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수요일 토요일
페트라 펠리니 지음, 전은경 옮김 / 북파머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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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에 단풍이 들기 훨씬 전부터 은행잎을 통과하는 가을 햇살이 먼저 노랗게 물이 들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가 아기를 껴안기도 전에 입꼬리에 걸린 미소와 눈웃음이 절로 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계절의 엽서와도 같은 그런 전조를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이나 포옹보다도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나 온기를, 실수가 잦은 아이의 성장을 믿어주는 엄마의 단단한 눈길을 더 사랑하는 까닭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동네방네 소문내지 않더라도 만남이 이어질 때마다 내 가슴에 닿는 그 푸근함을 더 좋아한다. 유난을 떨거나 서로에게 확인을 받지 않아도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가 쇠사슬보다 더 단단하다고 믿는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나는 더 좋다. 헤어짐에 앞서 내 뒤주머니에 나도 모르게 슬쩍 찔러주던, 편지봉투에 담긴 당신의 사랑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오스트리아 작가 페트라 펠리니가 쓴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은 그런 소설이다. 15세 소녀 린다의 마음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소설, 치매에 걸린 후베르트 할아버지의 마음을 또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소설. 그런 바람들이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사그라들지 않는 소설. 그래서 조금쯤 지루하다 느낄 수도 있는 소설. 그럼에도 이쯤에서 갑자기 뚝하고 멈추는 걸 바라지 않게 되는 소설. 멈춤이 곧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너무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까닭에 책을 읽으면서도,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면서도 남은 페이지를 나도 모르게 슬쩍 바라보게 되는 소설.


"후베르트와 에바와 나,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 과장이 될 테지. 우리는 서로를 느낀다. 서로 파고들거나, 그게 아니라도 어쨌든 서로에게 다가가는 물결 또는 아이들이 손으로 하는 놀이와 비슷하다. 제일 위에 있는 손 위에 다른 손이 놓이고, 제일 아래에 있는 손이 빠져나와 다시 제일 위에 놓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감정과 분위기와 몸짓이 쌓인다. 어떤 때는 후베르트의 으르렁거림이, 또 어떤 때는 에바의 국가가, 또 어떤 때는 내 유머가 위에 놓인다."  (p.119~p.120)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86세의 노인 후베르트와 죽는 것이 소원인 15세 소녀 린다가 무너져가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삶의 희망을 되찾아가는 내용의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내가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단행본으로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매일 조금씩 다르지만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 반복해서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치매를 앓는 후베르트는 하루가 다르게 기억을 잃어가고, 그런 후베를트를 24시간 간병을 하고 있는 폴란드 출신의 에바, 간병인 에바에게 잠시의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같은 건물에 살면서 일주일에 세 번 방문하여 후베르트의 말벗이 되고 있는 린다, 후베르트의 딸 나방, 린다의 남사친이자 유일한 친구인 케빈, 린다의 엄마와 엄마의 남자 친구인 위르겐 아저씨 등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다. 370여 쪽의 긴 소설 분량에 비하면 인물 설정은 꽤나 단출한 편이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우리 그냥 그런 척하자." 엄마가 무슨 말이냐는 눈길로 나를 본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척하며 지내. 사는 게 괜찮은 척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들 잘해내지 못해. 우리도 그런 척할 수 있어. 우리 삶이 괜찮은 척." 엄마는 손가락을 치켜들고 붕대를 가만히 노려본다."  (p.222)


린다는 평생을 야외 수영장 안전요원으로 일했던 후베르트를 위해 어렵게 외출을 감행하기도 하고, 일시적으로 간병인 자리를 잃었던 에바의 복귀를 위해 애쓰기도 한다. 그럼에도 린다는 16살이 되는 자신의 생일 즈음에 맞춰 도로를 달리는 차에 뛰어든다. 그러나 심각하지 않은 부상을 입고 퇴원한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린다는 목발을 짚은 채 후베르트를 찾는다. 후베르트는 이제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후베르트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야 하는 린다와 에바. 린다는 이제 엄마를 생각하여 죽지 않기로 결심한다.


"죽음에서 가장 좋은 점이 뭔지 아세요? 아무도 미래로 할아버지를 협박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미래로 나를 협박할 때면 엄마는 내가 미래를 잘못 설계한다거나 망친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해요. 그런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몸을 뒤로 기대고는, 강아지들이나 손뼉치기 노래 가사를 생각해요. 아, 죄송해요. 말이 다른 데로 샜네요."  (p.322~p.323)


"나는 후베르트처럼 한다. 모든 것을 한곳에 쓸어 담는다. 사람과 계절, 사건을 모두 한군데에 담고 뒤섞으면 다 괜찮아진다. 모두 살아 있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 빠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현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내버려두면 안 된다."  (p.368)


도로 옆 인도에도 조금씩 낙엽이 쌓이고 있다. 무심한 발길이 그 위를 오가고, 닳고 닳은 시간처럼 부스러진 낙엽이 흩어진다. 계절을 닮은 석양이 휴일 언저리를 훑고 지나는 동안 먼 곳에서 구급차 소리가 요란하다. 페트라 펠리니의 소설<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은 사실 스토리에 끌린다기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더 매력적인 작품이다. 스토리는 어쩌면 작가의 사유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슬한 바람이 분다. 창문을 닫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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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단편선 소담 클래식 6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임병윤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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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거 앨런 포의 남다른 재능은 소재의 선정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들이 선호하지 않는 소재, 그런 까닭에 독자들에게는 낯설었던 소재를 인간 공포의 아주 작은 영역에 몰아넣음으로써 소설을 읽는 독자의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는 능력은 그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낯선 소재를 현실과 결합하고자 하는 그의 고민이 선행되지 않았을까 싶다. 낯선 소재가 공포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어떤 면에서 강하고 짧은 호흡이 유리했을 터,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포는 1편의 장편과 74편의 단편을 남겼다. 단편의 대부분이 공포 소설이지만 말이다. 내각 읽었던 소담출판사에서 출간한 <포 단편선> 역시 공포 소설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검은 고양이'를 비롯하여 포의 또 다른 대표작인 '어셔가의 몰락', '적사병의 가면', '모르그가街'의 살인', '도둑맞은 편지', '함정과 시계추', '유리병에 남긴 편지'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7편의 단편이 실려 있지만, '모르그가街'의 살인'과 '도둑맞은 편지'는 그의 저작 중 많지 않은 추리 소설로 분류된다고 하겠다.


"내 기분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비틀대다가 반대편 벽에 겨우 기대섰다. 계단을 올라가던 경찰관들도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 잠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열두 개의 건장한 손이 달려들어 벽을 파내기 시작했다. 벽돌은 한꺼번에 모두 떨어져 나갔다. 이미 심하게 부패하고 머리에 핏덩이가 말라붙은 시체가 바로 눈앞에 똑바로 서 있었다."  (p.28 '검은 고양이' 중에서)


사실 우리가 읽은 공포 소설의 대부분은 어쩌면 어린 시절에 집중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소설보다 더 공포스러운 경험을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때문에 공포 소설에서 느끼는 공포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상대적으로 체감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실에서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겨울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었던 공포 소설의 충격은 그야말로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순수하면서도 직접적인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한동안 멀어졌던 공포 소설을 다시 읽었던 건 '애드거 앨런 포'라는 이름에서 오는 친숙함과 그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무척 눈을 뜨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눈을 뜨면 주위가 어떤 모습일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무엇인가 끔찍한 게 보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보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더욱 무서울 것 같았다. 마침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눈을 번쩍 떠 보았다. 정말 두려워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짙은 어둠이 무겁게 내리누르며 숨통을 죄는 듯했다. 공기마저도 숨을 턱턱 막았다."  (p.198~p.199 '함정과 시계추' 중에서)


공포 소설 작가로서 포의 재능은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원인과 그 현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분석하여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환경을 포착하고 기술한다는 데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짧은 순간 극한의 공포를 맛보게 한다. 그리고 공포 이후의 나른한 휴지(休止). 공포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휴지(休止)의 느낌은 더욱 달콤하다. 이러한 반복을 통하여 우리는 공포 소설에 익숙해지고, 중독의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공포를 기피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포의 소설은 우리가 왜 공포 소설에 열광하는가? 하는 물음에 가장 교과서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공포감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마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하고도 무시무시한 해역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호기심에 절망적인 두려움조차 달아나 버렸고, 내가 맞이하게 될 끔찍한 죽음까지도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우리는 짜릿한 흥분을 주는 무언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그것을 알게 되는 그 순간이 곧 죽음을 의미하며 앞으로도 결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그것을 향해서 말이다."  (p.245 '유리병에 남긴 편지' 중에서)


어린 시절 나는 공포 영화를 보거나 공포 소설을 읽은 날이면 혹여라도 꿈속에서 그와 같은 공포를 되새김질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웬만한 일들을 다 겪어 본 나로서는 이제 공포로 인해 잠들지 못하는 날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공포보다는 오히려 억누를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해 잠들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상상 속에서의 공포는 현실에서의 체험을 통해 극복되지만 슬픔은 아무리 많은 체험으로도 결코 극복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애드거 앨런 포의 단편선을 다시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어렸을 때 내가 느꼈던 순수의 공포를 이제 다시는 되살릴 수 없겠구나 하는 서글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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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일을 매듭짓고 나면 산적했던 또 다른 일이 내 앞에 나타난다. 마치 제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말이다. 한숨을 돌릴 만한 잠시의 여유도 없이 이렇게 일이 몰아칠 때면 내가 마치 그리스신화 속 시지프스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무거운 바위를 어렵게 어렵게 산의 정상까지 굴려다 놓으면 바위는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 제자리에서 바위를 굴려야만 하는 반복적인 삶. 그와 같은 무의미한 행동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시간에 쫓겨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어찌어찌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반나절이 훌쩍 흐르고, 기계적으로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금세 또 일주일이 흘러가고 만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쉽게 얻은 듯한 주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백세희 작가의 부고 소식을 신문 기사로 읽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또는 삶에 지친 많은 이들에게 작가의 글은 언제나 작은 위로가 되곤 했었는데 3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거붓한 일상을 살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어쩌면 일상의 무게에 눌려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상태에 놓였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대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굴려가는 일상의 바위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힘에 겨울 때, 우리를 대신하여 그 바위를 굴려줄 이는 누구인가. 우리의 근원적인 외로움은 거기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대학생 때 나는 시각장애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니었기에 알 수도 없었고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무용지물 박물관」을 읽고, 그해 갑작스럽게 발병했던 녹내장 수술을 받고 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시각장애에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점자블록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걷거나 뛰는 보도블록 사이에 함께 깔린 울퉁불퉁한 노란색 블록. 그게 시각장애인의 안전을 위한 블록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때 이 문장이 떠올랐다. 모든 것은 눈앞에 있다. 우리는 손만 뻗으면 된다. 몇십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길을 걸었으면서도 한 번도 점자블록을 의식하거나 의문을 품은 적이 없다. '노란색 블록이 있구나' 정도도 생각한 적이 없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즈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못 본 채로 눈을 감고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 중 백세희 작가의 글에서)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는 김하나, 이슬아, 김금희, 최은영, 백수린, 백세희, 이석원, 임진아, 김동영 등 9명 작가의 글이 실린 책이다. 백세희 작가의 글을 비교적 길게 옮겨 적는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작가의 명복을 빌어본다. 오늘 밤에는 어쩌면 속살거리는 빗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소슬한 추위를 함께 느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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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25-10-17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섯분에게 생명을 이어주신 백세희작가님의 명복을 빕니다.

꼼쥐 2025-10-18 15:00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사실을 기사에서 읽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기쁜 소식일 텐데 그것으로 인해 더 북받쳐 오르는 슬픔이...
 
장미
로베르트 발저 지음, 안미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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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의 저작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아동문학가 권정생을 떠올리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남들처럼 학업을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문학을 향한 열정만큼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뜨거웠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베르트 발저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타당했던 반면, 권정생에 대한 우리나라 문학계 및 국민들의 평가는 한참이나 못 미치는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한다. 한 사람의 재능이나 성품에 대한 평가보다 그가 가진 학벌이나 인맥을 더 중시하는 대한민국의 질긴 악습은 문학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부유하는 어떤 감정의 색깔을 또렷이 구분하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집 <장미>를 읽는 독자는 작가의 또렷한 사유와 거침없는 방식의 글쓰기 시도에 대해 어떤 무례함을 표하기보다 세련됨이나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 책에 수록된 글은 대개 두세 쪽 내외의 짧은 산문이고, 뚜렷한 결말이나 극적 반전을 보여주지도 않지만, 글에서 보이는 작가의 번뜩이는 감각과 사유의 선명성은 글을 읽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나는 한때 진짜 숙녀인 한 부인을 흠모했다. 하지만 요즘은 『피가로』가 내 버릇을 나쁘게 한 만큼 그녀를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마탱』이 나를 반쯤 바보스럽게 만들지 않았던가? 내 동료들이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 녹초가 되도록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읽는 신문들 때문에 기고만장해졌다."  (p.26 '파리의 신문들' 중에서)


시를 표현하는 문학적 방식이나 기법과는 다르게 산문은 그 길이에 상관없이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숨긴 채 소위 '튀지 않는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수필이 비록 붓 가는 대로 쓰는, 무형식의 글이라고는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 세계에서 존재하는 무형식의 형식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은 그와 같은 관례나 형식을 과감히 벗어던진다. 게다가 산문의 소재로 쓰인 대부분의 인물들이 지극히 서민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이 사실적이거나 구체적이지 않고 작가의 문학적 지식과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상의 우리들처럼 여행을 하고,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눈다. 작가의 환상 속에서 태어난 인물인 듯하지만 현대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한다.


"사무실에서 한 젊은이가 경건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예의바르게 글을 쓰고 있었다.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고, 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주고, 이런저런 특별한 일을 적었으며, 마지막에는 항상 답장을 당부했다. 그의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에 대해 걱정하셨을 것이다. 그는 단지 생각이 너무 많아 창백해졌고, 오로지 너무 섬세한 감정 때문에 감정이 없었다."  (p.66 '에리히' 중에서)


발저의 산문은 무척이나 쉽고 가볍게 읽히지만 불과 두세 쪽으로 구성된 하나의 꼭지를 다 읽은 후에도 '그래서 결론이 뭔데?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 거야?' 하는 식으로 이해를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장의 구성 방식, 예컨대 두괄식이나 미괄식 혹은 병렬식이나 수미쌍괄식 등의 어떤 방식도 아닌, 산만한 문장 몇몇에 스무고개의 힌트를 숨겨 놓은 것처럼 그의 글이 펼쳐지는 까닭에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쉽게 몰입하고 몇 주라도 독서를 하며 보낼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몰리에르의 희극과 모파상의 소설을 읽었고, 이 두 위대한 작가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란히 두었다. 그들은 기질이나 인간에 대한 통찰이 비슷했다. 모파상을 읽으면 그는 놀라운 것을 눈앞에 제시해서 인생의 일반적인 흐름을 과소평가하게 만들 수 있다. 세련된 감정에 믿을 수 없는 힘이 들어 있고, 더 위대한 단편 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기분이 좋고, 놀랍고 행복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p.98 '몇몇 작가와 어느 성실한 부인에 관해' 중에서)


어찌나 비가 자주 오는지 명절 연휴가 끝난 후에도 연휴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한낮에는 모처럼 맑은 하늘이 드러나더니 저녁이 되자 금세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행복해하던 로베르트 발저도 1929년부터 발다우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던가. 이러다가는 정말 가을도 다 가기 전에 우울한 기분에 취해 꼼짝달싹 못 할지도 모른다. 발저의 다른 산문집에 나오는 한 구절을 옮겨본다. '아침의 꿈과 저녁의 꿈, 빛과 밤, 그리고 별. 낮의 장밋빛 광선과 밤의 희미한 빛. 시와 분. 한 주와 한 해 전체. 얼마나 자주 나는 내 영혼의 은밀한 벗인 달을 올려다보았던가.'(발저의 산문집 '산책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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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는 고랑 어디쯤에 얕은 웅덩이 하나 파 놓으면 나의 시간은 그쯤에서 잠시 멈출 수 있을까. 미래를 잃고 잠시 멈춘 웅덩이 속의 시간은 그렇게 남은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가며 자맥질하듯 들끓게 될까. 천국보다 얕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더러 행복과 유사한 어떤 추억을 손안에 움켜쥘 수 있을까. 길었던 추석 연휴를 마치고 출근한 직원들의 얼굴에 드리운 피로의 그늘은 오늘의 하늘처럼 어둡기만 했다. 연휴 내내 흐리고 개는 일이 반복되던 날씨는 연휴가 끝난 오늘도 관성처럼 지속되고 있다. 사람들도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관성처럼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페트라 펠리니의 소설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은 소설이라기보다 차라리 서사를 동반한 철학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독자를 훈계하거나 명령하는 투의 일반적 철학 서적처럼 읽기 곤란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잔잔하고 감동적인 서사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있지만, 이따금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는 듯한 어떤 경구들이 톡 쏘는 양념처럼 이야기에 넋이 나간 독자들의 정신을 환기시키곤 한다.


"나는 앞날을 예상하고 있고, 많은 것을 이해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라는 점이다. 삶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이해가 된다. 어제 케빈과 나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모든 것, 정말로 모든 것이 불안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삶은 맹렬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거기 부응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항상 뭔가 증명해야 하고, 자기 자체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슬프다. 정말 슬프다."  (p.84)


소설 속 주인공인 린다의 생각이다. 린다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 살. 린다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어떤 인물보다 더 어른스럽다. 중증 치매 환자인 후베르트 할아버지의 24시간 요양보호사 에바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일주일에 세 번(월요일, 수요일, 토요일) 할아버지를 돌보는 경험을 통해 열여덟 살이 되면 깨끗하게 세상을 등지려고 했던 린다 역시 조금씩 변하게 되는데...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시간의 고랑을 따라 각자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어쩌면 연휴의 잔상과 여운이 자맥질하듯 현재의 시간에 뒤섞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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