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 비가 내리던 날
먹고 사는 문제는
방사능 공포보다
무서웠다

사람들이야
우산으로 제 몸뚱아릴
가릴 수 있다지만
저 풀들과 나무들은
또 어쩔 것이냐

내가 밟은 땅은 
비에 젖는데...
그렇게 방사능에 젖어드는데
나는 서둘러 출근을 한다

밤길에는
사람이 젤루 무섭다던
할머니 말씀

아아!
이제는 낮이나 밤이나
사람이 젤루 무섭다
사람이 만든 것은
모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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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어찌나 올랐는지 요즘은 지갑을 열기가 두렵다.
정부는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4.7%로 발표했지만, 무상교육과 무상급식 효과를 제외하면 무려 5%를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상 수치일 뿐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 지수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오른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사업을 했던 때가 있었다.
 빠듯한 자본금으로 시작한 탓에 나는 언제나 돈에 쪼들렸고,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했던 나는 그 난국을 어찌 헤쳐가야 할 지 난감하기만 했었다.  늘 고민을 달고 살던 내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교회에 나가보자는 것이었다.  금전적 스트레스도 조금 덜고, 인맥을 형성하여 매출도 늘려보자는 심산이었다.  어려서 성탄절이 아니면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던지라 주일에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간다는 것이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교회를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헌금 수거함을 투명한 것으로 바꾸자는 말씀이 있었다.  딴에는 헌금의 액수에 상관없이 떳떳하게 내자는 것이었는데 나와 같이 얄팍한 심산으로 출근하듯 다니는 사람에게는 그 부담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적은 액수의 돈으로 그럭저럭 다닐 수 있었는데 투명한 헌금통으로 바뀌면 체면상 그마저도 어렵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이 있었던 다음 주일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얼핏 보기에도 그 수가 현격히 줄었었고, 그 일을 계기로 나 또한 교회에 가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다 어느 순간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사업에서도 손을 떼었고 교회와는 영영 멀어지게 되었다.
나는 지금 그때 그 교회의 헌금통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지갑의 월급쟁이로 산다.  고위 공직자의 재산이 지난 해에 비해 얼마나 더 늘었느니 하는 발표를 들으며 속이 부글부글 끓고, 지난 달 물가가 사상 최고치로 급등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깨가  처지는 그런....

현 정부 출범 후 3년간 아시아 유럽 북미 등 주요 경제국 중 한국의 환율상승률(통화가치 하락률)과 물가상승률이 모두 최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동안 정부의 대기업 수출 지원을 위한 고환율정책이 물가 급등을 불렀다는 일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증이기도 하거니와 이러한 인위적이거나 최소한 ’묵시적인’ 고환율 정책이 대기업의 배를 불려주었는지는 몰라도 소비자물가 급등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점에서는 분개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특정 환율을 목표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지만, 정부가 그동안 사실상 1100원선을 ’마지노선’으로 삼아 시장 개입을 해온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금융위기 이후 1500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2009년 하반기부터 점차 안정됐으나 1100원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물가대란’이 현실화하면서 고환율 기조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4월 재보선까지 앞둔 상황에서 정부는 어느 정도 환율 하락을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가 여전히 올해 5% 성장률을 고집하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수출 증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정부가 ’고환율 기조’를 완전히 포기하고 큰 폭의 환율 하락을 용인할지는 미지수다.  그럴 경우 우리는 방사능 낙진과 함께 고물가의 폭탄을 피할 수 없다.

며칠 전 발표된 통계청의 사망통계자료에 의하면 직업별 수명에 있어 종교인이 80세로 1위, 정치인이 75세로 그 다음을 차지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과 같은 고물가와 고실업, 극심한 소비침체의 시기에도 스트레스 없이 지갑을 불릴 수 있는 직업은 역시 종교인과 정치인 밖에 없는 듯하다.

이 참에 나도 수능을 다시 치뤄서라도 신학대나 정치학과를 택해야 하나? 하는 현실성 없는 상상을 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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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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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만한 문학의 거장치고 독서에 있어 달인의 경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만은 헤르만 헤세의 폭넓은 독서와 그로부터 얻은 다양한 지식은 독자로 하여금 경외마저 들게 한다.  이사를 앞두고, 수천 권의 책이 들어찬 서재를 정리하는 데만 무려 8일이 걸렸을 정도라는 헤세의 책 사랑은 유별나다.  그것은 어쩌면 이 책의 도입부에서 "인간이 자연에게서 거저 얻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세계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책의 세계다" 라는 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책사랑’이 단순한 애정을 넘어, ’경외심’에 가까운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헤세의 수많은 에세이 가운데 책과 독서에 관한 것만을 골라 편집한 책이다. 원서에는 모두 63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었다고 하나, 그 중 24편만이 이 책에 실렸다.  동서양의 책을 두루 읽어 사고의 깊이를 더했던 그임에도 번역되지 않은 책에 대한 허기와 갈증을 피력하는 모습은 나와 같은 게으른 독자를 부끄럽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번역한 김지선님이 고맙고 감사하다.  독일어 원본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번역본으로도 글의 흐름에 끊김이 없을 뿐 아니라 어휘 선택에도 공을 들인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책이란 무책임한 인간을 더 무책임하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삶에 무능한 사람에게 대리만족으로서의 허위의 삶을 헐값에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책은 오직 삶으로 이끌어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에게 불꽃같은 에너지와 젊음을 맛보게 해주지 못하고 신선한 활력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지 못한다면, 독서에 바친 시간은 전부 허탕이다."  (P.10)

책을 읽을 때는 온 힘을 기울여 주의를 집중하고 책에서 느끼는 감정들에 적극적으로 몸을 맡기고 함께 겪고자 하는 뜻이 없다면, 불량독자라고 헤세는 말한다.  즉 다독보다는 정독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독서와 글쓰기, 문학 비평과 시, 작가와 문학 사조, 독서와 장서, 예술가와 정신분석 등 저자가 문학 전반에 대해 느끼고 생각했던 바를 해박한 지식으로 논하고 있다.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그의 독서체험에 바탕을 둔 세계문학 도서목록은 동서양 고전을 망라한다. 첫 단추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 가장 오래 간다’는 정신사의 원칙에 따라 성서, 우파니샤드를 간추린 < 베단타 > , 불경, < 길가메시 > 서사시, < 논어 > , < 도덕경 > 등에다 장자의 우화 같은 ’인류가 보유한 문헌의 기본화음’들이 꿴다. 헤세는 목록작성에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을 슬금슬금 끼워 넣는 일은 삼간다. 또한 ’세계문고’의 목록구성이 얼추 마무리되자 바로 검증과정을 거친다. 

 또한 헤세는 독자의 유형을 이렇게 분류한다.
먼저 말과 마부의 관계처럼 책은 이끌고 독자는 따라가는 순진한 독자.  이들은 작가의 파동을 함께 타고 그의 세계관에 온전히 동화되며, 작가가 자기 인물들에 부여한 해석 일체를 가감 없이 수용한다고 헤세는 말한다.
다음으로 책의 예술성, 언어, 작가의 소양과 정신성 등에 치중하고 이런 것들을 객관시하여 문학작품 최고 최종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교양계층 독자.  이들은 사냥꾼이 짐승의 자취를 더듬듯 작가를 추적하며, 미학적 가치 따위는 별 의미가 없고, 작가의 동요와 불안정성에 크게 매료된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는 이유가 교양을 쌓기 위함도, 재미를 얻기 위함도 아닌, 책을 읽는 목적이 작가의 눈을 빌려 세상을 해석하기 위해서도, 또는 철학자의 이론을 수용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닌 유희적 독자.  이러한 독자는 어떤 책에 나온 멋진 구절이나 지혜와 진실이 담긴 말을 보면, 시험 삼아 한 번쯤 뒤집어보거나, 읽은 것을 타고 떠오르는 충동과 영감의 물결 속을 헤엄쳐 다니게 된다고 한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린 시절 읽었던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 그리고 대학 시절에 읽었던 <싯다르타>는 내 독서의 이력에 작은 흔적으로 남았지만, 헤르만 헤세라는 그 이름은 내 머리 속에 크게 각인 되었었다.  자기 실현을 위한 노력을 한시도 쉬지 않았던 거장의 발자취.  그 지워지지 않는 책의 세계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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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따라 노란 개나리가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었다.
완연한 봄이다.
매년 맞는 봄이건만 어찌 이리도 새로운지....
새로 맞는 봄을 오롯이 새롭다 느끼는 것은 지나간 봄을 완전히 잊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망각, 또는 잊혀짐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나도 제법 나이가 들고 보니 내가 죽어 사라지면 내 아들녀석이 나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잊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머리 속에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회상의 편린으로나마 구차하게 남아 영원히 살아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모든 것을 온전히 새롭다고 느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새롭다는 느낌은 내가 세상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징표와 같은 것이다.  지난 과거에 집착하여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삶은 죽은 삶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새로운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데서 나온다.
과거의 기억에 덧씌워진 상태로는 변화하는 모든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를 바라보도록 한다.   똑같은 책을 다시 읽더라도 어제의 느낌을 지우고 다시 읽는다면 얼마나 새롭고 신선한가!  그리고 그 한 권의 책으로도 우리는 세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가!  설령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더라도 우리는 그 기억마저 새롭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새롭고 충만할 것인가!

잊혀짐은 사멸이 아닌 새로움으로 다시 태어나는 '살아 있음'의 표상임을 이 봄에 새로 피는 노란 개나리에게서 배운다.  태동하는 봄은 잊혀져간 수많은 것들, 하나의 새로움을 위한 그 각고의 역사를 다시 깨달으라 말한다.
어제의 기억은 오늘의 잊혀짐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잊혀짐은 오직 잊혀질 때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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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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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책을 보면 특이한 현상이 있다.
인기 작가나 외국 번안서가 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출판사의 의도된 판매 전략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가독력이 떨어지는 어렵고 난해한 책이 상위에 랭크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 셀러 1위에 오른 것도 모자라, 수개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킨 것만 봐도 그렇다.  철학 입문서라고 보기에는 결코 가볍게 읽혀질만한 책이 아님에도 독자들의 인기는 여전히 식지 않았고, 최근에 장하준 교수의 이 책이 인기몰이를 이어가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 책은 물론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여 씌여진 자유 시장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서이자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비롯된 세계적 금융 위기의 결과와 그 촉발 원인에서 보여지는 자유 시장주의자들, 혹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허술한 추측과 왜곡된 시각을 꼬집고 있는 책이다. 나아가 자본주의를 더 나은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해 '경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되찾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쓰여진 책이라고 저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어쩌면 저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자신의 권리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경제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익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나는 저자의 의도 또는 희망사항에 대한 의문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사실 개인의 정치 사회화 과정에서 확립되는 정치적 성향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게 통설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이나 권력으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정치 지도자들, 혹은 권력자들은 이 책을 읽기나 했을까?  만일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읽었다고 가정할 때, 그들의 사고는 책을 읽기 전과 얼마만큼 달라졌을까?  비록 그들이 유권자의 인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최종 판단의 순간이 오면 이 책에서도 여러번 다뤄지고 있는, 어쩌면 자본주의의 근간이 될 수도 있는 개인의 이기심에 따르지 않겠는가.

정치인이 아닌 일반 대중의 입장에 있는 독자는 또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읽었을까? 
자신이 어떤 이슈나 제도에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때가 아니면 실질적 권리행사를 할 수 없는 제한적 권력자(일반 시민)인 대다수 국민은 이 책을 읽고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자신의 불만이 저자와 같은 지식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만족감으로?  또는 최소한 이 정도의 지식은 있어야 한다는 지적 만족을 위해?  또는 읽기 어려운 책이었지만 읽어냈다는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또는 읽는 내내 '에이, 더러운 세상!'이라며 속으로만 맘껏 외칠 수 있었던 불만 해소용으로?  이도 저도 아니면 아무 책이나 읽어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하는 식의 지적 보험이라도 필요해서?  아니면 이제라도 사회의(또는 제도의) 어두운 이면을 보았으니 정치일선에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려고?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얼치기 경제학도로서 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차피 책은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한다고 하니 어떤 책을 많이 읽는지 살펴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 체제는 분명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고, 정의가 희박한 사회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이 어려운 책을 어떤 목적으로 읽었을지 지금도 몹시 궁금하다.  도대체 왜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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