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꼼수다 뒷담화
김용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오늘 '나는 꼼수다'의 고정 멤버였던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대법원은 정 전 의원에 대한 상고심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로써 정 전 의원은 향후 10년동안 피선거권이 박탈되면서 출마 또한 무산되는 등 정치생명의 위기를 맞게 됐다.  그렇다면 현역 정치인이었던 그가 이런 결과를 예상 못한 바가 아니었을텐데 현 정부와 대척점의 위치에 있는 '나꼼수'의 고정 패널로 활동했는가 하는 문제와, 아무리 현 정부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의 판결을 이렇게 서둘러 종결지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의문으로 남는다.  유불리를 떠나 서로에게 치명적인 오점으로 작용할 사안이기에 누군가는 분명 무리수를 둔 셈이다.

  

나는 아주 편한 사람과 만나 가벼운 대화를 나누 듯 이 글을 쓰려고 한다.  순서가 뒤바뀌어 혼란스러울 수도 있고, 의미를 파악하느라 진땀을 흘릴 수도 있지만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문제이겠는가.  어차피 나 혼자 쓰는 블로그이고, 얼떨결에 방문한 분이라면 대충 훑어보거나 숫제 읽지 않아도 될 일이다.

 

먼저 전제를 달아야겠다.  공격성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보았던 프로이드의 주장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격성의 표출 양상은 너무나 다양해서 모두 다룰 수는 없고, 오직 말과 글을 포함한 언어적 관점으로만 그 범주를 축소해야겠다.  즉, 현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내내 지향해 왔던 강압적 방법을 동원한 언어적 공격성의 차단과 정권의 말기에 등장한 '나꼼수'의 이상 열풍을 들어 대화에 대한 주관적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먼저, 강제적인 겁박이나 실효적 법리로 인간의 본능을 차단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가령 성욕이나 식욕과 같은 본능을 법으로 억제하거나 차단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열이면 열 다들 코웃음을 날릴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질문이기에 세살배기 아이도 헛웃음을 지을 만하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을 하고, 또는 이간질이나 뒷담화를 일삼는 등의 공격성 표출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내재된 본능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뜩이나 그것을 분출할 다양한 수단을 확보한 현대인에게 원천적 차단을 강제하거나 시도하는 자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불가능함을 잘 알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지마라'는 항목을 늘릴수록 아이는 '일탈행위'의 쾌감과 스릴에 목 말라 할 테고, 그 강도가 심할수록 반발하는 힘은 더욱 강해지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러한 본능에 대응하는 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

상대방의 말에 주관적 평가를 더하지 말아야 한다.  즉, 자기식 소설 쓰기를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가령 아내가 "인간아, 술 좀 작작 마셔라."라고 했을 때, 남편이 이 말을 듣고 '아, 내 아내는 이제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구나.'하는 식의 주관적 평가, 또는 소설 쓰기는 결국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신에게만 상처를 입힌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 말에 내포된 의미만 받아들인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주관적 평가가 덧붙여지면 결국 대화는 차단되고 자신에게는 심각한 상처만 입히게 된다.  자신이 쏜 화살에 자신이 맞는 격이니 보통 심각한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학습을 통하여 체득된 이런 식의 소설 쓰기는 마치 이것이 자기 방어적 수단이라도 되는 양 습관화 되어 고치기 쉽지 않다.

 

다음으로, 바람직한 대화는 맹목적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자들의 '수다'가 여기에 가장 잘 부합할텐데 남자들은 사실 이런 대화에 취약하다.  목적이 없는 대화는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제다.  대화에 목적이 개입되는 그 순간부터 대화는 강의나 훈계와 같은 일방적 떠들기로 변질되고 만다.  무릇 세상의 모든 수컷들이란 가오잡기를 좋아하지 않던가.  현 정권은 한낱 수컷들의 가오잡기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나꼼수'의 열풍은 대화의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대화의 맹목적성(그들의 대화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더라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수컷들의 가오잡기가 없다는 점)과 청취자의 말을 그들 스스로가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저자 김용민은 나꼼수의 제작 뒷담화와 흥행 비결에 대해 이 책에서 그 나름의 평가를 피력하고 있다.

 

오늘 정봉주 전 의원은 '나꼼수'의 고정 패널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화의 즐거움을 알게 된 '나꼼수'의 열혈 청취자들은 제2, 제3의 '나꼼수'를 이어갈 것이다.  즐겁자고 하는 것이 대화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년에 작고한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를 '하이퍼리얼(과도현실 또는 파생현실)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우리에게는 그닥 친숙하지 않은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하이퍼 리얼 쇼크>와 <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을 읽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 두 권의 책 사이에는 하등의 공통점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그렇구나'하고 느낄 수 있다.

 

플라톤은 그의 후기저작인 '소피스테스'에서  이 세계를 원형(이데아), 복제물(현실), 복제의 복제물(시뮬라크르)로 정의하였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데아의 복제물인데, 복제는 언제나 원형을 그대로 담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복제하면 할 수록 원형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실재하지 않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반면에, 포스트 구조주의의 핵심 이론 중 하나인 시뮬라크르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확립한 개념으로서 플라톤의 개념과는 다르게,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닌 독립성을 가진 개체로 보았다. 즉, 원형을 단순히 흉내낸 가짜가 아니라 원형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역동적인 존재로 여긴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쟝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에서도 나온 바 있다. 여기서는 주로 대중과 미디어, 소비사회에 대한 개념으로 쓰였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머리가 딱딱 아프다.  철학을 기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고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개념만 익히면 그 다음은 비교적 쉽다.  모든 일이 그렇지 않던가.  처음이 어려울 뿐 알고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정치를 예로 들면 이렇다.  정치가는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갈 올바른 철학과 탁월한 국정관리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국민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투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와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다.  가령 후보자의 약력에서 '하버드 대학 졸업'이라는 문구만 보아도 그 사람이 뽑히면 마치 대한민국의 학생들 모두가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또는 모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출마하면 우리나라 전체 국민이 그 사람의 이미지처럼 점잖고 바른 행동만 하는 덕치가 금방이라도 실현될 듯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평생 개그만 한 사람을 뽑아주면 웃을 일 없는 현실에서 매일매일이 즐겁고 행복한 날만 이어질 것같은 생각도 든다.

 

교환가치나 사용가치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이미지화 되고 기호화 된 세상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실존하는 사물을 소비하지 않고,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 또는 기호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배우 신세경이 광고하는 청바지만 입어도 그렇게 날씬하고 폼나는 자태를 갖게될 것만 같은 환상.  정치에 있어 하이퍼 리얼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고 노무현 대통령과 한명숙 전 총리가 아니었을까?  검찰은 피의 사실을 언론에 흘리고, 언론은 다시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편집하여 사건을 보도하고,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국민들은 앞다투어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거나 부풀리고...  그렇게 몇 단계만 걸쳐도 없던 현실이 실재 존재하는 가상의 현실, 현실을 지배하는 가상, 즉 시뮬라르크가 되는 것이다.

 

모처럼 편한 휴일을 맞았는데 이 두 권의 책이 나를 붙잡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울푸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울푸드 -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소울 시리즈 Soul Series 1
성석제 외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 되었던 걸까?'하는 그런...   같은 색으로 칠해진 벽의 한 귀퉁이처럼 그 경계마저 모호한 어느 지점에 동그마니 서 있을 때부터 나는 어른이었다.  아니, 어쩌면  흙먼지가 쓸려 금방 씻겨놓은 아가의 젖살처럼 뽀얀 마당에 뒤뚱뒤뚱 발자국을 찍던 그 시절부터 나는 어른이었는지도 모른다.  땅에 쓰인 발자국 편지의 흔적을 따라 몇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나는 그새 어른이 되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종종종… 외줄로 난 그 길을 따라 훌쩍 미래로 날아온 듯한 느낌.  당혹스럽다.  그 길에서는 늘 엄마가 삼시세끼 긇여내던 된장국 냄새가 난다.

 

이 책을 읽기 한참 전.  아마 올해 초쯤이었나 보다. 나는 되르테 쉬퍼가 쓴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읽었었다.  (http://blog.aladin.co.kr/760404134/4658747)최고급 레스토랑의 인정받는 수석요리사였던 루프레히트 슈미트씨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기 때문에 호스피스 병동의 요리사가 되었고, 그는 삶의 마지막 여정을 걷고 있는 그 병동의 환자들을 위해 추억의 요리를 준비한다.  호스피스 ‘로이히트포이어’에서 11년간 근무하며 인생의 마지막 요리를 준비해주었던 요리사 루프레히트 슈미트씨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였던 되르테 쉬퍼는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그것이 내가 읽은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읽었던 한 귀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인생의 날을 늘려줄 수는 없지만, 남은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는 있습니다."라는 문장.  나를 보호하고, 나를 표현하고,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주었던 내 육신에 대한 마지막 감사의 인사.  육신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에 육신이 기억하는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는 행위는 얼마나 숭고한가.  나는 지금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울 푸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소제목만 옮겨 보면 이렇다.  굳이 이렇게 하는 까닭은 소제목만 읽어도 그 내용을 대강 어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먹밥의 맛_ 백영옥, 내 친구가 만드는 과자, 이브콘_ 조진국, 당신의 첫 피자는 어떤 맛이었나요?_ 서유미,연애는 한 그릇의 카레라이스_ 안은영, 햄버거에 대한 명상_ 이화정, 온몸을 깨우는 매콤함, 빨계떡_ 박상, 영혼의 거처_ 성석제, 지금 익숙한 것을 처음 만났을 때_ 한창훈, 수제비와 비틀즈_ 김창완, 엄마표 된장찌개_ 이충걸, 남쪽 나라에서 온 사나이_ 이우일, 달밧, 내 영혼의 다이어트_ 정박미경, 라면은, 완전식품이다_ 김어준, 토스카나의 수프를 추천하네_ 박찬일, 퓨전, 길에서 얻은 음식_ 노익상, 바닷내가 나는 밤이면_ 황교익, 커피향 엄마를 기억하세요?_ 이지민, 커피, 벗어날 수 없는_ 조동섭, 혼자 마시는 술_ 차유진, 재즈, 와인 그리고 박사님_ 남무성, 삶이 담긴 술잔_ 강병인.  도합 21명이다.

 

삶이 팍팍할수록 옛것이 그리운 법.  세상이라는 수레바퀴는 냉정하고 비열하게 한치의 자비심도 없이 흘러만 가고, 나는 그리움을 안주 삼아 농익은 막걸리 잔이라도 기울이고 싶다.  그때처럼 까마득하던 막걸리 심부름길에, 아무런 걱정도 없이 봄이 부르는 향기에 넋을 놓고 싶다.  오전에 푸슬푸슬 내리던 눈도 소리도 없이 잦아들고 까만 어둠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단조롭다.

 

어릴 적 자주 부르던 노래를 잊지 못하 듯, 오늘은 문득 아주 오래도록 맡았던 엄마의 체취가 몹시도 그립다.  뜬금없는 안부전화에 내 목소리가 젖어있었나 보다.  뭔 일 있냐는 물음에, 그 전화선을 타고 젖은 짚섶에 앉아 푸성귀를 손질하던 어머니의 거친 손이 영상처럼 펼쳐진다.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 되었는지,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 콩 서리에 밤이 새는 줄도 몰랐던 그 기억들도, 그때의 음식들도 세월따라 차츰 잊혀만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과황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속절없이 세월만 간다고 푸념아닌 푸념을 한다.

그래서일까? 한 해를 마감하는 매년 이맘때면 이틀이 멀다하고 술을 마신다.  술이라도 먹고 흠뻑 취하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회색 신사('모모'에 나오는)의 출현을 알코올 에너지를 빌어 막아볼 수 있으려니 하는 억지와도 같은 주장이 술꾼들의 간을 두배쯤 부풀려 놓는다.  오지 않을 회색 신사를 기다리며 비장한 결의를 다지는 듯한 그들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다.  진지하다 못해 제 풀에 제가 쓰러질 즈음이면 게게 풀린 눈으로 모모를 찾는다.  자신의 인생 역정을 차분히 들어줄 상대가 필요한 시간.  모모는 출장 마사지라도 간 것인지 밤새 보이지 않았다.  자정을 넘길 무렵,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화의식에 돌입한다.  먼저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오래된 정화의식을 본떠 자신의 속을 남김없이 비우기.  사람들 발길이 드문 신성한 곳을 찾아 무릎을 꿇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먹은 음식물을 다 토한다.  일행은 그 신성한 의식을 지켜보며 등을 토닥여준다.  자신을 대신해 고통을 감수하는 예수를 생각하며.

 

때로는 오지 않는 회색 신사에게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회색 전봇대를 붙들고 드잡이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시체놀이라도 하려는지 큰 대자로 누워 요지부동의 자세로 추위를 이기는 사람도 있다.  설산에서 고행한 석가세존도 그랬을까.  나는 그 모든 의식을 맨정신으로 지켜보며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세상의 성인이란 성인은 모두 한순간에 아이로 깜짝변신을 한 듯한 착각.  몇 첨 남지 않은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야말로 뼈와 살이 타는 밤이다.  나는 문득 포장마차의 닝닝한 우동을 그리워한다.

 

나는 그 밤에 성석제의 <칼과 황홀>을 읽었다.

내가 처음 읽었던 그의 작품은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였다.  작가의 성격이 고스란히 글에 투영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지극히 낙천적이거나, 지극히 비관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 작가는 자신의 성격을 은밀히 감춘다.  자신의 글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작가의 성격이 극단과 맞닿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성석제의 글은 구수한 입담으로 배꼽을 쥐게 한다.  아마도 <칼과 황홀>을 다 읽은 독자라면 자신의 몸무게가 20그램쯤(배꼽 무게) 줄어들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 연재했던 글에 몇 대목을 더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고, 1부는 '하루 세 번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끼니와 밥상을 다루었고, 2부에서는 '마음의 노독을 풀어준다'는 표현으로 술 이야기를 담고 있다.  3부는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라는 제목에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데 찻상과 후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글의 말미에는 맛지도와 함께 작가의 말이 실려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제 먹을 복은 다 타고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워낙에 없던 시절이었다.  허기를 달랠만한 것이면 뭐든 먹었던 시절.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먹었던 흰쌀밥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잡곡이 섞이지 않은 하얀 쌀밥에 반찬도 없이 왜간장과 김을 얹어 먹었던 그 밥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음식의 맛은 훗날 추억에 버무려져 더 맛깔난 음식으로 차려질지 모른다.  성석제의 <칼과 황홀>은 결국 음식에 얽힌 사람들과 에피소드의 귀결이다.  나는 '재미는 그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에서 나온다'는 말을 닳도록 할 때가 있다.  성석제의 유별난 맛기행은 바로 낙천적인 그의 성격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런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겪고 만나고 맛보고 느끼는 것이 결국 내가 태어난 곳, 자라난 곳, 가장 가까운 사람에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삶의 근간이 되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나는 세상을 지각할 기본적인 도구가 없는 셈으로 정말 줏대도 정신도 없이 황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오후의 나른한 권태가 밀려오는 시간.  나는 에스프레소의 진한 커피향에 끌려 후배의 커피숍에 들러 이 글을 쓴다.  내게 필요한 것은 각성제로서의 커피가 아닌 후배의 가벼운 미소가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달에는 사내의 인사이동이 있었다.

직장생활이란 게 다 그렇지만 매년 연례행사처럼 치뤄지는 인사이동 시기가 다가오면 미리부터 '카더라'식의 루머와 설이 나돌고 그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모습도 눈에 띄곤 한다.  나도 물론 평범한 직장인인지라 예외일 리 없다.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 누군가의 '카더라 통신'이 중계되기라도 할라치면 진행자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새라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듣게 마련인데 다 듣고 돌아서는 모습에서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긴장과 기대 속에 사내 게시판이 구멍이 날 지경에 이르면 공고문이 나붙는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환호와 한숨소리.  웬만한 야구장의 응원 열기가 이보다 더할까.

흥분과 실망이 교차하는 왁자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저녁 어둠이 내리는 퇴근 시각이 다가오면 여지없이 회식자리가 펼쳐진다.  기분 좋다고 내는 승진턱이야 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즐거운 기분으로 참석할 수 있다지만, 승진에서 탈락한 우리의 '떨거지' 그룹은 어깨를 웅크리고 한겨울의 칼바람을 맞아야 한다.  가끔 부서에서는 승진에서 탈락한 그들을 위해 '위로주'를 사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 술로 달래질 성질의 것이던가.

 

나는 승진 축하 자리보다는 진급 탈락자들을 위한 위로 회식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각별히 챙기는 인류애의 발로에서 그러는 것도 아니요, 그들 앞에서 우쭐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려고 그러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과 섞여 술자리를 갖다 보면 '세상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다들 거나하게 취하면 내일 당장 사표를 쓰고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사람과, 내가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느냐며 큰소리 치는 사람과, 갑자기 흐느껴 우는 사람 등등 그 모습도 제각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낄 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승승장구하는 시기에는 그 사람의 본성을 알기 어렵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또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술기운을 빌어 어렵사리 푸는 그들의 큰소리는 애잔하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모습이라고 웅변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서 소박한 소시민의 따뜻한 정감을 느낀다.

 

자리이동이 있었던지라 업무 인수인계로 한 달이 어찌 흘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연말이면 왜 그리 회식자리가 많던지...  술을 못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12월과 1월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1-12-0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12월과 1월이 지나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꼼쥐님 회사에서는 한 바탕 칼바람이 불었군요. 인생은 고스톱과 같다더니, 누가 또 피박을 쓰고 광박을 쓰는지 그건 피해갈 수 없나봐요. 저도 술을 잘 못하는데 미래에 회식자리 없는 일을 알아봐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그런 일이 있을까요? 작가라면 또 모르지만 ㅎㅎ) 오늘 날이 많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길 :)

꼼쥐 2011-12-0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도 밤새 회식자리에 끌려다녔더니 하루 종일 피곤하네요. 음주가무가 최대의 약점인 저는 연말연시에는 중노동에 시달립니다. 음주가무 중 한두 개라도 잘하는 게 있어야 조금 덜 힘들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