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독서 행태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어떤 강박관념 또는 엄숙주의에서 비롯된

학교식 책읽기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순전히

자연발생적이고, 우연에서 기인한

진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나 스스로는 썩 마음에 들어한다.

 

도대체 어떻게 읽기에 자기 스스로

마음에 든다고 공개적으로 떠벌리는 것일까?

이건 오로지 나의 주관적 평가에서 나온 것이니

시시비비를 가릴 문제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다 할 의미도 없다.

 

먼저 일주일에 몇 권을 읽느냐 하면

많이 읽을 때는 4권, 적게 읽으면 1권으로

평균 2~3권 정도를 읽는다.

주제는 그때그때 다르다.  최근 2~3개월 전부터는

물리학 공부에 홀딱 반하여 부(副)였던 물리학이

어느새 주(主)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그 전에는 인문학이 주였다.)

 

머리가 무겁거나 자투리 시간이 나면

가벼운 문학책을 읽는다.  잘 읽지 않던

소설도 요즘은 즐겨 읽는다.  소설이 좋아진 이유는

딱히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현실에서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거나

가까이 하지 않았을 사람들(가령 수다스럽거나

경거망동하는 사람들, 또는 근엄한 얼굴로 젠 체하는

사람들)과도 짧은 시간 동안 수다스럽지만(책 속에서)

전혀 수다스럽지 않은(현실에서) 친구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책의 선택에 있어서는 내가 생각해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어떤 계획도 없이 그저 우연에 맡긴 채

책을 고르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맘에

쏙 드는 책들만 걸려드는지...

 

가령 이런 식이다.

어떤 책을 읽다가 그 책에서 거론된 책을

다음 독서 대상으로 선택하거나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우연히 보게 된 지인이

다른 책을 추천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인터넷의 한 귀퉁이에서

우연히 읽었던 서평이 맘에 들었거나.

 

나의 독서는 나이에 따라 차츰 단조로워지는

식성과는 달리 점차 잡식성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변화로 인해 하나 좋아진 것은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을 퍼트리는 시간 도둑

'회색 도당'들의 습격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식사 때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독서가 밥보다 맛있어서' 라고

핑계를 댄다.  다만, 아쉬운 것은 책에 빠져 살다 보니

서평을 쓰는 일로부터 점차 멀어진다는 점이다.

둘 다 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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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6-3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오랜만에 들렸어요. 독서가 밥보다 맛있다니. 정말 좋은 현상이네요.
저는 소설만 편식해서 저 스스로도 걱정인데~ 잡식성으로 변화를 시도해봐야겠어요.
그러면 저도 밥때를 놓치고, 독서의 진수성찬을 맛보고 있노라 외칠 수 있겠죠? ㅎㅎ

꼼쥐 2012-07-05 11:42   좋아요 0 | URL
저는 독서의 편향성이 워낙에 강했었죠. 아마도 말없는 수다쟁이님보다 훨씬 심했을지도 몰라요. 제가 이렇게 변하리라곤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는데 지금 와 돌이켜 보면 '나도 이제 나이가 들고 있구나'하는 생각만 들어요. 조금은 쓸쓸하지만.
 

요 며칠간은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워낙 가물었던 터라

바람에 실려오는 습기도 없으니

아침에 운동을 하는 나로서는

이보다 반가운 일도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청명한 하늘을 보며

산을 오르는데

몇 걸음 앞서서 걷고 있는

초로의 부부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산의 능선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때마침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등줄기에 흐른 땀을 식혀주었다.

그 바람이 반가웠는지

아주머니가 소녀처럼 감탄을 했다.

 

"어머! 어쩜, 가을날씨 같아요."

그러자 옆에서 걷던 아저씨가

"지금이 보릿가을이지.

보리를 수확할 무렵이면 가을 날씨처럼

선선한 바람이 부는데

시골 사람들은 다들  이 때를 보릿가을이라고

불렀어." 한다.

 

나는 속으로

'아, 보릿가을. 참 좋은 말이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단어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아저씨가 지어낸 말이려니 하고 짐작했었다.

 

산의 정상 부근에서는

수많은 떡갈나무와 은사시나무의 우듬지를

훑고 지나는 바람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사전에서 '보릿가을'을 찾아 보았다.

'보리가 익어서 거둘 만하게 된 때'를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내 나이가 어린 나이도 아닌데

나는 왜 여태 이 좋은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일까?

책에서 읽어 알게 된 '인디언 썸머'가

생각났다.  우리말도 아닌 그 단어는

잘도 기억하면서 정작 너무나 고운

우리말은 몰랐었다.

 

'보릿가을'

입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참 좋은 말이다.

오늘은 비록 햇볕은 따가웠지만

한낮에도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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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내'가 '나'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내가 누구인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성격인지,

어떻게 살아야 나다운 것인지,

하나도 아는 게 없는데...

 

매일 아침 산을 오를 때마다

들르는 곳이 있다.

적어도 수령 5,60년은 되었음직한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곳으로

나는 아무리 바쁜 날에도

이곳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솔잎이 방석처럼 푹신한 곳에

자리를 잡고 한동안 앉아 있노라면

내가 아닌,

나 또한 무성한 소나무가 되어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오늘 아침에도

그 자리에 앉아 들었던 생각이

나는 순간 순간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구나,하는 것이었다.

모든 순간을 오로지

'내'가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줄이야.

나는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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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의 일이다.

외출을 할 일이 있어 차를 몰고 한적한 이면도로의 삼거리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는데 중년 여성 두 분이 횡단보도에서 옥신각신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차도 사람도 많지 않았다.  유난히 신호 대기 시간이 길다고 느껴질 즈음 그 중년의 여인네들 중 다소 체격이 통통한 분이 다른 한 분의 손을 강제로 잡아 끌고 신호를 무시한 채 무단횡단을 하였다.  그렇게 횡단보도를 중간쯤 건너왔을 때 억지로 끌려온 여인은 신호 대기를 하던 나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끌려가는 반면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 끌었던 분은 나를 보며 멋쩍은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하며 미소를 짓는 사람에게 뚱해 있을 수도 없어서 괜찮다는 표시로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날씨는 찌는 듯이 덥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길을 건너는 사람, 그리고 이를 지켜보며 차 안에서 실없이 웃고 있는 나.  묘한 언밸런스의 상황이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길을 다 건널 때까지 마주 보고 웃을 수 없어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 혼자 웃었다.

  

생후 3~4개월경에는 어떤 사람을 보거나 누구에게 안기더라도 생글생글 웃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그 시기를 '무차별 미소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웃음은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리 급한 일이 있는 듯 보이지도 않았지만 뙤약볕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것은 그들에게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잘못하는 줄은 알지만 약간의 일탈을 즐기며 즐거워 하던 그 여인이 하루가 지난 지금도 나를 미소짓게 한다.

 

미국의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고 독

 

- 엘라 휠러 윌콕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슬픈 이 세상은 환희를 빌려야 하지만
고통은 그 스스로도 충분하다
노래하라, 언덕들이 화답하리라
탄식하라, 허공으로 흩어지리라
메아리는 즐거운 소리에 울려 퍼지지만
근심스런 소리에 사라져버린다.

환희하라, 사람들이 너를 찾으리라
비통하라, 사람들이 너를 떠나리라
사람들은 너의 충만한 기쁨을 원하지만
너의 비통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뻐하라, 너의 친구들이 많아지리라
슬퍼하라, 너의 친구들을 다 잃으리라
아무도 달콤한 와인을 거절하지 않지만
인생의 쓴맛은 너 혼자 마셔야 한다.

잔치하라, 너의 집은 사람들로 넘치리라
굶주려라, 세상이 너를 그냥 지나가리라
성공과 베품은 너의 삶을 도와주지만
아무도 너의 죽음을 도울 수 없다
길고 화려한 행렬을 맞기 위해서
즐거움의 저택 안에는 공간이 있지만
좁은 고통의 통로를 지날 때에는
우리 모두 한 사람씩 지나가야 한다. 


< 천국으로 가는 시> 中에서

 

 

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 여인들은 짜증내기 쉬운 여름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어쩌면 그 여인들은 제2의 '무차별 미소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번의 미소만으로도 더위를 잊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오늘도 많이 웃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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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가슴에 청진기를 들이대면 헉헉대는 숨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릴 듯하다.  무더운 날이었다.  옆에 앉은 사람의 열기가 훅훅 느껴지는 듯했다.  간간이 불어 오는 바람마저 없었다면 호수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입만 뻐끔거리는 붕어처럼 길게 늘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권태에 지친 오후는 시간의 모노레일을 천천히 미끄러져 흐른다.  대책이 없었다.

 

뭔가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요즘 들어 부쩍 재미를 붙이고 있는 물리학책에도 도무지 눈길이 가지 않았다.  도서관에 들러서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빌렸다.  책을 들고 들뜬 마음으로 나오려는데 한 권만 빌리기는 뭔가 아쉬운 듯해서 다시 서가를 맴돌다가 찾아낸 책이 A.J.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였다.  한번쯤 읽은 기억이 있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두 권의 책을 빌려 도서관을 나섰다.

조금 더 있다가는 도서관 전체의 책을 탐낼까 두려웠다.  도서관 옆의 작은 공원에서 잠시 산책을 했다.  머리꼭지가 이글거리는 한낮의 더위 속에서도 아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는 이미 산책 나온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비집고 앉을 틈이 없어 보였다.  미련이 남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여전히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컴퓨터 열기도 무시하지 못하겠어서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제 여름의 초입인데 앞으로 견딜 일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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