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일 년 중 책이 가장 안 팔리는 계절 또한 가을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새로 출간된 에세이는 대부분 요즘의 시회적 이슈로 주목을 받는 '힐링'과 연관된 책들 일색이다.  출판사 입장에서 한 권이라도 더 팔아 보고자 하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노랫말이 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낙엽이 쌓이는 날/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렇게 시작하는 고은 시인의 <가을 편지>.  김민기가 곡을 붙이고 이동원이 불렀던...  이 노래를 들으면 가을날의 그리움과 짙은 우수가 가슴 속 깊이 묻어나는 듯하다.  그리고 연습장에 그때의 그리움을 어설픈 시로 남기고 싶은 애잔한 느낌이 든다.  나처럼 메마른 사람도 이럴진대, 어느 누구나 가을엔 시적 감흥이 저절로 생겨나는가 보다.  이 계절에는 한 권의 시집이나 시인의 에세이가 제격이 아닐까?

 

 

 

 

 

 

내가 읽어 본 김정한 작가의 작품은 하나같이 편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고독하다는 뜻이다.  멀리 있어도 헤어지고 싶지 않은 심정, 그것이 편지가 갖는 상징성이 아닐까?  여전히 작가는 외롭고 자신처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듯 이 글을 썼을 것이다.  먹물같은 슬픔이 밀려오더라도 한바탕 실컷 울고나면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길 것이다.  이 가을에.

 

 

 

 

 

 

 

삶에 지치다 보면 내가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가? 하고 한번쯤 자문하게 된다.  내가 아닌 주변의 다른 사람만을 위해 내 한평생을 산다면 '나'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하고 변명해도 미안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온전히 '나'를 위해 살았던 적이 있었나? 하고 되묻는다.  '아마 그럴지도...'. 나는 명확히 대답하지 못한다.  늘 그렇게 자신이 없다.  오직 나에게는.  여행 에세이스트 테오의 책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도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작품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무슨 실수든 할수 있는 권리가 있어, 단 한가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실수만 빼고,"라고.  우리는 이렇든 저렇든 내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것은 누군가의 확신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의무도 내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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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 시대를 뛰어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 Wisdom Classic 7
김경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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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30대 이전에는 꿈과 이상, 욕심과 가능성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다들 그렇지 않았을까?  그때의 나는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외쳤던 나폴레옹 황제의 패기로 넘쳐났었다.  그런 인식으로 세상을 보았으니 냉철한 현실인식으로 무장한 40대 이후의 중장년은 패기도 없고 용기도 없는 '퇴물'처럼 느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못 가진 자의 허세는 지나친 용기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을 읽었다.

학창시절에 뜻도 모른 채 읽었던 <군주론>.  마키아벨리는 내게 속물의 전형으로 각인되었다.  작은 것 보다는 큰 것이 먼저 눈에 띄었고, 세밀한 계획 보다는 커다란 꿈이 먼저였던 돈키호테의 시기에 마키아벨리의 냉철한 사고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젊은이의 이상과 현실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그 결과는 참담한 법이다.  내게는 절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참담한 결과를 몇 번 겪으면 그제사 어른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이론가이며 저술가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500여 년이라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읽혀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마키아벨리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떤 정치가나 평론가 혹은 리더십 이론가의 견해와는 사뭇 다르다.   <군주론>은 나약한 소국의 힘없는 외교관으로서, 또는 선량하고 고결한 시민이자 좋은 아버지로서 그가 살았던 삶에 대한 자기성찰이자, 자신의 영혼보다 사랑했던 모국 피렌체의 부국강병에 대한 염원을 담은 기도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을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의 나는 나와 타인의 구별에만 집착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선량한 양심의 소유자이고, 법과 규칙을 준수하는 신의와 성실의 표본이며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라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에 누구나가 선망하는 이상적인 인간형.  그것이 '나'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환상에 사로잡힌 삶에서 타인은 오직 나와 구별되는(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비열함과 권모술수로 무장한) 악의 화신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내 양심의 이면에 존재하는(일상을 지배하는) 보편적 인간의 공통분모를 생각하지 못할 때,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때, 공동체의 통합이나 조직의 목표를 향한 자기 희생은 기대하기 어렵다.  오직 갈등과 분열 속에서 각자의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아마 젊은 시절의 마키아벨리도 그러했으리라.  기본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통분모(일상적인 탐욕과 이기심, 권력에 대한 집착과 공포)를 스스로 밝히고 반성하는 것은 나이가 든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나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부끄러운 면모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남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비열한 속성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에서 보듯 '선민의식'에 가득찬 호전적 인간군상으로 남게 마련이다.

 

국가든 기업이든 조직원의 통합이 전제되지 않는 한, 조직의 목표를 위해 조직원이 헌신하지 않는 한 그 공동체의 미래는 없다.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공통된 인성을 솔직하고 세밀하게 노정함으로써 리더의 통치를 돕고자 했을 뿐이다.  인간의 속성이 악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여 그 공통점을 추출하기 어려운데 반해 조직에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만 악의 모습은 그 양태가 비슷하여 분류하기 쉽고 이것이 성하였을 때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므로 리더는 오직 인간의 악한 면을 어떻게 다스릴까?하는 문제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인간에게는 오직 '악'의 근원만 존재한다가 아니라 공동체의 단합과 발전을 위해 '악'의 속성을 다루는 리더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더불어 리더 자신 또한 한 명의 인간 개체로서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와 다를 바 없는 같은 속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의 구성원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현명한 군주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일만이 아니고 먼 장래에 있을 분쟁까지도 배려해야 하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에 대처해야 한다.  위험이란 미리 알면 쉽게 대책을 세울 수 있지만 코앞에 닥쳐올 때까지 그냥 보고만 있으면 그 병은 악화되어 불치병이 된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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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볼라벤'이 언론이나 정부가 요란을 떤 것에 비하면

조용히(?) 물러갔다는 느낌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사는 이곳에도 오늘 낮에는 제법 강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소나무를 보며

'아, 솔잎에도 앞뒤가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껏 활엽수의 넓은 나뭇잎만 앞뒤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

침엽수인 소나무의 잎도 그 색깔이며 표면이 앞과 뒤가 다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솔잎은 바람의 기세에 눌려서인지

잔뜩 움츠린 모습이 안돼 보이고

쓰러질듯 위태위태한 모습에 가슴을 졸였었다.

내가 더욱 놀랐던 것은 바람이 잠시 잦아들었을 때의

소나무 모습이었다.

푸르고 정정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한나절의 바람에 시달린 소나무는

마치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처럼

솔잎마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 나무도 고난을 겪으면 늙는구나!'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그렇게 흔들리면서 뿌리와 흙 사이에 공간이 생기고

나무는 지금보다 더 잘 자라겠지만

그 짧은 순간의 고통은 우리네 인간처럼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음을 잘 알 듯하다.

 

우리는 말이나 언어가 아닌,

우리들의 생각이나 느낌 또는 체험을 통하여

신과 소통하고 있음을 조금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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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 미술비평은 어떻게 거장 화가들을 능욕했는가?
로저 킴볼 지음, 이일환 옮김 / 베가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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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미대에 다니던 친구 세 명과 함께 서울 방배동에서 겨울방학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단독주택의 차고를 개조하여 월세로 놓은 곳이니 난방이 될 리 없었고, 도로 쪽으로는 홑겹 유리 미닫이문이 셔터문 안쪽에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이면 문 틈새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지만 우리는 하나뿐인 연탄난로 주변에 모여 기타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들이키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곳이 마치 로마시대의 지하묘지처럼 음산하다며 '카타콤'이라고 불렀었다.

 

술도 못 마시고 전공도 전혀 달랐던 나는 물과 기름처럼 좀체 섞이지 못하였다.  그들로부터 가끔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안주감으로 라면을 끓여주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캔버스에서 살아나는 갖가지 형상들과 붓을 잡은 손의 유연한 움직임이 그저 신기한 듯 쳐다보는 재미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밤이 늦도록 이젤 앞에 앉아 골똘한 생각에 잠기곤 하던 그들과 달리 나는 밤이 깊었다 싶으면 으레 냉기가 도는 침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추위에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어준 후, 간신히 고양이 세수를 마치면 서둘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곤 했다. 

 

그때 같이 지내던 친구 중 한 명은 미술대학으로 유명한 H 대를 다니다가 1학년말 작품 전시회에 걸렸던 자신의 작품에 문제가 있어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고 이듬해 D 대학 천안 캠퍼스에 재입학 했었다.  당시 그는 전시회 작품으로 정부미 포대를 똑 같이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만 그리면 뭔가 밋밋한 느낌이 들어서 '정부미'를 '전부미'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전두환 정권이었던 당시의 사정은 예술이든, 언론이든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공안정국의 삼엄한 분위기는 예술작품이라고 해서 검열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친구는 그 바람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고, 교수님과 학교 당국에 호소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고 했다.  그림에 재능이 많았던 친구는 D대학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미술 관련 모 사단법인의 이사장이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사의 평가는 언제나 평론가와 그 시대의 권력자의 몫이었다.  당사자인 작가의 목소리는 언제나 무시되기 일쑤였고, 의식 있는 평론가의 항변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21세기인 지금도 통치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작품은 법의 잣대로, 또는 평론가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처벌되거나 불이익을 받는다.

 

이 책은 예술사에서 평론가의 부당한 해석을 작품을 예로 들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쿠르베, 마크 로스코, 사전트,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고갱, 반 고흐 등의 작품이 당시의 평론가에 의해 어떻게 평가받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일반 독자에게도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부당한 평론가는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는 언어 폭력범이 될 수도 있음이다.김태호 교수는 추천사에 이렇게 적고 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혹은 다른 예술의 영역이든, 당신이 에술을 '살기로'작정했다면 이 책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결의를 굳건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혹은 당신이 미학이나 예술사 혹은 예술평론에 뜻을 두고 있다면, 이 책에서 그 학문이나 활동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예술의 메인 이벤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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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 편향이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흥미있게 읽었던 분야는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그 중 하나는 심리학과 관련된 책들인데, 나는 사실 심리학을 그닥 신뢰하는 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심리(의식 또는 무의식)를 유형의 어떤 것으로 치환하려는 심리학자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이런 치기어린(?) 행동이 과학을 빙자한 말장난이나 언어적 유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더구나 정신분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에게 내재한 다양한 심리 중 몇몇을 부각시켜 도드라지게 함으로써 나와 같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그렇구나'하고 인정하게 만드는 것, 이미 존재하던 대륙을 콜럼버스가 발견하였다는 사실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대륙을 새로 창조한 것인 양 환호하는 모습과 하등 다를 게 없다고 본다.  대체로 약간의 허구가 가미된 문장이나 말은 강한 중독성을 내포하게 마련이어서 한번 맛을 들이면 좀체 벗어아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심리학을 하나의 실증적 과학처럼 믿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심리학은 화학반응처럼 수십 번 또는 수백 번의 실험을 통하여 얻어진 학설이나 이론도 아니요, 우리 앞에서 꼼짝 못하게 증명할 수 있는 이론도 아니다.  그럼에도 심리학자들이 심리학의 과학적 측면을 특히 강조함으로써 대중들의 신뢰를 쉽사리 확보하는 것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아마도 그들이 나쁜 맘을 먹고 사기를 친다면 그들의 술수에 걸려 들지 않을 사람이 없을 듯싶다.

 

그렇다고 내가 심리학을 무시하거나 거들떠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에 가깝다.  이처럼 심리학을 그닥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심리학 서적을 탐닉하는 나의 이율배반적 행태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어쩌면 나의 이러한 반응 이면에는 유아기부터 형성되어 온 방어기제 '회피'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삶에서 오는 고통이나 부조리한 삶의 흔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공간, 심리적 갈등과 공포로부터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여겼던 마음의 휴식처, 또는 어떤 상상도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안전지대로 나는 독서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려서부터 소설과 철학에 악다구니를 쓰듯 매달렸었다.  자라면서 소설과 철학은 조금 시큰둥해졌지만 심리학과 물리학 등 다른 분야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을 뿐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전문용어로 '회피'는 위험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 상황,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라고 한다.  부정적 감정으로부터의 도피, 그로부터 비롯된  삶의 의미에 대한 가치 절하, 삶의 열정을 먼 거리에서 바라보며 한없이 서성거리던 나의 청춘.  내 의식은 끝없는 상상의 세계에 중독되듯 이끌렸고, 그럴수록 더욱 독서에 빠져들었다.

 

정신분석이나 심리학 용어를 모른다고 삶을 모르는 것도 아니요, 내 삶의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닌데, 지금도 나는 한동안 책에 빠져들 때면 '회피'에 대하여 생각하곤 한다.  삶은 가슴으로 부딪칠 일이지 독서와 사색으로 멀리서 바라볼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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