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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ㅣ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평점 :
지난 월요일까지만 하더라도 한낮 기온은 조금 더운 감이 없지 않았으나 아침, 저녁 기온은 제법 낮았었다. 나는 화요일 아침에도 월요일에 입었던 도톰한 운동복을 그대로 챙겨 입고 아침 운동을 나섰는데, 등산로 입구의 계단을 채 오르기도 전에 막심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보다 10도는 높아졌을 것 같은 날씨. 하늘은 잔뜩 흐렸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습도마저 높았다. 운동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등허리에 땀이 차서 운동복은 금세 축축해졌다. 계절의 변화는 이렇게 느닷없다. 앞으로 기온은 차츰 올라 소소리바람이 치는 어느 가을날 아침, 열어 두었던 안방 창문을 서둘러 닫을 때까지 우리는 한동안 끝날 것 같지 않은 더위에 시달릴 것이다.
그렇게 산의 초입서부터 땀을 흘리기 시작했던 나는 산의 능선에 있는 산스장에서 땀범벅이 된 몸으로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땀냄새를 맡은 모기 한 마리가 앵앵거리며 귓가를 맴돌았다. '벌써 모기라니!' 어찌어찌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목이 쉰 듯한 멧비둘기가 '구구구구' 울었다. 백수린의 산문집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다 읽은 지가 여러 날 지났는데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바빴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무엇보다 나의 천성적인 게으름이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비가 내리고 있다. 여름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뒤라스를 읽던 여름을 기억한다. 눈부신 어느 날, 불탄 책 한 권을 발견한 소년.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고 글을 읽을 줄도 모르면서, 소년은 책을 읽어나가며 인생이란 헛되고 헛될 뿐이라는 삶의 비밀을 깨닫고 어른이 되어버린다. 파괴와 결별을 겪으며 어른이 되기 전 아직 모든 것이 완벽했던 유년 시절의 한순간을 그리는 이야기. 뒤라스의 글을 읽고 번역하던 날들의 여름은 아름답고, 덧없는 계절이었다." (p.32)
1부 '나의 작고 환한 방', 2부 '산책하는 기분', 3부 '멀리, 조금 더 멀리'의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 들려주는 양 담백한 문체로 부드럽게 이끌어 간다. M 이모를 통해 알게 된 언덕 위의 작은 동네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된 작가가 그곳에서 만난 이웃들과 공동주택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월동준비며 제설작업, 재개발로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르는 동네의 현실 등을 담담히 그리고 있는 1부와 작가가 17년 동안 함께 했던 반려견 '봉봉'과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사랑과 죽음에 대한 소회를 담은 2부, 한 사람의 '여성' 혹은 '여성작가'로 살아가는 자신의 자각과 한계를 다루는 3부. 어쩌면 그것은 특별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특별하지 않은 독자들의 삶에 슬몃 얹어 놓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이윽고 이제 5월은 내가 사랑하는 두 명의 사람이 태어났고, 내가 사랑하는 두 명의 사람이 떠난 계절이 되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물론 그 일들은 모두 각기 다른 해에 일어났지만 앞으로 내가 갖게 될 모든 달력에 그들의 생生과 사死는 열흘도 채 되지 못하는 짧은 시간 안에 전부 기록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 5월이 되면 어김없이 매번 이 사실을 떠올리리라. 인생이란 탄생과 죽음 사이를 날아가는 화살이라는 사실을. 그 가냘픈 화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과녁에 꽂힌다. 하지만 우리는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p.161~p.162)
내가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의 리뷰를 쓰기로 작정하고 떠오르지 않는 생각들을 억지로 끌어모으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오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유튜브 영상에서 보는 봉하마을은 노란 물결의 추모 인파로 가득하고 나는 문득 '사람의 변화도, 계절의 변화도 갑작스럽고 느닷없는 일'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어느 날 당신 곁에서 누군가가 떠나듯 벌써부터 치솟는 여름 더위에 대한 공포는 어느 가을날 아침의 소소리바람과 함께 멈출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단단한 과거 속에 갇힐 것이다.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행복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행복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밤 찾아오는 도둑눈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사라지는 찰나적인 감각이란 걸 아는 나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스무 살이었던 나의 빈곤한 상상 속 마흔과는 다르지만 나의 40대가 즐겁고 신나는 모험으로 가득하리란 걸 나는 예감할 수 있었다." (p.224~p.225)
사나흘 더웠던 날씨는 오늘 다시 수그러들었다. 때 이른 더위가 미안했던지 주말을 맞는 사람들에게 선선한 날씨를 선물처럼 풀어놓는다. 우리는 그렇게 또 한 주를 살아냈다. 보란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