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현실에 푹 빠져, 내 주변에는 오직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한다고 믿게 될 때, 나의 관심에서 밀려난 또 다른 현실은 마치 부모의 관심에서 멀어진 어린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는 부모에게 토라져 이를 앙다문 채 복수를 다짐하는 것처럼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등장할지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현실과의 끊임없는 의사소통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를 가운데 두고 각기 다른 현실들이 나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뺏어내려고 다투는 그 치열한 현장에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조직내에서도 어떤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내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여러 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듯이, 내 주변에는 나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무수히 많은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려면 어는 정도의 나이를 먹었을 때에나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잠시 등한시 했던 여러 일들이 마치 복수를 하듯 무대 뒤에서 등장할 수 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만한 나이도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며칠 전 작년에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 중 한 명의 졸업식이 있었다.

그날도 나는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새벽 칼바람을 뚫고 아침 운동에 나섰다.  부쩍 떨어진 기온과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새벽 거리에서 내가 그 아이의 졸업식에 참석해야 하나 하는 문제를 곰곰 생각했다.  나는 그 전 날 그 아이를 축하하기 위해 졸업식에 참석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소식을 그 아이의 친구에게서 들었다.  무릎 관절이 안 좋으신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이고, 동생들은 학교에 가고, 늘 술에 취한 채 사는 그 아이의 아버지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에도 보란 듯이 서울의 모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던 그 아이.  마음 같아서는 하루 휴가를 내서라도 맘껏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도 고민이 있었다.  여학생인 그 아이가 남남이나 다름 없는 나의 축하를 선선히 받아줄 것인지, 가뜩이나 여러 친구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학교에서, 게다가 휴대폰이 없는 그 아이와 만나려면 등교하기 전에 약속 시간과 장소를 미리 잡아야 한다. 

 

출근하기 전에 그 아이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아이는 내 예상과는 달리 밝은 목소리로 와주시면 고맙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을 하여 사무실에는 점심시간 전에 잠시 외출을 하였다가 오후에 들어오겠노라고 전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뽀얗게 먼지만 뒤집어 쓴 차를 몰고 그 아이의 학교로 향했다.  이상 한파 때문인지 꽃값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쌌다.  부모의 축하를 받으며 나오는 졸업생들.  그 왁자한 소음을 뒤로 하고 아이와의 약속 장소로 갔다.  약속 시간까지는 10여 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교정 곳곳에는 사진을 찍는 인파로 가득했다.

 

잠시 딴생각에 젖어 있던 나는 아이의 외침도 듣지 못했다.  준비해 온 꽃다발을 전하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낮인데도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근사한 '꽃돌이'를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아이가 웃었다.  근처의 식당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듯하여 차를 몰아 시내를 벗어났다.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하라고 하는데도 아이는 요지부동  아무거나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부담감 때문이었겠지.

 

식당에서 아이는 조금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자신이 오늘 나와의 만남을 선뜻 응했던 것은 내게 부탁이 있어서라며 그 속내를 털어 놓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고 3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이 다 나의 격려와 조언 덕분이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꼭 전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자신처럼 힘들게 공부하는 후배들을 위해 시간이 되면 다시 공부방을 열어달라는 부탁도 했다.  수업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나의 경험담도 들려주고 공부에 조금 나태해진 학생에게는 따끔한 질책도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회사로 들어가는 내내 아이의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여러 현실들이 나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는 듯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바람이 윙윙 차유리를 때리고 방관자처럼 멀찍이 달아나는 시간이 야속한 하루.  세월아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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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네가 태어난 이후 내게 1월은 예전보다 훨씬 선명한 색채로 다가왔단다.

마치 내 삶이 네가 태어나기 전과 태어난 후로 양분되듯이.

그럼에도 그 빛나는 1월에 나는 네게 단 한 통의 편지도 쓰지 못한 채 한 달을 무의미하게 흘려 보냈단다.  지나고 보면 언제나 후회와 아쉬움만 남곤 하지.

 

아들아

 

지난  며칠은 기록적인 한파가 이어졌었지.

내가 유일하게 돌보는 화분(군자란)이 그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고 말았지 뭐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단다.  전화로 소식을 들었던 너도 진심으로 아쉬워했고.  잘 돌보지 못한 내 불찰이 컸단다.  지난 달인가? 네가 돌보는 금붕어에게 먹이를 너무 많이 주는 바람에 세 마리 중 두 마리가 죽었던 것이.   너는 슬퍼서 엉엉 소리내어 울기까지 했다는 소식을 네 엄마로부터 들었던 것이 오래지 않은데, 공교롭게도 나는 한파가 온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물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넘치도록 물을 주고 말았구나.

 

아들아

 

생각해 보렴.

너나 나나 모두 선의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그 결과는 최악이었구나.  이것이 비단 우리가 기르고 돌보는 동식물에게만 일어나는 일이겠니?  그렇지 않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보다 더한 일들도 비일비재 하단다.  내가 비록 선의로 행한 일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결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  나는 선의였으니 내 책임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만 그렇다고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란다.

 

아들아

       

굶주림이 심할수록 굶주림을 참고 더 천천히 먹어야 탈이 없듯, 식물도 추위가 닥칠 때는 목마름을 참아야 한단다.  그렇게 대비하지 않으면 막상 추위가 몰려 올 때 곧 얼어 죽고 말 거야.  사람도 이와 같단다.  위기가 닥칠 것을 대비하여 자신의 욕심을 반쯤 내려놓지 않으면 어려움을 견딜 수 없는 법이란다.  갈증을 견디지 못한 식물이 추위에 얼어 죽듯, 욕심이 많은 사람은 위기에 직면해서 좌절과 분노를 견디지 못한 채 쉽게 파멸하고 말 거야.

 

아들아

 

오늘은 입춘.  나는 어느 시인의 시구를 내 가엾은 화초에게 들려주련다.

"해도 입춘이 넘으면 양지바른 둔덕에는 머리칼풀의 속움이 트는 것이다.
그러기에 입춘만 들면 한겨울내 친했던 창애와 썰매와 발구며 꿩 노루 토끼에 멧돼지며 매 멧새
출출이들과 떠나는 것이 섭섭해서 소년의 마음은 흐리었던 것이다.
높고 무섭고 쓸쓸하고 슬픈 겨울이나 그래도 가깝고 정답고 흥성흥성해서 좋은 겨울이 그만
입춘이 와서 가버리는 것이라고 소년은 슬펐던 것이다
."(立春/백석)

 

아들아

 

너와 나는 이 겨울 작은 미물을 통하여 소중한 가르침을 얻었구나.

욕심에 이끌리어 산다면 죽음이 가깝다는 것을.

그리고 생명을 돌보는 일에는 항상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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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새 책을 고른다는 것, 읽어보지 못한 책들의 제목에 관심을 두는 것, 항상 나의 촉수를 그 쪽에 두는 것은 생각처럼 쉽고 편한 일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종이 냄새 폴폴 날 듯한 신간을 훑어보는 일은 인적이 닿지 않은 눈밭을 걷는 것처럼 마음을 설레게 한다.

 

  폴라 다시의 글은 책을 읽기도 전에 마음이 젖어든다.  그녀의 불행에, 그녀의 정 많음에, 그리고 세상을 향한 그녀의 사랑에...

이성적이기보다 오히려 감성적으로 비춰지는 상담 치료사라니...

어쩌면 그녀의 상실과 고통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녀의 글에 감동과 위로를 받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를 닮은 또 다른 너이기에.

 

 

 

 

 

 

 

 

간혹 그런 생각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 감추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무방비 상태로 모두에게 공개되겠지.'하는 그런 두려움.  하기야 죽은 사람이 뭘 알까마는 이런 유의 책들, 가령 작가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첫사랑의 추억이나 편지들, 작품화 되지 않은 단상들, 그 외의 끄적거림들이 작가의 사후 유족들에 의해 낱낱이 공개되는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관음증 환자의 도덕적 양심처럼 선뜻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수도자의 생각은 수도자의 생각으로, 중생의 생각은 중생의 생각으로 결국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한 채 세월은 흘러가지만 새해가 되면 문득 어떤 의무감처럼 수도자의 생각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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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제갈량 - 승부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삼국지 리더십 2
자오위핑 지음, 박찬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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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게 있다.

지키지 못할 거창한 약속들만 골라 새로 산 다이어리에 보란 듯이 적어 놓았다가 그해의 반도 지나기 전에 남 보기 부끄러워 슬그머니 책상 서랍에 감추었던 적이 하도 많아서 나는 요즘 되도록이면 가볍고 소소한 것들만 고른다.  그 중 웬만한 것들은 첫달이 지나기 전에 떨어져 나가고 둘째달까지 살아있는 놈들만 다이어리에 옮겨 적는다.  그래야만 한해의 끝자락에 이르러서도 간신히 체면치레를 할 수 있다.  올해는 그 가짓수도 손으로 꼽을 정도이니 연초부터 서두를 일은 없겠다 싶었던지 마음마저 눅지근하게 늘어지는 본새가 심상치 않다.

 

아무튼 그 결심 중 하나가 '인문학 공부를 새로 하자'는 것인데 딱히 기간을 정한 것도 아니다.  조금 방자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나오는 신간들이 가벼운데다 지극히 표면적인 사색의 글들로 넘쳐나는지라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에는 부족하다는(또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식이 일천한 자의 섣부른 판단에서 비롯된 이 결심을 실천하고자 나는 고전과 신간을 2대 1의 비율로 유지하기로 맘 먹었다.  1월에는 사마광의 자치통감 후한시대 편을(권중달 옮김, 5,6,7권) 간신히 읽었다.  2월에 내가 목표로 한 책은 플라톤의 대화편(천병관 옮김)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유영 옮김)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제갈량>이다.  자치통감을 읽으면서 느꼈던 소회인 즉, 빈약한 내 지식에 대한 한탄뿐이었기에 2월에는 신간을 한 권 슬쩍 밀어 넣은 것이다.

 

안 읽던 고전을 읽느라 1월에 하도 고생을 한 탓인지 이 책은 술술 읽혔다.

학창시절 읽었던 '삼국지'를 떠올리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이 책은 삼국지의 재판(再版)이 아니라 인력관리와 리더십, 중국 고전 관리사상의 전문가로 중국의 '대륙 10대 강사'로 선정된 저자가 현대인의 자기계발 욕구에 맞게 역사 속의 제갈량을 재해석한 것으로 국영방송 CCTV에서 진행한 교양 프로그램 '백가강단'의 강의를 엮은 것이다.

 

책은 스물 일곱의 나이에 유비의 핵심 측근으로 발탁되어 파산 직전의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설파하며 패왕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한 제갈량의 지략과 처세술, 철저한 현실분석과 뛰어난 용인술 등을 바탕으로 현대 기업과 조직내에서 직장인이 취해야 할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삼고초려'를 연출함으로써 유비의 마음을 사고, 담력과 냉정한 판단으로 오로를 평정함으로써 후주 유선에게 위기시에 취해야 할 리더의 자세를 선보였던 제갈량의 관리 능력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책에서 저자는 총 9장에 걸쳐 상사로부터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는 방법과 자신의 약점을 보이지 않고 상대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는 방법, 인재를 기르고 조직을 관리하는 방법, 위기 대처 능력과 세상을 보는 안목 등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다양한 처세술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제갈량은 범인이 아니라 신이었고, 완전무결한 우상이었다.  이런 지위를 흔들 방법은 없다.  그래서 나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했고, 개인의 감정적 성향을 줄이는 대신 대중의 심미적 정취와 수용 심리를 존중했다.  논쟁이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최대한 냉정하게 처리했다."  (P.7)

 

저자는 역사속의 인물 제갈량을 현대에 되살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 듯하다.  그러나 역사속의 인물 제갈량을 현대에 되살릴 방법도, 그의 생각과 방법론을 생생한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방법도 존재하지 않기에 이 책은 분명 현대인으로 살아가는 저자 자신이 또 다른 현대인에게 전하는 메시지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저자 자신이 분석한 제갈량의 태도와 상황 대처술도 이 책을 읽는 다양한 독자층을 생각할 때 논란의 여지는 분명히 존재하리라고 본다.  그럼에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불세출의 천재 지략가를 통하여 단 하나의 깨달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가히 족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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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지난 해에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세배를 오겠다는 연락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다음으로 미뤄왔었다.

어제는 오후부터 함박눈이 펑펑 내렸고, 퇴근길의 교통체증을 염려한 회사에서는 서둘러 퇴근을 종용했다.  딱히 만나야 할 사람도 없고, 특별한 스케줄도 없었던 나는 생색이라도 낼 겸 겸사겸사 아이들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마치 바쁘지만 아이들을 위해 선심이라도 쓰는듯.

 

뚜벅이로 출퇴근을 하는 나는 보란 듯이 우산을 쓰고 눈 내리는 거리로 나섰다.

버스 승강장에는 띄엄띄엄 오는 버스를 서로 먼저 타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의 사이사이로 직장 동료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거리도 멀지 않은데 기필코 만원 버스를 타고야 말겠다며 밀치고 올라서는 그들의 모습이 딱하게만 보였다.  인도에 쌓인 눈은 벌써 발목을 덮을 정도로 수북하다.  아이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이르자 벌써 도착한 아이들은 눈뭉치를 들고 서로를 쫓으며 눈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수도권에서 벗어나 지방에 산다는 것은 오직 제 살갗으로 계절을 체감하는 천혜의 혜택을 오롯이 누리는 일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즐거움을 어찌 말로 다 하랴.  한 아이를 부르자 똘망한 눈들이 약속이나 한 듯 내게로 쏠렸다.  그렇게 잠시의 침묵이 흘렀고, 손에 들었던 눈뭉치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로 쏟아졌다.  정신없이 눈세례를 받은 나도 바닥의 눈을 그러모아 아이들을 향해 던졌다.  편을 가르고 눈싸움을 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과 어울려 깔깔대며 한참을 뛰어다녔다.  다 젖은 외투 위로 뿌옇게 김이 서렸다.  오슬한 한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배고프다는 아이들을 이끌고 가까운 분식집으로 향했다.

시간은 벌써 9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나이 어린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내 나이를 잊는 못된(?) 버릇이 있다.  내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것을 시키라며 그들에게 주문권 일체를 넘겼다.  옥신각신 말씨름이 이어진 것도 잠시, 떡볶이며 김밥, 쫄면 등 갖가지 음식들이 상을 가득 메웠다.  올해 대학을 진학하는 아이들과 취직을 준비하는 아이들.  가슴속에 쌓인 고민을 음식으로 밀어내려는 듯 아이들은 게걸스레 먹었다. 

 

아이들과 헤어져 숙소로 향하는 길.

여전히 눈은 소리없이 내리고 안상한 가지 위로 눈꽃이 소복하다.  나는 잘 살고 있노라고, 부러울 것 없이 정말 잘 살고 있노라고 눈 내리는 밤하늘을 향해 외치고 싶었다.

코끝 싸한 추위가 더할수록 삶의 투명성은 더욱 밝게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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