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내가 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편지 형식으로 남겨왔었다.  어떤 주제를 분류해서 쓴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먼저 산 인생의 선배로서 내가 겪고 깨달은 것들이 아들에게 조금의 보탬이 될까 싶어 기록한 것인데 저자의 바람도 나와 같았나 보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여행의 기술>이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부연할 필요도 없지만 나는 작가의 기발한 생각과 표현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만의 매력에 흠뻑 취했었다.  더불어 저자로 인해 철학자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하게 되었다.  그의 글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일상에서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유리알처럼 쏟아진다.  

 

 

 

 

 

 

 

 

 

 

 

 

 

"서양 문명의 몰락은 죽은 사람을 장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은 비단 문명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지는 않는다.  죽음이 우리 곁에서 멀어질수록 우리 자신이 느끼는 삶의 가치는 그에 비례하여 축소된다.  죽음을 생생하게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작가와 같은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일 것이다. 잊혀질 정도로 죽음이 우리 곁에서 멀어질 즈음이면 작가와 같이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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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가는 길- 일곱 살에 나를 버린 엄마의 땅, 스물일곱에 다시 품에 안다
아샤 미로 지음, 손미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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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1월 05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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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 - 한명숙 전 총리의 검찰과의 전쟁, 그 700일간의 기록
황창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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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의 청렴도 평가에서 만년 하위권을 맴도는 기관이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검찰청과 경찰청이 바로 그곳이다.  엄정한 법의 잣대로 국민의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그곳이 부패와 편법의 온상이 된 지는 꽤나 오래된 듯하다.  아니 제대로 된 검찰청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검찰은 많은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법률 전문가가 아닌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사권, 경찰 수사에 대한 수사지휘권, 구속영장 등 각종 영장에 대한 영장청구권, 피의자를 재판에 회부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소권, 법원 판결을 통해 확정된 형을 집행하는 형집행권 등으로 이 모든 권한이 검찰에 집중돼 있다. 기소 여부를 법규정이 아니라 검사 재량에 맡기는 `기소편의주의`가 형사소송법에 채택돼 있음도 간과하면 안 된다. 가히 세계 다른 나라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 검찰 권한은 막강하다.  어떤 권력이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비대해진 권력은 자정능력과 자기 통제력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검사 개개인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고, 사석에서 만나면 예의 바르고 정중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분들이 많다.  그럼에도 시스템 내에서는 비열하고, 몰염치하며, 악날해지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현실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다.  참여정부 초기에 일개 평검사가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 다하던 그런 모습은 현 정부에 들어서 더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을 그렇게 순한 모습으로 잠재우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있었겠지만 '정의와 양심'을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소중한 가치로 여겨야 하는 검찰이 권력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모습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한명숙 전 총리의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으며, 퇴임 후에도 지근 거리에서 그녀를 보좌하고 있는 저자 황창화 소장은 한명숙 전 총리가 기소에서부터 2번의 무죄판결을 받기까지의 길고 긴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한 전 총리가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그런 판결을 받은 것도 한 전 총리였으니까 가능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회유와 압박 속에서 돈도, 빽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쉽게 포기하였을텐데 그나마 일국의 국무총리를 지내신 분이니 그들과 맞서 이길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물론 재판에서 이겼다는 사실만으로 완전한 승리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처음에 받은 인상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던가.  첫사랑, 첫눈, 첫인상 등 처음이라는 느낌은 일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하여, 한 전 총리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된 부정적인 이미지는 무죄판결을 받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일부는 한 전 총리가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검찰은 그런 면에서 잃은 것이 없다.  비록 재판에서는 졌지만 그들이 원하던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으니까.

 

민주주의는 결국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 우리 앞에서 사실로 인식되기 전까지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말하기 어렵다.  언제까지 우리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모습을 한 검찰을 지켜보아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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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새해가 밝았다.

아침부터 간간이 내리는 눈.  새해 첫날의 서설이다.

작년 이맘 때쯤, '한 해를 살아내기 보다는 살아가게 하소서'하고 바랬다.

지나고 나면 성긴 추억이 한 줌 서릿발처럼 밟힌다.  실제로 지나온 시간 같지가 않다.

 

새벽부터 이어지던 휴대폰 문자음에 잠을 설쳤다.

어제와 오늘이 그닥 달라진 것도 없는데 이런 날이면 왠지 습관처럼 의미를 부여한다.

아이처럼 유치해지지 않으면 삶은 그저 밋밋할 뿐이다.

무뎌진 마음결에 새로이 무늬를 되새기는 날.  오늘은 그런 날이어야 한다.

닭살이 돋고 손발이 오글거려도.

 

아들과 함께 도서관을 찾았다.

평소의 주말이라면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시끌벅적할 시간.  한산하다.

빈 자리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정숙'이라는 시간이 얼어붙은, 휑한 공간에 책장 넘기는 소리만 가끔 메아리처럼 들린다.

 

새로 장만한 2012년 다이어리에 없는 스케쥴도 몇 가지 적어 놓아야 할 듯한 압박감.

대체로 차분할 것.  서두르지 말 것.

그리고...

 

눈발이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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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리얼 쇼크 - 이미지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최효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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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뮬라크르의 이미지가 확대재생산되고 과잉 증식하면서 하이퍼리얼 속으로 빠져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자본과 미디어, 관료제(국가, 정치권력)의 합작품이기도 하고 자본과 미디어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우리사회에는 이미 가짜 실재인 시뮬라크르가 자가증식해 온통 시뮬라시옹의 질서로 둘러싸여 있다."  (P.368)

 

말이 참 어렵다.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삶과 실존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지난 월요일에는 회사의 송년회가 있었다.  유난히 추운 날씨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칼바람을 뚫고 직원들은 독거 노인들의 난방을 위한 '사랑의 연탄 배달' 행사를 가졌었다.  다들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나서는 모습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시커먼 연탄을 들고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난방이 잘 되는 사무실에서도 춥다고 난리인데 하루 종일 영하의 추위에 오들오들 떨 생각을 하니 지레 겁부터 나는 것이었다.

 

연탄을 나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 어귀에서 연탄을 리어카에 옮겨 싣고 끌고 당기며 비탈길을 오르는 일도, 몸조차 가누기 힘든 좁은 연탄광에 연탄을 쌓는 일도 우리 같은 도시내기들에겐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 회사를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인원이 많으니 두어 시간이면 다 끝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사람들도 일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지쳐가는 눈치였다.  얼굴이고 옷이고 할 것 없이 시커먼 칠을 한 직원들이 길바닥에 널부러지기 직전에야 일이 마무리 되었다.  짧은 겨울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고 있었다.

 

우리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커피라도 대접하겠다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연탄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방에 들어섰을 때, 발바닥에 시린 냉기가 전해졌다.  겨울 추위가 시작된 지 한참이나 지났건만 전기장판에 의지한 채 겨울을 나고 있는 모습이 짠하게 다가왔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하얀 입김이 방안 가득 퍼졌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집은 큰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산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매년 겨울이면 땔감을 구하는 것이 우리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루 일과였고, 눈이라도 쌓여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에는 연탄을 배달시키곤 하였다.  꽁꽁 언 연탄을 큰길에서부터 집까지 나르는 일은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는 일보다 더 힘들었다.  연탄의 가운데 구멍에 새끼줄을 끼워 양손에 한 장 또는 두 장의 연탄을 들고 눈 쌓인 비탈길을 오르노라면 칼바람에 손과 볼이 얼어 감각이 무뎌지곤 했다.  연탄 백 장을 나르려면 미끄러운 산비탈을 수십 번 오가야 했으니...

 

우리는 언제부턴가 석탄과 석유를 매개로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겨울은 그저  긴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오래도록 기다렸던 스키 시즌 쯤으로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의식 속에 추위로 인한 삶의 고통은 없다.  현실이 복제된 과잉 현실(하이퍼 리얼)은 이제 원본마저 까맣게 잊혀지고 있다.  원본이 없는 실재는 더욱 더 실제적이다.  어른들이 자신이 겪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을 들려주어도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이러한 과잉 현실, 즉 하이퍼 리얼의 모습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의식의 사고',  즉 우리가 실재하는 어떤 대상과 맺는 관계는 사실상 심볼릭한 룰(구조- structure)이 상당부분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구조주의 학파는 언어학자 소쉬르에서 비롯되었고, 프랑스의 사상가인 장 보드리야르는 구조주의 학파에서도 대표적인 비관론자에 속한다.  사유의 주체가 내가 아닌 구조(또는 이미지)가 지배하므로 현대인은 소비 행태와 어떤 사건을 대하는 반응에 있어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정형화 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와 자본에 의해 형성된 가짜 현실의 영상 이미지는 현대인을 미디어에 종속된 로봇처럼 만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견해를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가 몰두하고 있는 11가지 뜨거운 이슈들을 통해 현실보다는 ‘만들어진 현실’을 믿기 원하는 대중의 속성과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자본과 미디어의 본모습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보드리야르에 의해 정립된 하이퍼리얼(hyper real)의 개념은 현대 철학에 있어 중요한 한 축이다.  그러나 구조주의 얼개와 구조주의 철학가의 사상을 모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전통철학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독자가 과학과 철학이 융합된 구조주의 이론을 습득하여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하여, 이 책의 저자는 9·11 테러사건 이후 이슬람의 이미지, 광화문 촛불 시위, 타블로의 학력 위조 논란과 포르노그래피의 속성 등 우리사회를 뒤흔든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우리 현실 깊숙이 침투해 있는 하이퍼리얼 개념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사고와 행동의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조종되는 현대인의 모습은 비극적이다.  그렇다면 자본과 미디어에 종속된 현대인이 아닌, 미디어에 조종당하지 않는 당당한 사고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미디어의 허구성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 ‘미디어 독해력’을 조언한다.  외부의 구조와 룰에 지배되고 있는 현대인에게 보드리야르의 철학은 강한 울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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