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어둠은 짙고 무거웠습니다. 밤을 밝히는 도심의 꺼지지 않는 조명들도, 내 손안에 들린 작은 손전등도 새벽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인 듯 보였습니다. 어제 아침 거칠게 불던 바람은 잦아들었습니다. 어제의 바람이 등산로에 남겨 놓은 나뭇가지며 색이 바랜 잎사귀들이 패잔병이 남기고 간 유품처럼 내내 덧없었습니다.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뚝 떨어진 기온 탓인지 밖으로 드러난 손끝으로부터 새벽 냉기가 올라왔습니다. 인근에 펼쳐진 아파트 공사장에서는 신새벽부터 철근을 자르는지 절단기 소리가 요란합니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매캐한 쇠비린내가 속을 뒤흔들고, 경사진 길을 내려가면서 하마터면 넘어질 듯 비틀거렸습니다. 새벽의 고요가 공사장의 소음으로 인해 조금씩 깨어지고 있었습니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외투가 조금 두터워졌습니다. 여전히 녹색이 우세한 가로수의 계절감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잠깐의 추위도 견디기 어렵다는 듯 어느 한 곳 빈틈이 보이지 않게 꽁꽁 싸맨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견디기 힘들었던 추위도, 숨이 콱콱 막히던 여름도 막상 지나고 나면 때론 그리워지게 마련입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살아온 점점의 시간들이 폐허처럼 보일지라도 마음에 쩍쩍 금이 가는 날이면 그 시절 그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안리타의 에세이 <리타의 정원>을 읽고 있습니다. 안리타 작가의 작품 중 두 번째 읽는 책입니다. 안리타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작가가 쓴 어떤 책이라도 한 권쯤 손이 갔던 사람이라면 작가의 글맛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특히 오늘처럼 날씨가 춥고 가슴이 몽글몽글 초겨울의 허무로 뒤덮이는 날에는 안리타 작가의 글 한 대목쯤 나즉나즉 읊조리고 싶어집니다.


"어여쁜 풀꽃 하나 만나게 될 때면, 하늘을 바라보고 숨을 쉴 때면, 시계가 닿지 않는 산 너머 능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멈춰버린 마음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영원의 시간은 이 순간 내 마음에 원래 그렇게 잇는 듯하다. 자유와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숨 쉬는 지금에도 있는 듯하다."  (p.106)


한낮 기온은 조금 오른 듯합니다. 사람들의 얼굴 근육도 풀렸는지 알듯 모를 듯 미소가 번집니다. 겨울로 가기에는 조금 이르다 싶었는지 하늘빛은 여전히 가을을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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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같이 일교차가 큰 환절기에는 특히 새벽 등반하실적에 옷을 든든하게 입고 산에 올라가셔야 될거 같아요.

꼼쥐 2025-11-01 11:28   좋아요 0 | URL
아침 기온이 조금 낮기는 하지만 그래도 산에 오르다 보면 아직은 땀이 나기도 합니다. 너무 덥게 입으면 오히려 담이 많이 나서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더라구요. 저만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보온은 필수죠.
 
AI는 인간을 꿈꾸는가 - 인간과 비인간, 그 경계를 묻다
제임스 보일 지음 / 미래의창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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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의 어떤 용어가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는 보편 언어로 변모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보통의 사람들에게 일상어로 쓰이는 것도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쓰는 데에는 더욱더 긴 시간이 요구된다. 과거에는 그랬다. 물론 지금도 과학계의 몇몇 사람들만 사용하는 과학용어가 쉽게 일상어로 전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말이다. 그러나 인터넷의 보급은 우리의 일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전문영역으로 취급되던 여러 분야의 장벽이 일거에 무너뜨린 것은 물론 각 분야의 지식을 우리의 일상 속으로 편입되게 하였다. 전문가입네, 하고 으스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현상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을 터, 대중의 지적 수준이 향상됨으로써 자신의 권위는 비례적으로 낮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부채질하고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이 아마도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 AI)이 아닐까 싶다. AI로 통칭되는 이 단어는 이제 산골 벽지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도 일상의 보편 언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의 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온 AI는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꿔 놓을까?


"이 책은 아직 입증되지 않은 두 가지 접근 방식을 토대로 구성된다. 첫째, 매우 다양한 여러 맥락에 따라 경계선을 들여다보게 되면, 그저 한 가지 관점에만 치중할 때보다 훨씬 더 이 사안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 사안에 관한 논쟁은 삶의 한 측면이나 학문의 한 분야에만 오롯이 국한되지 않으며, 사회의 철학, 법률, 예술, 역사, 도덕 전반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논쟁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공상과학소설 및 영화에서부터 윤리학까지, AI 관련 기술에서부터 의식에 관한 철학까지, 헌법을 둘러싼 논쟁에서부터 법정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각종 소재와 자료를 살펴볼 것이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인격에 관한 다각적인 논쟁들과 매우 다양한 측면을 아우르는 이러한 접근법은 '인간' 및 '인격체'의 정의를 둘러싼 혼란 가운데 일부나마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p.66~p.67 '서문' 중에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AI 기술에 대한 대중의 기대와는 별개로 AI로 인한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상존하는 건 사실이다. SF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이러다가 AI를 탑재한 로봇이 등장하여 인간을 복종시키고, 결국에는 인간이 AI의 노예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번역이나 통역, 의료나 법률, 코딩 등의 전문 분야에서 인간보다 더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임으로써 이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직업을 잃고 실업자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 등은 이미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불안과는 별개로 AI의 등장으로 인해 촉발된 논쟁은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인공지능이 '감정과 자의식'이 있다면 과연 우리는 인공지능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인간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어떤 기준으로 인간을 분류할 것인가? 의 문제, 그렇다면 인격체의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은 법률적 판단과 더불어 철학이나 윤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도덕적 지위를 구분하는 경계에 존재하는 깊은 바다를 항해할 때, 인격에 관한 이론들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바다를 안내하는 지도의 역할을 해줄 수 없다. '인공지능에 어떠한 지위의 법적 인격을 부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 역시 우리의 삶이 인공지능으로 인해 급박한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인공지능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된 후에 인격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때는 질문의 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관점이 지금과는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p.254 '인공지능' 중에서)


듀크대 로스쿨 석좌교수인 제임스 보일이 쓴 이 책 <AI는 인간을 꿈꾸는가>는 비인간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본질에 대해 묻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반려견이나 반려묘 등 인간이 아닌 동물에 대해서도 그들의 권리를 법적으로 확장하여 왔으며, 그와 동시에 생명체가 아닌 법인에 대해서도 법적인 권리를 인정해 왔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어떠한가? 구글의 엔지니어인 블레이크 르모인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 컴퓨터 시스템이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짓는 요소로 언어를 그 기준으로 삼는다면 인공지능은 이해력과 지능을 기반으로 언어 구사도 능숙한 까닭에 인간으로 보아야 할까? 만일 우리가 비생물인 인공지능에 인격권을 부여한다면 생명이 있는 다른 개체, 이를테면 혼종 동물, 키메라, 형질 전환 개체에게도 인격을 부여해야 하는가? 이런 방법으로 범위를 무한정 넓혀가다 보면 우리는 과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냉정하고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선은 어디에서 그어지게 될까?


"우리가 새롭게 받아들일 의식이라는 개념의 의미에서부터 기술 발전의 속도와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너무나 불확실하다. 그렇지만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미래이기도 하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존재, 즉 고차원적 지능 및 의식을 갖추고 추상적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인격체'들이 이 행성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존재는 이미 나타났는가? 아니면 앞으로 나타나게 될까?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러한 미래에 도전할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p.522 '결론' 중에서)


자제분들과 떨어져 시골에서 생활하는 어르신들 대부분은 대화 상대를 찾지 못해 하루에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많다고 하소연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러나 AI의 등장으로 인해 수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은 물론 약 먹을 시간을 알려주거나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라고 알려주는 등 생활에 필요한 여러 정보를 척척 말해주는 AI가 오히려 자식보다 낫다는 말을 더러 하기도 한다. 농담처럼 말이다. 그러나 AI와의 끝없는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얻고 외로움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정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다가 자신이 가진 재산을 모두 AI에게 상속하겠다는 노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미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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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인근의 공원에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야자매트가 깔린 공원 둘레의 산책로에는 운동복을 입고 뛰거나 걷는 사람들로 붐비고, 공원 한편에 설치된 운동기구를 이용하려는 몇몇 사람들도 눈에 띕니다. 그 옆에 마련된 간이 족구장에서도 코트에 공이 꽂힐 때마다 서로 함성을 지르며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공원 여기저기에 놓은 벤치에는 노인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어떤 사람은 그런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습니다. 공원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의 한 손에는 반려견의 목줄이 들려 있었습니다. 여전히 초록이 우세하지만 공원의 나무들도 이제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고 있습니다. 나뭇가지에는 언뜻언뜻 보이는 딱새와 까치와 비둘기들이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는 모습입니다.


남유하 작가가 쓴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겠지만 마음이 약한 나로서는 차마 읽을 수가 없어서 책꽂이 한켠에 고이 꽂아 두었던 책입니다. 여전히 나는 읽을 수 없는 부분을 차례로 건너뛰며 몇몇 꼭지를 겨우 읽을 뿐입니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무조건 걸었다. 미세먼지가 심하면 마스크를 쓰고 걸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걸었다. 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울면서 걸었다. 사람이 없는 길을 골라 걸었다. 간혹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울음이 저절로  잦아들었다. 사람이 지나가면 다시 목 놓아 울었다. 그렇게 걷고 울다 떠오른 말이 있었다. 슬픔을 걷다."  (p.251)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고통이 찾아올 때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한 특별한 처방전을 펼쳐들곤 합니다. 나는 속으로 '지금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삶(my life)'이 펼치는 서사다.'라는 생각을 마치 세뇌를 하듯 몇 번이고 되뇌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뇌를 한 채 바라보면 나의 삶이 펼쳐지는 모습은 마치 내가 예전에 읽었던 누군가의 평전이나 전기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나로부터 나의 삶을 분리시키는 방법은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매우 극단적인 처방인 셈입니다.


반면 니시 가나코가 쓴 에세이 <거미를 찾다>는 낯선 타지에서 작가 자신에게 찾아온 유방암 발병 사실을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아주 담담히 사실적으로 기록한 에세이입니다. <거미를 찾다>와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번갈아가며 읽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 권의 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 듯하기 때문입니다.


"수술 당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바깥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7시까지는 물을 마실 수 있어서 끓인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수술 후에는 팔을 올릴 수 없으니 앞이 벌어진 옷을 입는 편이 낫다고 들었다. 그래서 전날에 준비해 둔 면 소재로 된 흰 잠옷을 입었다. 일본에 있는 친구 리사가 보내준 것이었다. 남편과 아이는 아직 자고 있었다. 편지를 써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p.188~p.189)


우리가 사는 삶은 시간에 맞서 투쟁하는 투쟁의 기록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각각 다르고, 주어지는 환경도 서로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시간에 맞서 싸우게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그 사실이 무서워 주춤 물러설 때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나와 내 시간의 싸움에 개입할 수도 없고 도와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의 분투가 필요한 고독한 싸움일 뿐입니다. 아까운 10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나는 공원 산책로를 남들처럼 몇 바퀴 돌았을 뿐입니다. 산책을 하듯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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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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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도 다 지난 시점에 이 책을 읽는다는 게 조금 쑥스럽고 생뚱맞은 느낌도 든다. 이맘때의 나라면 <가을밤의 모든 것>이나 <가을밤의 어떤 것>쯤은 읽어야 할 터인데 아쉽게도 그런 제목의 소설은 없는 듯하다. 사실 나는 백수린 작가가 쓴 <봄밤의 모든 것>이 출간되었던 올해 초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노래를 부르다가 끝내 읽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물론 소설 한 권 읽는 데 무슨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요, 다 읽은 후 시험을 치를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왠지 모르게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이런 찝찝한 기분을 털어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손에 잡았다.


어떻게 보면 약간의 의무감으로 시작한 일인데 책은 의외로 빠르게 읽혔다. '아주 환한 날들', 빛이 다가올 때', '봄밤의 우리', '흰 눈과 개', '호우豪雨',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등 7편의 단편이 실렸다고는 하지만 작가가 의도했던 어떤 순간을 스냅사진에 담듯 포착하여 독자들에게 그 정점의 시간만을 제시하는 까닭에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그 상황을 영상으로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오히려 하나하나의 단편이 결말을 향해 치달릴 때면 '벌써?' 하는 물음이 절로 나왔고, 하나의 단편이 끝날 때면 언제나  못내 아쉬운 마음을 달래느라 들여마셨던 숨을 길게 내뱉어야만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p.36 '아주 환한 날들' 중에서)


작가는 이 책에서 시간으로도 되메울 수 없는 상실의 무력감에 대해 담담한 필체로 묘사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가까웠던 사람이나 존재들과 이별을 할 수밖에 없고, 그와 같은 상실의 아픔은 다른 어떤 관계로도 대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겪었던 상실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다만 우리는 삶에서 겪는 여러 상실의 상처를 안은 채 시간의 경과를 통하여 혹은 다른 존재와의 새로운 관계를 통하여 과거의 아픔을 조금씩 치유할 뿐이다. 작가는 각각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 모두가 그와 같은 아픔을 공유하지만 그들이 치유하고 위로받는 순간은 각각 달라서 그 하나하나의 모습을 세밀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들뜨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는 가슴이 아릿해지기도 한다.


"거듭될수록 소희의 상상은 익숙한 서사를 게으르게 변주한 형태를 띠었는데, 그건 악의 때문이 아니라 소희에게는 죽음이 아직 너무나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말을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해야 할 이유는 없지, 소희는 생각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범죄자일 수도 있었고 자식들에게 버림받을 만한 일을 한 부도덕한 아버지였거나 사기꾼, 자발적인 고독을 택한 은둔자일 수도 있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눴다면 소희가 싫어하게 되었을 만한 인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 한때 존재했던 생生이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없다니. 그건 대체 무슨 말이지?"  (P.172 '호우豪雨' 중에서)


오세영 시인의 시 <10월>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등장한다. '우리는/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오늘도/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영원한 이별을 위해 수많은 이별을 경험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또 내면서 눈물도 메말라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흘릴 눈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구가 탄생한 이래 단 한 번도 같은 날씨가 반복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탄생과 더불어 똑같은 상실의 상처를 단 한 번도 반복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여러 이유로 이별하고, 떠난 사람을 때로 미워하기도 하면서 또 다른 만남을 이어간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별과 동시에 또 다른 이별을 준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주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최악을 상상하며 얼마나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 마침내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어떤 얼굴로 다가올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미래와 끝에 대해서 대비할 능력이 마치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헛되게 믿으면서. 그렇게 말한 후 우리는 주미의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말했다. 이미 다 환해졌다고 생각한 연노란색 하늘과 부드러운 윤곽을 지닌 산등성이가 맞닿은 부분을 따라 아주 가느다란 선이 생기고 그것을 우리가 발견할 때까지."  (P.245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중에서)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백수린 작가가 쓴 이 소설집에 대해 <잘 적응된 허무>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긴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사라지지 않는 빛을 만드는 백수린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경지다. 암흑 같은 마음을 살리는 소중한 백야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백수린 작가는 어쩌면 우리 삶에서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상실의 아픔과 허무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의 소설집 이름을 <봄밤의 모든 것>으로 정했는지도 모른다. 눈밭의 상처에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서 말이다.


별로 한 것도 없는 듯한데 다시 또 주말. 10월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부스스한 가을 햇살에도 모과가 익어가고 있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을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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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크게 떨어졌다. 맹렬하게 뜨거웠던 여름과 하루 건너 비가 내렸던 가을. 늦장마가 연상되는 궂은 날씨였지만 가을은 여전히 진행중이리라 믿었는데 갑작스레 기온이 뚝 떨어져 오슬오슬 추위를 느끼다 보니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절로 들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1년 중 더없이 좋은 이 짧은 계절의 흥취를 느껴본 적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가을을 통째로 도둑맞은 기분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가뜩이나 서늘한 날씨에 오후 들어 하늘마저 어두워진 탓에 반차라도 내고 일찍 퇴근하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참았던 하루.


점심으로 뜨끈한 순두부를 먹었다. 펄펄 끓는 뚝배기에 담긴 얼큰한 순두부찌개를 정신없이 퍼먹느라 입천장이 벗겨지는 줄도 몰랐다. 새벽 등산로에는 요즘 산을 오르는 등산객이 부쩍 줄었다. 날씨가 조금 더 추워지고 눈이라도 한 차례 내리면 등산객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겨우내 활동량을 줄였던 사람들은 새순이 돋는 봄이 되어서야 다시 또 산을 찾을 것이다. 몇 달 동안 불어난 체중에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말이다.


국정감사가 한창인 요즘 대법원장을 비롯한 몇몇 판사들의 일탈행동으로 사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법부는 국민들의 신뢰가 비교적 높은 부처였다. 그러던 것이 윤석열 정권과 내란 시국을 거치면서 사법부의 몇몇 인사들은 노골적으로 제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고, 그들이 추구해야 할 양심이나 정의는 안중에도 없었다. 과거에도 그런 사람들이 왜 없었을까마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그 바람에 비밀 유지가 갈수록 어려워지다 보니 그런 인사들의 비행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욕심을 좇아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걸 보면 한편으로 가엾고 딱해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간혹 잘못 알고 있거나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인생의 여러 경험을 두루 겪어서 판단도 현명해지고, 성격도 원만하게 바뀔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의 본래 성격이 되살아나고, 감정이나 인지 편향의 통제력이 감소하는 까닭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는, 그야말로 고집불통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대개 젊은 시절부터 성격도 좋고 판단력도 좋았던 사람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조희대 대법원장처럼 늙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벚나무처럼 얇고 여린 잎들은 한 차례 바람에도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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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0-22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일년만의 변화이기를 바래보지만, 지구 자전축이 조금 틀어져 버린 듯한,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다가온 것이 아닌가 싶군요.

꼼쥐 2025-10-24 12:27   좋아요 0 | URL
지구 환경의 변화가 확실히 심각한 것 같아요.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이를 바로잡을 노력은커녕 권력 놀음에만 급급하고 있으니... 내년 여름은 또 어찌 날지 지금부터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