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 도시공간 시리즈 3
김건희.김지연 지음 / 선드리프레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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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하는 형식은 그 유례도 깊고 사례 역시 많다. 그렇다고 편지를 주고받는 두 사람이 모두 작가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독자들로부터 더 큰 관심을 받곤 하지만 정제된 글의 형식을 생각할 때 둘 중 한 사람은 작가일 필요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도 이와 같은 형식의 산문집을 여러 권 읽은 경험이 있다. 지난해 타계한 서경식 교수와 일본인 소설가 다와다 요코가 나눈 사색의 기록 <경계에서 춤추다>나 음악인 루시드 폴과 마종기 시인이 쓴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이 외에도 한나 아렌트와 카를 야스퍼스의 서간집도 있고,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 사이에 오고 간 아름다운 편지들도 있다. 김혼비 작가와 황선우 자가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모은 책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역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형식으로 책이 출간되는 걸 보면 편지라는 독특한 형식이 우리에게 주는 매력이 꽤나 크다고 해야 할까.


며칠 전에도 나는 이와 같은 형식의 산문집을 한 권 읽었다. 잡지사의 직원과 잡지사의 고정 필진으로 만나 열 살이라는 나이 차이와 작가와 잡지사 직원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편지라는 사적이고 긴밀한 매체를 통해 사연을 주고받았던 데에는 남들이 알 수 없는 두 사람만의 비밀이 존재했을 터, 그와 같은 비밀이 겉도는 이야기가 아닌, 현실적이면서도 동시대의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질 때 비로소 책으로서의 가치를 갖게 될 터였다.


"작품에 담긴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이 작품에 담은 언어, 그 언어가 닿고자 하는 곳, 그것을 발견하려고 도착한 사람들, 모두를 연결하는 일이겠죠. 어쩌면 그것을 연결하는 큐레이터나 에듀케이터의 일조차, 미싱사의 손길처럼 하나의 일상적이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방식으로 가려진 마음을 발견하는 게 예술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마음을 가린 장막을 혼자서 모두 걷어내기는 어려워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가 삶에서 신뢰할만한 것, 지켜내야 할 것들을 발견하는 게 우리가 예술에서 구해야 할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마치 샤르댕의 정물에서 본 것들처럼요."  (p.44)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통해 만난 건희와 지연은 미술과 책을 좋아하는 이십 대의 기자와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다수 매체에 현대미술과 도시문화를 비평하는 글을 기고하는 삼십 대의 작가였다. 그들 사이에 놓인 공통분모는 미술과 그림이었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넓히면 대한민국이라는 보수적인 국가에서 태어난 두 여인일 수도 있고,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 청춘일 수도 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같이 아름다운 것들을 오래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때로는 아름다움을 등지고 어두운 그늘에 숨어버리는 일상의 곁에 서 있어 주는 일일 거예요. 어차피 다 다른 삶인데 무슨 얘길 하겠어요. 전 그저 저 같은 삶도 있다고 보여줄 뿐이에요. 이건 이정표가 아니라 그냥 당신 삶의 두께를 늘리는 재료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p.87)


어제는 아나운서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윤여정 배우를 보았다. 어떻게 하면 윤여정 배우처럼 유연하게 늙어갈 수 있느냐는 한 젊은 방청객의 질문에 대해 그녀의 대답은 매우 확고했던 듯하다. 자신은 많은 경험과 삶의 고비를 넘겨 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얻어진 것일 뿐이니 굳이 노력하고 애쓰지 말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자신에게 질문을 한 젊은 방청객이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고 유연한 노인으로 늙지 않아도 좋으니 비교적 순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이 고된 환경에 처하면 처할수록 많은 깨달음과 지식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한 줌의 깨달음이나 지식이 고된 삶에 대한 대가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깨달음을 반납할지언정 편하고 순탄한 삶을 사는 게 백 번 나을지도 모른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어떤 존재를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예쁜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존재에 대한 확신이 생겨요. 몇 년 간 여러 전시장에서 한 작가의 작품들을 자주 만나다 보면 그런 단단한 예감이 불쑥 솟아오르거든요. 전 제가 오랫동안 지켜본 것들을 믿어요."  (p.176)


책의 제목도 밝히지 않은 이상한 리뷰가 되고 말았다. 김건희, 김지연이 쓴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라는 책이다. 나는 사실 우리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최고 권력자가 쓴 책인 줄 알았다. 공사다망하실 텐데 이런 낭만적인 책을 쓸 여유가 있으셨을까 하는 의문은 있었지만 외간 남자와도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하는 분이니 그 정도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살짝 들었었다. 그러나 책을 펼치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분은 아니었다. 텔레비전에서 그분을 볼 때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걸 보면 이 책의 제목이 왠지 더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나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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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닿았던 바람은 엉기지 않고 이내 흩어집니다. 푸슬푸슬 흩어지는 바람이 길었던 여름을 단죄하려는 듯 웃자란 풀들을 훑고 사라집니다. 한소끔 불어 드는 바람에도 속절없이 흔들리는 옥수수 대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수군대며 길었던 지난여름을 회상합니다. 삶이란 결국 여름의 땀방울처럼 엉기고 뒤섞이다가 어느 날 문득 가을바람처럼 푸슬푸슬 흩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서먹하고 슴슴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서가에 꽂힌 시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성복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이라거나 한정원의 시집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나태주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등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길조차 가지 않던 책들이었습니다. 이성복 시인이 쓴 시 한 수를 옮겨봅니다.


숲속에서


숲 전체가 쓰르라미 울음밭이었습니다

날개 빼면 손톱보다 작은 덩치가 숲을 가득 메웠습니다


쓰르라미 우는 쪽으로 다가가자 울음이 뚝 그쳤습니다

몇 발짝 물러서면 나뭇잎 사이, 번쩍이는 햇빛 사이

빛나는 노래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애써 마음먹으면 잡을 수도 있었겠지요

쓰르라미 잡히면 숲이 갇혀 숨죽이고

은밀한 나의 기쁨 끝날 테지요


내가 멀어지면 쓰르라미 울음소리 눈부십디다

여름날 해거름 쓰르라미 울음소리 귀를 찢었습니다


통상 우리는 시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생활로부터, 우리의 삶으로부터 시가 멀어진 까닭은 현대인의 팍팍한 삶에 시의 낭만은 감히 끼어들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시인의 언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인의 언어입니다.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언어도 아닌데 그들이 하는 말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중 단 한 사람을 콕 찍어 말한다면 심하게 체머리를 흔드는 어느 정치인이라고만 하겠습니다. 씨불인다고 다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의 언어는 어느 이방인에게 하는 토착 원주민의 그것처럼 그저 웅얼거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쉼 없이 지껄입니다.


가을입니다. 아니, 언뜻 가을인 듯 느껴졌습니다. 시인의 언어가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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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다 실버 센류 모음집 1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음, 이지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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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으로 갈수록 위트와 유머가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무엇보다 대화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인이나 직장 동료 등 타인으로부터의 관심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거나 현저히 줄어드는 것이 하나의 이유로 작용할 것이다. 위트와 유머가 사라진 대화는 칙칙하고 어둡다. 어떤 의무감으로 시작하는 일이 아니라면 칙칙하고 어두운 대화를 길게 이끌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듯싶다. 그러므로 노년의 대화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고, 대화를 통해 유행하는 기술이나 재치를 연마해야 하는 위트와 유머는 더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실버 센류'를 소개한 책이 꽤나 인기를 끌고 있다. 센류라 함은 일본의 정형시 중 하나로, 5-7-5 총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를 일컫는 말로서 풍자나 익살을 담아내는 게 특징이다. 그러므로 '실버 센류'는 노인 세대가 쓴 센류를 말한다.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의 주최로 2001년부터 매해 열리는 센류 공모전의 이름이기도 한 '실버 센류'에 접수된 11만 수가 넘는 센류 응모작 중 여든여덟 수를 추려 담은 책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에는 노인들의 웃픈 이야기가 한 줄 시에 담겨 있다. 제목만큼이나 특이하고 기발한 시구를 읽다 보면 왠지 모를 아련한 슬픔이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차오르지만 노인 특유의 풍류와 익살이 옅은 미소를 짓게 만들기도 한다.


1부의 첫 장에 담긴 시구 "당일치기로 가보고 싶구나 천국에"를 시작으로 "LED 전구 다 쓸 때까지 남지 않은 나의 수명",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 노환입니다」", "개찰구 안 열려 확인하니 진찰권" 등 노인들의 생활밀착형 개그와 유머가 주를 이루지만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재치가 넘치는 글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이라는 시구도 있고, "혼자 사는 노인 가전제품 음성 안내에 대답을 한다"라는 시구도 보인다. 생활에서 비롯된 반복적인 관찰이 아니고선 도저히 떠오를 수 없는 말들이다.


현재형으로 말할 수 없는 가을이다. 그렇게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그렇게 조금씩 늙어갈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지만 실상은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메메토 모리!'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나도 언제가는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늙지 않은 채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울하거나 풀이 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책에 나오는 여러 시구처럼 자신의 처지를 웃음으로 승화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좋은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동 응답기에 대고 천천히 말하라며 고함치는 아버지"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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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대던 여름 햇살이 조금씩 한산해지고 있습니다.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여름 햇살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면서 나는 삶의 신산스러운 고비마다 비슷한 넋두리를 되풀이하던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견디기 힘든 여름이었어요."라고 지금 내가 말한다면 어머니는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생전의 모습처럼 담담하게 "사는 게 어디 단 한 번이라도 만만할 때가 있겠니."라고 하셨을까요. 나는 이따금 한때 나의 어머니셨던 그분이 참으로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2024년의 길었던 여름이 제 갈 길을 터벅터벅 걸어 우리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습니다.


엊그제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취임 후 두 번째로 가진 기자회견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총평하자면 국민들의 분노를 키운 기자회견이었습니다. 의정 갈등의 대치 국면으로 인해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는 이 시점에 대통령의 상황 판단은 그야말로 최악이었고, 친일 반민족 인사들의 대거 등용으로 인한 반감 또한 다시 불을 지피는 형국이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이 아무런 현실 인식도 없이 "비상진료체제가 잘 가동되고 있다."며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답변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제 주변에도 야간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가 결국 집에서 숨을 거둔 유가족분이 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병원에서 야간 응급실 환자를 돌볼 의사가 부족하거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마당에 '비상진료체제가 잘 가동되고 있다.'고 말하는 대통령이라니... 이제는 국민 모두가 자신의 건강은 제 스스로 돌봐야 할 듯합니다. 야간에는 사고가 나서도, 절대 큰 병에 걸려서도 안 됩니다. 응급실에 간다고 해도 응급실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집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지금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중증인지 경증인지 정도는 미리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의학 지식을 갖는 것은 필수적인 요구사항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쌓으셨다면 아플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셈입니다. 그렇지만 야간에는 여전히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고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하겠습니다.


제10호 태풍 '산산'이 느리게 일본 열도를 강타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힌 듯합니다. 다른 때 같으면 유난히 정이 많은 우리나라 국민의 관심과 안타까움이 답지했을 텐데 올해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고위 공직자 중에는 이웃 나라 일본의 재난 상황에 대해 인류애적 차원이 아니라 동포애적 차원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곳곳에 설치된 독도의 조형물을 없애고,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역사에서 지우려 함께 노력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의 노고를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일본은 독도 주변에 군함을 보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수시로 순시선을 보내며, 한국 정부에게는 독도 방어훈련을 일절 하지 말라는 요구까지 한다고 합니다. 국가의 영토를 보전할 의무가 있는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다른 깊은 뜻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길고 길었던 8월이었습니다. 낮에는 여전히 더위를 느끼고, 말매미의 울음소리도 여전하지만 계절은 한 발 앞서 가을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대한민국 정부는 과거로, 오직 과거로만 퇴행하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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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모든 파도는 비밀을 품고 있다 Short Story Collection 1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 / 센텐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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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만인지 모르겠다.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을 다시 읽은 게. 줄잡아 수십 년은 흐르지 않았을까 싶다. 인터넷도 없고 텔레비전 수상기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학교가 파한 오후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는 삼삼오오 모여 딱지치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등에서 누군가 선택한 그날의 놀이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시큰둥한 날이면 친구네 집 사랑방에 모여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거나 괴도 뤼팽을 읽었다. 책이 귀한 시절이었다. 아이들의 손때가 묻은 책은 군데군데 찢겨나갔고, 낡은 옷을 깁듯 흰 종이로 정성스레 이어붙인 페이지도 여러 장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는 듯 아이들은 읽었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누구든 기꺼이 셜로키언(Sherlockian)이나 홈지언(Holmesian)이 되고자 했던 시절. 아이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셜록 홈즈가 되기도 하고 괴도 뤼팽이 되기도 했다.


"책의 초반부, 선상에서 일어나는 6가지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은 홈즈를 떠올리게 하는 듯합니다. 선상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은 계속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아서 코난 도일은 이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던져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결과를 추리하게 합니다. 셜록 홈즈가 육지에서의 미스터리였다면 이 책은 해상에서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단편마다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여 특색 있고 흥미로운 주인공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p.5 '작품 소개' 중에서)


1922년 영국에서 <해적과 푸른 물 이야기>로 출간되었다가 1925년 <샤키 선장의 거래 & 해적 신화>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번역되었다고 한다. '조셉 하바쿡 제프슨의 성명서'를 비롯하여 '작은 정사각형 상자', '육지의 해적-혼잡한 시간', '폴스타호의 선장', '협력의 끝', '줄무늬 상자', '샤키 선장:셰인트키츠의 총독이 집으로 돌아온 방법', '샤키 선장과 스티븐 크래독의 거래', '샤키 선장의 몰락', 코플리 뱅크스와 샤키 선장의 종말' 등 10편의 단편 추리소설이 담겨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반부에는 해상에서 벌어지는 6가지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이, 후반부에는 전설의 악명 높은 샤키 선장 모험기가 펼쳐진다.


"나는 일지를 계속 쓰지 않을 것이다. 이제 집으로 향하는 길은 명확하고 분명하며, 거대한 얼음 구덩이는 곧 과거의 기억이 될 것이다. 최근 사건으로 인해 겪은 충격을 극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항해 일지를 시작할 때는 이렇게 끝낼 줄 몰랐다. 나는 이 외로운 선실에서 이 마지막 말들을 쓰고 있다. 나는 죽은 사람의 빠르고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내 위에 있는 갑판에서 들리는 듯한 상상을 하고 있다."  (p.134 '폴스타호의 선장' 중에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마무리되자 대부분의 해적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피 딜리버리'호의 샤키 선장은 달랐다. 총으로 무장한 그는 잔인한 범죄와 무자비한 살인 행각으로 유명했고, 그의 해적 활동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모닝 스타'호의 존 스카로우 선장은 자신의 배에 보물을 싣고 출항 준비를 한다. 그리고 샤키 선장을 피하기 위해 먼 항로를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배에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을 태우게 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세인트키츠 총독이었다. 그렇게 항해는 시작되었고, 배가 영국 해안에 이르렀을 때 세인트키츠 총독이 바로 변장한 샤키 선장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침대에 목이 베인 채로 누워 있었지. 마침 내가 탈옥했을 때, 그가 처음 보는 선장과 함께 유럽을 건너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샤키 선장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항구에나 있으니까!) 나는 베란다를 통해 그의 방으로 들어가 그에게 진 약간의 빚을 갚았지. 그리고 필요한 물건들을 잔뜩 챙겼어. 물론 너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안경과 신발 한 켤레도 말이지. 그리고 배에 타서 총독인 척 행세를 한 거지. 자 네드, 이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p.189 '샤키 선장:세인트키츠의 총독이 집으로 돌아온 방법' 중에서)


처서를 지나면서 햇살이 겨냥하는 더위의 칼날이 조금 무뎌진 느낌이다. 물론 늦더위의 예봉이 완전히 꺾인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2024년의 무더위 속에서 셜록 홈즈를 읽던 그때처럼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중하며 읽을 수는 없었지만 다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읽어 내려갔던 건 사실이다. 코난 도일의 문장이 쉽고 평이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으나 추리소설의 특성상 문장과 문장 사이의 호응이 깊고 끈끈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추리소설에 특화된 코난 도일의 감각이 때로는 21세기의 독자인 나에게도 허를 찌르는 구석이 없지 않아서 독서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을 다시 읽은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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