에요. 허영심은 없는데 자존심이 강한 사람도 있잖아요. 자존심이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라고 한다면, 허영심은 남들로 하여금 자신을 자기 생각대로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인 거죠."  (p.34)


그런 측면에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역시 고전으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하겠다. 18세기 말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이 비록 현대인의 가치관과는 조금쯤 어긋난다고 할지라도 대화체 위주의 빠른 전개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을 읽는 재미를  톡톡히 느끼게 하는 것은 물론 대화 속에 숨겨진 작가의 철학과 인생관이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충분히 제곤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소설은 자칫 우리가 놓칠 수 있는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베넷가의 네 자매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을 유추하고 탐구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을 받는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모습은 별반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보고 있듯이, 사랑만 있다면 젊은 사람들은 당장 재산이 없다고 해서 약혼을 못 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죠. 그러니 제가 유혹을 느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다르게 현명한 행동을 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요? 아니면 그런 유혹을 거부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나 들겠어요? 그러니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것뿐이에요. 제가 그분의 첫 연인이라고 성급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분과 함께 있게 되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어쨌든 최선을 다할 거예요."  (p.216)


사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워낙 유명한 까닭에 소설 원본이 아닐지라도 영화나 연극 또는 대강의 줄거리를 통해 어떤 내용인지 다들 알고 있을 듯하다. 19세기 영국 시골의 지주 계급이었던 베넷가는 딸만 있을 뿐 아들이 없는 관계로 베넷 씨가 죽으면 그의 모든 재산은 친척인 사촌 콜린스에게 상속되고 딸들은 거주할 곳을 잃게 된다. 이런 까닭에 베넷 부인은 다섯 딸의 불투명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딸들의 결혼 문제에 매달리는데...


베넷가의 둘째 딸인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모욕적으로 굴었다는 이유로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하지만 결국 다아시의 편지를 받은 후 자신 역시 그동안 다아시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다아시는 사실 영지의 주인인 데다 연수입도 많은 상류층 계급으로서 누구나 탐낼 만한 신랑감이었다. 이러한 신분이 오히려 엘리자베스의 청혼 거절을 계기로 자신의 오만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고치게 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신의 편견으로 인해 다아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존중하게 된다. 책에는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커플 외에도 베넷 부부를 비롯한 다양한 커플이 등장한다. 이를 통하여 당시의 시대상과 결혼관을 알 수 있게 되지만 시대에 상관없이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가장 이상적인 결혼은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 씨가 평소와는 다르게 몹시 어색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며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그날 이후 자신의 감정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지금까지 변함없이 자신을 생각해 준 그의 마음에 깊은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대답을 들은 다아시 씨는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벅찬 행복감에 휩싸였다. 그는 기쁨에 겨워 열정적이면서도 침착하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다. 그의 모습은 열화와 같은 사랑에 빠져 버린 남자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p.532)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건 대학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나는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풋내기 대학생이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던 힘든 나날을 보내던 시기였다. 잠깐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바빴던 시기에 읽었던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삶의 낭만과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주었던 귀한 책이었다. 시간을 한참이나 건너뛰어 다시 읽게 된 <오만과 편견>. 아스라한 추억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나는 벌써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 시절에 나는 책을 잡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지만, 지금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눈길이 가는 까닭에 읽는 속도는 마냥 더디고 늘어지기만 했다. 어쩌면 나의 걸음도 지난 세월만큼이나 느려졌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례하여 낭만은 멀어지고, 셈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관계에 존재하는 '오만과 편견'이 세월에 비례하여 감소하거나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시 읽게 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이 가슴에 남았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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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의 생각을 스냅사진처럼 써보려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 순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뇌'라는 걸 각인시키려는 듯 한 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런 편견 없이 그냥 그대로 옮겨보자 생각했던 나의 의도를 무시한 채 바로 그 순간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듯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침입자에 대비한 소개명령이라도 떨어진 듯 여느 때는 잘도 떠오르던 시시껄렁한 생각들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어느 심령술사가 내 앞에서 "레드 썬!"하고 주문을 건 것도 아닌데.


요란하던 장맛비가 그쳤다.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씻어낸 듯 대기는 더없이 깨끗했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햇살은 무채색의 보도블록에 부딪혀도 빛의 손실이 전혀 없이 그대로 반사되는 듯했다. 나는 이와 같은 극과 극의 비현실적인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고 하루 종일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던 게 바로 하루 전인데, 금세 이렇게 전형적인 여름 한낮의 풍경을 연출할 수 있다고?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날씨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이러다가 언제 어느 순간 또 비가 쏟아질지 알 수 없는 상황.


6월도 이제 하순을 향해 치닫고 있다. 엊그제 시작한 듯한 2025년도 이미 반환점을 돈 상황. 지난 시간에는 언제나 미련과 후회가 뒤섞인다. 장례식장에선 언제나 망자에게 못해준 일만 기억되는 것처럼. 이렇게 햇볕이 투명하게 맑고 쨍한 더위가 내리쬐는데 인근 중학교의 농구장에선 어린 학생들이 더위도 잊은 채 농구를 하고 있다. 나도 저런 청소년기를 건너왔을 텐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머릿속 멍한 상태가 좀체 나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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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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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는 읽을 책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도서관은 뻔질나게 찾게 된다. 말하자면 병이다. 병도 중병이라고 하겠다. 이러다 보니 구매한 책과 빌린 책이 뒤섞여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반납 날짜가 임박하였다는 도서관의 카톡 문자를 받고서야 비로소 대출 도서를 찾느라 서재를 한바탕 뒤집어놓는 통에 책은 늘 여기저기 널브러진 채로 주인을 맞는다. 이따금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집이 벼락이라도 맞았느냐며 어지러운 집안 풍경을 빗대어 놀리곤 한다. 그런 말이 듣기 싫었던 나는 큰맘 먹고 책정리에 나서기도 하지만 정돈된 모습도 잠시일 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내가 '엔트로피의 법칙'을 확고하게 믿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없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들은 잠시만 눈을 떼면 엉뚱한 곳에 가 있거나 아예 사라져버리곤 했다. 나와 함께하는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틈만 나면 다른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주인에 대한 복무 외의 나머지 시간에는 자신들만의 삶을 살기로 작정들을 한 것 같다. 하여간 그것들은 찾으면 없다. 급하게 필요할 때일수록 더 그렇다. 안경, 열쇠 꾸러미, 지갑, 휴대전화만 그런 것이 아니라, 책꽂이의 책들과 작업실의 오만 가지 도구들, 얼마 전에 적어둔 메모들, 아껴두었던 기억들마저 다 한통속으로 그 모양이다."  (p.39)


안규철의 에세이 <사물의 뒷모습>의 한 대목을 읽으면서 이런 고민이 나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저으기 안심이 되었었다. 나는 사실 이 책 <사물의 뒷모습>을 페이지의 순서에 상관없이 짬이 날 때마다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었다. 그렇다 보니 어떤 부분은 두 번 혹은 서너 번씩 읽기도 했고, 또 어떤 부분은 건너뛰듯 후루룩 급하게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리뷰를 쓰는 일은 마냥 미루고 말았다. 무작정 뒤로 미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리뷰를 쓴다는 건 책과의 영원한 결별 혹은 복잡한 내 서재의 어느 귀퉁이에서 언제일지도 모르는, 적어도 나와의 눈 맞춤이 있기 전까지는 표지 가득 먼지만 쌓아가야 하는 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세로 전락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고 싶었던 마음, 그게 뭔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나에게도 나무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가지들이 있다. 그것들 중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하고 잘라낼 것과 살릴 것을 정해야 한다. 생각처럼 잘되지는 않지만,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버릴 것을 버리는 나무의 결단을 배워야 한다. 나무가 된다는 것은 한곳에 자리 잡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나무의 미덕은 인내와 여유로움만이 아니다. 치열한 자기성찰과 말 없는 실천에 나무의 미덕이 있다."  (p.80)


언젠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놀라운 발견이나 깨달음을 안겨주는 작가의 글을 읽었다 할지라도 "어머, 어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하며 경원시하거나 어떤 작가의 글이 나의 생각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어머, 어쩜 내 생각을 이렇게 베껴놓은 듯 똑같을까!" 하고 동일시하지 않아야 작가를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생각한다면 나날이 증가하는 '덕후'는 아예 생겨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다만 그런 놀라운 작가의 글을 만날지라도 그저 담담하게 '아, 이 사람은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구나.' 하는 정도로 가볍게 여기기로 했을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깨닫는 법이니까. 다만 그것이 글이나 다른 예술의 형태로 세상에 알려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일이 어떻게 끝날지를, 그 일의 반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멈추는 법을, 말하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법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잊는 법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앞으로 가는 방법만을 배웠지 멈추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뭔가를 이루고 소유하는 방법만을 배웠지 그것과 헤어지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만을 배웠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다시 멈춰야 하는 시간, 우리가 배우지 않았던 것들을 위해 지평선 너머를 응시해야 하는 시간이다."  (p.224~p.225)


어제부터 내리는 장맛비가 날짜를 달리 한 오늘도 끊임없이 내린다. 눅눅한 습기가 방안 구석구석을 떠돌다가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느 곳에 불쑥 곰팡이를 피울 것 같은 토요일 오전의 멍한 시간. 나는 배고픔도 잊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아 리뷰를 쓴다. 이렇게 멍한 정신으로 어떤 좋은 글이 나올까마는 나는 그와 같은 일말의 기대감도 없이 다음에 해야 할 일에 손을 대기 전에 우선 이 글을 매조지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는 생각만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장맛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끼니 대신 눅눅한 습기만 잔뜩 흡입한 탓인지 배고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감각에 이상이 있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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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코앞이라는데 하늘은 여전히 맑고 화창합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몇 걸음만 걸어도 땀이 쏟아지는 오후,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없었더라면 숨이 턱턱 막히지 않을까 싶은 날씨입니다. 벚나무의 우듬지에도 올봄 새로 돋은 잎들이 시들시들 말라갑니다. 쏟아지는 햇살의 열기를 이기지 못한 탓일 테지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름을 대비합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퇴근 후 어스름이 지는 저녁나절, 뜻이 맞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달리기를 하며 무더위에 맞서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아우르며 여름은 한껏 부풀어 갑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신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에도 장애가 존재합니다. 정신의 장애는 현대인에게 있어 아주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까닭에 우리 대부분은 아마도 정신적 장애인에 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개인별로 장애의 경중은 차이가 나겠지만 말입니다. 신체의 장애는 전적으로 한 개인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편입니다. 그러나 정신적 장애는 타인과의 관계, 이를테면 사회적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있어 정신적 장애는 신체적 장애보다 더 큰 문제로 작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나는 지인이나 회사 동료들에게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를 일러 '정신장애 판정표'라고 부르곤 합니다. 말하자면 MBTI 검사는 정신적 장애를 판정하는 요소를 유형별로 모아 어떤 부분에 장애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준표인 셈이지요. 그것이 아주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사회가 개인 단위로 쪼개지면 쪼개질수록 장애의 정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부락 단위로 공동체를 꾸려 평생을 그들과 함께 살아가던 시절에는 개개인이 경험하는 정신적 장애 수준은 매우 낮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기부터 독립(고립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지만)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장애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질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듯합니다.


주변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이겠지요. 사회적 관계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 그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건 힘든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정신적 장애의 등급에 상관없이 인간을 무작정 따르는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보이는 것은 인지상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도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대개 일반인보다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타인을 자신의 뜻대로 부리고자 하는 성격의 유형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만 그런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좋게 말하면 리더십이 강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공동체 생활에서 자신의 위치가 그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정신적으로 늘 피폐하거나 분노와 스트레스가 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애완동물과의 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겠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겪는 정신적 장애가 고쳐지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할수록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이 적어지는 까닭도 같은 이유일 듯합니다. 정신적 장애를 겪는 사람이 같은 사람과 몇십 년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정신적 장애가 비록 계절적 질병은 아니지만 무더운 여름철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내심이 조금쯤 감소하여 나의 장애 정도가 더욱 도드라지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정신과 의사로부터 장애 판정을 받은 바 없지만 나 역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 중 한 사람으로서 정신적 장애인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타인에게 짜증을 내기 쉬운 여름철, 나의 장애 등급을 낮추기 위해(겉보기에 낮아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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