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도 명절을 전후로 계절은 완연한 가을로 훌쩍 접어들었다.
시리도록 높고 푸른 하늘, 살 속을 파고드는 오슬오슬한 한기와 한낮의 따가운 햇빛.
긴소매 옷을 꺼내 입으며 갑작스러운 계절의 변화에 나는 그저 놀라고 얼떨떨해 할뿐이었다.  

그런 계절의 변화와 함께 민족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도 조용히 지나갔다.
겉으로는 그랬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런 명절이 끝나면 몸이 아닌 마음으로 명절증후군을 앓는다.
남들은 다들 목이 아프다는 둥, 허리가 아프다는 둥 자신의 신체로 명절증후군을 호소하게 되는데 나는 호된 가슴앓이로 명절증후군을 대신하는 것이다.
세월을 허투루 보낸 것인지, 명절이 끝나고 나면 나의 철없음에 며칠을 자책하며 보내는 것이 그것인데 그 까닭인즉슨, 세월의 더께만큼이나 늘어만 가는 시기심과 탐욕 때문이다.
이런 부끄러운 사정을 나는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속시원히 털어놓지 못했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아마도 나는 나이를 거꾸로 먹나 보다.
나의 탐욕과 경쟁심은 눌러도 눌러도 어느새 독버섯처럼 자라 해가 더할수록 커져만 간다.
가족 중 누군가 차를 새로 샀다거나, 못보던 명품 가방을 보았다거나, 평수를 늘려 이사를 했다거나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우리 세대가 아닌 아이들의 문제로까지 내려간다.
누구네 집 아이가 1등을 했다거나,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는 등 진심으로 축하해줘야 마땅한 일임에도 나는 은근한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끼는 것이다.
겉으로는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속좁은 사람이 되고 마는 나의 위선과 이중인격에 구역질이 난다.
남도 아닌 가족, 친지에게 이런 경쟁의식이 가당키나 한가.
득될 것도 없고, 오히려 허망함만 남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알고나 있을까?
속속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할까?
나이가 들면 점차 사그러드는 성욕이나 수면욕과는 달리 탐욕은 해가 갈수록 더해만 가니 나의 탐욕은 어느 시점에나 멈출 것인가.

내 양심의 체에 걸러진 탐욕의 알갱이들이 온 몸을 돌며 구석구석을 찌른다.
데굴데굴 구르며 아파할 수도 없는 이 홍역을 그렇게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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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사는 목적이 ’행복’의 추구라고 한다면, 
’행복’의 구성 요소에서 ’진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평소에 TV를 잘 보지 않던 나는 지난 주 한 예능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진한 감동을 느꼈었다.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다.
성악을 전공하지 않은(소수의 전공자도 있었지만)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모여 합창단을
결성하고, 합창대회를 준비하는 과정도 감동이었지만, 합창대회의 두 번째 참가팀이었던
실버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며 그들이 흘렸던 눈물은 감동 이상의 그 무엇을 시청자들에게 전해주었다.

내가 그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꾸미지 않은 '진실'과 그것이 주는 진한 감동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소망했던 윤동주의 시처럼
우리는 실생활에서 진실과 마주할 기회가 매우 드물다.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꾸미고 치장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알리는 것에는 다들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 때로는 당황스럽고, 
때로는 진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의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속내를 끄집어내어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의 피 속에는 자신의 약점을 보인다는 것이 곧 생명을 포기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원시사회로부터 전해지는 유전자가 흐르고 있기에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지 못하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우리는 숨기기에 급급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능적 행태를 벗어던지는 데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진실'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자신을 숨기려는 원시적 본능과 함께 '진실'하지 못하면 왠지
불편하고 거북하게 느끼는 '양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심은 원시적 본능 앞에 번번이 무릎을 꿇지만, 우리는 결코 행복을 포기할 수 없기에
누구에게나 진실해야 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블로그 활동을 하는 내내 잘 쓰여진 글보다는 진실을 담은 짧은 글에서 더 큰 감동을 느껴왔던
내 자신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 전체에서 '진실'을 뺀 행복이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
그것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진실' 앞에서 나도 모르게 피어나는 행복한
 미소와 한줄기 눈물의 가치를 어찌 순간의 용기와 비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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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밤입니다.
대부분의 회사가 징검다리 휴일로 9일을 쉬나 봅니다.
휴일의 첫날.
긴 연휴를 맞은 사람들의 느긋한 마음처럼
차분하고 조용한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이 밤에 어울릴만한 글을 찾아 분위기를 내려고
했는데, 끝내 찾지 못하여 대학 때 썼던 유치한 글로 대신합니다.
 
어느 가을, 느리게 흐르는 밤

밤은
온통 어둠입니다
흔들림 없는 어둠입니다
고요 한점 내려앉아
당신이 그립습니다

어두운 하늘엔
구름처럼 두둥실
그리운 마음만이
떠다닙니다
가식이 없는
시간입니다

뽀오얀 속살처럼
가만가만
달이 뜨네요
창을 열면
은빛 비늘이
묻어날 듯합니다
나는 또
당신이 그립습니다

나릇한
졸음이 밀려옵니다
사랑한다 말하면
화들짝 놀란
이 어둠이 사라질 듯합니다

싸르르 싸르르
내 배를 쓸어주던
할머니 손길처럼
귀뚜라미가 웁니다

눈을 감으면
꿈결처럼 훨훨
날아올라
저 하늘에 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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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코밑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연휴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한다.
계절은 속일 수 없어서 며칠 전만 해도 그렇게 뜨겁던 열기는 온데간데 없고, 한낮의 햇살은 따갑지만 산들산들 부는 바람과 청명한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아, 가을이구나!'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다.
주변의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저마다의  휴가 계획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가 밀려 온 나라가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을텐데 여행은 자제하는 게 좋지 않나?"하고 한마디 거들자 다들,
"그래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추억을 만들겠어요?"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추억도 시간을 내어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추억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바람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슬쩍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매우 가냘픈 것이어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던 것은 오히려 희미해지고, 기억되지 않을 듯한 소소한 일들이 오래도록 또렷이 남는 경우가 그 얼마나 많은가.
어릴 적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기억, 억새밭을 스치며 지나는 바람의 서걱거림, 반딧불이의 가녀린 불빛을 좇아 밤길을 헤매던 기억 등은 내게는 어제의 일처럼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저 일상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추억을 만들어야겠다는 조바심도 없이 이루어진 일인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또렷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추억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날 보석처럼 줍는 것이다.
성과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은 추억도 시간을 내어 만드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그렇게 만들어진 추억이 지금의 바람처럼 끝까지 남아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불가능한 꿈을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수긍하며 또 하루를 산다.
언젠가 우리는 지식도 아무런 노력 없이 시간을 내면 만들어지는 것이라 굳게 믿게 되지나 않을까?  그리고 추억은 돈만 지불하면 종류별로 살 수 있는 것이라 믿게 되지는 않을까?
불가능한 것도 만들어야 하는 현대인의 조급함과 강박증이 느린 발걸음을 재촉한다.
나는 그들의 틈에서 또 바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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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의 탐독 - 정성일의 한국영화 비평활극
정성일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차안에서 우연히 듣게 된 책속의 한 구절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순히 그랬다.  우연이 필연으로 만나는 그 한순간이 책과의 인연을 결정했다는 것, 전체 내용이 아닌 짧은 구절이 맘에 들어 책을 펼친다는 것은 지극히 낭만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충분한 근거가 되겠지만, 나는 그 대척점에 서서 무모했던 자신을 비난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에게 쓴 애도의 글.
<정은임의 영화 음악>을 진행하던 아나운서와 게스트의 관계였던 작가가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애잔함을 넘어 짙푸른 울음과도 닮아있다.
"첫 문장은 백번을 고쳐서 다시 써도 도무지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쓸 생각이다.  그것만이 내가 당신을 잠시라도 불러 세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멋지게 쓰려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슬프다기보다는 그냥 아프다."(P.39)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난 후 두 달 동안 낙타만 그렸다는 작가는 자라서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의 평론가가 되었다.
겉도는 관계로 스쳐 지나쳤을 법한 진행자와 게스트의 자리.  한 진행자의 죽음이 작가를 그토록 저리고 아프게 했던 까닭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에서 그들은 서로 만났고, 서로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경청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그 프로의 애청자로서 아직도 고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의 서평은 여기까지가 다이다.

사실 나는 평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라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자라면서 평론에 대한  거부반응을 꾸준히 느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통합된 작품을 갈가리 찢어 작은 조각마다 메스를 들이대는 해체적 분석은 끔찍하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거만하며 다소 무례하기까지 한 글(평론)을 좋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평론을 읽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고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 중심에는 인내하며 끝까지 읽어야 할 필요성의 부재가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영화를 평하는 글은 그야말로 평론을 위한 평론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란 본시 현실 너머의 현실, 현실을 가장한 작위적 실체와 관객의 집단적 환상이 만나는 것인 만큼 평론은 무의미하다.  스크린 속의 스토리는 언제나 환타지일 수 밖에 없고, 관객은 그 시각적 환영에 몰입되어 현실을 잊는다.  영화를 본다는것은 일종의 감독이 만든 마술에 걸려든 관객의 최면 상태, 현실을 사는 관객이 일상의 따분함과 지루함 등 마주하기 싫은 모든 요소를 배제한 기형적 실체를 보는 집단적 광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잣대로 낱낱의 영화적 도구(또는 쇼트)를 분석한다는 것은 그 글을 읽는 독자(또는 관객)와는 거리가 먼 관심 밖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500 페이지를 훌쩍 넘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갖고 있는 영화적 소양과 그의 글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흡입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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