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꼴통 보수 전성 시대


몇 안 되는 소수일 때는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전면에 나서지 못하지만 누군가 멍석을 깔아주면 활개를 치며 거리를 활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음침한 골목 안쪽으로 숨어들던 친일 제국주의자들이 그렇고 박정희와 이승만 독재를 찬양하는 전체주의자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 시대의 고민거리인 은둔형 외톨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주고 우쭈쭈 기를 북돋워주기만 하면 세상 무서운 게 없는 듯 행동하게 마련입니다.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일반인 출입불가의 성역처럼 여겨지던 법원 건물을 향해 소화기를 던지고, 내부 집기를 부수고, 불까지 지르려고 했던 일들도 그들이 술에 취해서 혹은 마약이나 펜타닐을 먹은 후 취했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주었기 때문에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거침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몇몇 일들만 겨우 처리했을 뿐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못한 채 기신기신 숨만 쉬며 보냈습니다. 한 젊은(혹은 어리다고도 할 수 있는) 여배우의 극단적 선택에 따른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충격을 받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나는 그 배우와 일면식도 없고 그녀를 좋아하는 팬 중 한 사람도 아니지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재능 있고 예쁜 어린 배우가 그와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충격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여파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다는 것, 그 마지막 선택을 결행하는 이면에는 타인이 알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갈등과 번민과 고통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그와 같은 젊음을 지나온 한 사람의 기성세대로서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워야 할 청춘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죄스러움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외 언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조회수 장사에 열을 올리는 우리나라 주류 언론과 그 언론에 실린 쓰레기와도 같은 기사에 자신의 더러운 감정을 배설하듯 댓글을 다는 악플러들에 대한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해 달려가는 일부 개신교 목사와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영혼 없는 청춘들의 막장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한 영화 한 편이 떠오릅니다. 순박한 남자 창수와 시골에서 상경하여 온갖 몹쓸 짓을 다 겪고 마침내 자신의 처지에 맞는 행복을 찾게 되는 영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입니다. 나는 비록 친구가 만화방에서 빌려 온 비디오테이프를 통하여 본 영화이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한 영화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론과 작금의 권력이 판을 깔아 준 멍석 위에서 꼴통 보수들이 칼춤을 추는 '꼴통 보수 전성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실. 윤석열과 김건희가 각본을 쓰고 감독도 겸한 <꼴통 보수 전성시대>도 이제 그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오를 여러 인물들을 선별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떠안고 있습니다. 지금은 <꼴통 보수 전성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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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행동과 시제에 의해 빚어지는 넓은 간극에 대해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예컨대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하려는 사람 사이의 간극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간극 같은 것이 그것이다. 양자 사이의 간극은 너무 넓어서 섣부르게 정의하거나 예단하는 것은 물론 '어떠했으면' 하는 가정조차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삶을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대척점에 있는 많은 것들과 그들 사이의 까마득한 간극을 조금씩 깨우쳐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가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으면서 문득 떠올랐다 스러진 상념들이 가는 햇살 속 먼지처럼 부유하는 아침. 나는 쉽게 잊히는 기억들을 한 줌 끌어 모아 서평을 빙자한 한 편의 글을 써본다.


"내가 처음 당선 소식을 들은 날, 내 어머니가 전화를 받은 장소가 떠오른다. 노래방, 내 어머니도 가는 곳. 한 번의 농담과 또 한 번의 농담, 그다음 번의 농담으로 삶의 품위를 지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소식이 어머니를 짓누를 때, 내 어머니가 놀러 가지 않고 살러 간 곳. 먼 옛날에는 이 세계가 전부 노래방이었겠지. 그러니 언젠가 삶의 어느 질곡에서, 노래방 한구석에서, 우연히 당신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 당신이 조금 목말라하는 것 같다면, '진짜와 진짜 비슷한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내가 사겠다."  (p.52~p.53)


나는 대개 시인의 산문집을 즐겨 읽는 편이지만 때론 소설가의 산문집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될 때가 있다. 정유정 소설가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이나 소설가 신경숙의 <아름다운 그늘> 등이 그랬다. 그들의 공통점은 늘 소설만 쓰던 작가가 드물게 선보인 산문집이라는 특징이 있다. 소설과 산문집을 번갈아가며 출간하는 작가에게는 없는 매력이 그들에게는 있다. 글로 쓰고 싶었지만 끝내 쓰지 않았던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였다가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어 시중에 나왔을 때, 그 책을 읽는 독자가 받는 인상은 무척이나 각별하다.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도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쓰다 엔터키를 치면 마법처럼 종이 한 장이 더 생긴다. 누군가의 문장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 우리 마음에는 빈 공간이 생긴다. 옛날 사람들의 문장이 우리 이야기가 되고, 나의 삶이 내 것이 되는 정갈한 자리가. 그 자리에 선배가 적어놓은 말들은 또 얼마나 정답고 재밌는지. 책 앞머리에서 선배는 "이제 나는 서른다섯 살이 됐다. 앞으로 살 인생은 이미 살 인생과 똑같은 것일까" 묻는다."  (p.143)


2002년에 등단한 작가가 이후 17년 동안 보고 느낀 여러 '이름'을 기록한 이 책은 '나를 부른 이름'의 1부와 '너와 부른 이름'의 2부를 거쳐 3부 '우릴 부른 이름들'로 끝을 맺는다. 소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1부에서 작가는 자신의 부모님과 고향 등 유년 시절의 추억과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첫 당선 소식을 듣고 가족에게 전했을 때의 떨림과 아련함을 떠올리기도 한다. 2부에서는 소설가 김애란과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3부에서는 작가가 겪은 구체적인 경험과 느낌들이 되살아난다. 읽었던 책과 즐겨 쓰는 문구와 뉴스에서 들었던 소식들...


"만일 문학에 전통이란 게 있다면 그중 우리가 이어나갈 게 있다면 그건 단순히 소재나 형식이기 전에 사람과 이 세계를 대하는 어떤 태도 혹은 마음이지 않을까. 우리가 죽은 자를 기리려 한다는 건, 잘 묻으려 한다는 건 결국 삶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겐 '나는 죽은 사람 편'이라는 저 말이 우리 문학의 아프고 소중한 유산 그리고 전통으로 느껴진다."  (p.292~p.293)


나의 기억력은 날이 갈수록 그 기능이 떨어지고 있다. 그것은 곧 내가 불러줄 새로운 이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며칠 전에는 휴대폰을 차에 두고 내렸다가 마지막으로 둔 곳이 기억나지 않아 휴대폰을 찾는 데 반나절을 소비하기도 했다. 바빠서 정신없이 서두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다들 위로하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실 앞에서 그저 망연할 따름이었다. 언젠가 나의 기억력도 수명이 다하여 '삐뽀삐뽀' 비상신호를 울리며 한도 초과를 알릴 테지만, 적어도 그날까지는 '잊기 좋은 이름;들을 다정히 불러주고 싶다. 그 이름들 중에는 어쩌면 내가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뇌는 이름도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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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많이 풀렸다. 봄이 멀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한 계절과 결별하는 건 어지간히 슬픈 일이라는 걸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하면서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한 계절을 보내는 숙취의 뒤끝은 언제나 쓸쓸함이었다. 지난 계절의 잔재처럼 마음에 남았던 쓸쓸함은 새로운 계절의 정점에 이르기도 전에 말끔히 사라지곤 하지만, 새로운 계절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와 같은, 당연히 있어야 할 긍정적인 기분을 반나마 상쇄하곤 했다. 정월 대보름의 찬란했던 달빛이 짙은 어둠을 다 몰아내지 못했던 것처럼.


외국인 친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실감하겠지만 그들과의 전화 통화에서의 주제는 언제나 대한민국의 대통령 윤석열에게로 좁혀진다. BTS를 배출한 국가에서, 블랙핑크를 배출한 국가에서, 기생충을 제작한 봉준호 감독을 배출한 국가에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을 배출한 국가에서 어떻게 윤석열과 같은 미친 작자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었느냐는 게 그들의 공통된 질문이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이 질문과 함께 따라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낯이 화끈거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엄 성공의 축배를 그들 손에 들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국회를 향해 달려갔던 그 위대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그들 덕분에 우리가 지켜왔던 일상을 휘청거리며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었고, 그들 덕분에 다 쓰러져가던 경제를 가까스로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스웨덴 작가 리사 리드센의 소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불안한 생각을 떨쳐보려 애썼다. 이전에는 사서 걱정하는 일이 좀체로 없었다. 하지만 내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씩 무너져 내려가는 최근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문득 거울 속의 남자에게 애틋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p.372~p.373)


작가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썼다.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위대한 동시에 생각으로 인해 고통을 짊어지는 동물이기도 하다. 날씨가 풀리고 겨울의 잔주름이 펴지는 시기. 나는 그 쓸쓸함의 숙취를 풀기 위해 산책을 하고 뻐근해진 다리를 욕조 속에 담근다. 그럴 때 나는 봄이 멀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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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2-15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굥은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기에...

꼼쥐 2025-02-16 14:26   좋아요 0 | URL
헌재 재판관들 앞에서도 꾸벅꾸벅 조는 걸 보면 그런 듯합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겠지요.
 
다이내믹 코리아
정주식 외 지음 / 사계절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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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도 이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아는 뉴스 맞춤형 시대가 되고 말았다. 플랫폼이 알아서 영상을 추천해 주는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이다. 자신의 성향이나 정치이념에 맞지 않는 뉴스나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불리한 뉴스는 애시당초 뉴스 취급도 받지 못한다. 정치 양극화 현상이 심화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그와 같은 추세를 반영하듯 평소 정치 뉴스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던 많은 국민들에게도 강제적으로 어느 한 편을 선택하도록 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온라인에서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서도 극단적인 편 가르기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업무 외에는 사적인 말조차 건네지 않으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갈수록 개별화되는 플랫폼 알고리즘 속에서 하나의 사안을 두고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콘텐츠는 사라져간다는 것, 도파민 ROI 시대에 뉴스의 가치는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같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정확히 민주주의의 지향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 토론자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인정투쟁은 명예와 명성을 추구하는 데 반해 주목경쟁은 사람들의 관심 그 자체를 좇는다는 박권일의 지적과 정치인들이 숙성시킬 시간이 없이 콘텐츠의 전반적인 질을 떨어뜨린다는 정주식의 지적 역시 이 가설을 지지한다."  (P.43)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티는 일'을 일컬어 우리는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사회 구성원의 의견을 조율하고 통합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더욱 갈등을 부추기고 반목과 대립을 조장하는 데 힘을 쏟았다. 야당과 시민단체를 향해 반국가 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가 하면 자신들을 향한 극렬 지지자들에게는 권력으로 비호할 수 있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은 효과는 분명했다. 국민들을 이념적 내전 상태로 치닫게 함으로써 피아의 구별을 용이하게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의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12월 3일 그날 밤의 사건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누군가는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환호했고 누군가는 민주주의의 허약함에 좌절했다. 희망과 좌절을 냉정하게 파악할 때 허약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그만큼 소중히 키워가야 할 우리 민주주의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다. 이 토론에 없는 것은 근거 없는 낙관과 희망 없는 비관이다."  (P.397)


2022년 봄 '토론의 즐거움'이라는 이름의 모임으로 치유 모임처럼 만나 2025년 1월까지 140여 회의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는 그들. 정주식 칼럼니스트를 비롯하여 <지금은 없는 시민>의 저자 강남규, <소수의견>을 썼던 박권일, CBS 뉴미디어 <씨리얼>의 신혜림 PD, <글쓰기의 최전선>을 쓴 은유 작가, <한겨레21>의 이재훈 편집장, 장혜영 전 국회의원이 그들이다. 책에 실린 13개의 테마, -'도둑맞은 집중력'과 뉴스의 위기, '죽은 개가 돌아왔어요' 복제견 찬반논란, 양당제를 돕는 중도정치의 역설, 정치인 향한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유, 인구 문제를 과장함으로써 은폐되는 것들, 카리나는 몇 살부터 연애하면 됩니까?, 진보정치는 왜 망했을까?, 영피프티는 언제까지 젊을까?, 거부권 중독 윤석열 대통령의 심리 상태, 대한민국이 양궁협회처럼 운영된다면..., 사람들이 <흑백요리사>에 열광한 이유,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계엄국과 응원봉,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는 어쩌면 윤석열 정부의 집권 전반에 대한 커다란 이슈들일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로서 아쉬웠던 점은 참가한 토론자들의 이념 성향이나 지향점이 매우 유사했다는 것이다.


"이 혼란의 끝에는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잇을까. 우리가 겨울에 본 것은 국가적 아노미 상태에서도 질서를 만들어내는 시민들의 힘이다. 분명한 것은 당연한 미래는 없으며 어떤 세계와 결별할지 어떤 세계와 마주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일곱 논자가 만들고 싶은 미래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 우리의 여정이 더 나은 공동체를 열어가는 데 작은 실마리를 전할 수 있길 희망한다."  (p.9 '여는 글' 중에서)


토론 문화가 사라진 자리에 폭력과 증오가 싹트고 있다. 대결과 반목이 일상처럼 꿈틀대는 이 시기에 우리가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구심점은 과연 무엇일까? 폭력과 증오의 정치가 우리 사회를 번영의 세계로 이끌어 줄 리는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처럼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세를 불리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그들에게 국가의 발전은 안중에도 없다. 언제쯤이면 우리나라에도 토론 문화가 되살아나서 좌와 우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방안을 찾는 데 골몰하는 날이 올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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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는 없는 말이지만 '눈치'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사전에 따르면 눈치는  '일의 정황이나 남의 마음 따위를 상황으로부터 미루어 알아내는 힘'이라는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눈치를 채다', '눈치가 없다', '눈치가 빠르다', '눈치를 살피다' 등 다양한 표현으로 쓰곤 한다.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 '눈치를 살피다'는 '기색을 살피다'와 비슷한 용례로 보기도 하는데, '기색'이나 '면색'보다는 '눈치'가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아이템 중 하나가 어쩌면 '눈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직장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사실 '눈치'가 빠른 사람과 일을 하는 게 여러 모로 편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구체적으로 지시하거나 의뢰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준다면 그보다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로는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일도 어찌 알았는지 결과물을 눈앞에 턱 하니 내놓을 때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눈치'가 빠른 사람을 그닥 신뢰하지 않는다. 업무적인 관계에서는 편하고 유용한 사람일지 몰라도 사적인 관계에서까지 가까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눈치'가 없는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편이다. 비록 업무적인 관계에서는 부담스럽고 답답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의 기준에서 '눈치'가 없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전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성향이 고집스럽고 자기주장이 강한 반면 눈곱만큼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는 부류가 그것이다. 물론 전자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면 우리 사회의 그 어떤 이도 사적으로 가까이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까이할 필요가 있지 않고서는 열이면 열 그런 부류의 인간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윤석열'이라고 하겠다. 그는 정말 '눈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운 인물이다. 재수 없으니 이만 각설하고, 나는 후자의 인간형을 좋아한다. 고집스럽고 때론 답답해 보일 때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상황에 따라 숨기거나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마음에는 두고 있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그(또는 그녀)가 대신해 주었을 때 일견 당황하면서도 속이 다 시원할 때가 있다. 물론 그런 말을 뱉음으로써 당사자인 그(또는 그녀)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지만 나는 그(또는 그녀)를 향해 '당신은 잘못한 게 전혀 없다'고 크게 말해주고 싶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깨를 다독여주거나 거하게 술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끌림의 감정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한 어미 자식도 아롱이다롱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비록 '눈치'가 없는 인간을 선호하고 신뢰하는 편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가 빠른 인간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날이 추우니 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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